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질 사형입니다-83화 (83/141)

<83화>

나는 선양귀의 어깨를 아예 밟아 눌러 버렸다. 자세가 완전히 무너진 선양귀가 내 발아래에서 숨을 죽였다.

어느 순간 웃음소리가 뚝 멎었다. 나는 더는 웃고 있지 않았다.

차가운 정적이 흘렀다.

영광. …영광이라.

속으로 작게 중얼거리며 선양귀의 어깨를 짓밟고 있던 발을 내렸다.

선양귀는 바로 일어나지 못하고 바르작거렸다. 그런 선양귀를 짧게 일별한 뒤,

“…헛소리.”

그 곁을 지나치며 일갈했다.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에도, 내가 줄 수 있는 것에도 ‘영광’은 없다. 그런데 무슨 ‘영광’이고, 무슨 ‘은덕’이란 말인가.

선양귀를 뒤에 둔 채 겹문으로 걸어가며 코끝으로 비소했다.

“주인님.”

그런 내 뒤로 선양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에 답하지 않았다. 두 손을 뒷짐 진 채 앞만 주시하며 조금도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내 걸음걸이에 맞춰 새하얀 옷자락이 펄럭인다. 전신에서 흐르는 귀기에 옷 끝자락이 크게 호를 그리며 너울거렸다.

진력에 의해 저절로 열린 겹문을 지나쳐 학서당의 문지방을 넘었다. 그리고 몸을 틀며 복도로 걸음을 내딛는 것과 동시에, 곁눈으로 문설주 너머 학서당 안을 보았다.

내가 나온 뒤 도로 닫히는 그 겹문 틈으로 찰나 본 것은 선양귀였다. 나를 보고 있는 선양귀의 은회색 눈과 마주쳤다.

곧 겹문이 완전히 닫혔다.

나는 무감이 시선을 돌려 앞을 응시했다. 그러곤 조금의 지체 없이 걸음을 움직였다.

* * *

돌아간 내원의 침전[寢殿]에는 토끼 두 마리가 저들끼리 어울리며 뛰어놀고 있었다.

연연은 문가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세운 양 무릎 위로 고개를 파묻은 채 가만히 있다. 분명 내가 들어온 걸 알았을 텐데도 아는 척도 하지 않는다.

나는 그런 연연의 동그란 뒤통수를 내려다보며 가볍게 미소 지었다.

말도 없이 그대로 내원으로 보내서 삐졌나 보네.

“연연.”

연연을 부르며 먼저 다가갔다. 그러곤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굽히곤 앉아선, 한 손을 뻗어 연연의 작은 손등을 툭 건드렸다.

검지로 두어 번 더 장난스럽게 툭, 툭, 건드리다 천천히 손을 거뒀다.

“…….”

여전히 날 보지도 않는 연연에 코끝으로 가는 숨을 내쉬었다가,

“사부를 본체만체하다니.”

일부러 질책 섞인 말을 했다.

“버릇이 없어도 너무 없어서야, 정말 큰일이군. 정말 큰일이야.”

고개를 과장되게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그러면서 눈은 연연에게서 떼지 않았다.

과연, 예상대로 연연은 바로 반응을 보였다. 드디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든 거다.

“사부…!”

곧바로 고개를 들어 나를 보는 연연의 미간이 미미하게 찌푸려져 있다. 삐죽이고 있는 입매의 양 입꼬리는 아래로 쳐졌다.

나는 피식 웃으며 두 팔을 뻗어 연연의 겨드랑이 밑으로 넣었다. 연연은 내 손길을 익숙하게 받아들였다. 그대로 번쩍 안아 들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 한 팔에 걸쳐 앉은 연연이 양팔로 내 목을 끌어안으며 꼬옥 안겨 온다.

“내 부덕의 소치로구나.”

연극 톤으로 슬쩍 말을 흘리며 곁눈으로 연연을 살폈다.

“그래서 네가 이렇게 버릇이 없는 거지.”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있던 연연이 내 쪽으로 슬그머니 고개를 돌린다. 나는 위로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애써 억누르며 짐짓 침중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곤 고개를 돌려 연연과 눈을 맞췄다.

“널 어떡하지? 응? 어떡할까. 연연-.”

내 말이 이어질수록 연연이 눈을 빠르게 깜박인다. 뚱한 표정이 점점 풀리는 걸 보며 나는 기어코 피식 웃었다. 내 웃음을 못 본 연연은 눈을 굴리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사부…….”

그러곤 작게 칭얼댔다.

“……그래. 사부. 나는 네 사부야.”

나는 나직이 답하며 한 팔로 연연을 안은 채 침전 안을 천천히 거닐었다.

“사부가 되어 가지고 제자를 혼자 두다니. 내가 부덕해 네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네 버릇만 따져 묻다니. 정말 너무하네. 응, 너무했지. 사부가 너무했어.”

내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은 채 연연이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런 연연을 힐끗 내려다봤다.

“…연연-, 너무한 사부가 약속 하나 하마. 앞으로 다신 널 혼자 두지 않겠다고.”

사방을 돌아다니는 토끼 두 마리, 귀돌이와 귀순이를 한 곳으로 몰며 말했다.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선 연연, 네가 해야 할 일이 있어.”

내 말에, 내 목에 둘러져 있던 연연의 두 팔이 움찔 떨린다.

“귀돌이, 귀순이와의 작별 인사.”

“…….”

“저 토끼들은 데려가지 않을 거거든.”

“……사부.”

“그래. 나는 연연의 사부라, 연연만을 데리러 온 거야.”

내 목에 둘러졌던 연연의 팔이 풀어진다.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는 연연과 눈을 맞추며 입꼬리를 매끄럽게 휘어 올렸다.

“연연은 사부와 같이 갈 거지?”

“……! 사부!”

연연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에 나도 마주 고개를 끄덕여 줬다.

“응. 그래, 그러자. 사부는 연연만 보살펴 줄 거고, 연연만을 위할게. …응, 그럴 거야.”

입가에 지은 미소가 점점 문드러져서 뭉그러지는 느낌이다.

……오연.

내 머릿속에는 여전히 당신의 모진 말들이 메아리치고, 내 마음엔 당신을 향한 원망이 응어리져 있어.

결코 풀리지 않을 응어리는 내가 당신 때문에 무엇을 잃었는지 알려 주지만,

“약속할게.”

지금 눈앞에 있는 연연의 존재는 나로 인해 당신이 잃은 것이 무엇인지 알려 줘.

속마음은 보이지 않는 것이고, 내 죄책감은 이렇게 눈앞에 있으니 보이는 것에 치중할 수밖에.

어쨌든 빚을 졌다는 건 사실이니까.

…나는 당신을 회생시킬 거야.

당신을 되살려서 지난 빚을 모조리 다 갚을 거고, 전부 다 갚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겠지.

“자, 그럼 작별 인사하고 와.”

연연을 바닥에 내려주며 말했다.

내가 내려주자마자 연연은 귀돌이와 귀순이에게로 향했다. 토끼들에게 작별 인사하는 연연을 뒤에서 얼마간 바라보다가, 나도 그 곁으로 걸음을 옮겼다.

옆에 같이 쭈그리고 앉자, 연연이 품에 안고 있는 토끼들을 내 쪽으로 내민다. 나는 토끼들의 머리를 손끝으로 살살 쓰다듬었다.

-03

계절은 이제 막 겨울을 지나가고 있다.

미룰 수 없는 일이라 서두르긴 했지만 역시 시기가 그다지 좋지 않다. 연연이 추위와 더위, 둘 다 잘 타기 때문이다.

도자기 인형이라 병에는 안 걸리겠지만 그렇다고 아무 영향도 안 받는 건 아니다. 냉기와 열기가 몸에 쌓이다 보면 점점 내구도가 약해질 거고, 그게 과하면 망가질 터였다.

연연의 몸 안에 내원근(단전)이 없다는 게 이럴 때 더 아쉬워진다.

내원근이 없는 연연은 한서불침을 비롯한 그 어떤 술법도 쓰지 못한다. 그나마 있는 게 오연의 혼에서 파생된 기운이다.

그거라도 있어서 어떻게든 요행히 제 한 몸은 건사할 수 있는 것 같지만, …역시 마음이 안 놓인다.

그건 정말이지 말 그대로 요행일 뿐이니까.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83)============================================================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