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질 사형입니다-88화 (88/141)

<88화>

* * *

하룻밤이 지났다.

나와 연연은 정오가 지날 무렵에야 방에서 나왔다. 연연이 창밖 구경 삼매경에 빠졌기 때문이다.

점심까지 객점에서 해결한 뒤에 바로 산에 오르기로 했다.

간밤에 눈이 제법 왔으니 분명 꽤 많이 쌓였겠지. 작은 눈사람 두 개 정도는 만들 수 있을 거다.

앞장서서 계단을 내려가는 연연의 뒤를 느긋이 쫓았다. 계단 난간 너머 아래에서 북적이는 기척이 느껴진다.

난간 아래를 내려 보자, 1층 맨 앞의 낮은 단에 앉아 있는 이가 보였다.

소박한 차림새의 한 중년 남자였는데 앞에 낮은 탁자를 두고 있었다. 탁자 위에는 쥘부채와 물잔이 놓여 있었다.

1층의 대부분 사람들이 그 남자를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다들 무언가를 기다리는 눈치다.

나는 1층에서 눈을 돌려 객점 안을 전체적으로 훑어봤다.

정황상 저 남자는 이야기꾼일 확률이 크니 이 객점 안에서 어디가 가장 목이 좋을지 가늠해 보는 거였다. 번잡하지 않으면서 듣기 좋은 곳이 좋겠다.

11년 만에 나온 속계였다. 세상사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한 번 들어 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

구조적으로 그나마 가장 나은 곳을 한곳 빠르게 추린 뒤,

“연연.”

1층으로 내려가고 있는 연연을 불러 세웠다.

“이리 와.”

바로 멈춰 서서 나를 돌아보는 연연의 얼굴엔 토끼 반가면이 씌워져 있었다. 그를 향해 한쪽 눈썹을 까닥이며 눈짓했다.

“사부!”

작은 외침과 함께 연연이 다시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온다. 그런 연연을 잠시 일별한 뒤, 휙 몸을 틀어 1층과 복층으로 이어진 2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곧장 날 따라잡은 연연이 내 바로 뒤에서 쫓아온다. 나는 2층 난간 근처의 식탁에 자리 잡고 앉았다.

과연, 1층 정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낮은 단에 앉아 있는 중년의 남자도 잘 보이고 말이다.

마치 연극을 관람하는 기분으로 난간 너머를 내려다봤다.

“나리. 간밤엔 평안하셨습니까?”

어제 방을 안내해 줬던 점원이 다가와선 물었다. 들고 온 쟁반에는 청옥색 찻잔이, 한 손에는 찻주전자가 들려 있었다.

“식사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무엇이든 하문해 주신다면 정성껏 최선을 다해 준비해 올리겠습니다.”

식탁 위에 찻잔을 내려놓곤, 이어서 능숙한 손길로 찻물을 따르며 점원이 말했다.

나는 1층 난간 너머에 시선을 둔 채 점원을 향해 손을 까닥였다. 점원이 곧장 자세를 낮추며 가까이 다가온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저 이야기꾼이 오늘 준비한 이야기가 뭐지?”

“아-! 네. 사해필성 비극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문곡과 자고, 그 이복형제에 관한…….”

매끄럽게 말을 잇던 점원이 무언가 기색을 눈치챘는지 말끝을 흐린다. 이어지는 조심스런 침묵에서 내 눈치를 보는 게 느껴진다.

꿀꺽-

침묵 끝에 마른침을 한 번 삼킨 뒤 점원이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따로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시다면, 이야기꾼에게 일러두겠습니다.”

“아-, 그렇다면 사양 않고.”

나는 입꼬리를 휘어 매끄럽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천천히 돌려 점원을 돌아봤다.

나를 보는 점원의 동공이 점차 크게 확장된다. 뒤늦게 허겁지겁 시선을 내리깔긴 했지만 얼굴에 퍼진 열감까지 지울 순 없었다.

양 뺨의 홍조와 긴장으로 떨리고 있는 숨결까지, 그 식상한 반응을 눈에 담았다.

입가에 지었던 미소가 삐뚜름 기울어진다.

점원을 싸늘히 응시하는데, 내 맞은편에 연연이 앉는 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속으로 깊이 숨을 삼키며 뒤틀린 심기도 함께 내리눌러 묻어 버렸다.

입가의 미소는 완전히 지운 채 점원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러곤 소매에서 전낭(돈주머니)을 꺼내 통째로 점원에게 던져 줬다.

퍽-!

제 가슴팍을 맞고 떨어진 전낭을 점원이 도로 허겁지겁 줍는다.

“…나리? 이건…….”

불안과 기대가 뒤섞인 목소리였다.

“심부름 값이다. 나가서 멱리 하나 사와.”

맞은편에 앉아 있는 연연과 눈을 맞춘 채 여상히 말했다.

내가 만든 가면을 쓰고 있는 연연은 오늘따라 얌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조금도 부산스럽지 않은 모습에, 나는 한 손으로 턱을 괴며 일부러 삐딱하게 앉았다.

…어째 분위기가 좀 무겁네.

“음식은 여기 숙수(조리장)가 제 목을 걸 수 있을 만큼 괜찮은 걸로. 맵게.”

오연이 매운 음식을 좋아했다는 걸 떠올리며 말했다. 내가 말끝에 덧붙인 ‘맵게’란 말에 연연의 몸이 조금 들썩인다. 좋은 모양이다.

나는 의식적으로 싱긋 미소 지어 보였다.

“그리고 이야기는…, 지금 현재 가장…… 가장 명망 높은 선사. 그래, 그런 류의 이야기가 좋겠어.”

대수롭잖은 목소리로 말하며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무엇보다도 말이야.”

이어 말을 덧붙이며 나는 가면 너머 연연의 눈을 직시했다.

내 속셈은 대략 ‘일거양득’, ‘꿩 먹고 알 먹고’에 있었다.

일단 가장 우선되는 것은 ‘정기’이다.

명망이 높을수록 그 피에 흐르는 정기 또한 많을 테니, 한 놈만 제대로 걸리면 된다는 심산이다. 그러면 굳이 다른 잡어를 낚을 필요가 없고, 자연히 불필요한 수고도 덜어질 테니까.

그러니 지금 가장 명망 높은 선사가 누구인지 알아 두는 게 좋다. 또, 겸사겸사 연연에게 조기교육도 시키고 말이다.

연연이 앞으로 정기를 무사히 다 흡수하게 되면 본래의 삶인 ‘선사’의 길을 걸을 텐데, 이참에 훌륭한 선배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좋지. 교육에 좋을 거다.

그야말로 ‘일거양득’, ‘꿩 먹고 알 먹고’다.

“…가장 명망 높은 선사 말입니까? 네, 알겠습니다. …혹 다른 더 듣고 싶은 이야기는 없으신지…….”

나는 대답 대신 손을 한 번 내저어 보였다. 필요 없으니 그만 물러가란 뜻이었다. 점원도 더 가타부타 말 얹지 않고 바로 물러갔다.

얼마 있지 않아 식탁 위에 음식들이 빠르게 차려졌다. 하나같이 사천음식이었는데 그 종류가 다양하고 제법 정갈하게 꾸며져 있었다.

찬 음식, 더운 음식, 찜, 탕, 볶음, 절임.

숙수의 목을 걸 수 있을 만한 걸 가져오랬더니, 여기서 잘 팔리는 건 다 내온 것 같았다.

풍기는 매운 향이 기꺼운지 식탁 아래 연연의 두 발이 동동거리는 게 느껴진다.

“연연.”

내 호명에 연연이 바로 발 동동거림을 멈춘다.

“군자는 어디서나 예의껏, 차례를 지켜야 한다고 하지 않았느냐. 제일 처음은 뭐였지?”

연연의 시선이 내 젓가락에 꽂힌다. 나는 설핏 웃었다.

“좋아. 나부터지.”

고개를 주억거리며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 젓가락을 쥔 쪽의 소매를 받쳤다.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을 가볍게 훑어본 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숙주볶음을 조금 집었다. 고추기름에 볶았는지 매운 향이 물씬 난다.

한 입 넣어 씹자 아삭거리는 식감과 함께 감칠맛이 난다.

내가 먹은 걸 본 뒤에 연연이 그제야 제 젓가락을 들었다. 젓가락을 쥔 자세부터 음식을 집는 자세까지. 완벽하다. 굳이 가르쳐 주지 않아도 처음부터 저렇게 곧잘 했다.

그리고 나도 수저를 저렇게 잡는다. 원래는 엉망이었는데 오연에게 배워서 고쳤었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88)============================================================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