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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질 사형입니다-89화 (89/141)

<89화>

연연이 제 앞접시에 음식들을 골고루 더는 걸 보며 젓가락을 도로 내려놨다. 그런 내가 신경 쓰이는지, 양껏 담은 음식들을 먹으며 연연이 나를 흘끗거린다.

“사부?”

반가면 아래 입가에 양념을 묻힌 채 연연이 나를 불렀다. 나는 대답 없이 그냥 싱긋 웃었다. 그러자 연연이 음식이 담긴 접시를 내 앞으로 슬쩍 밀어 둔다.

“사부 챙겨 주는 거야?”

기분이 조금 유쾌해져서 아까보다 더 깊이 미소 지었다.

“응.”

목을 울려 대꾸하며 연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대하는 눈빛으로 나와 내 젓가락을 번갈아 보는 연연에, 나는 식탁 위로 손을 올렸다.

젓가락으로 손을 가져갔다가, 그대로 바로 그 옆을 짚었다. 그리고 젓가락을 집는 대신 식탁 위를 손끝으로 두드렸다.

툭, 툭-

손끝으로 흘리는 진기가 식탁 위 접시들의 자리를 이리저리 바꾸었다. 연연이 잘 먹지 않는 건 뒤로 빠지고, 연연이 잘 먹는 건 빠진 자리를 채우며 앞으로 밀려갔다.

마치 장기를 재배치하는 것처럼 한 차례 바꾸고 보니, 연연이 내게 밀어 준 접시가 어느새 연연에게 가장 가까워졌다.

“사부…?”

나를 부르는 연연의 목소리에 당황스러움이 묻어난다. 연연이 쥐고 있는 젓가락 끝이 허공을 배회한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왠지 장난기가 솟았다.

“연연, 네가 밀어 줘서 방금은 내게 가장 가까웠던 음식이 지금은 나와 가장 멀어졌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 것 같으냐?”

내 말에 연연이 바로 식탁으로 시선을 내린다. 당근을 집어 보이려는 속셈일 게 뻔하다. 나는 연연의 젓가락이 당근을 집으려는 족족 허공섭물로 도중에 가로챘다.

내 앞접시에 당근이 가득 찰수록 연연의 젓가락질이 매서워진다. 하지만 기세만 매서워질 뿐, 결국 연연은 당근을 하나도 건지지 못했다.

“사부!”

연연이 심통 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나는 듣는 체 마는 체 하며 일부러 한숨을 내쉬었다.

“사부는 답을 듣지 못해 알 수가 없구나.”

들으란 듯이 혼잣말을 한 뒤 연연의 반응을 기다렸다.

나는 내 놀림에 연연이 발끈할 줄 알았다. 하다못해 삐지거나 말이다. 그러면 장난이라고 말한 뒤 당근을 돌려주려고 했다.

그런데 연연이 보인 반응은 내 예상을 전부 비껴갔다. 갑자기 분위기가 가라앉으며 기분이 침체되는 게 보였다. 연연은 입을 몇 번 뻐금거리다가 다물었다.

방금 달싹였던 입 모양으론 무슨 말을 하려 했던 건지 읽을 수 없었다.

…뭐, 그래 봐야 ‘사부’라는 한 단어겠지만. 연연이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니 말이다.

“…연연? 화났어?”

내 말에 연연이 그제야 입을 삐죽거리며 다시 음식을 퍽퍽 먹기 시작한다.

기분은 나쁜데 음식은 맛있는지 식탁 아래 두 발을 다시 동동 흔든다. 빠르게 기분이 풀리는 게 보인다. …하여간.

속으로 가는 숨을 내쉬었다.

“나리, 시키신 멱리입니다.”

때마침 심부름을 마친 점원이 돌아왔다.

점원은 새하얀 너울이 둘러진 멱리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있었다.

“이 근방에서 가장 좋은 물건입니다.”

그 말대로 딱 보기에도 상품[上品]으로 보였다.

멱리를 받아 들어 바로 썼다. 새하얀 너울에 시야가 얼핏 가려진다.

점원이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를 올린 뒤 물러갔다. 그러고 얼마 있지 않아 1층의 이야기꾼이 입을 열었다.

“11년 전.”

지금부터 풀어놓을 이야기의 서두였다.

나는 1층 난간 아래로 시선을 돌렸다. 맞은편의 연연은 그새 배가 찼는지, 아니면 음식이 입에 물렸는지 산만하게 굴었다. 주변을 둘러보다가 어느 한 곳을 보더니, 슬금슬금 자리에서 움직인다. 뭔가 재밌어 보이는 걸 발견하기라도 한 모양이다.

내가 시선도 주지 않고 관망하고만 있으니 그걸 허락으로 알았는지 이젠 숫제 일어섰다. 그러곤 눈치껏 야금야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신의 일탈을 내가 눈치채지 않길 바라는 건지, 아니면 저와 눈 한 번 맞춰 주길 바라는 건지.

굉장히 눈에 띄고도 거슬리는 움직임이다.

나는 코끝으로 가는 숨을 내쉬었다.

지금은 식사 시간이라 객점 안은 번잡했다. 1층에 비해 복층인 2층은 한가로운 축이었지만, 지금도 객점 안으로 계속 사람들이 들어왔다.

1층의 번잡함이 언제 여기까지 밀려 올라올지 몰랐다.

“너무 멀리 가진 말고.”

흘끗 시선을 돌려 연연을 보며 말했다.

내가 준 짧은 주의에 연연이 곧장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답해 왔다. 그러곤 내 시야 밖으로 훌쩍 나갔다. 하지만 여전히 내 기감 안이었다.

촤락-!

다시 내려다본 이야기꾼은 부채를 폈다 접는 걸로 주위의 이목을 끌고 있었다.

이 와중에도 객점 안으로 사람들이 드문드문 들어왔고, 그중 대부분은 그나마 한산한 여기 복층으로 올라왔다.

비어 있던 자리가 빠르게 채워지는 걸 보며 찻잔으로 손을 가져갔다. 흰 소맷자락 아래로 드러난 손은 핏기 하나 없이 희었다.

창백하고 곧은 손가락 끝의 검은 손톱을 흘끗 보았다가, 손톱을 세워 찻잔을 가볍게 두어 번 두드렸다.

툭-, 툭-

찻잔 안에서 작게 소용돌이가 일더니, 다음 순간 찻물로 빚어진 작은 새가 솟구쳐 올라왔다.

새는 찻잔 주변을 빙글빙글 돌다가 어느 한 곳으로 날아갔다. 머잖아 새가 날아간 방향에서 연연이 달려왔다. 새를 통해 내 부름을 받고 달려오는 거다.

얼굴에 쓰고 있는 반가면이 비스듬히 흘러 내려져 있다. 그 때문에 반가면에 가려져 있던 얼굴이 얼추 보였다. 저래서야 쓰나 마나다. 활동적인 아이에겐 많이 불편한가?

“연연.”

어서 이리 오라고 연연을 불렀다.

“사부.”

내 곁에 당도한 연연이 화답해 왔다. 두 손으로 내 허벅지를 짚으며 체중을 기대 오는 연연에게 손을 뻗었다.

연연은 내 손길을 익숙하게 받아들였다. 나는 비스듬히 흘러내린 상태의 반가면을 도로 제대로 씌워 줬다가, 문득 내가 쓰고 있는 멱리의 너울을 의식했다. 그리고 반가면이 묘하게 불편해 보이던 연연의 모습 또한 떠올렸다.

‘…흠.’

잠시 고민한 뒤 나는 그대로 가면을 벗겨 줬다.

“오늘 할 이야기가 11년 전 사해필성에 관한 건 맞지만, 그 애틋한 이복형제에 관한 게 아니라-,”

아래 1층에선 이야기꾼의 목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나는 토끼 반가면을 소매 안의 술법으로 만든 아공간에 넣으며 주변으로 신경을 돌렸다.

어느 순간부터 조용해진 객잔 안은 이제 나직한 술렁거림도 들려오지 않았다. 기묘하게 느껴질 정도의 정적이었다.

그 적막을 가르며 이야기꾼이 말했다.

“귀곡의 주인인 귀왕야 ‘사혈귀존[師烕鬼尊]’.”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사혈귀존’이란 별호가 주는 공포가 여화 객잔을 짓눌렀다.

심지어 이야기꾼마저 두려움에 집어삼켜진 낯빛이었다.

“‘사혈귀존[師烕鬼尊]’. 스승 ‘사[師]’에 없앨 ‘혈[烕]’이 들어가는 이 별호는, 귀신들이 감히 떠들어대길, 그 사혈귀존이 스스로에게 직접 붙인 별호라 합니다. 마치 그것이 본인의 의의란 듯이, 혹은 그저 자신이 저지른 짓을 온 세상에 떠벌리듯이 말이요.”

이야기꾼이 은근한 목소리로 풀어 가는 사혈귀존 이야기에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당대 가장 저명한 선사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했더니, 화두에 오른 게 나라. 내 별호로 서두를 열 만한 선사가 누구일지 대충 알겠다. 굳이 추려 볼 필요도 없다.

내 인생의 주인공은 ‘그’ 뿐이었으니까.

지금은 어떤 이름으로 불리고 있을지 몰라도, 분명 ‘너’다.

동요로 인해 손끝이 미약하게 떨린다. 손가락을 천천히 오므려 꽉 주먹 쥐었다.

어쩐지 이야기꾼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아서 바로 앞 식탁만 응시했다. 속에서 이는 동요에 갖은 감정이 얽힌다.

“사부?”

그런 내가 이상해 보이는지 연연이 보채듯 불러 온다. 그제야 나는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고선 연연을 돌아봤다. 동시에 1층 난간 아래에서 이야기꾼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사혈귀존과 가장 대척점에 선 영웅, 백아군[君].”

순간 숨이 턱 막혀 왔다.

역시 ‘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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