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연연의 눈이 내 찻잔을 따라 움직인다. 습관처럼 만두를 입가에 가져다 대긴 하지만 먹진 않는다. 온 관심이 내 찻잔에 쏠려 있다.
“사부!”
결국 연연이 한 손을 들어 내 찻잔을 가리키며 나를 불렀다. 호기심으로 만만한 목소리였다.
“이거? 이건 그냥 빈 찻잔이야.”
모른 척 그냥 넘어가려고 했지만 통하질 않는다. 입을 꾹 다문 채 내 손 안의 찻잔만 지그시 노려보고 있다. 어딜 봐도 방금 내 말을 믿는 눈치가 아니다.
결국 인내심이 바닥난 연연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게 쭉 뻗어 오는 연연의 팔을 직시하며 뒤로 조금 몸을 물렸다.
“사제지간에 이리 믿음이 없어서야.”
미간을 살짝 좁히며 대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연연, 네가 사부인 나를 안 믿으면 이 세상에서 누가 나를 믿겠어?”
내 말에 내게 뻗어지던 연연의 손끝이 멈칫한다.
나는 서운하단 내색을 팍팍 풍기며 연연과 눈을 맞췄다. 샐쭉했던 연연의 표정이 애매모호해진다. 그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간신히 기세를 한풀 꺾었다. 이제 증거인멸만 하면 끝이다.
찻잔 안의 것을 다른 곳으로 전이시키는 것쯤이야 간단하다.
잠시 생각에 잠겨선 손끝으로 찻잔의 겉면을 톡-, 톡- 두드렸다. 상념에 잠길 때마다 나오는 손버릇이었다. 그런데 찻잔 안에서 예기치 못한 화답이 돌아왔다.
톡-, 톡-
그 소리를 들은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연연의 눈이 일순 반짝였다.
“사부!”
연연이 나를 부르는 것과 동시에 나는 빠르게 찻잔 뚜껑을 열고선 안에 든 것을 힘껏 창밖으로 던져 버렸다.
반사적으로 나온 행동이었다.
뒤늦게 슬쩍 시선을 내려 손에 든 찻잔을 보았다. 텅 빈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날아간 모양이다.
“…….”
이렇게 심한 꼴을 당했으니 다신 내 앞에 나타나지 않겠지.
…그래, 차라리 잘된 일이다. 겸사겸사 증거인멸도 했고.
나는 텅 빈 찻잔 안을 연연에게 보여 줬다.
찻잔과 나를 번갈아 보는 연연의 눈엔 미심쩍음이 가득했다. 그래도 일단 보이는 진실이 이러하니, 마땅히 할 말도 없을 거다.
예상대로 연연은 순순히 나왔다. 도로 자리에 앉는 연연을 보며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기댄 채 팔짱을 꼈다. 그리고 고개를 옆으로 까닥이며 눈썹을 치켜올렸다.
“봐. 사부는 거짓말 안 해.”
“…응.”
대답은 잠깐의 시간 차를 두고 심드렁하게 돌아왔다. 껄적지근한 반응이긴 하지만, 뭐, 그런 일말의 찜찜함쯤이야 관대하게 넘길 수 있다.
나는 관대하게 고개를 주억이며 찻잔을 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럼 이제 일어설까?”
연연이 진작 음식들에 흥미를 잃은 상태란 걸 알기에 한 말이었다.
과연, 연연도 미련 한 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자리에서 일어서려다가 상 위의 찢어진 손수건에 시선을 줬다.
손수건을 향해 불쑥 손을 뻗었다가 그대로 손끝을 오므리며 거두었다. 거둔 손을 등 뒤로 뒷짐 지며 꽉 주먹 쥐었다.
‘흥.’
속으로 작게 콧방귀 뀌며 돌아섰다.
저 찢어진 손수건 따위, 마음에 두지 않을 거다.
냉정하게 앞으로 몇 발자국 뗐다가 잠깐 우뚝 멈춰 섰다.
“…….”
그리고 곧 다시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좀 전보다 빠른 걸음으로 식당에서 벗어났다.
식당에서 가볍게 아침 식사까지 마쳤지만 여전히 이른 시간이었다. 거리를 좀 더 둘러보며 느긋하게 돌아가도 될 것 같다.
설탕에 절인 과일을 파는 노점에 들러, 잎을 엮어 만든 그릇에 나눠 담은 걸 두 개 샀다.
긴 나무꼬챙이와 함께 주는 걸 연연과 사이좋게 하나씩 받아 들었다. 그러곤 천천히 먹으며 대로[大路]를 거닐었다. 입안에 퍼지는 달짝지근한 풍미에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부드러우면서 뭉근한 식감이 마음에 든다.
이거 괜찮네.
입술에 묻은 과즙과 설탕을 혀로 핥아 먹으며 눈으론 연연의 뒤를 쫓았다. 연연은 그새 향낭을 잔뜩 짊어진 지게꾼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연연에게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결정[結晶]’을 붙였다.
물론 이 ‘결정[結晶]’만으론 안심이 안 되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방비를 하고 나니 마음에 약간의 여유가 생긴다.
“연연, 너무 멀리 가진 말거라.”
주의를 한 번 준 뒤 나도 주변에 가볍게 시선을 줬다. 그러다가 화본[話本]을 파는 좌판을 발견했다. 순간 흥미가 일어 그리로 가려다가, 그 전에 연연이 있는 쪽을 한 번 더 일별했다.
좋아. 잠깐 다녀오면 되겠지. ‘결정[結晶]’도 붙여 놨으니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알 수 있다.
나는 화본을 파는 좌판 앞에 가 섰다.
‘어디 보자…….’
손에 들고 있는 과일절임을 얇은 나무꼬챙이로 꽂아 먹으며 눈으론 화본들을 훑었다.
[용신이 비를 내린 이유], [군자의 덕망], [어느 사형제의 비밀], [귀신에게 잡혔을 때], [벗과 술잔], [운우지정을 가둔 연꽃], [물가에 달그림자].
“…….”
대충 훑어보다가 두께가 가장 얇아 보이는 화본으로 손을 가져갔다.
[물가에 달그림자]. 제목도 제일 그럴듯했다.
내가 화본을 집으려 하자 좌판 주인이 짧게 탄성을 내뱉는다.
“어?!”
다소 당황한 기색이었다. 흘끗 시선을 들어 좌판 주인을 보자 어색하게 웃는다.
“저…, 그건 선사님께서 보실 만한 책이 아닙니다.”
선사가 볼만한 책이 아니라고?
무슨 불온한 서적이길래.
오히려 더 흥미가 생겨서 화본을 집어 들었다. 그러자 주인장이 사색이 되어선 거듭 만류한다.
“아니, 그건 정말 볼만한 책이 못 됩니다요.”
두 손을 설레설레 내저으며 다른 책을 추천하려는 주인장에게 조각 은화 하나를 던져 줬다.
“하이고…….”
그제야 주인장이 입을 다문다.
나는 [물가에 달그림자] 화본을 옆구리에 끼고선 돌아섰다.
“선사님께서 사 간 것이니 나중에 소인을 탓해선 안 됩니다!”
등 뒤로 주인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잔뜩 몸을 사리는 말이었다.
나는 돌아보지 않은 채 한 손만 들어 대충 휘휘 흔들어 줬다. 그러곤 미심쩍은 눈으로 방금 산 화본의 표지를 살폈다. 처음엔 흥미 본위의 마음이었는데, 저렇게까지 나오니 왠지 모를 꺼림칙함이 든다.
일단 대충 안의 내용을 훑어보려는데 시야 가장자리로 낯익은 게 들어왔다. 시선이 저절로 그리로 향했다.
나는 펼쳐 보려던 화본을 도로 덮고 다시 옆구리에 꼈다. 그리고 방금 전 모퉁이를 돌아 사라진 이에 대해 생각했다.
스치듯 봤지만 그가 누군지 내가 모를 리 없다.
‘심마’였다. 아직 이 부근에 있었나.
아까 식당에 이어 두 번째 우연이다. 뭐, 그것도 이번이 마지막이겠지만. 우연이란 게 언제까지고 이어질 리 없을 테니까.
나는 심마가 사라진 방향을 잠시 바라보았다가 천천히 걸음을 돌렸다.
먹다 만 과일절임도 마저 먹었다. 설탕에 절여져서 흐물흐물해진 걸 꼬치로 꽂아 먹으려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이런 건 숟가락으로 떠먹어야 하는데.
속에서 은근히 피어오르는 짜증에 작게 신경질을 부리며 과일절임을 뒤적였다. 그러다 완전히 입맛을 잃었다.
“사부!”
때마침 연연이 나를 불렀다.
나는 과일절임이 조금 남은 그릇을 버리고 연연에게 갔다.
연연은 양손에 향낭을 하나씩 들고 있었다.
“그게 마음에 들어?”
“응!”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씩씩하게 대답하는 연연에 가는 미소를 지었다.
마음에 든다면야.
나는 향낭 값을 치른 뒤 두 개 다 연연에게 주려 했다. 그런데 연연이 하나는 내가 차길 고집하길래 결국 향낭 하나는 내 허리춤에 찼다.
연연은 그런 날 잠시간 지켜보다가 또다시 다른 데 정신이 팔려선 그리로 가 버렸다. 근방의 커다란 잡화점 앞에서 날 향해 손을 흔들어 보이는 연연에 마주 손을 흔들어 줬다.
그걸 허락으로 알아들었는지 연연이 잡화점 안으로 쏙 들어갔다.
나는 가볍게 숨을 내쉬며 연연을 뒤쫓아 잡화점으로 향했다. 그러다 무언가 자석에 이끌리는 것처럼 비스듬히 몸을 돌려, 아까 심마가 사라진 모퉁이 쪽을 슬쩍 봤다.
…이젠 서로 가는 길의 동선이 다르니 정말 마주칠 일이 없겠지.
“…….”
다시 몸을 돌려 앞의 잡화점을 보았다.
전각의 편액에 ‘유연재[有緣]’라고 호방하게 쓰여 있었다.
‘유연재[有緣]’. 인연이 닿는 상점이라. 한 손을 뒷짐 진 채 유연재로 느긋이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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