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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질 사형입니다-86화 (86/141)

<86화>

연연은 책상 다리를 손끝으로 툭, 톡 두드리고 있었다.

서로 두드리는 박자가 미묘하게 어긋난다.

내가 두드리던 걸 멈추자, 연연도 덩달아 멈췄다. 슬그머니 내 눈치를 보는 모습에 나는 입꼬리를 매끄럽게 호선으로 휘었다.

그렇지. 연연은 곧잘 날 따라 하니 그걸 이용해야겠다.

아, 이, 우, 에, 오.

입을 가볍게 풀어 준 뒤, 손가락으로 내 입가를 가리켰다.

“연연, 잘 봐. ‘사’, ‘부’.”

과장되게 입을 벌리며 똑똑히 발음했다.

처음이니까 일부러 연연이 잘 말하는 단어로 했다.

“사! 부!”

연연도 나를 따라 과장스럽게 입을 벌리며 크게 발음했다.

순조롭다.

“좋아. 잘했어.”

딱!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며 기꺼워했다.

“그럼… 다음은, ‘좋’, ‘아’.”

“…….”

아까와 똑같이 두 글자인데 이번엔 날 멀뚱히 보기만 한다.

“연연, 사부가 좋지?”

“응!”

“그럼 ‘좋아’라고 말해 줘. 어서. 응?”

내 말에 연연이 눈을 데굴 굴리더니 선뜻 입을 벌린다. 그 모습을 조마조마한 마음 반, 기대 반인 심정으로 지켜봤다.

그리고 곧 들려온 말은…….

“…사부!”

아주 낭랑한 목소리였다.

발음은 ‘좋아’와 거리가 멀었지만, 좋아한다는 마음은 한가득 전해져 왔다.

나는 애매하게 웃으며 눈썹을 찡그렸다.

음…… 만만치가 않네.

연연을 물끄러미 보며 고민하다가 다짜고짜 책상 위로 엎드렸다. 그리고 우는 시늉을 했다.

“흑흑.”

나오지도 않는 눈물을 억지로 쥐어짜 내려는 수고는 하지 않았다. 입으로만 우는 소리를 냈다.

“사부?”

연연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내 옆에 달라붙어선 허벅지 위로 기대온다. 책상에 엎드리고 있는 내 얼굴을 보려고 애쓰는 거다. 나와 책상 사이의 틈을 통해 엿보려는 기색에 나는 피식 웃었다. 되레 내가 그 틈새로 연연을 엿봤다.

어느 순간 연연이 내 품 안을 강제로 비집고 들어왔다. 나와 책상 사이 좁은 틈으로 제 머리를 집어넣는 연연을 억지로 밀어내지 않았다. 자연스레 내 팔이 들어 올려지며 연연과 눈이 마주쳤다,

내가 웃고 있는 걸 본 연연의 눈이 새초롬해진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꿋꿋하게 우는 소리를 냈다.

“사부를 울리다니. 불효하구나, 연연.”

양 입꼬리를 싱긋 올린 채 느긋이 상체를 일으켰다. 그런 날 쳐다보는 연연의 눈빛은 불손했다.

내 품에서 도로 머리를 빼내려는 연연에, 곧바로 두 팔을 내려 감싸 잡았다. 그러곤 상체를 완전히 세우며 내 허벅지 사이로 연연을 앉혔다.

“왜, 사부가 울지 않은 것 같아? 아니야, 연연. 사부가 울고 있었단 건 진짜야. 그냥 흐르지 않을 뿐이지.”

쀼루퉁한 얼굴로 날 빤히 보는 연연과 지그시 눈을 맞췄다.

“눈물이 사부의 안에 늪처럼 고여 있어서 그래. …그래서 그런 거지.”

흐르지 않고 고여 있는 늪과 마찬가지로, 모든 게 그래서…….

실제 입 밖으로 꺼낸 말과 혼자 속으로 생각한 말이 머릿속에서 중첩된다.

“그럼 이 불효를 어떻게 씻을지는…….”

별생각 없이 뒷말을 잇다가 문득 새삼 연연을 살폈다. 시선은 줄곧 연연에게 둔 상태였지만, 사실 제대로 보고 있지 않았다. 속의 상념이 들끓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연의 낯빛이 좋지 않단 걸 이제야 알았다.

조금 침울해진 게 보인다. 불효하단 말이 충격이었을까.

…내가 너무 놀렸나.

나는 코끝으로 가는 숨을 내쉬었다.

‘불효’라. 방금 꺼낸 단어를 새삼 입안으로 되뇌어 보았다. 저절로 자조 섞인 웃음이 지어졌다.

“아니야.”

곧 입을 열어 말했다. 이번엔 연연을 제대로 봤다.

“사부의 속에 있는 늪도, 방금 사부가 울었다 한 것도 연연 때문이 아니야. 내가 자초한 거지. …그래, 불효라니. 사부가 말실수를 했어. 그건 불효가 아니야. 불효일 리가. 연연은 불효하지 않아.”

“…….”

“…네가 가진 문제는 네 허물이 아닌데. 그러니 잘못은… 그래, 그렇지. 시시비비를 가려 보자면, 가령…, 두 사람이 있어.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한텐 잘못이 없는 거야. 그럼 그 문제를 일으킨 건 누구겠어.”

잠시 말을 멈추며 입안 여린 살을 짓씹었다. 그러곤 자조 섞인 비소와 함께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래도 있잖아, 연연. 내가… 처음부터 잘못이었던 걸까? 그런 걸까. 하지만 애초에 시작은, ……내가 자초한 거라고 하기엔 너무, …그래, 두 사람이 있어. 있는데, 그 사이의 깊은 은원을 하나하나 헤아려 따져 들자면, 나는…, 그래, 무엇을 위해야 하는지는 알아. 알지만 나는, 내가…….”

속의 말을 정처 없이 잇다 보니 할 말 못 할 말 가리지 못하고 횡설수설 나왔다.

나는 쓰게 웃으며 입을 다물었다. 역한 괴로움도 삼켰다.

나를 보는 연연은 혼란스런 얼굴이었다. 무슨 이야기인지 못 알아들은 표정인 것 같은데.

…다행이다.

가는 숨을 내쉬었다. 속이 끝없이 침잠한다.

“…아무튼 이 사부는 알고 있다는, 뭐, 그런 거지. 연연이 불효자가 아니란 걸 말이야.”

분위기를 가볍게 덜어내기 위해 일부러 어깨를 으쓱이며 표정을 풀었다.

“그리고 연연이 누구를 좋아하는지도 알아. 되도록 말로 해 줬음 했지만, …이 사부는, 연연이 좀 더 많은 것을 직접적으로 표현해 주길 바랐거든. 그래, 직접적이지 않으면 알아보기가 힘들어. 가령…….”

고민하며 말끝을 끄는데 문득 좋은 생각이 났다. 씩 웃으며 연연과 얼굴을 가까이 맞댔다.

“…당근 정도는 흔들어 줘야지.”

눈매를 장난스럽게 휘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내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연연이 눈을 깜박인다.

나는 그런 연연과 길게 시선을 마주하며 몸을 천천히 뒤로 물렸다. 곧 등에 등받이가 닿았다.

등받이에 깊숙이 몸을 기대며 나는 한쪽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때마침 문 바깥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허벅지 사이에 앉혔던 연연을 향해 술법을 발현시켰다. 순간 전이술로 인해 연연의 거취가 순식간에 내 맞은편 자리로 옮겨졌다. 동시에 나는 허공섭물로 토끼 가면을 가져와 연연의 얼굴에 씌워 줬다.

그러곤 밖의 점원들에게 안으로 들어오라 했다. 곧 문이 열리며 수 명의 사람들이 줄지어 들어왔다. 하나같이 두 손에 쟁반을 받쳐 들고 있었다.

물 흐르듯 유려하게 움직이는 점원들은 호흡 소리마저 일체되어 있었다.

점원들은 나와 연연이 마주 앉은 자리에 눈치껏 먼저 음식들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자리가 부족해 남은 요리들은 옆의 탁상 위에 올려 둔 뒤 조금 뒤로 물러났다.

바로 나가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문 바로 옆에 일렬로 대기하는 모습들이 질서정연하다.

나는 그런 그들에게 손을 한 번 내저어 보였다. 그러자 쓸데없는 사족을 더하지 않고 곧바로 완전히 물러간다. 조심스런 움직임은 간간이 옷자락 스치는 소리만 낼 뿐, 발걸음 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문이 다시 소리 없이 닫혔다.

나는 앞의 상에 차려진 음식들을 눈으로 찬찬히 훑었다.

신선한 야채를 먹기 좋게 썰어 놓은 음식이 눈에 띄었다. 야채 중 내 시선을 사로잡은 건 단연 주홍색 당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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