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그런가.”
답하며 연연에게 눈짓했다.
“연연. 감사 인사는?”
“아이고-, 그럴 것 없습니다, 나리. 이미 많이 사 주신 것도 있고, …그저 다음에 다시 한번 더 찾아 주신다면 그걸로도 아주, 아주 감사합니다.”
좌판 주인의 말을 고개를 주억거리며 들은 뒤,
“연연.”
다시 한 차례 더 연연을 불렀다.
내 단호한 부름에 극구 사양하던 좌판 주인은 입을 다물고, 연연은 그런 좌판 주인에게 꾸벅 감사 인사를 했다.
“그럼 주인장, 많이 파시오.”
나도 인사를 남긴 뒤 연연과 함께 걸음을 돌렸다.
“예, 예! 감사합니다, 나리!”
등 뒤로 좌판 주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나는 걸음 속도를 조금씩 늦췄다. 내 옆에서 쫓아오고 있는 연연의 품 안에 짐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야시장의 등불은 아직 휘황하지만, 이래서야 더 이상의 구경은 어렵겠다.
전이술을 써서 장난감들을 다른 곳으로 보내는 걸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다. 진기를 내공으로 눈속임해 술법을 법술인 척 쓰는 것쯤이야, 약간의 수고만 들이면 얼마든지 가능하니까.
…그런데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연연이 장난감들에서 눈을 못 떼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난감이 마음에 드는지 상기된 얼굴로 뿌듯하게 웃고 있다.
“야시장 구경은 여기까지로 하고.”
완전히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부지런히 내 옆을 따라오고 있던 개아무개가 후다닥 앞으로 와 나를 본다. 반색하는 기색이다. 그런 개아무개를 마주 보며 포권을 취했다.
“지금까지 안내 고마웠습니다, 선생.”
내 확답에 개아무개의 입이 천천히 벌어진다. 아주 함박웃음이다. 황급히 마주 포권을 취하는 자세에도 기꺼움이 서려 있다.
나는 입가에 미소를 띤 채 개아무개가 하는 양을 지켜봤다.
“하이고-, 아닙니다. 소인이 대인께 도움이 되었다면, 그것만으로도 소인에겐 크나큰…….”
고개까지 주억거리며 듣고 있는데 개아무개가 말을 하다 만다.
급격히 흐려진 말끝과 함께 개아무개의 웃는 낯짝이 어색해진다. 본능적으로 뭔가 불길한 직감이라도 든 건가. 그렇다면 썩 쓸 만한 감이다. 이미 한 박자 늦었지만.
“크나큰?”
개아무개가 흐린 말끝을 되짚으며 고개를 옆으로 비스듬히 기울였다. 개아무개의 낯빛이 다시 안 좋아진다. 아까의 함박웃음은 찾아볼 수 없었다.
“…대인, 전 정말 아무 쓸모도 없는 걸개(거지)일 뿐입니다요.”
이제는 하소연을 시작한 개아무개가 간절한 눈빛을 보낸다. 나는 그 눈빛을 아무 거리낌 없이 마주하며 말문을 열었다.
“그럼,”
일부러 말꼬리를 늘리며 허리를 앞으로 살짝 숙여 좀 더 가까이 대면[對面]했다.
“길 안내의 답례로 내가 선생의 쓸모를 찾아 주겠습니다.”
뒷말을 이으며 허리를 도로 폈다.
“예?”
곧장 개아무개의 기겁이 뒤따른다. 바로 양손을 저어 보이는 게 퍽 다급해 보인다.
“쓸모, 쓸모라니…! 하이고- 대인! 소인은,”
“하하하-”
개아무개의 항변을 웃음소리로 막아 버렸다. 내 웃음소리에 개아무개가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뻐금거린다. 그 모습을 보며 웃는 걸 멈췄다.
한순간 웃음소리가 뚝 끊겼다. 묘한 적막이 그 빈자리를 채웠다. 개아무개는 이제 말을 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
“선생.”
웃음기가 남지 않은 목소리로 개아무개를 불렀다.
“…예, 대인.”
“선생은 나를 겁내 하면서도 정말로 겁먹지는 않아. 왜 그런지 알아? 지금 선생 앞의 나는 선사이니까. …이 봐, 걸개 선생. 지금 두 개의 길이 있어.”
완전히 얼어 버린 개아무개를 향해 두 손가락을 펼쳐 보였다.
“첫 번째, 내가 선생의 쓸모를 찾는 것.”
두 손가락 중 하나를 접었다.
“두 번째, 선생이 내게 본인의 쓸모를 보여 주는 것.”
남은 손가락 하나도 마저 접었다.
“선생이 보기엔 어떤 게 더 좋을지? 내, 선생에게 선택할 기회를 주겠습니다.”
“…….”
개아무개는 말이 없었다.
초조하게 눈을 굴리더니 마른침을 한 번 삼키곤 가까스로 입을 연다.
그사이 나는 연연의 장난감을 나눠 들어줬다. 힘들어하는 기색은 없었지만, 턱 바로 밑까지 쌓아져 있는 게 벅찬 감이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진짜…, 대인의 진짜 정체가 무엇입니까?”
한껏 진중해진 어투로 개아무개가 물었다.
“선사입니다.”
딱 잘라 말했다.
“소인도 걸개입니다. 하지만…, 대인께선 소인을 단순히 걸개로만 보지 않으시지요. 저 또한 대인이 여타 다른 선사와… 같아 보이지가 않습니다.”
“…그럼 선생 눈에 내가 무엇 같습니까?”
짧은 침묵 끝에 내가 물었다. 나를 중심으로 흐르는 기류가 미묘하게 무거워진다.
“함부로 유추해 괜한 화를 사고 싶진 않습니다요.”
내 시선에 위축되는지 개아무개의 어깨가 움츠러든다.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서로 숨기지 않는 걸로 하면.”
“서로……?”
내 제안에 개아무개가 조금 혹한다. 그 낯짝을 주시하며 나는 입을 열었다.
“선생이 누구인지 내게 알려 준다면, 나도… 알려 주겠습니다.”
긴장감을 높이기 위해 일부러 중간에 말을 끌었다. 은근한 목소리는 듣기에 짐짓 유쾌했다.
“소인은 …개방의 ‘무본’이라 하오.”
길지 않은 고민 끝에 개아무개가 말했다. 말투도 아까와 달라졌다.
“무본?”
“그게 지금 소인의 이름이외다. 없을 무[無]에 근본 본[本]. 대인도 알다시피 여긴 낙주라 개방의 분파가 없어서 말이오. 그래서 겸사겸사 의미를 살려 그렇게 되었소이다.”
말하면서 자신의 허리춤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내게만 슬쩍 보여 준 그것은 개방의 일원임을 상징하는 매듭이었다. 개아무개, 무본의 매듭은 총 세 개였는데, 분타주 급이란 뜻이다.
분타주 급 정도면 가명 여러 개를 가지고 있을 법하다.
개방 걸개들은 처한 상황과 임무에 따라 여러 이름을 가졌으니 말이다.
내가 확인하기 무섭게 매듭을 도로 허리춤 안으로 집어넣으며 무본이 헛기침을 했다.
“험험-”
그러면서 내게 슬쩍 눈치를 주는 게, 이젠 내 차례라고 아주 노골적으로 말하고 있다. 나는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리며 비소했다.
내가 누구인지 대답해 주는 거야 어렵지 않다. 어차피 처음부터 진실을 말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으니까.
“나는.”
가볍게 말문을 열었다가 시야 가장자리로 들어온 품 안의 장난감을 봤다. 장난감을 잠시 일별한 뒤, 다시 시선을 들어 앞의 무본을 보았다.
“……나는 ‘진연’입니다. 곤륜에서 온 선사이고, 현재 강호를 종횡 중인 것은… 속세를 아주 등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게 다요?”
“선생이 현재의 자신에 대해 말한 것과 마찬가지로 나도 지금의 나에 대해 말한 것뿐입니다.”
“하지만…, 그러면 처음의 그 소개와 다를 것이,”
“나는 처음부터 말했으니까. 곤륜에서 온 선사 진연이라고.”
내 말에 무본이 찔끔한 얼굴로 억울해했다.
“그건…, 그래도! 대인께서 여타 선사와 같아 보이지 않는 이유라도 알려 주셔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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