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귀야혼전 내원안부의 내 처소다.
무심코 시선을 움직여 휘장이 쳐진 침상을 훑었다. 그러다 문득 바로 옆 탁상을 보았다. 탁상에 놓인 호접등이 반짝반짝 점멸하고 있었다.
호접등은 귀곡의 보물로, 등 안에 혼 일부를 넣고 염(진언[眞言]을 외다)하면, 넣은 혼의 나머지를 찾는다. 그렇기에 망자의 혼이 어디 있는지 알려 주는 기물이다.
호접등이 꺼지는 경우는 단 두 가지뿐이다. 혼을 다 찾았거나 아니면 넣었던 혼 일부를 도로 꺼냈거나.
혼은 생전의 기억 대부분을 망각한 상태로 존재한다. 그래서 누군가는 ‘혼이란 이전의 생에서 해방된 상태’라고 한다. 그렇기에 생전의 이와는 다르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다.
혼을 모으는 건 오연을 되살릴 수 있는 방법이고, 내가 그에게 진 빚을 갚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점멸하는 호접등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저 호접등이 점멸하는 건 지금 내 옆에 있는 연연 때문이다. 연연이 오연의 혼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인형이라 거기에 반응하는 거다.
나른한 숨을 흘리며 팔을 들어 눈가에 올렸다.
11년. 그날로부터 11년의 세월이 흘렀다.
지난날의 모든 것을 잊기엔 지나치게 짧은 시간이다. 아니, 애초에 11년이 아닌 110년이었어도, 그보다 더 긴 억겁의 시간이었어도 잊을 수 없었을 거다.
그 모든 과거의 일들이 현재의 나를 만들었으니까.
결국 이 세상사란 천라지망 아래에 있다는 거다.
11년 전에 나는 우사, 남여연, 유계와 함께 사해필성의 진상과 그에 따른 전말을 밝혀냈다. 그리고 오연의 혼을 소멸시킴으로써 ‘잊혀진 기억’도 전부 되찾았다.
그 기억이 알려 준 진실은…, 내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을 때 믿고 있던 것과 다를 것이 없었다.
결국 나를 망친 건 우사였다.
회귀 전의 나는 우사에게 짙은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보다 더 강해지고 싶은 마음에 우사에게서 멀어져 사마외도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그걸로 만족하지 못하고 그 정점에 서기 위해 우사의 천옥을 원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우사에게 다시 접근했고, 다시 돌아온 내게 우사는 입에 발린 말을 했다.
나는 나로 충분하다고. 내가 무엇인지는 상관없다고. 그저 곁에만 있어 달라고.
그 입발림에 넘어간 나는 처음엔 우사의 지기가 되었다. 그다음에는 그와 운우지정을 나눴지만…, 결국 모든 게 거짓이었고, 전부 기만이었다.
우사는 다른 이와 혼례를 올렸다.
결국 나는 우사에게 두 번 버려진 거다.
사형으로서 한 번, 정인으로서 한 번.
우사가 날 두 번 저버린 그 생이 후회됐다. 피를 토할 정도로 원망했다. 그런 나를 도운 게 바로 오연이었다.
나는 그에게 감히 회귀를 부탁했다. 그 술법이 얼마나 큰 희생을 요하는지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그런데 나는 회귀로 그걸 잊고, 회귀 후에 우사를 구한답시고 오연을 죽였다. 그의 혼을 내 손으로 직접 소멸시켰다.
그 행위에 대한 대가는 내 목에 검은 끈의 흉으로 남았다.
아직 오연이 했던 그 모진 말들이, 끝없이 귓가를 맴돌던 말들과 자신으로 하여금 계속 정진하라던 그 일갈이 여전히 고통스럽고 저주스럽지만, …저주스러운 만큼 죽어도 죽지 못하는 이 생 자체에 죄악감을 느낀다.
지금 내 생에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게 오연의 희생이니까.
후회, 분노, 절망감. 그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내 마음이 빚어낸 지옥 속에서 살았다. 이 지옥에서 내가 소원하는 것은 하나뿐이다.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마른세수를 하며 가는 숨을 내쉬다가, 눈을 굴려 내 옆에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내 쪽으로 돌아누운 채 잠들어 있는 이 아이는 오연이다. 정확히는 오연의 혼을 바탕으로 빚어낸 도자기 인형 ‘연연’이다.
인형의 안은 거의 텅 비어져 있다. 오연의 혼 대부분을 내가 소멸시킨 터라, 안에 채워 넣을 것이 없었다. 일단 얼마 없는 오연의 혼이라도 바득바득 모아 넣었지만 아무래도 많이 부족하다.
아이에게로 돌아누우며 한 손으로 내 머리를 받쳤다. 그리고 다른 손으론 아이의 몸을 가만가만 토닥였다.
지금 이 생에 내 소원은 오연을 회생시키는 것. 그것밖에 없다.
어떻게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오연을 되살려서 지난 빚을 갚고 모든 걸 만회하고 싶다.
“연연.”
내가 지어 준 아이의 이름을 나직이 불러 봤다.
연연[然緣].
내 부름에 연연이 반짝 눈을 뜬다. 내가 부르면 기다렸단 듯 나와 눈을 맞추는 연연에 입꼬리를 끌어 올려 싱긋 웃었다.
“오늘도 좋은 날이야.”
내 인사에 연연이 배시시 웃으며 마주 답한다.
“사부.”
아직 할 줄 아는 말이 ‘사부’뿐이긴 하지만, 눈빛과 표정의 언어란 것이 있다.
바라보는 눈과 지어 보이는 표정, 그리고 어투만으로도 연연의 감정은 그럭저럭 잘 전달되었다.
잠에서 깬 연연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잠을 자지 않아도 괜찮은 몸이지만, 연연은 잠이 필요하다. 그래서 매번 연연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대부분은 뜬눈으로 밤을 새우지만 간혹 잠에 들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꿈결을 통해 우사를 보고, 우사의 목소리를 듣는다.
11년 전, 아직 우리가 함께했을 때의 풍경이 쉬이 떨쳐지지 않아서 그런 걸 거다. 그러나 떨쳐지지 않는다 해도 이미 11년의 세월이 흘렀다. 나는 여기에 있다.
여기, 귀곡에.
사해필성 성루에서 떨어지며 내가 전이된 곳은 바로 귀곡이었다.
귀곡에서 내 모든 게 달라졌다.
본원진기는 물론, 풍기는 기운과 외모, 그리고 내 주변을 이루는 것까지 전부 다.
나를 부르는 칭호마저 바뀌는 순간, 나는 11년 전 그때와 완전히 유리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완전히 다른 내가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나는 나였다.
사혈귀존도 결국엔 그저 ‘나’일 뿐.
타락한 것도, 악독해진 것도 아닌.
나는 애초에 타고나길 악질 사형이었다.
연연과 눈을 맞춘 채, 머리를 받친 손의 끝을 남몰래 까닥였다. 손끝의 진력(요, 마, 귀의 내력)이 술법의 궤적을 따라 허공에 흐르며, 그 공력이 법진을 그려낸다.
그려진 법진은 하나의 결계가 되어 호접등으로부터 연연을 은밀히 가렸다. 그러자 호접등이 순식간에 꺼졌다.
‘연연’을 제외하곤 이제 이 세상에 오연의 혼은 남아 있지 않단 뜻이었다. 하지만 아직 많이 부족하다. 연연의 안을 전부 채워 완전하게 만들어야만 완벽히 회생시킬 수 있다.
오연의 혼이 없다면, 그 혼을 대체할 만한 걸 찾는 수밖에.
……가령 선인의 정기라던가.
이어지는 상념의 끝, 다다른 결론에 조소를 지었다.
그래, 나는 애초에 타고나길 악질이었다. 그러니 더 나빠진 것도 없다.
그때에도, 지금에도 내 이름은 ‘진연’이다.
* * *
귀야혼전의 학서당.
한 손에 꺼진 호접등을 든 채, ‘학서당’이라 쓰인 편액을 잠시 올려다봤다. 홀로 마주한 전각은 오늘따라 유독 더 그림자 져 보였다. 역시 연연을 처소에 남겨 두고 오길 잘했다.
전각 앞에서 잠시 멈췄던 걸음은 이내 다시 앞으로 내디뎌졌다. 나는 학서당 안으로 성큼 들어갔다.
긴 복도의 여러 개 겹문을 지나쳐, 사방에 질서정연하게 놓인 책장 사이를 소리 없이 걸었다. 지나치는 책장엔 칸칸 마다 장서와 두루마리가 쌓여 있다. 모두 기밀문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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