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내가 대답 않고 물끄러미 보자, 짧게 숨을 들이 삼킨다. 그러더니 바로 고개를 내저으며 내가 준 목독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아주 얼굴을 파묻을 기세였다.
“아, 아닙니다요, 선사님! 그럼 이 목독, 이 목독이 무엇이냐-.”
…흠-
가볍게 숨을 내쉬며 그런 무본을 지켜봤다. 사실 무본이 저 목독을 알 거라는 데에 기대는 없다.
목독을 연거푸 훑어보는 멍청한 낯짝을 시큰둥한 눈으로 지켜보다가 곁의 연연에게로 관심을 돌렸다.
예상외로 연연은 무본만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무본이 들고 있는 목독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연연?”
내가 부르자 그제야 화들짝 반응한다.
“사부.”
곧장 손을 들어 무본이 들고 있는 목독을 가리키는 연연에 난감한 침음을 흘렸다.
저게 무슨 물건인지 모르는 이상 일단 살생부와 같이 관리하기로 결정지은 참이기 때문이다. 죽은 이는 말이 없는 법이니, 그런 방식으로 저 목독을 본 눈을 최소화할 셈이었다.
“안 돼.”
결국 고개를 내저으며 안 된다고 말했다. 연연이 입을 삐죽거리는 걸 모른 체하자 이제는 아예 무본에게 가 버린다.
직접 얻어 낼 속셈인 것 같은데, 그렇겐 안 된다.
“연연.”
연연을 엄하게 부르며 그보다 성큼 앞장서서 목독을 도로 가져왔다.
목독이 무본의 손에서 내 손으로 옮겨지는 걸 연연이 눈으로 끈질기게 쫓는다.
왜 저렇게 이거에 집착하지? 그렇게 궁금한가?
“사부!”
다시 내게 돌아와 내 옷자락을 붙들고 흔드는 연연을 내려다봤다.
“안 돼.”
다시금 단호하게 말하며 연연과 똑바로 눈을 맞췄다. 날 보는 연연의 눈에 고집이 서린다.
“어허-. 사부 말 안 들을래?”
일단 목독을 연연의 눈에 안 보이게끔 도로 소매 안에 집어넣으려 했다.
“그게 뭐…, 중요한 것입니까요?”
그때 무본이 말을 걸어왔다.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은 미묘한 불안감을 띠고 있었다.
“제자분에게도 안 보이는 것을 소인에게만 보여 주신 건…!”
“…….”
“선사님! 소인도 이 강호의 비정함에 대해 아는 만치 압니다요! 때로는 무언가를 알고 본 것만으로도… 장강에 떠내려 갈 빌미가 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
“이미 본 것을 무를 순 없으니, …아니, 애초에 소인은 그게 무엇인지도 모릅니다요. 눈뜬장님이나 마찬가지인데 굳이 죽, 죽일-,”
“선생이 아무것도 모르는 건 알겠어.”
“예! 결백합니다요!”
형형한 눈빛으로 날 보는 무본의 낯짝을 지그시 응시하다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돌렸다. 그러곤 한 손을 들어 목덜미를 매만지다가, 불쑥 엄지손가락으로 등 뒤를 가리켰다.
“…그렇다면 뭐…, 저 초옥에 이전에 살았던 이에 대해선 뭐 아는 것 있습니까? 가령 누가 살았는지, 뭐, 그런-.”
“모릅니다!”
여태까지 중 가장 기강이 잡힌 목소리로 무본이 답했다. 문제는 빠릿빠릿하기만 하지, 그 내용은 내 기대감에 한참 못 미쳤다.
“모른다고?”
등 뒤를 가리켰던 손을 내리며 되물었다.
말하면서도 어이가 없어져서 절로 고개가 삐딱하게 기울어졌다.
개방의 안가[安家]에서 일어난 일을 개방 걸개가 모른다는 게 말이 돼? 더군다나 내 눈앞의 저 걸개는 분타주 급이다.
내 반응이 싸늘해지자 무본이 목을 움츠린다. 반면 내 곁의 연연은 목을 쭉 내민 채 내 손 안의 목독을 엿보려 애쓰고 있었다.
연연의 괜한 수고를 덜어 주기 위해 나는 목독을 소매 안의 아공간으로 집어넣었다. 그런 뒤 팔짱을 낀 채 서서 무본을 직시했다.
내 행동에 한껏 토라진 연연이 하릴없이 내 옷자락을 팔랑팔랑 흔들어댔지만, 그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것이… 그 안가[安家]는 사실 본래 개방의 것이 아니었습니다요. 버려진 폐가 같길래, 꽤 오래전부터 눈여겨보다가 안가[安家]로 편입시킨 것인데….”
“…….”
그래서 오랫동안 관리가 되어 있지 않았던 거였나.
“그 초옥이 민가였을 때 누가 살았는진 모릅니다요. 수소문했을 때도 다들 그냥 빈집이라고만 하고, 무슨 귀신이 들렸다면서 아무도 가까이 가지 않는… 헙-!”
정신없이 말을 잇다가 뒤늦게 제정신이 들었는지 무본이 급히 입을 다문다.
내 눈치를 보는 무본을 무시하며 상념에 잠겼다. 그렇다면 그 초옥이 본래는 그냥 민가였다고? …흠.
“소인은 결단코 이이제이[以夷制夷]를 생각해서 그런 게 아닙니다요! 악한 기운은 악한 기운으로 눌러 버리잔 생각은 절대로-!”
“그래, 개방 걸개가 제 안가를 순순히 알려 줄 리가 없지.”
잠시 상념을 접어 두고 비꼬았다.
“하이고-. 오해입니다요, 선사님! 이제 그 초옥은 명실상부한 개방의 안가이고,”
“걸개가 땅에 떨어진 걸 주워 갖는 족속인 건 알고 있었는데, 설마하니 남의 것을 탐내 도둑질까지 할 줄이야. 이제 보니 선생은 개방이 아니라 녹림이었군.”
“녹, 녹림이라니…! 분명 아무도 오가지 않는 폐가였습니다. 버려진 건 먼저 줍는 놈이 임자인 게 세상의 이치 아니겠습니까요, 선사님.”
무본은 이제 나를 ‘선사님’이라고 꼬박꼬박 불렀다. 그게 제 목숨줄이라는 되는 듯이 말이다.
“그 초옥, 정말 버려진 거 맞습니까?”
의심을 거두지 않고 다시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안에 제법 많은 세간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같이 초옥 외양에 어울리지 않는 고가의 집기였다. 게다가 중요해 보이는 목독도 발견했고.
“예. 귀신이 들렸다는 소문까지 나돌 정도면 말 다 했지요.”
“…….”
“……저-, 선사님. 정말 초옥에 귀신이 들렸던가요? 헤… 헤헤.”
두 손을 비비며 무본이 어리숙한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건 단편적인 모습일 뿐이었고, 기실 날 보는 두 눈은 기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초옥에 귀신이 들렸단 소문이 정말 맞는지 날 살피고 있는 거다.
이 걸개만큼 날 무서워하면서도 겁에 질리지 않는 인간은 없을 거다.
“글쎄-.”
일부러 말꼬리를 늘리며 무본을 삐딱하게 보았다.
“무슨 귀신이 들렸다고 하던가요?”
무본에게 물으며 한편으론, 토라져서 그새 내 소맷자락을 놓고 딴짓 중인 연연을 손짓하며 불렀다.
연연은 언제 주웠는지 나뭇가지 하나를 손에 쥐고선 땅에 낙서를 하고 있었는데, 내가 부르자 미적거리며 다가왔다.
나는 나뭇가지를 쥐고 있지 않은 다른 한 손을 맞잡고선 다시 느긋이 걸음을 옮겼다. 무본도 우리를 뒤쫓아 걸음을 놀렸다.
“그것이…, 어느 약초꾼이 산에서 길을 헤매다가 우연찮게 초옥 근처를 지나가며 들은 게 시초인 것 같은데…. 워낙 오래전 일인지라 지금은 많이 와전되어선, 아니, 대인, 지금 무슨-!”
게거품이라도 물 것 같은 기세로 기겁하며 외쳐대는 무본을 힐끔 쳐다봤다.
내 시선이 닿기 무섭게 무본의 동공이 잘게 떨리더니 입가로 주먹을 가져간다.
“크흠-. …그…, 선사님.”
낮은 헛기침과 함께 호칭을 정정하며 무본이 내 발치를 눈짓한다. 정확히는 내가 올라탄 선검을 가리키고 있었다.
내 운기에 따라 땅에서 반 뼘 정도 떠오른 선검은 아주 미약한 살기를 흩뿌리고 있었다. 천성적으로 살기를 타고난 검이라 그렇다. 덕분에 지금 운기 중인 진기도 자연히 묻혀 티가 나지 않았다.
“개방 안가 근처에선 법술을 자제해 달라고 소인이 분명 부탁드렸는데….”
말끝을 흐리며 어검 중인 선검과 나를 번갈아 가며 흘끗댄다. 할 말은 많은데 차마 할 수 없어 꾹 억누른 표정이었다.
속으로 꿍얼대고 있을 게 뻔한 무본의 불손한 낯짝을 지켜보다가 냉큼 팔을 뻗어 그의 옷깃을 움켜잡았다.
“서, 선사님?!”
놀란 목소리로 나를 부르기에 한 번 싱긋 웃어 보인 뒤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무본이 목 졸린 비명 소리를 낸다.
“히익-!”
다짜고짜 몸부림치는 걸 무시하고 순수한 팔 힘만으로 들어 올렸다. 지면에서 떨어진 무본의 두 발이 동동 발버둥 친다. 목이 졸리는지 컥컥대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끊어질 듯 말 듯 한 신음 소리를 지루하게 흘려들으며 눈을 살짝 내리떴다.
“사부?”
앞에 태운 연연이 나를 부르며 돌아보려 한다. 동시에 걸개의 멱살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털썩-
내가 손을 놓자마자 무본이 땅으로 떨어지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뒤로 넘어진 채 날 올려다보는 얼굴이 사색이 되어 있다.
“…말은 바로 해야지. 개방의 안가[安家]?”
고개는 여전히 정면에 둔 채 피식 비소했다.
“뭐든 주워 먹는 게 걸개들 특성인 거 안다만. 정도껏 해야지, 안 그렇습니까, 선생?”
말을 이으며 방금까지 걸개의 멱살을 움켜잡았던 손을 뒤로 뒷짐 졌다. 그러곤 앞에서 무본을 돌아보고 있는 연연을 힐끔 내려다봤다.
“이제 선생의 장단에 맞춰 줄 생각은 없습니다. 자, 이번에도 선택지입니다.”
느긋이 말하며 뒷짐 지지 않은 다른 한 손으로 연연의 정수리를 토닥였다. 그러자 연연이 고개를 한껏 뒤로 젖혀 나를 올려다본다.
그에 고개를 옆으로 까닥이며 싱긋 웃었다. 그러곤 머리를 토닥였던 손으로 앞을 가리켰다. 연연이 다시 앞으로 몸을 돌리는 걸 확인한 뒤에야 무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일 번, 어검을 하는 내게 도움을 받는다. 이 번, 스스로 허공답보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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