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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질 사형입니다-90화 (90/141)

<90화>

‘백아군.’

소매 안으로 감춘 주먹에 절로 힘이 들어간다. 꽉 쥔 주먹의 손톱이 살갗을 찔렀다. 겉으론 평온을 가장했으나 속은 이미 평정을 잃은 지 오래였다.

가슴이 빠듯하게 죄며 일렁인다.

‘백아’. 그건 내가 우사에게 준 이름이었다. 본래는 우사가 저 스스로에게 지어 준 이름이긴 하지만, 어쨌든 이번엔 내가 제일 먼저 그를 백아라고 불렀다.

그리고 11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는 지금도 여전히 백아였다. 별호에 담긴 뜻도 내가 처음 불러준 백아[白我]와 같을까.

순간 든 의문에 곧바로 조소를 내비쳤다. 자조적인 비소였다.

그가 뭐라 불리고 있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내가 다시 그 이름을 부를 일은 없다.

11년 전, 나는 우사를 내 마음 안에 묻기로 했다. 그 일환으로 지난 11년 동안 단 한 번도 우사를 찾지 않았다. 그리고 우사 역시 단 한 번도 나를 찾지 않았다.

…잘된 일이다.

나는 앞의 식은 찻잔을 들었다. 그리고 단번에 들이켜 마셨다.

탁!

찻잔을 도로 내려놓으며 객점 안에 울려 퍼지는 이야기꾼의 말소리를 들었다.

이야기꾼은 백아군의 치적[治績]부터 시작해서 지난 행보와 타고난 기개 따위를 말하고 있었다.

어떤 사이한 마인(마족)을 물리쳤고, 거대한 업적을 쌓았으며, 그 명성이 태산과 같고, 곤궁에 빠진 이들을 돕는 심성까지. 그야말로 불세출의 영웅이자, 공전절후[空前絕後]한 군자였다.

모든 백도[白道]의 귀감이니, 속계의 상공[上空]이란 말로도 부족했다.

단 하나, 이야기꾼의 이야기에서 빠진 것은 그의 과거였다.

이야기꾼은 백아군의 지난 행보에 관한 이야기를 했지만, 그건 큼직한 치적에 한한 것이었다. 나와 함께 보냈던 시절은 우횡산에 드리운 안개처럼 희뿌옇게 가려져 있어, 그의 영웅담에는 나와 보낸 모든 것이 없었다.

그래서 세간이 말하는 백아군은 홀연히 나타난 신선 같은 이였다.

“백아군께선 오늘날에도 사혈귀존을 쫓고 계십니다.”

장황한 이야기의 끝은 또다시 ‘사혈귀존’이었다.

백아군 이야기의 서두도 내 별호이고, 끝맺음 또한 내 별호라.

그게 내 귀에는 ‘사혈귀존이 없으면 백아군의 시작도, 끝도 없다’는 듯이 들렸다.

깊이 숨을 삼켰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치미는 상념 아래 복잡하게 얽힌 심상이 차츰 어그러진다. 속에서 넘실거리는 잔악한 충동 이면에는 자기파멸적인 애수가 있었다.

심기가 뒤틀린다.

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그리고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간을 지나쳐 걷는 내 곁으로 연연이 따라붙는다.

막 계단으로 발을 디디는데,

“백아군의 대의가 정말로 숭고하군.”

“대의라기보단 숙명에 가깝지. 주야장천 그… 마도, 사혈귀존만 바라보고 계시니까. 듣기론 귀곡 입구에서 몇백 일간 때를 기다리셨다던데.”

“하면 지금도 귀곡 근처에 계시나?”

“그야 당연하지. 백아군께선 결코 사혈귀존을 홀로 두지 않을 테니 말일세.”

들려오는 말에 순간 멈칫했다.

방금 내가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누가 어디에 있다고? 우사가 귀곡에?

코끝으로 차게 비소를 내비쳤다. 몇 년이 지나도 강호엔 헛소문이며 허언이 떠나질 않는구나.

그리고 숙명? 숙명이라. 하하하-

속으로 날카로운 웃음을 터트렸다가 곧 그쳤다. 마저 계단을 내려가며 차가운 시선으로 앞을 주시했다.

천라지망 아래 진저리치게 이어지던 인연들, 숙명이라 불리던 그것을 어떻게 끊어냈던가.

끊어내기 위해 내가 또 무엇을 걸었고.

‘다음에 보면 그땐… 우사, 널 죽일 거다.’

숙명, 운명, 인연. 내가 그 모든 것을 내 발아래 직접 짓밟은 것은, …내게 원한이 있어서다.

내게는 우사를 죽여 마땅한 원한이 있다. 하지만 차마 죽일 수 없었다. 죽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우사를 죽은 사람인 셈 치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 다신 날 찾지 말라고 엄포도 놓았다.

만약 우사를 다시 보게 되면 나는 그를 죽여야만 하니까.

우사는 이미 내 안에서 죽은 사람이라, 그를 다시 만난다는 건 죽은 자를 생전에 다시 만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건… 내게 있어 생강시나 다를 바 없는 거고, 생강시는 베어 마땅한 존재다.

…그렇기에 나 또한 다시는 널 찾지 않겠다고 ‘그날’ 맹세했었다.

‘가.’

‘나도 너 안 찾을게.’

그렇게 간신히 저버린 악연이자 숙명이었다. 그런데 감히 ‘숙명’이란 단어를 허투루 입에 담아?

속에서 살심이 뭉근히 끓어오른다. 되는대로 지껄이는 저 혀들을 어떻게 해 줄까.

새하얀 소매 안의 손가락을 우득 꺾으며 고개를 옆으로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때, 번잡한 소음을 가르며 깨끗한 미성이 들려왔다.

“이제 보니 여기가 쥐 소굴이었군.”

나직한 음성이었음에도 그 무엇보다 또렷이 들렸다. 나는 불현듯 그리로 시선을 돌렸다.

방금 말한 상대는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에서 비스듬히 등지고 앉아 있었다. 그래서 뒷모습밖에 볼 수 없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때론 그 뒷모습과 풍기는 분위기만으로도 상대에 대해 알 수 있기 마련이다.

남자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흑발을 단정하게 반 묶음 해 은백색 머리 장식으로 고정하고 있었다. 그 자체로 고아하고, 앉은 자세는 흠잡을 곳 없이 완벽했다.

꼿꼿하게 편 허리와 반듯하게 넓은 어깨, 정적인 움직임 하나하나까지. 지극히 아정한 자태였다. 풍기는 기품 또한 범상치 않았으니.

나는 흑의 차림의 남자를 망연히 바라보았다.

‘…백아?’

나도 모르게 속으로 그 이름을 뇌까렸다.

“그게 무슨 소리오?”

문득 누군가가 남자에게 따지듯 물었다. 빈정 상한 투의 목소리였다.

반발심이 가득한 목소리에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그제야 내가 남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단 걸 알았다.

나는 뒤늦게 황급히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참고 있었던 숨을 내쉬었다.

속의 동요가 손끝의 떨림으로 나타난다.

나는 황망히 눈을 굴리다가 이윽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러곤 좀 전보다 다급하게 걸음을 움직였다.

방금까지의 살심은 잊은 지 오래였다.

“서목촌광[鼠目寸光].”

이곳에서 나가려 문을 향해 빠르게 걸어가는데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금 전의 시비에 대한 대답이었다.

이번엔 목소리가 앞이 아닌 옆에서 들려왔다. 지금의 내 위치가 아까 전과 달라졌기 때문이다.

아까 전 서 있었던 자리에선 남자의 뒷모습밖엔 볼 수 없었지만 지금은 고개만 돌리면 남자의 얼굴을 볼 수 있다.

그 사실을 깨닫기 무섭게 마른침이 삼켜졌다.

일순 걸음을 멈칫거렸다가 곧 소매 안의 두 손을 꽉 말아 쥐었다. 긴장과 동요로 내 호흡이 떨리는 게 스스로도 느껴진다.

나는 조금도 시선을 돌리지 않고 앞만 직시했다. 그리고 다시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그 말은 우리의 식견이 짧단 말이오?”

남자에게 대꾸하는 상대측의 목소리엔 반감이 가득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서목촌광[鼠目寸光]’이란 사자성어가 남자가 말한 ‘쥐 소굴’과 맞물리며 극도의 비꼼이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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