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그 일이 있은 후로는 만든 눈사람을 혼자서만 보았다. 널따란 설산에 눈사람 하나와 그걸 보는 나 한 명. 언제까지고 그렇게 혼자일 것 같았다.
눈사람도, 나도.
나는 깊은숨을 내쉬며 남은 상념을 억지로 끊어냈다. 뒷맛이 씁쓸하다. 머릿속 한편에 남은 심상마저 떨쳐 낸 뒤 연연이 내민 눈덩이에 집중했다.
“응. 잘 빚었다.”
내 칭찬에 연연의 낯이 환해진다.
“더 크게 굴려서 다시 갖고 와. 크게 하나, 그리고 그보다 작게 하나. 총 두 개면 돼.”
눈덩이를 돌려주며 말했다.
“만들어서 가져오면 그때 이 사부가 눈사람 완성시키는 거 도와주마.”
“응!”
두 손으로 눈덩이를 받쳐 든 채 연연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나는 천천히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아 그런 연연과 눈높이를 맞췄다.
“…눈사람이 완성되면 녹지 않게 보존 술법도 걸어 줄게. 그러면 사라지지 않고…, 그 눈사람은 언제까지고 계속 여기 있을 거야.”
담담히 말하며 여상하게 웃으려 했다. 그런데 내가 입매를 휘어 미소 짓기 전에, 연연이 먼저 고개를 가로저었다.
거절이었다.
“왜?”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예상치 못한, 너무 뜻밖의 반응이었기 때문이다.
“왜… 싫은데?”
재차 물었다.
‘사부’란 말밖에 하지 못하는 연연은 입을 꾹 다문 채 묵묵부답이었다.
“…연연.”
연연을 부르며 두 손을 뻗었다. 손안에 잡히는 연연의 어깨는 작고 여렸다. 양어깨를 감싸 쥔 손에 준 힘을 뺐다. 그리고 연연의 눈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말을 해 줘.
말을 안 하면 나는 몰라. 왜 싫은 건데. 나는 너 좋으라고 말해 준 건데, 왜 고개를 가로젓는 거야.
입안 여린 살을 깨물며 속으로 뇌까렸다.
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말을 하지 않으면…….
이어지는 생각은 이런 상황이 초래된 근본적인 원인, ‘그 문제’에 닿았다.
연연은, …왜 말을 못 하는 거지? 대체 뭐가 문제이길래.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내가 뭔가 잘못한 건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 말이다.
연연을 만든 건 나였으니까.
나는 연연의 근원이 오연이라는 걸 알고 있다. 혹시 나도 모르는 새에 연연의 목을 틀어막은 건 아닐까. 말하지 못하게 말이다.
불쑥불쑥 치미는 오연의 환청에 진저리가 쳐져서, 그 트라우마 때문에 내가 연연에게-,
“……사부.”
그때 연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단 한 마디의 부름이 끝없이 쏟아지는 상념에서 날 건져 냈다. 나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 연연과 얼굴을 마주했다.
“……응.”
나직이 대답하며 연연의 얼굴에 서린 걱정을 읽었다. 순간 속으로 아차 했다.
“그게 있지, 연연.”
메마른 웃음을 지으며 성급히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곤 이번엔 좀 더 자연스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사부도…… 눈사람 만들까?”
내 말에 연연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얼굴의 걱정스런 빛이 아까보다 옅어졌다.
나는 연연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놔줬다. 느리게 다시 거둬진 손끝을 천천히 오므려 주먹 쥐었다. 주먹 쥔 손을 소매 안으로 감추며 자리에서 일어나 섰다.
‘……됐다. 이제 아무래도 좋아.’
속으로 생각하며 숨을 깊이 삼켰다.
연연에게 지금 무슨 말을 듣든, 들어 봐야 어차피 나는 이해하지 않을 거다.
내 마음에 벽이 쳐져 있는데, 연연에게 어떻게든 답을 들어 봐야…….
받아들이지 못할 말은 아예 안 듣는 것만 못하다.
그러니 이제 됐어.
젖은 손수건 따위야 이미 한참 전에 지난 일이잖아.
“…….”
생각을 이을수록 깊어지는 상념이 심기에 거슬린다. 나는 머릿속 회로를 애써 다른 쪽으로 틀었다. 지금 가장 급선무인 것을 생각하자.
……그래, 동동을 찾아봐야겠다.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러기로 결정 내렸다. 어쩌면 그새 괜찮은 대어 하나를 낚았을지도 모르고.
생각이 든 김에 각지로 흩어 보낸 동동들과 시야 공유를 해 봤다.
시야 공유란, 지금 동동들이 보고 있는 것을 가져와 나도 엿보는 것이다. 이 시야 공유는 일방적인 것으로, 동동들만이 내게 공유하고 반대로 그들은 내 시야를 엿보지 못한다.
수많은 시야가 빠르게 촤르륵 지나간다. 그중 검게 변한 시야가 보였다.
‘흠?’
설마 진짜로 그새 선인과 맞닥트린 개체가 있을 줄이야. 잡혀서 어디 갇힌 건가?
시야가 검어진 동동은 이 근방에 풀어놓은 개체들이었다. 때마침 이 근방이라.
어떻게 할지 계산은 금방 끝났다. 이왕이면 대어가 좋겠는데.
“……그럼 연연은 여기서 눈사람 만들고 있어.”
내 말에 연연이 나를 물끄러미 올려본다. ‘사부는?’이란 얼굴이다.
“나는…, 이 사부는 저기서 만들게.”
멀찍이 한 곳을 눈짓하며 말했다. 아무 곳이나 가리킨 건데, 연연은 내가 가리킨 방향을 열심히 눈여겨봤다.
곧 연연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나는 싱긋 웃어 보이며 내원근의 진기를 운기했다. 잠시 눈을 뗀 사이에 연연을 잃어버릴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안전장치를 하나 해 둘 생각이다.
연연이 워낙 여기저기 잘 돌아다녀야 말이지.
근처에 소담하게 핀 매화꽃을 향해 검지 끝을 까닥였다. 내 손가락이 구부러지는 것과 동시에 매화꽃이 꺾였다.
나는 그대로 손바닥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꺾인 매화꽃이 내 손 안으로 날아들었다. 허공섭물이다.
나는 날아든 매화꽃을 가볍게 낚아채 잡았다. 손에 쥔 매화꽃에 내 진기가 스미며 새겨진 법진은 무척 단순했다. 법진을 새길 대상의 크기가 작아서 최대한 간략화한 거였다.
‘추적술’이 새겨진 매화꽃을 연연의 귓등에 곱게 꽂아 줬다. 지난번에 받은 꽃의 답례 겸 미아방지용이다.
“빼지 마.”
내 말에 연연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나도 싱긋 웃으며 마주 고개를 끄덕였다.
추적술이 새겨진 매개체가 연연에게 있는 한, 어디서든 쉽게 연연을 찾을 수 있다. 단순히 찾는 것뿐만 아니라 순간 전이술을 이용해 내가 있는 곳으로 소환시킬 수도 있으니 정말 편리하다.
…그래도 뭐, 그 정도로 아주 안심이 되는 건 아니니 어서 다녀와야겠다.
나는 연연을 일별한 뒤 곧장 몸을 틀었다.
일단 연연의 눈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가서, 그다음에 동동이 있는 곳으로 순간 이동할 생각이었다. 그러니 우선 아까 가리켰던 저기 아무 곳이나 가야겠다.
한 손을 뒷짐 진 채 걸었다. 주변 지형을 대충 훑어보며 사각지대를 가늠해 보다가 흘낏 시선을 돌려 연연을 봤다. 연연은 혼자서 잘 놀고 있었다. 눈덩이 굴리기에 여념이 없어 보인다.
나는 그 모습을 확인한 뒤, 방금 찾아낸 사각지대로 몸을 숨겼다. 그러곤 곧장 순간 이동술을 발현시켰다.
* * *
시야가 가려진 동동이 위치한 곳은 곤륜산 인근 자락이었다.
나는 주변을 경계하며 기감을 펼쳤다. 곧 기감에 기척 하나가 걸려들었다. 저 앞이다.
얕은 비탈 너머, 커다란 바위 뒤 나무 근처. 은신하기에 충분한 공간이다. 새하얀 눈으로 뒤덮인 빽빽한 나무 사이를 노려보았다.
잎이 다 떨어졌음에도 나뭇가지가 사방으로 뻗쳐 있어서 울창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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