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응!”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지금까지의 강수가 무색할 정도로 선뜻했다.
내가 잠시 말문을 잃은 사이 연연은 목간 밖으로 나갔다. 그 모습이 시원스럽기 그지없어, 붙잡을 새도 없었다.
“…허-”
하여간에.
연연이 나간 문을 일별하며 가는 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손을 들어 괜스레 목덜미를 매만지며 목간통 쪽으로 돌아섰다.
“싫음 말고.”
힘 빠진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웃옷을 마저 벗었다.
가장 안쪽의 얇은 내의 한 장만 남기고 나머지는 잘 개어 한쪽에 두었다. 머리의 비녀관도 풀어 개어 놓은 옷 위에 올려 뒀다. 풀지 않은 건 연연이 땋은 부분의 단색 머리끈뿐이다.
목간 안은 어느새 희뿌연 김으로 가득했다. 고인 습기가 천장에 맺혀, 물기가 목간통 안으로 똑-, 똑-, 떨어진다. 그 소리가 청아하여 제법 기꺼운 마음이 든다.
나는 목간통 안으로 들어갔다.
촤아아아악-
가득 찼던 물이 통 밖으로 넘쳐흐른다.
“하-”
절로 탄성이 흘러나온다. 따끈한 물에 몸을 푹 담그니 굉장히 좋다. 시름이 다 풀리는 기분이다.
두 팔로 물살을 휘저으며 목간통 안을 왔다 갔다거리다가 한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바로 위, 머리맡에 난 좁은 창으로 찬 바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더운물에 몸을 담금 채 찬 바람으로 얼굴을 식히니 그게 또 기가 막히다.
“흠흠~”
낮게 콧노래를 부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러다 머리끝까지 물속에 집어넣고 속으로 숫자 열까지 센 뒤, 단숨에 물 바깥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촤아악- 흠뻑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한쪽 면에 느슨히 몸을 기댔다.
고요한 목간에는 찰랑이는 물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그 적막한 소음에 멍하니 귀를 기울였다가, 빙글 몸을 돌려 목간통 가장자리에 나른히 팔을 걸치며 그 위로 머리를 기댔다.
멍한 머릿속은 무념무상해졌다기보단 사고가 얄팍해진 것에 가까웠다.
나는 충동적으로 동동들과 시야 공유를 했다. 나만 동동이 보는 것을 볼 수 있고, 내가 보는 것은 동동이 보지 못하는 일방적인 공유이다.
뭐가 보고 싶어서 시야 공유를 하는 건 아니었다. 어차피 ‘그 동동’의 시야는 여전히 까맣게 점멸되어 있을 테니까. 지금도 봉인구 안에 갇혀 있을 테지.
…그래, 신경 쓰지 않겠다 했지만, 사실은 계속… 거스러미처럼 걸렸다.
나는 동동들의 시야를 한차례 쭉 훑어봤다. 그러다 시야가 까맣게 점멸된 동동이 하나도 없음을 깨닫곤 흠칫 놀랐다.
“…어?”
멍한 탄성을 내뱉으며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섰다.
촤아악-!
물이 몸 위에서 흘러내리며 투명하게 젖은 내의가 몸에 달라붙는다.
더운 김이 피어나는 몸 위로 차가운 바람이 닿는다. 그 감각이 선연해 한 차례 파르르 떨었다.
‘…봉인에서 풀어 준 건가? 왜?’
나는 자리에 선 채 심마가 가져간 ‘그 동동’의 시야를 찾았다. 얼마 안 있어서 찾은 ‘그 동동’의 시야는, …정말로 까맣게 점멸되어 있지 않았다.
처음 보인 것은 전당의 전랑[殿廊, 전당의 복도]이었다.
전랑[殿廊] 안쪽의 협간[夾間, 정간의 좌우 양쪽에 있는 방]을 지나 긴 회랑의 여러 겹문 너머로까지. 시야에 보이는 풍경은 넓고 유유히 이어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동동을 자유로이 풀어 둔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시선 흐름에 제한이 없을 리 없다.
동동이 들어간 곳은 여덟 개의 붉은 기둥이 세워진 대당이었다. 한백옥으로 장식된 안은 웅장하면서도 고아했다. 화려한 문양이 정교히 그려진 천장과 거기에 매여 바닥까지 길게 늘어트린 새하얀 휘장들.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에 긴 휘장이 하늘거리며 은근히 나부낀다.
세속을 초월한 듯한 지고한 기품이 느껴지는 광경이었다.
하늘거리는 휘장이 동동의 시야를 가렸다가 물러나길 반복한다. 그때마다 언뜻 보이는 것이 있었다. 펄럭이는 휘장들 너머 가장 안쪽, 탑상에 홀로 앉은 남자였다.
눈가엔 역린이 없고 면사를 쓰고 있는 그, ‘심마’다.
심마는 앞에 탁상을 둔 채 정교한 등받이가 달린 연석에 앉아 있었다. 나무랄 데 없이 바른 자세는 휘장에 비치는 실루엣마저 아정했다.
동동과 심마의 거리가 좁혀질수록 나는 숨 쉬는 법도 잊은 것처럼 굴었다.
잠시 숨을 멈춘 채 점차 가까워지는 심마의 모습에 집중했다. 좀처럼 눈을 뗄 수가 없다. 절로 미간이 좁혀지며 몸에 힘이 들어간다.
그런 나와 반대로 심마는 이쪽엔 시선도 주지 않았다. 한 손에 붓을 든 채 탁상의 두루마리에 무언가를 쓰고 있다.
뭐를 쓰느라 저리 집중하고 있는 거지?
뭔지 몰라도 아주 푹 빠져 있는 심마를 보고 있자니 궁금증이 인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동동을 살짝 채근했다. 어서 심마에게 가까이 다가가 보라고 하명을 내린 것이다.
그와 동시에 심마의 손아래에서 유려히 움직이던 붓끝이 멈칫했다.
찰나 간의 멈칫거림이었지만 심마에게서 눈을 떼고 있지 않았던 덕에 알 수 있었다.
‘혹시 들킨 건가?’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으며 조마조마해졌다.
‘설마 들킨 건 아니겠지?’
심마를 주시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너 같은 건 앞으로 신경 쓰지 않겠다고 하고 돌아선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동동을 통해 엿본 걸 들키기라도 하면 내 체면은 끝장이다.
게다가 내가 본인을 신경 쓰고 있단… 이상한 오해를 할 거 아니야? 난 정말 아무 관심도 없는데…! 정말로, 진심으로 결백하다.
지금 이건, 그저 단지…, 동동의 안위가 궁금했던 것뿐이다.
“…….”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말 같지도 않은 변명을 속으로 주절대며 심마를 보았다.
심마가 내보이는 모든 반응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곧 붓끝이 다시 유려하게 움직였다. 멈칫거렸던 것 자체가 없었던 일인 것처럼, 두루마리에 몰두하는 심마에게선 어떤 위화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두루마리에 집중하는 옆모습은 여상하기만 했다. 제 근처까지 다가온 동동에겐 여전히 눈길도 주지 않는다.
…들키지 않은 건가?
잘 모르겠다.
나는 동동의 시야를 통해 탁상 위 두루마리를 봤다. 붓의 궤적이 그리고 있는 건 한 사람의 초상이었다.
길게 늘어트린 검은 머리카락과 갸름한 얼굴형. 뚜렷한 이목구비에 지을 듯 말 듯한 입꼬리의 웃음까지.
그건 나였다.
심마가 그리고 있는 건 내 초상이었다.
너무 예상치 못한 것이라 순간 말문이 막혔다.
왜 날 그리고 있는 거지?
정성스럽게 내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심마의 옆얼굴을 보았다. 내리깐 긴 눈매의 눈빛이 퍽 진중하다.
심마는 나를 그리고, 나는 그런 심마를 동동을 통해 보았다. 그러다 문득 몸이 식었단 걸 깨닫곤 천천히 주저앉아 탕 속으로 들어갔다.
코 바로 아래까지 물 안에 담근 채 두 팔로 몸을 감싸며 팔짱을 꼈다. 길게 내쉬는 숨결에 물결이 인다.
‘…귀곡에 있었던 11년간 단 한 번도 나를 찾아오지 않았으면서. …왜…….’
속으로 중얼거리며 동동의 시야를 살짝 틀어 심마가 그리고 있는 나를 봤다. 못하는 게 없는 줄은 알고 있었지만 그림까지 잘 그릴 줄이야.
‘그림 속의 내가 너를 보며 웃고 있네.’
팔짱 낀 손의 검지를 까닥이며 잠시 상념에 잠겼다가, 이내 탕 속에서 다시 몸을 일으켰다.
동동의 시선 방향을 조종하던 것도 그만두고 목간통에서 나갔다.
촤아악-
몸에 남은 물기는 운기를 통해 날려 버렸다.
옷을 벗어 둔 곳까지 걸어가며 동동과의 시야 공유도 그만 끊으려 했다. 심마가 있는 곳에서 현재 내가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리는 그때, 멀어져 가는 동동의 시야로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이 그림 속의 님은 나를 보며 웃고 있는 걸까, 아니면 웃고 있지 않은 걸까.>
심마의 목소리였다.
직후에 시야 공유가 끊겼다.
“…….”
나는 단번에 옷을 걸쳐 입고선 목간 밖으로 나갔다. 성큼 내디뎠던 걸음은 문에서 한 발자국 멀어진 거리에서 우뚝 멈춰 섰다.
아득한 밤하늘, 그 안에 수놓인 별들을 바라보다가 긴 숨을 내쉬며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곤 불쑥 왼손을 들어 뒷머리를 벅벅 헤집었다.
“…됐어, 다신 안 봐.”
강경한 목소리로 스스로에게 말한 뒤 깊이 심호흡했다.
속에서 치미는 온갖 감정을 가라앉히며 뒷머리를 헤집던 손도 내렸다. 그리고 잠시 속으로 곰곰이 생각했다.
‘…내가 보기엔 웃는 것 같았는데.’
불퉁한 기분이 가슴 안에 옅게 깔렸다.
* * *
어둠이 엷어진다.
창을 통해 푸른 새벽빛이 스며들었다.
감은 눈꺼풀 너머로 동이 터오는 걸 느끼며 깊이 숨을 내쉬었다.
초옥에서의 하룻밤은 운기조식을 하며 보냈다.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가부좌를 틀고 앉아선 심상[心想]을 정리했다.
연연은 그런 내 무릎께에서 몸을 웅크린 채 잤다.
여직 자고 있는 연연의 고른 숨소리 사이로 산새 지저귐이 섞여든다.
날이 밝았다.
머리 한구석에서 계속 튀어나오는 우사, ……그러니까 심마를 꾹꾹 눌러 지우던 걸 그만두고 감았던 눈을 떴다. 내 쪽을 향해 모로 웅크린 채 잠들어 있는 연연에게 한 번 시선을 준 뒤, 눈길을 돌려 새삼 초옥 안을 둘러봤다.
지난밤에 보았을 때와 별다를 게 없다. 흥미를 끄는 게 없어서 도로 시선을 거뒀다.
걸개 무본과 만나기로 한 정오(낮 12시)까지 시간이 좀 남는다. 그때까지 뭘 할지 생각하며 소매 안에서 장난감들을 꺼냈다. 연연이 지난 밤 야시장에서 산 것들이다.
자리에서 일어서며 내가 앉았던 자리에 그 장난감들을 한 아름 내려놨다. 그러곤 자는 연연을 굳이 깨우지 않고 홀로 마당으로 나갔다.
밤이 걷히며 스산함도 물러난 숲엔 새벽이슬이 맺혀 있었다. 부는 바람이 선선하며 맑다. 초옥의 퀴퀴함이 씻기는 기분이다.
잠시 산보나 할까.
가볍게 마음을 먹고 초옥 뒤편의 대나무 숲으로 향했다.
근처 실개울이 흐르는 소리와 영롱한 새 지저귀는 소리, 피부에 와 닿는 바람이 청량하다.
숲에 흐르는 평온한 분위기에 온전히 잠기지 못한 채 대나무 숲에 도착했다.
대나무 숲 특유의 청아한 향이 은은히 끼쳐 오며 공기도 한층 서늘해졌다.
시야를 가득 메운 죽순대를 바라보았다.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로 빽빽한 대나무 숲은 이따금 바람이 불 때마다 숲 전체가 흔들렸다. 그때마다 꼿꼿한 기세는 유연하게 일변했다.
대나무 숲을 통과한 바람의 청아한 내음을 맡으며 나는 그 안으로 들어갔다.
한 손을 등 뒤로 돌려 뒷짐 진 채 대나무 사이를 거닐었다. 그러다 가장 매끄럽게 곧은 죽순대에 손을 가져다 댔다.
대의 마디를 손끝으로 쓸며 보법을 쓸까, 말까 고민했다.
요, 마, 귀라 해서 어둡고 응달진 기운에서만 힘을 얻는 게 아니다. 찬연한 만물의 생기는 인간, 신선, 요, 마, 귀를 가리지 않고 정양에 도움을 준다. 그러니 대나무 사이를 타며 숲의 정기를 받는 건 귀족(귀신)의 몸에 해롭지 않다.
대나무가 군자[君子]를 상징하는지라 보편적인 그림에 안 맞아서 그렇지. 어쨌건 심적 정양에 도움이 될 터다.
……아직까지 마음 한구석에 남은 심마[心魔]를 다스리는 데도 도움이 될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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