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나는 피식 웃으며 연연 쪽으로 좀 더 걸음을 틀었다. 눈덩이를 사이에 두고 연연의 작은 머리를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왠지 맥이 빠진다. 허한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아까까지만 해도 주먹에 주고 있던 힘이 빠지는 기분이다. 방금까지 가졌던 번민이 싱숭생숭하게 가라앉아 켜켜이 쌓인다.
나는 소리 없이 한 손을 들어 눈덩이 너머로 뻗었다. 머리 위로 내 손의 그림자가 지는데도 연연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여전히 내 다리만 열심히 훔쳐보는 게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듯하다.
간혹 몸을 들썩이며 엉덩이를 씰룩거리는 걸로 보아 어떤 타이밍을 재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내 손끝은 연연의 작은 머리에 향해진 채였다. 그대로 잠시 멈춰서 별 깊이 없는 고민을 심드렁히 했다.
원래는 허공의 습기를 응축해서 작은 눈꽃을 빚을 생각이었다. 그걸 연연의 정수리로 떨어트려서 역으로 깜짝 놀라게 하려 했는데…….
‘흠. 어쩔까.’
그때 연연이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켰다. 두 팔을 제 머리 높이까지 든 채 날 덮치는 일련의 광경을 지켜만 볼 뿐 피하진 않았다.
곧 연연이 내 다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날 올려다보며 배시시 웃는다. 그 해맑은 얼굴을 내려다보며 뻗었던 손을 도로 거두었다.
‘연아, 그날 너를 데려와 내 곁에 두겠다고 결정했을 때,’
문득 지난날 오연이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회귀, …아니, ‘원멸’ 술법이 발현되기 이전에 한 말인지, 아니면 그 이후에 한 말인지는 모르겠다. 사실 이젠 그 두 개가 내 가슴 안에서 뒤죽박죽 엉켜서, 그냥 전부 내가 지나온 길의 일부 같다.
…그리고 그 모든 게 아직도 이렇게나 생생하다.
내 지난날에 오연이 무정하지 않은 적은 없었다.
‘오늘 같은 날이 있을 줄 알았더라면 널 거두지 않았을 거다.’
오연과 나눴었던 대화가 연이어 떠오른다.
‘그 뱀 놈 때문에요? 그놈 때문에 저를…!’
‘진연! 우사는 네 사제다!’
벼락같은 노성에 순간 울컥 반발심이 들었다. 그래서 이를 악물며 말대꾸를 했다.
‘…그날 우사를 살리는 게 아니었어요.’
그 말은 진심이 아니었다. 그런데 돌아선 등 뒤 장지문에 누군가의 그림자가 비치고 있었다. 그 그림자는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지만, 나는 그게 누구인지 알았다.
우사였다.
‘더는 날 실망시키지 말거라.’
등 뒤로 오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위계를 지키고 사형제지간에 선을 두어, 스스로가 사형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 말을 등에 진 채 걸었다. 앞으로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그 말들이 가진 무게감이 내 어깨를 짓눌렀다. 그러다 종국에는 숨까지 틀어막았다.
나는 이를 악물며 문지방을 넘었고, 막 장지문을 지나치려는 찰나, 시야 가장자리로 한 신형을 보았다.
내 걸음은 자연스럽게 그리로 틀어졌다.
그 신형은 바로 우사였다.
진작 그냥 갔을 줄 알았는데. 왜 거기에 있었던 걸까.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만약 날 기다린 게 맞다면 대체 왜? 무슨 좋은 꼴을 보겠다고.
그 당시 나는 내 앞에 마주 선 우사를 그대로 스쳐 지나갔다. 내가 지나칠 때 우사의 시선이 내게 따라붙었단 걸 안다. 알았지만 모른 척했다. 고집스럽게 정면만 노려봤다.
나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는다고 온몸으로 말하고 싶었으니까. 왜냐하면 나는 네가 정말…….
속에서 이어지는 상념을 진저리 치며 억지로 끊어 냈다.
연연은 여전히 날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런 연연의 머리 위로 손을 얹었다. 몇 번 쓰다듬어 준 뒤 아래로 툭, 내렸다. 그리고 눈덩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른 한 손은 여전히 뒷짐 진 채였다.
“그럼 이제 한 번 만들어 볼까.”
깊이 숨을 내쉰 뒤 여상히 말했다.
“…연연. 내가 왜 눈덩이 두 개를 만들라고 했는지 아느냐? …눈‘사람’이니까, 사람 꼴은 갖춰야 해서 머리와 몸통이 하나씩은 있어야 하거든. 아주 간단한 이치지. 결국 몸통 위에 머리를 얹으면 끝. 그걸로 눈사람은 완성.”
말을 이으며 연연에게로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입가에는 아까와 달리 가는 미소를 걸쳤다.
“어때, 쉽지?”
내 말에 연연이 입술을 오리처럼 모은 채 고개를 끄덕인다. 연연은 집중할 때면 입술을 모으는 습관이 있다.
“좋아! 그럼.”
어깨를 으쓱여 보이곤 눈덩이를 향해 턱짓하며 말했다.
잘 알아들었으면 이제 그만 가서 만들란 뜻이었다. 내 말을 알아들은 연연이 잡고 있던 내 다리를 놓는다. 그러곤 눈덩이로 가는 대신 어느 한 곳을 손으로 가리켰다.
짧은 팔이 뻗어진 방향을 보았다. 그 손끝이 향한 곳은 거기였다. 아까 내가 연연에게 눈덩이를 따로 만들어 오겠다고 둘러댄 곳. 바로 그 방향이었다.
…아. 눈덩이. 깜박했다.
“음….”
미간을 찡그리며 침음을 흘리다가 연연을 슬쩍 봤다. 연연과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씩 웃었다. 동시에 낌새를 눈치챈 연연의 표정이 불퉁해진다.
“사부!”
뾰로통한 어투로 날 부르는 연연에 나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래, 나는 네 사부란 뜻이었다.
내 속뜻을 알아챈 연연은 더는 날 탓하지 못했다. 대신 온몸으로 토라진 티를 냈다.
혼자서 쌩하니 눈덩이로 가버리는 연연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연연은 삐져서 내게 눈길도 주지 않고 두 팔로 눈덩이를 번쩍 안아 들었다.
비교적 작은 눈덩이를 큰 눈덩이 위로 올리려는 듯한데, 키가 좀 부족하다. 혼자서는 벅찬 감이 있다.
나는 연연의 곁으로 슬금슬금 다가가 바로 뒤에 바투 붙어 섰다. 등에 내 다리가 닿자 연연이 눈덩이를 끌어안은 채 고개만 위로 젖혀 날 올려다본다. 서로 시선이 딱 마주쳤다. 연연이 내게 체중을 기대 왔다.
“같이 할까?”
내가 말했다. 날 올려다보는 연연의 눈매가 가늘어진다. 어떻게 할지 고민하는 모양인데, 내겐 그 고민을 단번에 끝내 버릴 수가 있다.
“같이 만들면 이건 ‘우리’ 눈사람이네.”
이어진 내 한 마디는 역시 정답이었다. 연연이 자못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연연은 ‘우리’란 단어를 좋아한다. ‘내 것’보다 ‘우리 것’이란 단어에 더 마음을 주는 편이기도 하고.
사실 그게 좀 뜻밖이었다. 그래서 ‘우리’라는 말에 애착을 갖는 연연을 볼 때면 기분이 오묘해진다. 연연의 근본이 오연이란 걸 알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오연은 홀로 우뚝 선 태산 같은 사람이다. 그만큼 그가 내게 드리운 그림자도 컸다. 태산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 태산 같은 그림자를 밤하늘 삼아 떠오른 빛이 있었다. 그건 태산이 자아 낸 그림자를 빌어 빛나는 것이었다. 그 빛 때문에 그림자의 어둠이 더 짙어 보여 좋아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내 생에 유일한 빛이라 마냥 싫어할 수도 없었다.
나를 비춰 주는 그 빛무리를 손으로 따라 그려 보니, 하나로 이어지는 형상은 …뱀이었다.
…전부 기만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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