<76화>
안타깝게도 사혈귀존은 도중에 놓쳐 끝내 죽이지 못했지만, 그 선사야말로 영웅준걸이라. 하늘이 내린 기재이며 지고한 군자였다.
“백아군.”
이야기를 나누느라 잠시 비질을 멈춘 시종 중 한 아이가 그 선사의 별칭을 말했다.
반짝이는 눈이며 발간 뺨까지. 시종의 얼굴은 백아군을 향한 동경심으로 가득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백아군은 당대 선사 중 가장 아정하고 뛰어난 기재였다.
모두 백아군을 동경했고, 그보다 높은 연배를 가진 이도 인정하고 존중할 정도였다. 아니, 인정을 넘어 그에게 가르침을 청하는 이들도 심심찮게 많았다.
하지만 백아군은 홀로 고고했으니, 그 누구도 곁에 두지 않고 어디에도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사해혈사 이후 백아군은 천지를 떠돌며 협행을 하다가 어느 순간 행방이 묘연해졌다.
“백아군은 어디에 계실까?”
“사혈귀존을 쫓던 중이라고 들었으니까, 어쩌면 귀곡 근처에…….”
“하지만 귀곡은 귀족(귀신들을 다르게 지칭하는 말)들만 드나들 수 있다잖아.”
그 말에 빗자루에 기대 서 있던 아이가 사뭇 진지한 얼굴로 미간을 모았다. 잠시 무언가 고심하더니, 마주 선 아이에게로 비스듬히 몸을 기울이며 한 손을 입가로 가져갔다.
“…사실 이건 비밀인데, 성주님의 동생인 자고 군주께서 요새 자주 자리를 비우시잖아.”
“그래? 난 그쪽은 안 가니까 잘 몰라. 그런데 그게 왜?”
“그게…….”
마주 기울여 오는 상대에 아이가 그 귓가에 대고 뭐라 속삭이려는데, 때마침 지척에서 기척 하나가 불쑥 들려왔다. 두 시종은 반사적으로 서로 몸을 떼고 각자 열심히 비질하는 시늉을 했다.
일하는 중에 딴짓하며 사사로이 잡담했단 걸 들키면 벌을 받기 때문이다.
어린 시종 둘은 기척이 들려온 곳에 눈길도 주지 않고 비질만 열심히 했다.
사악-
사악-
빗자루로 눈을 쓰는 소리만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그 백색 소음 사이로 낮고 음울한 목소리가 미려하게 들려왔다.
“…사해필성의 시종들인가.”
나직하게 울리는 목소리는 미성이었다.
비질에 여념이 없던 시종 둘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일제히 바라본 방향엔 한 남자가 있었다. 새하얀 백의 차림이었는데,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얼굴을 얼핏 가리고 있었다.
남자가 한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기며 고개를 살짝 치켜들었다. 그러자 드러난 얼굴은 몹시 수려했다.
살짝 내리깐 긴 눈매의 동공은 청록색이었으나, 다음 순간 검은색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시종 둘 다 그 찰나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아, 네.”
시종 중 한 명이 저도 모르게 바로 대답했다. 수상한 행색임에도 느껴지는 기품과 수려한 외모 때문에 적의가 자꾸만 사라졌다. 도저히 남자를 적대하며 경계할 수가 없었다.
“사해필성엔 무슨 일로…….”
다른 시종 한 명도 이어서 묻다가, 남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지레 놀라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말의 공백은 길지 않았다.
시종은 마른침을 한 번 삼킨 뒤, 자신이 흐린 말끝을 바로 이었다.
“이쪽은 뒤의 각문(옆문)이라, 대문은 앞으로 조금 가야 합니다. …혹 성함을 알려 주신다면 안의 사람들에게 미리 일러두겠습니다.”
어느새 시종 둘은 눈앞 남자를 사해필성의 귀한 손님으로 대우하고 있었다. 남자가 부탁한다면 직접 안내까지 해 줄 기세였다.
남자에겐 그런 매력이 있었다. 상대를 압도하고 사로잡아, 원하는 대로 끄는 힘이었다.
“…귀객께선 누구십니까?”
시종들의 물음에 남자는 잠시 말이 없었다. 찰나의 침묵이 남자의 입매를 스치며 매끄럽게 호선을 그렸다.
“향하는 방향에 다다른 길이 여기이니,”
곧 남자가 답했다.
담담한 목소리는 지극히 차분했다.
“백아군이 여기에 왔다고 전하게.”
시종들을 응시하는 검은색 눈동자, 그 아래 눈가엔 역린이 없었다.
“배, 백아군?”
“설마…, 그 백아군이십니까?!”
시종들의 경악을 마주하는 남자의 눈매가 호선으로 싱긋 접힌 건 그때였다.
백옥 같은 얼굴에 수려한 눈웃음이 더해지니 그야말로 완벽했다. 시종들은 남자가 그려낸 표정에 현혹돼서, 자신들을 응시하고 있는 두 눈엔 조금의 웃음기도 없단 걸 눈치채지 못했다.
“일단은.”
무심한 목소리로 남자가 답했다.
* * *
험준한 절벽과 깎아지른 기암괴석, 그 너머의 계곡 안쪽에 귀곡이 있다.
어둡게 응달진 곳에 자리한 귀곡은 모든 것이 새카맣게 죽어 있는 암석지대였다. 안쪽에서 흘러나오는 귀기 때문에 초목은 자라지 않았고, 그 어떤 짐승들도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척박하고 메마른 땅이었다. 그러나 귀곡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면 그곳이 그 어디보다 휘황찬란한 곳이란 걸 알게 된다.
귀신들의 사이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는 번잡한 거리는 화려하고, 가게마다 걸려 있는 홍등은 꺼지는 법이 없다.
천공에 하늘거리는 붉은 비단 휘장에는 불청객들의 목이 매달려 있고, 귀신들은 그 아래에서 술을 마시고 도박 내기를 했다.
맛있는 음식이 즐비하고 세상 모든 향락이 거기에 있었다.
귀곡의 입구에서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눈부시게 화려해지는 경관은, 가장 안쪽 귀야혼전에서 그 화려함이 극치에 달한다. 그와 더불어 귀곡 전체를 무겁게 짓누르는 귀기 또한 극에 달하게 된다. 그래서인지 그 거대한 전각 주변만 유독 고요하고 침묵에 잠겨 있었다.
정말이지 끔찍하게 조용한 곳이었다.
음울한 어둠 속에서도 오색보석으로 황홀하게 빛을 발하고 있는 귀야혼전은, 그 자체로 하나의 무덤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귀곡의 이러한 변화는 사혈귀존이 정점에 등극하면서부터 시작됐다.
귀신들은 알아서 몸을 사리고 가급적 귀야혼전 근방을 피해 다녔다. 그러나 모두가 꺼리며 얼씬도 하지 않는다 해서, 정말 ‘모든’ 귀신들이 그럴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귀신들이 있었다. 귀야혼전의 시종들과 귀곡의 상귀(상급 귀신)들이 그랬다.
이번 대 귀왕은 귀곡을 무참히 휘저으며 휘둘렀고, 가만두면 귀야혼전 대문에 귀신들의 잘린 머리가 끝없이 매달릴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귀들은 자진해서 귀곡 전부를 귀왕에게 넘겼다. 그럼으로써 귀왕이 귀곡을 휘젓기만 하는 게 아니라 다스려 주길 바랐다.
살기 위해 스스로 수하로 들어갔고, 알아서 섬기고 받들어 모셨다.
그렇게 만들어진 당대의 귀주(귀곡의 주인)가 ‘사혈귀존’이었다. 대부분의 귀신들은 감히 그 이름을 입에 올리기조차 두려워했다.
‘사혈귀존[師烕鬼尊]’
그의 곁에는 두 종류의 군상뿐이었다.
개처럼 기거나, 혹은 개같이 죽거나.
-02
귀곡 귀야혼전의 안실.
내원안부.
‘사형…!’
꿈의 잔상이 머릿속에 여운을 남기며 사그라진다. 멀어지는 잔상에 미간이 저절로 좁아진다.
그건 11년 전 사해혈사 때 마지막으로 들은 우사의 목소리였다.
꿈결인지 실재인지 모를 그때의 외침이 여태 내 안에 남아 있단 방증이었다.
도통 잊히지 않는다.
눈매를 찡그리며 천천히 눈을 떴다. 그새 낯익은 천장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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