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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질 사형입니다-82화 (82/141)

<82화>

눈을 가늘게 뜨곤 선양귀를 천천히 훑었다. 내 가늠하는 시선에 흔들릴 법도 한데, 선양귀는 요지부동이었다. 미동 한번 없이 꿋꿋하다.

나는 다시금 선양귀를 살폈다. 내게 얻어맞은 탓에 찢긴 입술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다. 흐르는 피는 턱을 타고 아래로 뚝뚝 떨어졌다.

그 외에 흐트러진 은발이며 한쪽으로 흘러내린 검은 장포까지.

엉망이다. 엉망인 상태로 나만 바라보고 있다.

나는 선양귀를 마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서로의 시선이 마주치는 시간이 침묵에 비례해 길어졌다. 왠지 흥미가 떨어져서 나는 검 끝을 아래로 내렸다.

선양귀는 우둔하지 않다. 그러니 방금 내가 진심으로 자신을 죽이려 했단 걸 모를 리 없다.

내린 검 끝으로 바닥을 툭, 툭, 쳤다.

“…글쎄.”

속으로 조금 고심하다가 코끝으로 가벼운 숨을 내쉬며 말했다.

내 여상한 말에 선양귀가 살짝 시선을 내리깐다. 그런 선양귀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뒤의 말을 이었다.

“어떨까. …선양귀. 네 놈 생각엔 내가 이제 무엇을 할 것 같으냐?”

검 끝으로 바닥을 치는 소리가 점점 느려지면서, 그 소리의 간격이 서서히 벌어진다.

이 대치상황이 슬슬 무료해질 때쯤에야 선양귀가 입을 열었다.

“감히 신첩이 생각해 보건대, 지존께선 거슬리는 잡초를 베실 겁니다.”

‘잡초’라는 단어 선택이 실소를 자아내게 했다. 내가 지금 베려는 게 본인인 걸 모를 리는 없을 테고.

“잡초. 잡초라. …왜 잡초지?”

검 끝으로 바닥을 두드리던 걸 완전히 멈추며 물었다.

“뿌리를 제거하지 않는 한 없앨 수 없기에 그렇게 칭했습니다.”

“…흠. 그렇다면 뿌리는 무엇이지?”

내 물음에 선양귀가 그대로 납작 엎드렸다.

선양귀의 은발이 숙인 몸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 바닥에 이마를 댄 채 선양귀가 곧 아뢰었다.

“귀신[鬼神]에는 ‘신[神]’이 들어가기에, 귀신[鬼神]의 뿌리는 신[神]입니다.”

선양귀가 답했다.

“모든 귀신의 시작점은 하늘이어서, ‘귀[鬼]’의 뒤에는 늘 꼬리처럼 ‘신[神]’이 붙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많은 귀신들은 한때의 영광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고, 그 한때의 영광에 여전히 얽혀 있습니다. 걔 중 몇몇 귀신은 한때 천계에서 지고한 지위까지 가졌습니다.”

“그래서?”

“…그 뿌리를 뽑아내지 않는 한 모든 ‘귀[鬼]’에는 떨쳐 낼 수 없는 지난 은원이 얽혀 있습니다. 한때의 영광이 클수록 지난 은원은 깊고…, …그렇듯 깊은 제 은원에는 도련님이 있습니다.”

“…….”

여기서 ‘도련님’이라고 지칭된 대상은 ‘연연’이다.

지금의 연연은 혼이 불완전한 도자기 인형에 불과하지만, 그 바탕엔 ‘오연’이 있다.

오연은 속계의 선인이었고, 회귀 전에는 우화등선해 신선이 되었던 이다. 그리고 선양귀는 한때 천계의 상선이었고, 지금은 귀곡 내에서 가장 강한 귀족이다.

그런 선양귀와 오연 사이에 지난 은원이 있다고?

이번 생의 오연은 우화등선하지 않고 그냥 악귀로 끝났을뿐더러, 회귀 전의 시점으로 따져 봐도 오연이 우화등선했을 땐 이미 선양귀는 귀신이 된 상태였다.

아무리 따져 봐도 서로 간에 접점이 없는데.

앞뒤가 맞지 않아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

그래, 정말 말이 안 되긴 한데…, 오연에게 어떠한 비밀이 있다면 아주 말이 안 되는 건 아니다.

우사의 천명까지 바꿔 버린 회귀였다. 기실, 그게 단순한 회귀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지금 와선 확신으로 굳어졌다.

귀곡의 지배자로 거듭나며 나도 금술과 술법에 관해 대략적으로 알게 됐다.

기본적으로 회귀는 시간을 돌이키는 거라고 하지만, 사실은 평행의 다른 시간축으로 옮겨 가는 거다. 과거의 시점인 시간대로 말이다. 그래서 회귀는 죽음에서 시작된다.

본래 자신이 있던 시간축에서 죽어야 평행의 시간축의 또 다른 나로 깨어날 수 있으니까.

때문에 회귀의 경우엔 시간축을 옮기는 것뿐이라, 회귀 전의 일들은 다른 시간축에 남아 지워지지도, 사라지지도 않는다.

‘있었던 일’로 영영 남는다. 그렇기에 회귀했어도 ‘있었던 일’로 자국이 남아 있어서 천라지망을 관통하는 천명은 바뀌지 않는다.

그런데 나의 회귀로 인해 우사의 천명이 바뀌었다.

이는 회귀가 아님을 뜻한다. 회귀가 아닌…, 바로, ‘회귀’의 윗 단계인 ‘원멸’ 술법이다.

…그래, ‘원멸’ 술법일 가능성이 크다.

시간축을 옮겨 가는 회귀보다 더한 대가를 요하는 금술.

‘원멸’술은 살아온 시간축을 아예 없애 버린다. 전부 없었던 일이 된다. 완벽한 새로운 시작이다.

하지만 그 새로운 시작은 원멸술 당사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고, 그 원멸술이 발현되게끔 기여한 운명의 당사자들에겐 아니다.

원멸술이 발현된 계기의 대가가 그들 본원에 새겨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원멸술로 인해 ‘없었던 일이 된 시간대’의 죄업을 영혼에 짊어지고선 태어난다. 타고나길 그렇게 태어나, 자연히 천명도 바뀌게 된다.

그렇다면 나의 원멸은 기존의 생을 어디까지 지웠고, 어디서부터가 새로 시작된 생이 되는 걸까.

우사의 바뀐 천명을 기준으로 따져 보자면, 못해도 우사가 천명을 타고 태어나기 직전까진 지워진 셈이 되는 거다.

그러면 나는 왜 16살 무렵이 되어서야 ‘꿈’이란 매개체를 통해서 원멸로 지워진 생을 알게 된 걸까.

……그 해답은 아마 ‘천계의 보고’에나 있겠지.

아무튼 이 원멸술은 아주 극도한 금술이라, 우화등선한 지 얼마 안 된 애송이 신선은 쓸 수 없다.

내가 겪은 게 회귀가 아닌 원멸이라고 온갖 사료가 말해 주고 있는데, 그때의 오연으로서는 절대 쓸 수 없는 금술인 거다.

…오연이 그저 단순한 애송이 신선이었다면 말이다.

오연과 선양귀라.

선양귀가 지금까지 한 말이 정말이라면…….

어쩌면 오연은 내 생각보다 더 대단한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둘이서 서로 한때 얽혔을지 모를 지난 영광의 시절. 그때 생겨난 은원이 선양귀로 하여금 연연에게 굴종하게 만들었다, 라.

“도련님이 무엇인진 모르나, 제 뿌리에 얽힌 은원과 맞닿아 있습니다.”

“…이제야 그 말을 하는 연유가 뭐지?”

“지존께서 신첩을 죽이겠다고 결심하셨기 때문입니다.”

숙였던 고개를 조금 들며 선양귀가 답했다.

“죽음을 목전에 둬서 그렇다, 라. 생사에 초탈한 줄 알았더니. -정말이지, 귀신이란 것들이 생에 미련이 많아서야. 개나 소나 다 같은 반응이군.”

내 말에 선양귀가 처음으로 반응을 보였다. 늘상 무감하기만 했던 표정에 실금이 그어졌다.

곧 선양귀가 입을 열어 내게 고했다.

“…전하, 소첩은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환술(환영인형술)만 남겨 두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했기에 그런 것입니다. 저 환술만 남겨 두게 되면, 차후 지존의 심기를 거스를 만한 일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저 환술이 골칫거리를 불러올지도 모르니……, 귀왕 전하, 감히 아뢰옵건대 신첩을 남겨 두시길 청합니다.”

말끝에서 선양귀가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하면 신첩이 저 환술을 보필하겠습니다. 결코 이 귀곡에 불온함이 감돌지 않게 하겠습니다. …귀왕 전하. 그간 신첩이 불미스럽게 군 적은 있으나, 단언컨대 불온함을 품은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이어 말하는 선양귀의 이마가 바닥에 닿았다.

“이때까지 신첩이 따른 건 뒤의 ‘꼬리(신[神])’가 아닌, 앞의 ‘머리(귀[鬼])’뿐이었습니다. 내원근에 귀기가 깃든 순간부터 신첩은 귀족일 뿐이었고, 신첩이 머리를 조아리는 대상 또한 지존뿐입니다.”

“…짓밟힐지언정 베이고 싶진 않다, 그리고 그러는 게…, 본좌를 위해서다?”

“…….”

선양귀는 침묵으로 답했다.

그 침묵에서 긍정을 읽은 나는 깊은숨을 내쉬었다. 완전히 흥이 식어 버렸다.

“……선양귀, 네 잘못은 두 개다.”

짧은 침묵 끝에 단호히 말했다.

내린 검 끝을 다시 올려, 검 옆면으로 선양귀의 은발을 뒤로 젖혔다.

머리카락에 가려졌던 얼굴이 드러나며, 선양귀가 바닥에 대고 있던 이마를 뗐다. 고개를 조금 든 선양귀는 여전히 두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다 해서 유순해 보이진 않았다. 조금도 말이다.

나는 입가에 비소를 지은 채 말을 이었다.

“건방진 것. 그리고 거슬린 것.”

“…….”

“그 정도면 죽어 마땅하다 생각하는데. 으음-, 마땅하다 못해 차고 넘치지. …그런데, 어쩔까? 어떡할까.”

검 날을 비스듬히 세우자, 검과 맞닿아 있던 은색 머리카락이 힘없이 잘려 나간다. 선양귀는 여전히 미동도 없다.

나는 그런 선양귀를 싸늘히 주시하다가,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목을 치는 방향의 반대편이었다.

검의 궤적을 따라 선양귀의 옆머리가 사선으로 잘려 나갔다. 사르륵- 잘려 나간 머리카락이 은은하게 흩뿌려지며, 짧아진 옆머리가 선양귀의 턱선에 아슬아슬하게 걸쳤다.

나는 진력을 흩트려 손안의 흑망검[黑罔劍]을 없앴다. 그러곤 팔을 뒤로 돌려 뒷짐을 졌다.

그제야 선양귀가 완전히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본다. 붉은 기가 감도는 은회색 동공이 잘게 떨린다. 날 올려다보느라 한껏 젖혀진 목울대가 꿀꺽 울리는 게 보였다.

“……귀왕 전하의 하해와 같은 은덕과 그 뜻을 받들겠습니다.”

눈치껏 굴려 애쓰는 선양귀에,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좋아, 살고 싶다면 살려 주지.”

호쾌한 목소리로 말하며 고개를 가볍게 주억거렸다. 그러곤 친히 오른 다리를 들어 선양귀의 어깨 위로 발을 올렸다.

어깨를 밟은 발에 지그시 힘을 싣자 선양귀의 허리가 점차 숙여진다. 내 발아래에서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선양귀를 보며 미소 지었다.

“하해와 같은 아량을 베풀어 내 발아래에 남겨 두마.”

“남을 수 있다면 영광입니다.”

아래에서 들려오는 대답이, 아까 나눴던 대화를 상기시켰다.

지난 한때의 영광과 오늘날의 영광이라.

“하… 하하하-.”

헛숨은 웃음소리로 바뀌고, 웃음소리는 억지로 쥐어짜 내는 광소로 돌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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