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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질 사형입니다-104화 (104/141)

<104화>

“그럼 내일 정오에 여기서 다시 보는 걸로.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선생.”

그 말을 끝으로 무본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손을 휘휘 내저었다.

“……예, 알겠소이다.”

곧 축 처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무본에게서 완전히 등을 진 것과 동시에 그의 기척이 훌쩍 멀어졌다.

무본을 보낸 뒤 나는 연연과 함께 초옥[草屋]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대로 등 뒤의 문을 닫으려는데 덜컹거리며 잘 닫히지 않는다. 다시 살펴보니 문설주와 아귀가 맞질 않았다. 긴 세월 동안 풍파를 맞으며 삭은 탓이었다.

결국 문을 통째로 빼내 옆의 벽에 기대 세운 뒤 안으로 들어갔다.

어둠에 잠긴 내부는 달빛만이 흐리게 고여 있었다.

제일 먼저 보인 건 우측의 작은 주방이었다. 안방은 주방을 지나서 안쪽에 있었다.

닫혀 있는 겹문을 열어젖히자 드러난 안방은 병풍과 같은 가림막으로 구획이 나뉘어져 있었다. 개인 공간과 생활 공간을 나누어 쓰임새를 구분 짓기 위함 같았다.

안을 채운 가구들을 둘러봤다. 가림막 안쪽엔 침상의 한 종류인 발보상[拔步床] 하나와 탑상 하나가 있었다.

탑상 위의 책상에 놓인 빈 화병에 잠시 시선을 줬다가 이내 가림막으로 다시 눈을 돌렸다. 구획된 것과 비치된 가구들로 보아, 여기까지가 사적 공간인 것 같았다.

가림막 바깥쪽에는 장[欌]과 걸상이 있었다.

걸상은 탁자와 의자 두 개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 외 값비싼 집기들도 눈에 띄었다.

소박한 초옥의 외관과는 어울리지 않는 고급품들이었다. 비록 지금은 대부분이 뿌연 먼지로 뒤덮여 있는 데다가 칠이 벗겨진 부분도 있었지만 말이다.

먼지와 햇빛에 바랜 세간들을 대충 살핀 뒤 연연을 보았다.

“연연. 오늘 밤은 여기서 보낼 거야.”

“응.”

내 말에 연연이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대답해 왔다. 그리고 다시 여기저기 바쁘게 돌아다닌다.

궁금한 게 많은 모양이다.

서랍을 여닫아 보는 연연을 잠시 지켜보다가 말없이 탑상 쪽으로 몸을 돌렸다.

초옥 구경 삼매경에 빠진 연연은 잠시 혼자 내버려 둘 심산이었다. 구경이 다 끝나면 알아서 곁으로 오겠지.

홀로 탑상에 올라 잠시 앞의 책상을 보았다가, 이내 두 손으로 옷자락을 펼치며 자리에 앉았다. 크게 펄럭인 옷자락이 원형으로 넓게 펼쳐졌다.

처음엔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가 이윽고 한쪽 무릎을 세우며 등받이에 느슨히 기댔다.

나는 한결 편안해진 자세로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시야가 어두워지니 머리 한편에 묻어 두었던 심상이 떠올랐다.

…그건 심마였다.

사전적인 의미인 ‘심마[心魔]’이기도 하고, …누군가의 이름이기도 했다.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트인 시야에 들어오는 초옥의 정경을 잠시 바라보다가, 곧 곁으로 눈길을 줬다.

구경은 이제 다 끝났는지 연연이 내가 앉은 탑상에 기대앉아 있었다.

비스듬히 몸을 돌려 날 보고 있는 연연의 입가에 차츰 웃음이 번진다. 시선이 마주친 게 퍽 기꺼운 모양이다. 나는 그런 연연을 물끄러미 눈에 담았다.

무심한 낯으로 계속 보고 있으니, 처음에 밝았던 연연의 얼굴이 점차 묘하게 굳는다. 말없이 빤히 쳐다보는 게 이상한가 보다.

점점 낯빛이 우중충해지는 연연에, 결국 한 번 피식 웃어 보였다. 그럼으로써 분위기를 환기시킨 뒤 입을 열었다.

“연연.”

내 부름 하나로 연연의 낯이 조금 환해진다.

“목간이 어디에 있는지 봤느냐?”

내 물음에 연연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내젓는다. 그에 나는 연연 쪽으로 약간 몸을 기울였다.

“그럼 한 번 찾아볼까?”

“…….”

“우리가 함께.”

“응!”

연연이 좋아하는 ‘우리’라는 단어를 써 주니 바로 반응이 온다.

고개를 크게 끄덕이는 연연을 보며 멱리를 벗어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 그러곤 자리에서 일어나 섰다.

자꾸만 마음이 어지러워지니, 뜨거운 물에라도 몸을 푹 담가 머리를 비울 생각이었다.

“목간은 아마… 주방 근처에 있을 거야. 아궁이와 가까이에 있어야 물을 덥히기 쉬울 테니까.”

“응!”

“…하지만 목간통이 멀쩡할 린 없을 테고.”

“응!”

“…….”

혼잣말에도 돌아오는 대답이 참 씩씩하다.

연연에게 힐끗 시선을 준 뒤 곧 가벼운 웃음을 입가에 매단 채 도로 앞을 보았다.

“-그래도 무슨 상관이야?”

아까보단 경쾌하게 걸음을 내디디며 이어 말했다.

“이 사부가 있는데. -목간통쯤이야.”

의기양양하게 말하며 안방과 주방을 가로지른 겹문을 넘었다. 그러곤 주방 바깥으로 돌아, 뒤쪽에 붙어 있는 좁은 겹채 앞에 다다랐다.

입구에 길게 늘어져 있는 주렴을 걷어 내며 안으로 들어섰다.

예상대로 ‘목간’인 안에는 성인 두어 명이 들어갈 수 있는 통이 하나 놓여 있었다. 통 아래엔 낮은 받침대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거기서 나온 관이 주방 쪽 벽에 난 구멍 너머로 이어져 있었다.

보아하니, 그 벽 반대편에 있을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 열기가 관을 통해 목간통으로 전해지는 구조였다. 그러면 물이 빨리 식지 않고 오랫동안 온기를 유지할 수 있을 터다.

나는 목간 안을 한 차례 훑어본 뒤 목간통으로 걸어갔다. 그러곤 그 위에 덮여 있는 뚜껑을 열어 안을 들여다보았다.

바짝 말라 있는 목간통 내부는 갈라진 곳도, 부식된 흔적도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만 관리했을 리는 만무하고. 차라리 이 목간통엔 처음부터 어떤 특수한 처리가 되어 있었을 가능성 쪽이 훨씬 확률이 높다. 그래서 지금까지 멀쩡한 거겠지.

아무튼 이만하면 그냥 써도 되겠다. 목욕물은 앞의 시냇물에서 가져오면 되고.

‘공간 전이’를 이용해 단번에 물을 퍼 오려다가 생각을 바꿨다. 안가[安家]근처에선 법술을 쓰지 말아 달라던 무본의 당부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여기까지 오는 동안 경공도 쓰지 못했다.

‘공간 전이’는 법술이 아니라 술법이긴 하지만, 어쨌든 기[氣]를 쓴다는 점에 있어선 매한가지다. 게다가 나는 ‘진기’를 쓰니 더욱 선사들의 이목을 끌 거다.

잠시 고민하다가 목간통 안으로 들어가 바닥에 진[陣]을 그렸다.

허공섭물을 응용한, 아주 간략화한 법진이다. 이걸 이용하면 아주 미약한 힘만 운기 되는 정도로 그칠 거다. 그러면 웬만해선 들킬 염려가 없다.

반대로 말하자면, 웬만하지 않으면 들킨다는 거다. 하지만 상관없다. 이런 미미한 기운까지 눈치챌 정도의 선사라면 아까 야시장에서부터 내 존재를 눈치채고도 남았을 테니까.

법진을 다 그린 뒤 목간통에서 나왔다. 그리고 지체없이 겹채 밖으로 향했다. 연연이 그런 날 쫓아 덩달아 나온다.

나는 주변에 흐르는 시냇물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안력[眼力]을 높여 한층 넓어진 시야로 근방을 가만히 주시했다.

사방의 빽빽한 나무들을 투과해 마침내 시냇물을 눈에 담은 순간, 아까 목간통 바닥에 그려놓은 법진을 발현시켰다.

이제 됐다.

흡족하게 미소 지으며 돌아섰다. 도로 목간으로 돌아가려는 날 연연이 멀뚱멀뚱 쳐다본다.

“-그러고 보니, 마침 좋은 게 있지.”

연연과 눈을 맞추며 말했다.

“짜잔-”

입으로 ‘짜잔-’소리를 내며 소매 안 아공간에서 작은 구슬을 꺼냈다.

붉은 기가 도는 투명한 이 구슬은 본래 염귀[焰鬼]의 것으로, 이름하야 ‘화염옥[火焰玉]’이다. 기운을 밀어 넣으면 뜨겁게 달아오르는 성질이 있다.

염귀가 제 목숨처럼 아끼길래, 눈이 가서 친히 받아온 거였다. 그런데 이렇게 쓸모가 있을 줄은 몰랐네.

내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워져 있는 ‘화염옥[火焰玉]’을 본 연연은 여전히 멀뚱한 얼굴이었다. 그런 연연을 데리고 목간 안으로 들어갔다.

목간통에는 어느새 물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법진을 통해 시냇물에서 가져온 거다.

목간통 안의 아슬아슬한 수위[水位]를 확인한 뒤 법진에 기를 주입하던 걸 끊었다. 자연히 법진의 발현이 멈추며 차오르던 물도 아슬아슬하게 그쳤다.

나는 손가락 사이에 끼운 화염옥에 기를 밀어 넣곤 바로 목간통 안으로 던져 넣었다.

풍덩-

머잖아 물이 뿌옇게 흐려지며 뜨거운 김이 피어올랐다. 마치 온천수 같다.

“훌륭해.”

자화자찬하며 웃옷의 허리끈을 풀었다.

“사부?”

그런 날 연연이 불렀다. 그새 웃옷을 완전히 풀어헤친 나는 연연을 돌아봤다.

“아. 옷 벗는 거 도와줄까?”

하도 껴입혀 놔서 스스로 벗기 불편할 수도 있겠다. 바로 연연에게 손을 뻗었다. 그런데 연연이 한 발 뒤로 물러서며 내 손을 피했다.

“연연?”

의아해하며 부르자 연연이 고개를 마구 내젓는다.

‘왜 저러지?’

“사부와 같이 목욕 안 할 거야?”

“응!”

“…왜? 물이 너무 뜨거울까 봐 그래?”

보란 듯이 목간통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휘저었다.

“이 정도면 괜찮아.”

내 보여주기식 설득에도 연연이 계속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다. 저렇게 고집을 피울 때면 한량없단 걸 알기에 나는 한 차례 눈썹을 찡그렸다. 일이 피곤해졌음이 직감됐기 때문이다.

잠시 생각하다가 곧 한 가지 방안을 떠올렸다. 나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함을 가장하기 위해 어깨를 으쓱이며,

“그럼 여기서 나가거라.”

한 차례 강수를 뒀다.

보통 이렇게 하면 3할의 확률로 먹혔기 때문이다.

“목욕도 안 하는데 목간에 있을 순 없지. 사부 없이 혼자서, 어두운 방에서, 홀로 있어야 해.”

그리고 더불어 은근한 겁주기도 병행했다.

“할 수 있겠어?”

이만하면 충분하겠다 싶어서 기대를 담아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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