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가장 안쪽, 내밀한 위치에 자리한 평상까지 거침없이 걸어갔다.
낮은 단 위의, 나만 앉을 수 있는 넓은 평상의 좌상에는 얇은 서찰 하나만 놓여 있었다. 그 서찰 옆에 호접등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꺼진 호접등에 잠시 시선을 뒀다가 곧 시선을 돌리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동동.”
허공에 대고 짧게 호명하며 비스듬히 뒤돌아보자, 그에 아무것도 없던 등 뒤 허공에서 푸른 불꽃이 화르륵 일었다. 내 부름에 응답한 거다.
저 푸른 불꽃은 귀신의 혼불인 도깨비불이다. 내 마력을 사용해 귀신을 태워 죽이면 생과 사의 경계에 사로잡혀 저렇게 변모한다.
도깨비불이 그 경계에서 해방되는 방법은 단 두 개의 수뿐이다.
첫 번째는 내가 죽는 순간을 기다리는 거다. 내가 죽으면 자연스럽게 나의 권속에서 벗어나 경계에서 해방될 테니까. 그러면 온전한 안식에 들 수 있겠지.
두 번째는 내게 한 번 더 죽임을 당해 아예 소멸되는 거다. 이것도 어떻게 보면 나름의 안식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두 개의 선택지를 쥔 건 도깨비불이 아닌, 물론 나다. 내 권속 아래에 놓인 순간부터 도깨비불은 내게 일방적인 충성을 바치는 존재로 전락하게 된다.
그 어떤 선택지도 가질 수 없고, 내가 택한 선택지를 따르는 게 도깨비불들의 운명이다.
그래서 나는 도깨비불을 ‘동동’이라고 명명했다. 그들의 생이 물결을 따라 동동 떠다니는 부평초 같아서 말이다. 또, 생김새도 ‘동동’이란 명칭에 걸맞게 동글동글하기도 하고.
도깨비불은 대체로 푸른 불꽃 덩어리에 커다란 눈알이 박혀 있는 모습이다. 그 눈으로 보는 건 무엇이든 내게 공유되고, 또 동공으로 무언가를 삼켜서 내게 전송할 수도 있다.
지금 현존하고 있는 ‘동동’은 총 870여 개다. 그 동동들을 이용해 지금까지 오연의 혼을 찾았었다.
내 귀기에 남은 오연의 혼 잔재 중 일부가 내가 귀곡으로 전이할 때 떨어졌기 때문이다.
내게서 떨어진 그 잔재는 지상에 흩어져 생물, 사물 가리지 않고 깃들었다. 그러곤 영물, 혹은 귀물이라 불리며 모셔졌다.
그래서 이제까진 그 잔재들을 회수하는 데 있어 나름 쓸모가 있었는데, 이제 그 쓸모도 거의 다했다. 선인의 정기를 모으는 데엔 쓸 수가 없으니 말이다.
좌상을 돌아가 상석에 앉았다.
등받이에 느른히 몸을 기대 앉아선 한쪽 팔걸이에 팔꿈치를 댔다. 그러곤 비스듬히 턱을 괸 채, 다른 한 손으론 나머지 팔걸이를 톡- 툭- 두드렸다.
손끝으로 팔걸이를 두드리는 단조로운 소리가 규칙적으로 이어졌다.
툭- 툭-
소리가 울릴 때마다 눈앞의 허공에 동동들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내 부름에 속속들이 도착하고 있는 거다.
나는 눈을 내리깐 채 팔걸이를 두드리는 소리에 멍하니 집중했다.
툭- 툭- 일정한 간격으로 울리는 그 소리가 나를 차츰 상념에 잠기게 했다.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내 상념의 시작은 역시 11년 전부터다.
귀곡 바깥에 두고 온 인연과 부질없는 약속들.
갖가지 생각으로 복잡해지는 머릿속이 어지럽게 뒤엉킨다. 초조하게 미간을 좁혔다가 불현듯, 팔걸이를 두드리고 있던 내 손으로 시선을 옮겼다.
툭-
규칙적으로 울리던 소리가 그쳤다. 나는 팔걸이를 두드리던 손을 천천히 들어 눈앞까지 가져갔다.
이 손으로 내가 무엇을 행했더라.
오연을 죽이고, 그 혼을 소멸시키고, …연연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제 이어서 해야 할 일이 있다.
손을 꽉 그러쥐며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둥둥 떠오른 동동들로 메워진 정면을 쏘아보며 한쪽 입매를 비스듬히 휘어 비소를 지었다.
어느새 내 앞에는 수많은 동동이 떠 있었다.
수백 개의 동동이 내게서 하명이 떨어지길 기다리고 있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자세를 바로 해 앉았다.
호접등이 놓여 있는 앞의 책상에 한 손을 짚은 채 동동들을 바라보았다.
선인들을 찾아 그들의 정기를 빼앗는 일은 동동이 할 수 없다. 귀기조차 제대로 숨기지 못하는 미물이니, 선인에게 가까이 다가가기도 전에 되레 역공당할 거다.
오연의 남은 혼들을 찾을 때야, 그때엔 금고와 같은 곳에 보관되어 있어서 동동만으로도 충분히 가져올 수 있었지만 이번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다.
그렇다고 동동이 아닌 다른 귀신들을 쓰기엔 그들은 내게 완전히 귀속되어 있지 않아 믿을 수가 없다.
결국 결론은 하나다. 내가 직접 나서는 수밖에.
귀곡 바깥으로 나가는 걸 이제 더는 미룰 수 없다.
이때까지 귀곡 바깥으로 나가지 않은 건, …알았기 때문이었다.
우사는 빛에 속해 있고 나는 어둠에 잠겼으며, 내게 남은 건 이미 정해진…, 스스로 정한 숙명뿐이란 걸 말이다.
대립과 반목 따위의 운명들.
따져 보면 사마외도를 택한 그때부터 난 구제불능 인간이었다. 그럼에도 ‘회귀’를 했으니, 그 기연을 통해 우리가 다시 함께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었다.
그래, 한때는 그렇게 믿었었다.
하지만 ‘회귀’는 내게 있어 운명의 전환점 따위가 아니었다. 그저 지난한 운명을 이어 주는 징검다리일 뿐이었다. 그 징검다리를 건너 내 생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귀곡 바깥으로 나가면 이제 그게 더 확실하게 다가오겠지.
“…요, 마, 귀가 판치는 곳엔 선인이 있기 마련이지.”
나직이 읊조리며 시선을 내리떠 호접등을 보았다.
“지금부터 내가 보내는 장소에 가서 혼란을 일으켜.”
빛을 잃은 호접등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그러면 선인들이 알아서 꾀이겠지. …아. 혹여 괜한 날파리들이 기웃댈 수도 있으니까-,”
명예를 좇아 사해혈사를 일으킨 선문세가와 무림맹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들은 나를 잡겠단 일념하에 정소양을 죽이고 사해필성에 불을 질렀다. 그리고 독 안개를 풀어 사해필성의 백성 다수를 죽게 만들었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다는 신념이었다.
11년 전 그들의 행적이 오늘날에 이르러선 사혈귀존의 치적이 되었다.
“무엇도 해치지 말고 심한 말썽도 안 돼. 그러면 먹을 게 별로 없을 테니 날파리도 꼬이지 않겠지.”
좌상 바깥쪽으로 비스듬히 몸을 틀며 책상을 짚은 손을 떼 호접등을 들었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딱-!
경쾌한 소리와 함께 내 내원근에서 진기가 운기 되며 진력이 화악- 퍼졌다. 다음 순간, 진력으로 촘촘히 짜인 그물이 동동들을 일제히 휘감았다.
그리고 순식간에 동동들이 일제히 사라졌다. 내가 지정해 둔 장소로 강제전이 된 거다.
동동들이 사라진 자리를 스산한 한기가 채웠다. 무거운 정적 속에서 호접등만 내려다봤다.
탁탁.
그런 내 주위를 돌린 건 학서당 바깥에서 나는 기척이었다. 누구인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곳 학서당은 귀야혼전에서 집무를 보는 곳이라 출입이 엄격히 제한되어 있었으니까. 실상 학서당뿐만 아니라 귀야혼전 안 대부분이 그랬다.
그런 귀야혼전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건 나를 포함해 단 두 명뿐이다.
호접등을 도로 내려놓으며 닫혀 있는 겹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연연.”
바깥에서 이쪽을 기웃거리고 있을 아이를 불렀다. 내원에 남겨 두고 왔는데 나를 찾아 내의문 바깥까지 나왔나 보다.
내 부름에 기다렸단 듯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며 표정을 풀려고 노력했다. 입가로 손을 가져가 손끝으로 양 입꼬리를 위로 꾹꾹 눌러가며 마사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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