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서목촌광[鼠目寸光]’은 ‘한 치 앞밖에 보지 못하는 쥐의 눈’이란 뜻이다. 그야말로 절묘한 맞물림이자, 한 치의 거리낌도 없는 비꼼이었다.
“그야.”
남자는 냉소적인 어투로 맞받아쳤다.
“숙명이란 인연에서 비롯되는 법인데, 그 둘은 만나지도 못하고 있으니 인연이야 당연히 없는 거고.”
앞으로 나아갈수록 옆에서 들려오던 남자의 목소리가 뒤로 멀어진다.
“그러면 숙명이 있을 턱이 있나?”
“…그럼, 숙명이 아니면 뭐라는-,”
“심마[心魔].”
객점 문 앞에 서는 것과 동시에 뒤에서 남자의 대답이 들려왔다. 나는 조금의 지체 없이 그대로 손을 뻗어 앞의 문을 열었다.
“……심마[心魔]?”
뒤에서 들려오는 어수선한 술렁거림을 등지고,
“끊어진 인연을 이으려는 마음이니, …‘심마[心魔]’라 할 수 있지.”
그 웅성거림을 향한 답인지, 혼잣말인지 모를 남자의 중얼거림까지 뒤로한 채 여화 객잔을 나섰다.
등 뒤로 문이 닫힌다.
나는 끝까지 단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앞으로 계속 걸어 나갔다. 그렇게 한참 멀어진 후에야 비스듬히 돌아서서 뒤를 돌아봤다.
‘백아, 정말… 너야?’
속의 물음을 삼키고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미 여화 객잔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리 왔다.
이제 와서 그게 정말 우사였는지 알 길은 없다. 알아볼 마음도 없고.
나는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그런 내게서 심상찮은 기색을 느꼈는지 연연이 내 눈치를 본다.
“사부…….”
그 조심스런 부름에 나는 힐끗 시선을 내려 연연과 눈을 맞췄다. 연연은 내 옆에서 잘 따라오고 있었다. 나는 이어 고개까지 내려 연연을 마주 보며 싱긋 미소 지었다.
“연연. 우리 눈사람 만들러 갈까?”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며 물었다.
“……! 응!”
연연이 곧장 반색하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에 나는 뒷짐 지고 있던 손을 풀어 연연에게 내밀었다. 동시에 내원근의 진기가 운기되며 발아래에 법진이 넓게 그려졌다.
순식간에 그려진 법진의 궤적에 진력이 흘렀다. 진력의 흐름을 따라 발현되는 법진에서 미약한 돌풍이 일었다. 부는 바람에 옷자락이 크게 너풀거린다.
넓게 너울거리는 멱리 너머로 매화꽃잎이 날아들었다.
붉은 매화꽃잎이 하늘하늘 허공을 부유하는 것에 문득 시선을 빼앗겼다. 코끝에 느껴지는 공기가 좀 전보다 차가워졌다.
법진의 반경 안에 있는 이들만 보고 느낄 수 있는 정경이었다. 왜냐하면 이 체현[體現]은 법진의 영역 안으로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체현[體現]’.
‘체현’, 그 말뜻 그대로, 지금 눈앞의 모든 것은 내 머릿속 이미지를 바탕으로 시현된 것이다. 이 모든 건 허깨비에 지나지 않는 허상이다.
그래, 실제론 그렇지만, 시전자인 내가 이 법진 안에 있는 한 말이 달라진다. 실재하지 않는 허상이 실체화되기 때문이다.
나는 그 모든 형상화된 것을 바라보았다.
허상이지만 실재하고, 착각에 불과하지만 어쨌건 실체한다.
말 그대로 머릿속 이미지를 체현시킨 것이다.
이 술법의 이름은 ‘체현술’이다. 머릿속 정신적인 것을 시현[示現]시키는 ‘진기술’의 일종이다.
나는 체현술이 발현되는 법진 위에서 시현되는 모든 것을 보았다.
지금 내 머릿속이 그리고 있는 풍경이다. 내가 가야 할 곳이 어디인지 머리 한편으론 이미 알고 있는 셈이었다. 내가 정해 놓은 길이었다.
나는 내가 그린 풍경 안에서 내가 가야 할 길을 보았다. 곧 연연이 내가 내민 손을 붙잡았다. 나는 그 손을 맞잡으며 법진 중심에서 바깥으로 느긋이 걸음을 옮겼다.
법진의 영역에서 벗어나는 순간 체현술로 시현된 모든 것이 단순한 허상으로 남았다.
나는 체현술 법진에서 나가는 것과 동시에 순간 이동술을 발현시켰다.
이제 가야 할 시간이었다.
* * *
다시 돌아온 곤륜산 기슭은 새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붉은 매화꽃도 희게 덮여 온통 새하얬다.
내리는 햇빛 아래 반짝이며 조금씩 녹고 있는 눈을 보았다. 다른 누군가의 흔적은 조금도 없었다. 내린 그 상태로 소복하게 쌓여 있었다.
나는 가는 숨을 내쉬며 엷게 미소 지었다.
간밤에 눈이 많이 왔는지 예상보다 더 많이 쌓여 있다. 이만하면 눈사람 만들기엔 충분하다.
곁눈으로 연연을 힐끔 보았다.
나와 손을 굳게 마주 잡고 있는 상태인 연연은 눈앞 풍경에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설산의 정경에서 좀처럼 눈을 떼지 못한다.
“연연.”
내가 부르자 연연이 퍼뜩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본다. 멱리 너울 틈새로 서로의 시선이 딱 마주쳤다. 나는 씩 웃어 보였다.
“눈사람 만들자.”
내가 말했다.
눈사람이 뭔지 모르는 연연이 고개를 옆으로 비스듬히 기울인다.
“이 사부가 알려 줄게.”
나는 그런 연연의 눈을 보며 말했다.
“응!”
연연이 목을 울려 씩씩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마주 고개를 까닥인 뒤 전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우선…, 눈덩이가 필요해. 큰 거 하나랑 작은 거 하나. 눈덩이는 눈을 굴려서 만드는 건데 최대한 동글동글하게 빚으면서 단단하게 뭉쳐야…, ……연연?”
갑자기 뿌리쳐진 손에 바로 옆을 돌아봤다.
연연은 멀리 가지 않고 근처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니 눈덩이를 뭉치고 있다. 두 손으로 꾹꾹 눌러 가며 열심히 빚는 모습에 허탈한 숨을 내쉬었다.
상세하게 설명해 주려 했더니만. 그새를 못 참고.
피식 웃으며 허리를 숙였다. 그 상태로 두 손으로 양 무릎을 짚은 채 연연을 굽어봤다. 멱리의 너울과 머리카락이 앞으로 흘러내린다. 번잡하게 느껴져, 한 손을 들어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연연, 아직 이 사부의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내 나무람에 연연이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본다.
“사부.”
내가 뭐라 더 말할 새도 없이 연연이 나를 부르며 방긋 웃었다. 그러곤 자신이 방금까지 단단하게 뭉치고 있던 눈덩이를 내밀었다.
내게 내밀어진 그 눈덩이는 동그랗게 잘 빚어져 있었다. 티끌 하나 묻지 않아 새하얬고, 어디 하나 찌그러진 구석이 없었다.
완벽한 구체인 눈덩이를 보고 있자니, 원멸 전 내가 처음으로 만들었던 눈사람이 생각난다.
내 첫 눈사람은 나 혼자 만들었었다. 여기저기 흙이 묻어 꼬질꼬질한 작은 눈사람이었다. 나는 그걸 스승님에게…, 그러니까, 오연에게 선물이라고 줬었다.
어린 마음에, 눈사람을 주면 오연이 좋아해 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오연은 선인이니까, 눈사람 정도는 녹지 않게 잘 보관해 줄 거라고, …소중하게 간직해 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다음 날 오연의 책상 위에는 젖은 손수건 한 장만이 놓여 있었다. 오연이 눈사람을 올려 뒀던 그 손수건이었다.
눈사람은 녹아 사라졌고, 젖은 손수건만이 남았다.
그때 처음으로 배신감을 느꼈다.
왜 눈사람을 녹게 그냥 방치해 뒀냐고 따져 묻고 싶었지만, 결국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눈사람의 행방이며 젖은 손수건 따위에 관심 없는 척, 모른 척했다. 내가 오연에게 가졌던 기대감을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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