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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질 사형입니다-103화 (103/141)

<103화>

하늘을 가릴 듯이 사방으로 뻗은 나뭇가지는 그 자체로도 우거졌다. 이제 막 새순이 돋은 나뭇가지 사이로 산새가 푸드덕대며 날아가는 소리가 들렸고, 그 소리는 밤의 숲 특유의 스산함을 더 깊게 만들었다.

문득 시선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아까 연못의 구름다리 위에서 보았던 달이 여기에도 떠올라 있었다.

달을 바라보며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그건 굽이치는 강물 소리였다. 소란한 한밤의 숲속 소음 틈새로 희미하게 섞여 들려오고 있었다.

나는 무본의 걸음을 수월히 따라잡으며 옆으론 연연을 챙겼다. 장난감은 전부 내 소매 안의 아공간에 집어넣었다.

앞으로 내딛는 걸음에 솔방울이 차이고, 발아래에는 잡초와 나무껍질 따위가 밟혔다.

경공을 쓰지 않는 건 무본의 뜻이었다. 기[氣]를 이용해 경공을 밟으면 괜한 이목을 끌 수 있단 거였다.

안가[安家]의 존재를 들키게 되면 문제가 생길 수 있다며 무본은 걸어가길 원했고, 그에 나는 기꺼이 고개를 끄덕여 줬다.

얼마 안 있어서 앞장서 걷던 무본이 멈춰 섰다. 협곡을 건너고 수유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나는 눈이 좋은 편이라, 주변 지형에 교묘히 가려져 있는 공터와 초옥[草屋]의 존재를 일찌감치 눈치채고 있었다.

드디어 도착한 거다.

“여기입니다요.”

옆으로 완전히 비켜서며 무본이 말했다.

나는 기암괴석과 초목들 사이, 작은 공터에 세워진 초옥[草屋]을 바라보았다. 척 보기에도 소탈하고 소박했다.

초옥의 뒤로는 대나무 숲이 펼쳐져 있었고 근처에는 실개울이 흐르고 있었다.

“…과연.”

한 마디로 평하며 초옥으로 걸어갔다.

낡아서 반쯤 허물어진 울타리가 에워싸고 있는 초옥은 그 입구가 트여 있었다. 제일 앞장서 안으로 들어가자, 제멋대로 자란 잡초들이 보였다.

성기게 자란 잡초들은 마당을 거의 뒤덮은 수준이었다. 그나마 문까지 이어진 디딤돌이 우연찮게 누름돌 역할을 하고 있어, 그곳만 잡초가 자라지 못했다.

나는 마치 개울을 건너듯이 징검돌만 밟으며 건너뛰었다. 연연도 나를 따라 뒤에서 겅중겅중 뛰어오는 게 느껴졌다.

연연이 뒤에 따라붙은 걸 확인한 뒤 초옥 문을 열었다. 덜컹거리며 열린 문 틈새로 흙냄새와 묵은 먼지 냄새가 훅 끼쳐 왔다. 오래된 초가집 특유의 퀴퀴한 냄새였다.

설핏 인상을 쓰며 바로 팔을 들어 소매로 코와 입을 가렸다. 그리고 초옥에서 스멀스멀 흘러나오는 싸늘한 냉기를 맞다가, 불현듯 ‘사[辭]학당’을 떠올렸다.

‘사[辭]학당’.

스승과 사제가 있었던 내 소년 시절의 대부분은 그 초가[草家] 학당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우사와 절연한 뒤 나는 직접 손을 써 사[辭]학당을 부숴 버렸다.

사[辭]학당을 부순 건 원멸 전의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분명 내게 일어났던 일이었다.

내 손으로 사[辭]학당을 부수던 그때, 나는 그 초가[草家] 학당에서 이와 비슷한 냉기를 느꼈다. 오연의 천병을 이유로 너무 오래 비워뒀던 거다.

…그래도 여긴 최소한의 관리는 했는지 짚이 썩는 냄새는 나지 않네.

속으로 중얼거리며 어둑한 초옥 내부를 응시했다.

등은 고사하고 초 하나 켜 있지 않은 초옥 안은 달빛만이 흐리게 비쳐 들고 있었다. 그래서 무언가를 보려면 달빛에 의지해야 할 정도로 어두컴컴했다. 하지만 이 정도는 나와 연연에겐 아무 문제도 아니었다. 둘 다 눈이 밝을뿐더러, 애초에 범인[凡人]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튼 과연, 무본에게서 듣던 대로다.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은 빈집이다.

“하룻밤 머물기엔 나쁘지 않군요.”

휙 뒤돌아서며 말했다. 눈치를 보며 우리와 슬금슬금 거리를 벌리고 있던 무본이 곧바로 차렷 자세를 취한다.

하여간에, 눈에 뻔히 보이는 짓거리다.

낡은 초옥에서의 하룻밤으로 신세를 지워서, 그걸로 내뺄 셈이라면 정말이지 헛된 계산속인 거다. 이 정도론 제 목숨값을 다 못 치를뿐더러, 나는 무본의 쓸모를 여기까지로 한정 지을 생각이 없다.

한쪽 입매를 비틀어 비소를 지으며 나는 무본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선생에게 신세를 졌으니, 이 빚은 내일 직접 갚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입꼬리도 마저 매끄럽게 휘어 올려 짙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자연스럽게 내일을 기약한 거다.

내 말에 엉거주춤 마주 포권을 취했던 무본의 낯이 파리해졌다. 물벼락이라도 맞은 듯한 면상이었다.

“아닙니다, 대인!”

황급히 고개를 내저으며 무본이 말했다. 아주 경기라도 일으킬 기세다.

“갚으실 필요 없습니다요. 이건 그저 소인이 대인께 보여 드리는 작은 성의…,”

“아? 선생이 내게 성의를 베풀 만한 일이 있었던가? 오히려 선생께 수고를 끼친 내가 성의를 보이는 게 맞지요. 안 그렇습니까? 선생.”

“수, 수고라니 가당치도 않은! 그저 소인이 좋아서 한 일입니다요. 그러니까, 성의가 아니라, 그, 뭐시냐, 그래, 우호! 우호의 표시였습니다요, 대인!”

다급해지니 개아무개 때의 어투가 고스란히 나온다. 나는 짐짓 너그러운 척 고개를 주억이며 입을 열었다.

“그런가?”

친절한 목소리로 되물어 주자,

“그렇습니다요.”

개아무개, 무본이 바로 호응해 온다. 그에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그럼 내일을 기약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선생.”

“……예?”

내 말에 무본이 황당하단 낯짝으로 되물어 왔다. 대화의 흐름을 도통 따라가지 못하겠단 듯 흔들리는 동공은 어딘가 황망했으며, 표정은 맹했다.

더 마주 보고 있다간 저 멍청함이 나한테까지 옮겨질 것 같은 낯짝이었다.

나는 두 손을 느슨히 뒷짐 진 채 무본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 느긋이 걸음을 틀어 아예 비스듬히 돌아섰다.

“무엇이든 받은 게 있다면 되갚아 주는 것. 그것이 천라지망의 마땅한 이치일 터이니. 그렇다면 서로 간에 빚은 남기지 않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는데. 안 그렇습니까, 선생.”

“…하, 하지만 소인은 대인께 빚을 진 기억이 없는데……. 하이고-, 저…, 대인, 소인이 보기엔 이대로도 충분히! 서로 간에 아무 빚도 없으니 어느 때고 헤어져도 아주 무방하고 괜찮을,”

“그리고 나는 제자를 둔 입장이라.”

무본의 말을 도중에 자르며 내가 말했다. 들어 봐야 지지부진한 소리일 테고, 내 안엔 살심만 쌓일 테니 애초부터 안 듣는 게 낫다.

“선생이 우호를 내보였으니, 이제 내가 스승으로서 본[本]을 보여야겠습니다.”

그새 내 곁에 달라붙은 연연을 흘끗 눈짓하며 말했다.

“…안 그래도 괜찮은데…….”

아직 미련이 남았는지 무본이 미적대며 꿍얼거렸다. 꼭 뒷말을 덧붙이는 그 작태가 거슬린다. 소매 아래 손끝을 까닥까닥 꺾다가, 가벼운 심호흡과 함께 손에서 힘을 뺐다.

무본에겐 아직 쓸모가 남아 있다. 게다가 곁에 연연이 있는데 섣불리 손을 쓸 순 없는 노릇이다.

“…괜찮다 하지 말고 내 체면도 생각해 주시지요, 선생.”

겉으론 여전히 매끄러운 목소리로 무본에게 최후의 통첩을 날렸다.

내 기세에서 ‘더는 성가시게 굴지 말란’ 말뜻을 읽었는지, 무본이 이제야 눈치껏 입을 다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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