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귀곡을 나서며 연연에게 최대한 많은 옷을 껴입혀줬다. 몇 겹의 옷을 겹쳐 입어 더욱 동글동글해진 연연은 마치 새하얀 찐빵 같았다. 굉장히 포근하고 따듯해 보이는 찐빵.
“사부.”
나와 맞잡은 손을 앞뒤로 흔들며 연연이 나를 올려다본다.
“음?”
고개를 옆으로 까닥이며 연연과 눈을 맞췄다. 그러자 배시시 웃어 보이는 얼굴이 꽤 들떠 보인다. 하기야 그도 그럴 것이 귀곡 바깥으로 나온 건 이번이 처음이니까. 이제껏 귀곡 내에서만 지냈으니 첫 외출이 들뜰 법도 하다.
연연이 바쁘게 눈을 굴리며 사방을 둘러본다. 이제 막 한겨울이 지나간 산에 볼 것도 없을 텐데. 땅은 추위에 얼어붙었고 앙상한 나뭇가지엔 바람만이 걸렸다.
내가 보기엔 쓸쓸하고 삭막하기만 하다. 그런데 연연의 눈엔 그렇지 않나 보다.
점점 빨라지는 연연의 걸음에 발을 맞추며, 손을 흔드는 대로 맞잡은 팔을 흔들려 줬다.
오늘의 외행을 아는 건 귀곡 내에서도 선양귀뿐이다.
며칠이 더 지나면 그 외 몇몇 상귀들도 자연히 눈치챌 터다. 상귀 정도면 환술을 구분해 내는 안목 정도는 지녔을 테니까. 그래 봐야, 안다 한들 아무것도 하지 못하겠지만.
나는 내가 귀곡에 새겨 놓은 공포가 어느 정도인지 안다. 그렇기에 애초에 환술(환영인형술) 하나만 남겨두려 했었던 거고.
고작 환술이라 할지라도 그게 상징하는 게 ‘나’이니, 감히 어쩌지 못할 게 뻔하다. 만에 하나, 허튼짓을 하는 자가 나온다 해도 그것대로 나쁘지 않다. 심심하진 않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선양귀가 자진해서 내 환술을 보좌하겠다고 나섰다.
내가 선양귀를 가만둔 것은 주절주절 늘어놓는 자기변호에 넘어가서가 아니다. 그저 잠깐 거들떠보던 것을 도로 내팽개친 것에 불과하다.
흥이 깨지며 한순간 선양귀에게 가졌던 관심이 가셨기 때문이다.
나는 관심이 일지 않는 것엔 굳이 손을 대지 않는다.
살생으로 즐거움을 얻는 군자는 아니라서 누군가를 죽이는 데 손을 더럽혀 봤자, 느껴지는 건 씻고 싶다는 무료한 감상뿐이다.
귀곡에서 내내 그랬었다.
튄 피는 물로 씻어 내고, 더럽혀진 백의는 깨끗한 새것으로 갈아입는 것. 그 일련의 과정을 반복하고, 또 반복했었다. 지겨울 정도로 말이다.
가는 숨을 내쉬었다. 새하얗게 퍼진 숨결이 차가운 공기 속으로 사그라진다.
…동동들로 친 덫에 미끼가 걸려들었을까.
멍하니 속으로 생각하며 연연과 맞잡은 손에 힘을 줬다. 연연이 자꾸만 내 손을 놓고 주변을 돌아다니려 하기 때문이다.
언제 주웠는지 나와 잡지 않은 다른 한 손엔 나뭇가지 하나를 들고 있다.
“어떨까, 연연.”
속의 생각에 대한 물음을 입 밖으로 중얼거렸다. 굳이 대답을 필요로 하지 않은, 혼잣말에 가까운 말이었다.
연연이 곧바로 나를 돌아보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래서 나는 이번엔 연연을 보며 말했다.
“이왕이면 큰 게 걸렸으면 좋겠는데.”
씩 웃으며 한 말에 연연이 눈을 굴린다. 못 알아들은 눈치다. 내가 알아듣지 못하게 말했으니 당연하다.
연연은 의문을 표하지 않고 그냥 고개를 크게 끄덕여 줬다. 그 호응이 기꺼워서 나는 웃었다.
곧 다른 데로 다시 정신이 팔린 연연이 하릴없이 나뭇가지를 흔든다. 나는 그 모습을 보다가, 뒷짐 지고 있던 다른 한 손의 손끝을 까닥였다.
동동들을 먼저 보내 놓은 곳으로 이동할 참이었다.
내딛는 걸음 아래로 법진이 발현되며 내원근의 진기가 운기했다. 한 발자국 딛는 찰나의 순간에 순간 전이술이 발현되었다.
공간을 넘은 다음 순간, 주변의 풍경이 완전히 달라졌다. 허공에서 새하얀 눈송이가 흩날렸다. 공기는 좀 전의 것보다 포근했고, 지면에는 눈이 깔려 있었다. 그리고 사방의 매화나무에 매화꽃이 피어 있었다.
만개한 붉은 꽃송이가 흰 눈과 어우러지며 절경이었다.
쌓인 눈이 신기한지 연연이 쪼그리고 앉아선 나뭇가지로 눈을 헤집는다. 그러다가 나뭇가지를 옆에 내려놓고 아예 한 손으로 직접 눈을 만졌다.
손에 장갑을 끼고 있으니 많이 차갑진 않겠지.
도자기 인형인 연연은 체질적으로 술법을 쓰지 못하고, 몸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상태 이상’ 종류에 한해선 듣지도 않는다. 그래서 귀곡에서 토끼들과 함께 이동시켰을 때처럼 간접적인 건 괜찮아도 이렇게 직접적으로 몸을 따듯하게 보호해 주는 술법은 걸 수가 없다. 때문에 고민 끝에 강구해 낸 게 옷을 최대한 많이 껴입히는 거였다.
모자, 귀마개, 목도리, 장갑. 나름 만반의 준비를 다 했다.
“사부.”
연연이 눈을 한 움큼 떠서 내게 내민다. 그에 피식 웃으며 눈을 받아 들었다. 손에 손을 타고 옮겨지는 눈은 그새 조금 녹아 있었다.
눈을 더 모으고 싶은지 연연이 나와 맞잡은 손을 빼내려 한다. 잠시 고민하다가 맞잡고 있던 손을 놔줬다.
여기는 곤륜산 인근이기도 하고, 이 근방에 내 동동들이 포진해 있으니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럼 사부는 여기에 있으마.”
근처 바위로 가 눈을 대충 털어 낸 뒤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정좌를 하고 앉아선 두 손을 양 무릎 위에 올려 좌선을 했다. 사락사락 내리는 눈이 머리와 어깨 위로 소리 없이 내려앉는다.
피풍의를 걸치지 않은 백의 차림이긴 하지만, 추위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한서불침을 익힌 덕이다.
생각할수록 한서불침을 익히길 정말 잘했다. 이젠 아무리 추워도 덜덜 떨지 않을 수 있으니 말이다.
눈이 날리는 풍경에 아득히 시선을 줬다가, 연연을 일별했다.
연연은 근처에서 조그만 눈덩이를 굴리고 있었다.
나는 문득 소매 안에서 작은 가면 하나를 꺼냈다. 연연을 위해 손수 만든 반가면이었다. 무슨 문양을 그려 넣을까 고민하다가, 양쪽 광대뼈 부근에 토끼 수염을 그려 넣었다.
연연이 그나마 가장 잘 아는 동물이 토끼이기도 하고, 또 토끼를 좋아하기도 하니까. 내 나름 의미를 담은 거였다.
소매에서 꺼낸 반가면을 만지작거리다가 시선을 들어 다시 연연을 봤다. 눈덩이를 굴리느라 여념이 없는 연연은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내 시야에서 벗어나진 않았다.
“연연.”
내가 부르자 눈을 굴리던 중에도 곧장 고개를 들어 나를 본다. 아까보다 약간 커진 눈덩이는 흙이 묻어 꼬질꼬질했다.
하긴, 눈사람을 만들 정도로 많이 쌓이진 않았으니까.
그래도 앞으로 더 내릴 것 같았다. 계속 내리다 보면 아마… 오후쯤엔 눈사람을 만들 정도로 쌓여 있을 거다.
“이리로.”
이리 오라고 눈짓하며 말했다.
쪼그리고 앉아 있던 연연이 눈덩이를 들고선 일어났다. 연연의 두 손에 넘칠 정도의 크기다.
“그건 내려놓고.”
내 말에 연연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눈덩이를 도로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눈덩이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연연에,
“그걸로는 눈사람을 만들 수 없어.”
나는 말을 덧붙였다.
“이따 다시 여기로 오자. 그땐 이 사부가 커다란 눈사람을 만들어 줄게.”
“?”
‘눈사람’이란 말에 연연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눈사람을 모르는 건가? 하긴 눈을 보는 게 이번이 처음이니 그게 당연하긴 하다.
그러면 눈덩이는 왜 굴리고 있었던 거야?
…눈을 보면 눈덩이를 굴리고 싶어지는 게 어린애들의 본능 같은 건가?
“눈사람이 뭔지는 이 사부가 이따가 알려 줄…….”
말을 끝맺기도 전에 연연이 와다다 달려와 내 품으로 포옥 안겨 들었다. 두 손으로 내 허리를 끌어안은 채 고개만 들어 나를 올려다본다.
“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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