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마치 내 부름에 응하듯 나를 돌아보는 그의 모습이 천천히 일변한다. 백의는 흑의로 변하고, 허리까지 내려오는 흑발은 단정하게 반 묶음 해 은백색 머리 장식으로 고정했다. 내 쪽으로 비스듬히 돌린 얼굴은 면사로 가려져 있었다.
‘내 이름은 ‘심마’라 하오…!’
지난날 들었던 그 외침이 머릿속에서 먹먹하게 울린다.
나는 구름다리 위의 허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부?”
곁의 연연이 내 소맷자락을 잡고 흔들며 나를 부른다. 그제야 그 허상에서 천천히 시선을 뗐다. 한 번의 일별로 끝이었다. 다신 구름다리를 돌아보지 않았다.
연연의 걸음 속도에 발맞춰 주며 개아무개의 뒤를 쫓았다.
* * *
개아무개는 왔던 길을 되짚어갈 뿐 아니라 여기저기로 우리를 안내했다. 이 안내에 온 성심을 다하겠단 발악이 아주 잘 보였다.
여러 갈래로 뻗어진 골목길과 구불구불 이어진 계단들. 일렁이는 홍등의 불빛을 따라잡았다 생각한 순간, 시야가 확 트이며 수십 개의 등불이 줄지어 나타났다.
희미하게 들리던 말소리가 해일처럼 끼쳐 오며 그 사이로 무언가 지글지글 굽는 소리가 뒤섞였다.
길을 따라 세워진 노점들과 어디선가 자욱하게 풍겨 오는 연기와 음식 냄새. 사방에 어수선하게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서 간간이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저 안쪽, 대로의 중심부에는 분수대가 있었다. 솟구쳐 오르는 물줄기가 그 주위를 에두른 돌사자상 위로 떨어진다.
잡화점부터 시작해 포목점, 요리점, 그리고 향낭을 파는 지게꾼까지. 대부분 이 야시장의 흥에 겨워 하며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한가한 곳을 찾기가 더 어려운 지경이었다.
연연은 가고 싶은 곳이 참 많은 모양이다. 야시장이 열리고 있는 이 거리에 들어선 순간부터 자꾸만 어디론가 달려가려 한다. 지금도 이곳저곳 열심히 기웃거리고 있다.
“연연. 보고 싶은 것이 있어?”
줄지어 선 노점들을 눈으로 쭉 훑으며 물었다. 그러자 연연이 기다렸단 듯이 손끝으로 여기저기를 바쁘게 가리킨다. 나는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래. 전부 가 보자.”
내가 대답하기 무섭게 연연이 앞서 걷는다. 마음이 급해 보이는 그 뒷모습을 향해 손을 겨누었다.
손바닥을 위로 한 채 펼치고선, 그 위로 가볍게 숨을 불었다.
후-
내가 내쉰 숨결에 멱리의 너울이 하늘거리고 이어 내 손바닥 위로 스쳐 지나간 순간, 숨결이 ‘결정[結晶]’으로 맺힌다.
결정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나와 가늘게 이어진 것을 느끼며 가는 숨을 내쉬었다.
‘결정[結晶]’이란, 기운을 응축시킨 것으로 그 기운의 주인은 어디서든 결정의 위치를 대략 알 수 있다. 그래서 미아방지용으로도 나름 안성맞춤이다.
본래는 곤륜산 때처럼 꽃과 같은 매개체를 쓰려 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쓸 만한 것이 마땅치가 않으니 별수 없다. 결정을 만드는 수고로움을 감수하는 수밖에.
어쩔 수 없어 선택한 차선책인 만큼 탐탁지 않은 점이 있다. 기운을 응축시킨 것인 만큼, 저 결정에 내 진기가 깃들어 있다는 점이 그렇다.
아주 미량이라 저 정도의 진기를 눈치챌 만한 선사는 웬만해선 없겠지만, 문제는 다른 것들이 이끌린다는 거다. 특히 요, 마, 귀가 그렇다.
진기가 미약할수록 온갖 잡다한 요괴들이 꼬인다. 그 반대로 나만큼이나 고강한 귀족(귀신)이라면 주위에 얼씬도 않는 거고. 내게 먹혀 죽고 싶진 않을 테니 말이다.
진기의 바탕은 내원근이고, 내원근이 왜소할수록 진기 또한 미약하다. 이는 다시 말하자면 어리고 힘이 약한 개체, 즉 내원근이 덜 자리 잡았을수록 진기 또한 미약하단 뜻이 된다.
그렇기에 미약한 진기는 요, 마, 귀들을 끈다.
제 본원의 그릇이 감당만 한다면야, 진기는 죽이고 빼앗아 흡수할 수 있는 거니까. 지금의 내가 오연의 진기를 흡수해 귀족(귀신)이 된 것처럼 말이다.
진기를 흡수하면 흡수할수록 가진 술법의 힘은 강대해진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강대해지는 건 좋지 않다. 천라지망의 은원에 더욱 얽매이게 되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치러야 할 보속도 커진다.
결국 세상에 아주 공짜는 없다는 거다. 어떻게든 값을 치러야 한다.
아무튼 지금 저 결정[結晶]이 당초 내 목적-미아방지용-과 달리 연연을 위험에 빠트릴 수도 있단 거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 때문에 저 결정[結晶]을 도로 물릴 생각은 들지 않는다. 어떤 위험이든, 이런 번잡한 곳에서 애를 잃어버리는 것보단 낫다.
설령 정말 위험에 빠진다 해도, …내가 반드시 지켜 줄 거니까.
내가 날려 보낸 결정이 연연의 옷자락에 붙은 것을 보며 두 손을 뒤로 돌려 느슨히 뒷짐 졌다.
태생적으로 기에 예민한 것들이 있으니 기감은 열어 두지 않고 연연에게 붙여 둔 결정에만 집중했다. 그러면서 눈으론 주변을 대충 훑어봤다. 곁을 스쳐 지나가는 이들 중 선사로 보이는 이들은 하나같이 허리춤에 검을 패용하고 있었다.
‘검’이라.
선사로 위장한 상태이니 대놓고 진기를 쓸 순 없는 노릇이다.
…검이 하나 있으면 좋겠는데.
이미 흑망검이 있긴 하지만, 그건 내 귀기와 진기가 검의 형상을 띤 것에 가까웠다. 그러니 정체를 숨기기로 한 상황에서 흑망검을 쓸 순 없다.
마침 난 법술과 술법 전부 쓸 수 있고, 몸 안에 선기가 잔존해 있다. 덕분에 선검을 쓰기에도 무리가 없을 테고, 예전처럼 선검으로 이기어검을 하는 것도 가능하겠지.
“검에 관심이 있다면 이 근방에 무기점과 대장간이 있습니다요. 그리로 안내를 해 드릴까요, 대인?”
곁에서 개아무개가 말을 붙여 온다.
내가 너무 검에 시선을 빼앗겼나 보다. 어느새 멈춰서 있었단 것도 몰랐다. 연연은 저만치서 노점의 좌판을 구경하고 있다. 나를 살피는 개아무개의 시선을 무시하며 연연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그보다 현 낙주에 대한 이야기가 좋겠습니다.”
개아무개에게 조금도 시선을 주지 않고 연연에게 향하며 말했다.
“하이고-, 소인은 한낱 거지일 뿐이라 아는 것이 미천하여,”
“호사가들 사이에서 떠도는 뜬소문도 좋고,”
길어지려는 개아무개의 엄살을 매정히 끊으며 말했다. 이제 연연이 바로 저 앞에 있었다.
“은근한 야담도 좋습니다.”
말을 이으며 걸음을 내디뎠다.
“…그렇다면야…, 소문이라면 여기저기 오가며 꿰고 있습니다요. 이리 제 사정도 신경 써 주시다니 대인께선 정말 아량이 넓으시고-,”
나보다 반보 뒤에서 부지런히 따라오며 개아무개가 주절주절 말을 잇는다.
개아무개가 덧붙이는 사족을 흘려들으며 막 연연을 부르려는 찰나, 누군가와 어깨가 스쳤다.
아마 맞은편에서 오던 이였을 거다. 서로 향하는 방향이 정반대였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서로 엇갈리며 한 번 스쳤던 거겠지.
반사적으로 고개를 흘끗 돌려 곁눈으로 뒤를 보았다. 두 명의 선사였다. 마치 자석에 이끌리는 것처럼 몸이 조금 더 뒤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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