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질 사형입니다-98화 (98/141)

<98화>

“그렇게 스스로 낮출 것 없습니다.”

너울 너머, 개아무개를 직시하며 말했다. 놓아줄 생각 없으니 괜한 헛수고하지 말란 뜻이었다.

“내가 이미 그쪽을 선생이라고 불렀으니까.”

이어지는 내 말에 개아무개의 표정이 굳는다. 그런 개아무개를 보며 다시 미소 지었다.

“그래서 선생에게 도움을 청할까 하는데.”

내 말에 개아무개가 눈을 굴린다. 내 뒤쪽의 연화도[徒]를 비롯한 주변 선사들을 보는 모양인데, 저들에게 무슨 도움이라도 청할 생각인가.

속으로 조소하며 개아무개를 주시했다.

초조하게 눈을 굴리던 개아무개는 곧 눈을 한 번 질끈 감았다가 떴다. 낯에 짙게 서린 건 낭패감과 체념이었다. 그리고 그와 상반되게 두 눈엔 어떤 각오가 서려 있었다.

머잖아 개아무개가 긴장한 낯으로 마른침을 한 번 삼키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인의[仁義]에 맞지 않는 것은 할 수 없습니다.”

…응?

나는 한쪽 눈썹을 위로 까닥 치켜올렸다가, 이내 코끝으로 비소했다.

웬 생뚱맞은 소리를 하는 거지?

분명 내가 ‘나는 선사’라고 말했을 텐데.

“…농이… 지나친 듯한데.”

일부러 대수롭잖게 맞받아쳤다. 그에 개아무개의 입매가 경직된다. 본인이 실수했단 자각이 이제야 들었나 보다.

개아무개가 황망히 입을 뻐금거리는 걸 참을성 있게 기다려 줬다.

“…살려만 주십시오.”

한참 후에 들려온 대답은 간곡한 청이었다. 그래도 눈치는 있는지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하하-”

나는 재밌는 농담을 들었단 듯 웃어넘기며 두 손을 전부 뒷짐 졌다. 안 그러면 저 걸개의 목을 꺾어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럼 갑시다, 선생.”

느긋이 걸음을 옮겨 개아무개의 곁을 스쳐 지나가며 말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속의 짜증을 다스렸다.

지금 내가 차려입은 옷도 백의이고, 스스로를 선사라고까지 소개했는데. …하여간, 겁에 질린 채로 눈치까지 없어 보이는 걸개가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내 뒤를 개아무개가 머뭇대며 쫓아왔다. 내 뒤나 쫓으라고 붙잡아 둔 게 아니어서 걸음을 약간 늦췄다. 그러자 개아무개의 기척이 눈에 띄게 멈칫거리더니 이내 슬금슬금 나와의 거리 폭을 좁힌다.

차마 내 옆에 나란히 설 순 없는지 반보 뒤에서 따라온다. 연연은 걸개에게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낙주의 시가지 안으로 들어설수록 점점 번화해지는 정경에 한 눈이 팔려 있었다.

확실히 번성한 곳이다.

거리의 전각 처마 아래에 걸려 있는 등불에는 제각기 다른 모양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고, 객잔과 주루 안쪽에선 비파 타는 소리와 흥청거림이 뒤섞여 들려왔다. 거리 바깥까지 식탁을 늘어놓은 반점은 만석이었다.

노점상과 만물상들이 제각기 사람들의 이목을 끌려고 앞다투어 목소리를 높인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손에는 시장에서 산 물건들이 들려 있었다. 다들 지금을 만끽하는 얼굴들이다.

거리 안쪽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점점 전각의 분위기가 고즈넉해진다. 가장 큰 변화는 소음이었다. 번잡한 소음이 점차 사그라지며, 고요함 속에서 높은 담들이 나타났다. 장원[墻垣]이다.

사위는 이제 푸르게 잠겨 있었다.

“저…, 대인, 어디까지 가시는 건지 여쭤봐도…….”

반보 뒤에서 개아무개가 물었다. 때마침 걸음을 멈추고 앞을 바라보았다. 그냥 내키는 대로 걸었을 뿐이었다. 정면에 떠올라 있는 달을 바라보다가, 그 아래 작은 연못을 가로지른 구름다리를 보았다.

그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저…, 대인…….”

다시 나를 부르는 개아무개에 나는 가는 숨을 내쉬며 걸음을 돌렸다.

달과 구름다리를 등지고 선 채 개아무개를 마주 봤다. 내 시선을 피하는 개아무개의 목울대가 꿀꺽 울린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입을 뗐다.

“선생께선 내가 편하지 않은가 봅니다?”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띤 채 말했다.

“앞으로 볼 날이 길어질지도 모르는데.”

“제, 제가 무엇을 하면 됩니까요?”

개아무개가 황급히 내 말을 가로막으며 후다닥 제 말을 한다. 거의 말을 토해 내는 수준이었다. 나와 길게 보고 싶지 않단 무언의 의지가 느껴졌다. 나는 차게 비소했다.

“글쎄… 선생은 내게 무엇을 해 줄 수 있습니까?”

“…혹 가고 싶은 곳이나 보고 싶은 것이 있다면 소인이 길잡이가 되어드릴 수 있습니다요. 가진 게 이 비루한 몸뚱이 하나뿐인지라, 낙주를 이리저리 오가며 웬만한 길은 다 꿰찼습니다.”

제 쓸모를 길잡이에 한하는 개아무개에 나는 어깨를 가벼이 으쓱여 보였다. 쓸모를 논할 주도권은 내게 있단 걸 굳이 말할 필요는 없었으니 말이다.

“좋습니다.”

흔쾌히 답하며 곁의 연연을 봤다.

“연연, 가고 싶은 곳이나 보고 싶은 것 있어?”

내 물음에 연연이 팔을 들어 우리가 지나온 길을 가리킨다. 연연의 손끝이 가리킨 곳엔 저 멀리, 등불의 환한 빛이 아득하게 고여 있었다. 야시장의 불빛이다.

여기까지 오며 그냥 지나쳐 온 야시장을 다시 한번 더 구경하고 싶은 모양이다.

“좋아.”

다시 흔쾌히 답하며 나는 개아무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덩달아 연연이 가리킨 곳을 본 개아무개가 혼자 고개를 주억거리며 나를 힐끔 일별한다.

“그러면…, 다시 야시장으로 안내해 드릴까요, 대인?”

“음.”

나는 가볍게 목을 울려 호응했다.

“내 제자가 야시장을 구경하고 싶어 하는 듯하니, 이왕이면 구석구석 제대로 둘러보는 게 좋겠습니다.”

이어 말하며 앞을 향해 턱짓했다.

“그럼 선생께서 안내를 해 주시지요.”

개아무개는 바로 반응하지 않고 나와 연연을 빠르게 번갈아 보더니 묘하게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이제 보니 아주 훌륭하신 사제지간, 그러니까 이렇게 자애로운 스승을 만나기가 쉽지 않을 터인데, 대인을 만난 게 저 아이에게 아주 커다란 홍복이자 최고의 기연일 것입니다. 헤헤…….”

“…….”

나를 만난 게 아주 커다란 홍복이자 최고의 기연일 거라고?

표정이 저절로 싸늘하게 굳는 게 느껴진다.

“…그럼, 선생도 그런가?”

미묘하게 날 선 어투로 물었다.

멱리의 너울에 가려졌어도 내 언짢음이 느껴졌는지 개아무개가 다시 마른침을 삼킨다.

자기가 무슨 지뢰를 밟았는지 모르겠단 억울한 면상이다. 그 면상을 보고 있자니, 개아무개를 상대하는 것 자체가 죄다, 그래, 죄다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냥 관두자.

깊이 숨을 삼키며 기세를 누그러트렸다. 그걸 기민하게 눈치챈 개아무개가 급히 몸을 돌린다.

“그, 그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요, 대인!”

개아무개를 따라 다시 걸음을 옮기려다가, 문득 비스듬히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봤다. 등 뒤의 작은 연못을 가로지르고 있는 구름다리 위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기척 없이 선 이는 구름다리 한가운데서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내게 등을 진 채였다.

낯익은 뒷모습에서 나는 눈을 떼지 못했다.

달빛이 자아낸 신기루란 걸 알면서도 그랬다. 달과 물에는 음기가 서려 있고, 이 두 개가 맞닿으면 때때로 보는 이를 현혹시키는 허상을 만들기도 한다.

‘……우사.’

속으로 그 이름을 나직이 불러 보았다. 그러자 뒤돌아서 있던 구름다리 위의 상대가 때마침 이쪽으로 몸을 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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