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질 사형입니다-87화 (87/141)

<87화>

나는 눈가에 즐거운 기색을 띠었다.

“연연.”

옆의 창틀에 나른히 몸을 기대며 한 손으로 턱을 괬다. 그리고 다른 손으론 술병을 집어 들었다.

조롱박 모양의 술병은 유박색이었고 은은한 광택이 흘렀다.

“사부가 좋으면 당근을 흔들거라.”

양 입꼬리를 끌어올려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진기로 창을 닫았다. 열어 놓은 창 때문에 방 안 공기가 점점 차가워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창문을 닫자, 창 너머에서 흘러들어 오던 소음들이 창에 가로막혀 희미해졌다.

연연은 바로 당근을 집어 들어서 흔들었다. 흔들리는 당근을 보며 나는 술병을 입가에 가져다 댔다.

독주가 넘어가며 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와삭-

연연도 흔들던 당근을 베어 먹었다.

식사가 끝날 무렵엔 날이 완전히 저물어있었다. 창밖에 날리는 눈송이들도 아까보다 더 굵어져 있다. 어느 순간부터 날리기 시작한 눈발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거세졌다. 거리는 희게 덮인 지 오래였다.

식사를 마친 우리는 각자 침상에 들었다.

나는 자리에 똑바로 누워선 천장을 응시하다가, 힐끗 눈을 굴려 옆의 침상을 곁눈질했다. 아까부터 그쪽에서 계속 시선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각자의 침상에 드는 순간부터 연연은 계속 내가 있는 쪽을 기웃거렸다.

자리가 낯설어서 잠이 잘 안 오나?

나는 곁눈질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비스듬히 상체를 일으켰다. 두 손을 뒤로 돌려 몸을 지탱한 채 연연을 보았다. 그러자 내 쪽으로 돌아누워 있던 연연이 곧장 몸을 벌떡 일으킨다.

날 빤히 보는 눈이 묘하게 반짝거린다. 기대감이 서린 그 얼굴을 마주하며 도로 슬그머니 누웠다. 연연 쪽으로 향해 누워선 한 팔로 머리를 지탱했다. 그리고 한 손으론 덮고 있던 이불을 들췄다.

들춘 이불 안쪽을 눈짓하며 입매를 매끄럽게 호선으로 휘었다.

“연연.”

내 부름에 연연이 기다렸단 듯 후다닥 침상에서 내려왔다. 내게로 달려와 단번에 내 침상으로 뛰어든다.

펼쳐 준 이불 틈새로 파고드는 연연을 내려다봤다. 연연은 부산스럽게 움직이더니 기어코 내 옆자리를 차지해 냈다.

내 옆에 가지런히 누운 연연의 몸 위로 이불을 덮어 줬다. 그리고 그 위로 손을 올려 가볍게 토닥였다.

음식과 마찬가지로 수면도 연연과 나에겐 반드시 필요한 건 아니다. …아니지만, 심신의 피로를 풀기에 잠만큼 좋은 건 없다.

옛말에 잠이 보약이란 말도 있으니까.

“어서 자. 눈 감고.”

내 말에 연연이 얌전히 눈을 감는다.

눈을 감은 모습을 보며 토닥이던 손을 천천히 멈췄다. 그러자 연연의 감겨 있던 눈꺼풀이 슬그머니 올라간다. 실눈을 뜬 연연에 ‘어허!’하고 엄한 소리를 내자 바로 눈을 꼭 감는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소리 없이 미소 지었다. 그러다가 불현듯 찾아온 상념에 입가의 미소를 천천히 지웠다.

원멸 이전, 나와 오연의 진짜 첫 만남이 생각났다.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고아였던 내게, 오연은 처음 내밀어진 손이었다.

오연은 내게 처음으로 손을 내밀어 줬고, 나를 거둬 줬다.

하늘 아래 나 혼자라고 생각했었는데 오연이 내 곁에 있어 줬다. 가족의 정은 주지 않았지만 사제지연은 줬었다.

한때는 내 생의 중심이 오연이었고, 내 세계엔 우리 둘뿐이었다. 그리고 돌고 돌아 다시 우리 둘이 되었다. 다시 사제지연을 맺었고 또다시 함께 있게 됐다.

하지만 그때와 같지는 않다.

서로의 입장이 바뀌었고, 처한 상황도 그때와는 반대로 뒤집혔으니까.

…이전에 우리의 관계가 무[無]에서 시작해 은원[恩怨]으로 끝났다면, 이제는 그 반대다.

이번에 우리의 관계는 은원[恩怨]에서 시작해 무[無]로 끝날 것이다.

연연을 토닥였던 손을 거둬 내 목덜미를 매만졌다. 검은 끈 문양이 새겨져 있을 부분을 손끝으로 쓸다가, 가는 숨을 내쉬며 바로 누웠다.

목을 만지던 손을 들어 내 눈가를 덮으며 가만히 두 눈을 감았다. 감은 눈꺼풀 안쪽으로 잔상 하나가 선명히 떠오른다.

‘사해혈사’ 때의 기억이다.

‘잘못…, 잘못했어요, 사형. 제가 잘못했어요. 사형. 제가 잘못…….’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빌던 우사. 잘못한 것 하나 없으면서도 무작정 비는 우사의 몸에는 암기가 박혀 있었다. 나를 대신해 맞은 암기였다. 그뿐만 아니라 복부에는 부러진 검날도 박혀 있었다. 그 검날은 내 선검의 부러진 나머지 부분이었다.

그날, 나는 검으로 우사의 복부를 찔렀다.

내게 애원하는 우사의 모습을 외면했고, 나를 구한 것을 질책하며 무정히 걷어차고.

그렇게 온갖 상처를 다 주며 악독하게 굴어도…, 결국 그날 나는 우사의 목을 베지 않았다.

우사를 죽이긴커녕, 끝내 모질게 끊어 버린 건 나 스스로의 목숨이었다.

내가 먼저 뒷걸음질 쳐 스스로 절벽에서 떨어졌다. 내 그 선택이 무엇을 뜻하는 건지 나는 안다.

알고 있다.

그건 내가 우사에게 주는 단 한 번의 기회였다.

그날, 나는 우사를 내 안의 지옥에서 놓아주었다.

우사가 자신의 천옥을 가져간 나를 벼랑에서 놓아준 것처럼 말이다.

문득, 우사가 내게 했던 말이 떠오른다.

‘나, 백아는 흐린 날에도, 맑은 날에도’

지난날의, 원멸술(회귀의 상위 술법)을 행하기 이전에 기억 속 말이었다.

‘해와 달이 부러워할 정도로 진연 형을 한평생 행복하게 해 주겠습니다.’

자신 있게 맹세하며 나를 돌아보던 그 웃는 얼굴이 꿈결처럼 흐려진다. 다음 순간 떠오른 건 다른 이와 혼례를 올리고 있는 뒷모습이었다.

‘…앞으로는 내가 형을 만나러 올 일 없을 거야. 그러니 그렇게 울 것 없이, 내가 미우면 날 욕하면서 떠나.’

먼저 사람을 농락하고 배신한 건 우사였다. 그래서 나도 당초의 목적대로 우사의 천옥을 가져갔고, 뒤늦게 그가 천옥이 없으면 죽는단 이야기를 들었다.

천옥을 돌려주기 위해 찾아간 천계에서 내가 들은 건 우사가 이미 죽었단 소식과 그가 남긴 유언이었다.

자신과 반지를 나눠 낀 내 약지를 자르라는 그 유언.

지금 이 지옥 같은 생이 오연의 희생에서 비롯된 거라 한다면, 그 희생을 요한 건 나였고…, 나를 그렇게 만든 건 우사였다.

‘그런 생각을 했어. 형과 함께 행복하게 사는 생각. …산이든 숲이든 냇가든 어디든 좋으니 오두막을 한 채 지어서 함께 사는 거야. …응, 좋다. 정말 좋을 거야. 안 그래, 형?’

…나를, 너와 함께 하는 꿈을 꾸게 만들었어.

그 꿈을 꾼 대가로 나는 의도치 않게 너를 죽였고, 오연 또한 죽였다. 그리고 끝내는 나 자신마저 죽였지만…….

“…….”

눈가를 덮었던 손을 내려 다시 내 목덜미를 매만졌다.

목에 둘러져 있는 흉[凶]을 손끝으로 덧그리듯 매만지다가, 문득 귓가로 손을 가져갔다. 손끝에 닿는 부드러운 감촉에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꽃이 아직 귓가에 꽂혀 있었구나.

귓가에 꽂혀 있는 꽃을 빼 눈앞으로 가져왔다. 엄지와 검지로 꽃줄기를 잡고선 빙글빙글 돌렸다.

“…….”

원멸 이전에도 꽃을 받은 적이 있었지.

꺾은 꽃을 한 아름 안고선 내게 다가오는 이를 향해 미소 지어 보이는 순간이 있었고.

바람에 꽃잎 몇 장이 날려 내게 불어왔다. 그 아름다운 풍경 위로 다른 회상이 덧그려진다. 그러면서 그 풍경에서 느꼈던 행복 또한 다른 감정으로 덧칠해져 간다.

원멸 전, 마지막 순간에 내 약지를 잘라 가며 그 여자가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울린다.

‘이게 내 낭군의 뜻이고, 이 순간이 내 낭군의 염원이야. 알겠어? …왜냐하면 이건 룡존이 남긴 단 하나뿐인 유언이거든. 유일무이하게 남긴 유언이 이거였어. …네 손의 그 반지가 죽기 직전까지 거슬리고 눈에 밟혀서, …그래서 남긴 유언이겠지. 왜냐하면 룡존 전하는 단 한 순간도…, 단 한 순간도 네 놈 같은 사특한 종자 따위 사랑한 적 없으니까…!’

그때 손가락이 잘리며 반지도 같이 빠졌다. 잘린 후 내 약지엔 반지흔만이 남았다.

깊어지는 절망감 속에서, 나는 단 하나의 사실을 처절하게 깨우쳤다. 그야 그럴 수밖에.

당장 우사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그 당사자가 없었으니까.

이미 죽어서 없었다.

나로 하여금 저를 죽이게 만들었다.

우사를 죽인 건 나였다.

배신감, 절망, 그리고 비통함과 원망.

‘아아아악-!!’

감옥 안에서 울려 퍼지던 내 절규가 아직도 귓전에 생생하다.

원멸 전의 그 일들이, 아직도 바로 어제 일인 것처럼 느껴진다. 헤어 나올 수 없는 늪에 잠긴 기분이다.

그리고 사해혈사.

그 모든 기억을 떠올린 내 앞에는 우사가 있었다.

‘잘못…, 잘못했어요, 사형. 제가 잘못했어요. 사형. 제가 잘못…….’

아무것도 모르는 무구한 낯으로 내게 비는 우사를 오연히 내려다봤다. 그 몸에 박혀 있는 암기가 거슬렸고, 우사의 목을 향해 애써 검을 휘둘러 봐야, …그래, 그래 봐야.

사실 이미 알고 있었다.

너를 죽이면 나는 분명 미칠 거다.

“…하아…….”

긴 한숨을 내쉬며 끝내 도로 눈을 감았다.

밤이 깊다.

…이제 그만……, 잠이나 자자.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87)============================================================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