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선술의 법진에 담기는 게 귀기라서 본래의 것과 같은 효과를 낼 순 없지만…, 선술을 펼쳤을 때 낼 수 있는 결과의 정반대 것은 완벽히 낼 수 있다.
그야말로 나름 만능인 셈이다.
수[手]진(손으로 맺은 법진)을 맺어 진기를 싣자, 귀돌이, 귀순이의 목에 걸려 있는 목걸이가 반응한다.
목걸이에 새겨 놓은 법진 중 하나를 발현시켰다. 순간전이술이다. 좌표는 내원의 침전[寢殿] (잠을 자고 쉬는 곳)으로 해 뒀다.
발현된 술법은 귀돌이, 귀순이는 물론 그 둘을 안고 있던 연연에게까지 미친다. 술법의 영향권 아래 놓인 연연과 귀돌이, 귀순이가 일제히 한꺼번에 사라졌다. 순간전이된 거다.
방금까지 연연이 있던 자리를 일별한 뒤 천천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내원근에서 들끓는 진기를 억누르기 위해 깊은숨을 내쉬었다.
진기를 운기할 때마다 지금 내가 무엇인지 새삼 실감하게 된다.
정좌하고 있던 자세를 다시 느슨히 하며 등받이에 나른히 등을 기댔다. 그리고 세운 한쪽 무릎 위에 오른팔을 걸친 채 손끝을 까닥였다.
“선양귀.”
내 부름에, 진작부터 곁에 와 있었던 선양귀가 모습을 드러냈다. 선양귀는 지척에서 나를 섬기는 상귀 중 하나다.
귀곡의 귀신들은 크게 세 분류로 나눠진다.
상귀, 중귀, 하귀.
그냥 단순하게 상, 중, 하로 나눈 거다. 구분 짓는 기준은 힘과 능력이다.
귀곡보다 힘과 능력이 중시되는 곳은 없고, 귀곡만큼이나 약육강식인 곳도 없다.
이곳에선 힘이 없으면 죽는 게 당연하고, 능력이 없으면 짓밟히는 게 마땅하다.
그게 당연한 이치고 진리인지라, 이곳에선 무도한 죽음이란 건 없었다. 죽었다는 것 자체가 힘과 능력이 없었다는 방증이니 말이다.
나는 눈을 내리깐 채 내 손톱 끝을 주시하며 딴짓했다. 엄지손가락으로 중지의 손톱 끝을 매만지다가, 한순간 살갗을 세게 찔렀다. 그러자 상처가 나며 금방 피가 맺혔다.
앞에서 부복하고 있는 선양귀에겐 조금의 눈길도 주지 않고 피가 나는 손가락을 바닥에 댔다. 지그시 누르자 핏물이 흥건하게 번진다.
“오늘 본좌가 널 부른 건, 네게 물을 게 있어서야.”
피로 법진을 그리며 말했다. 시큰둥한 목소리는 성의라곤 하나 없이 무심하기만 했지만, 방 안을 감도는 긴장감은 더욱 증대됐다.
선양귀는 제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는 법진을 마저 다 그린 뒤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겉에 걸치고 있던 장포를 벗어 방금 그린 법진 위로 떨어트렸다.
귀곡의 주인을 상징하는 ‘혼불’이 백금실로 수놓인 장포였다. 머잖아 장포 아래로 귀기가 새어 나왔다.
새어 나와 흐르는 귀기는 곧 장포에 완전히 스며들었다. 일종의 ‘환영인형술’이었다.
‘환영인형술’에 씌인 것은 그것을 보는 객체에 따라 저마다 다르게 보인다. 그것은 보는 이가 제게 갖는 상징성을 투영해서 보여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기 자신이 생각하기에 그것과 가장 연관된 것을 투영해서 보게 된다. 그러니 내가 이 장포에 ‘환영인형술’을 건 것은 어떻게 보면 오만이었다.
누구든 이 장포를 보면 반드시 나를 떠올릴 거라는 지극한 오만.
‘환영인형술’을 건 장포를 자리에 남겨 두고 홀로 평상에서 내려갔다. 선양귀는 여전히 바닥에 납작 엎드려선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나는 한 손을 뒷짐 진 채 선양귀에게로 걸어가 엎드리고 있는 몸을 걷어찼다. 단 번의 일격으로 선양귀의 몸이 옆으로 나가떨어졌다.
바닥에 나뒹구는 선양귀를 다시 불렀다.
“선양귀.”
내가 부르기 무섭게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내 발치로 와 부복한다. 그런 선양귀를 발끝으로 툭툭 걷어찼다.
선양귀는 변명 하나 없이 때리는 대로 맞았다. 잠자코 견뎌내는 모습을 보며 코끝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본좌가 너를 어떡할까. 응?”
혼잣말을 뇌까리며 발끝으로 선양귀의 턱을 받쳐 올렸다. 숙여진 고개가 들어 올려지며 다소곳이 내리깐 매서운 눈매가 보인다. 창백한 낯빛에 사이한 외모다.
선양귀는 여덟 명의 상귀 중 가장 내 측근에 있으며, 가장 날 성가시게 하는 이다.
“건방지고…, …거슬려.”
분명 날 무서워하고 있긴 한데, 내 말을 들어 처먹질 않는다.
이번 일만 해도 그렇다. 내 하명보다 연연의 의사를 우선시하는 게 한두 번이 아니다. 누가 보면 내 종복이 아니라 연연의 수하인 줄 알겠다. 연연의 말만 그렇게 잘 들으니 말이다.
내 명 없인 연연에게 모습도 드러내지 말고 말도 붙이지 말라 했건만. 내 하명을 어기면 어떤 꼴이 되는지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하명을 어긴 거로도 모자라 내 행방을 연연에게 알려 주다니.
선양귀는 내가 싫어하는 짓을 두 개나 저질렀다. 이제까지는 연연이 선양귀를 찾는 일이 종종 있어서 봐줬지만, 이제 그 인내심도 한계에 다다랐다.
선양귀의 턱을 받쳤던 발을 아래로 내렸다.
선양귀는 고개를 들어 올린 자세 그대로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런 선양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뒷짐 지지 않은 손을 옆으로 뻗었다.
비어 있는 손안으로 새카만 귀기가 모여든다. 저절로 모인 귀기는 내 진력과 뒤섞이며 곧 새카만 검신으로 변모했다.
내 진력을 바탕으로 해서 만들어진 이 검의 이름은 ‘흑망’이다. 내가 직접 지어 준 거다.
일명 흑망검[黑罔劍].
검을 흑[黑]자와 그물 망[罔]자를 쓴다. 어둠이 그물처럼 쳐지니 쉬이 벗어날 수 없단 뜻이다.
검면에는 ‘사도[邪道]’라고 새겨져 있다. 그러니 어쩌면, 꽤 높은 확률로 타고나길 사도검[邪道劍]이란 이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이름은 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임의로 이름을 ‘흑망’으로 바꿨다. 이 검은 내 진신과 공명하니 이름 정도야 내 마음대로 불러도 상관없겠지.
흑망[黑罔]을 휘둘러 선양귀의 턱 아래에 갖다 댔다. 그제야 선양귀가 내리깔고 있던 시선을 천천히 들어 나를 올려다본다. 무감한 얼굴엔 어떤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아무 동요 없이 초연하기 그지없다.
“주인님.”
선양귀가 나와 똑바로 눈을 마주하며 나를 불렀다. 어투와 자세 등 겉으로 드러나는 태도는 공손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날 보는 눈이 어딘가 불손하다. 마주한 시선에서 순종은 느껴지지만, 굴종은 느껴지지 않는다.
하긴, 저 시선을 아예 이해 못 할 건 아니다. 처음부터 이 관계에 주종 따윈 없었으니까.
입으로는 날 ‘주인님’이라고 부르고 있고, 나 또한 상대를 ‘종복’으로 취급하고 있지만, 사실 서로가 알고 있다.
나는 선양귀를 진심으로 거둔 적 없고, 선양귀 또한 나를 모실 뿐, 나를 따르며 진심을 보인 적 없다.
비단 선양귀뿐만 아니라 이 귀곡 자체가 내게 그랬다.
귀곡의 주인이라고 불리고 있지만 나는 단 한 번도 귀곡을 내 수중에 둔 적 없다.
이젠 슬슬 ‘주인님’이란 호칭이 마뜩잖음을 넘어 어쭙잖게까지 느껴진다. 시시한 호칭 놀이가 더욱 지긋지긋해진 거다.
실소를 흘리며 무정히 검을 휘두르려는 그때,
“지존께선 자리를 비우실 겁니까?”
선양귀가 내게 물었다.
뜻밖의 물음이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검을 멈추었다. 매끄럽게 이어지던 검의 궤적이 선양귀의 목 바로 옆에서 뚝 끊겼다.
여전히 내게서 눈을 떼지 않는 선양귀를 내려다보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이런 일촉즉발의 순간에 저런 질문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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