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
답을 못하는 무본을 향해 한쪽 눈썹을 까닥여 보였다.
“……예. 저 초옥을 개방의 안가[安家]라고 않겠습니다요.”
한참 후에야 무본이 한결 수그러든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내가 전날 하룻밤 신세 진 게 선생이 아니라 저 초옥의 본래 주인이 되는 셈이군.”
“예? 예. 대인, 아니, 선사님. 선사님께선 소인에게 빚진 게 없게 되니까… 어? 그렇다면 일전에 소인에게 말한 갚아야 할 빚이 없는 것 아니오?!”
흥분했는지 무본의 어투가 본래대로 바뀌었다.
“아-. 그런가.”
나는 어깨를 으쓱여 보이며 일단 수긍했다. 그러곤 무본의 안색이 환해지는 걸 조금 지켜보다가 이어 입을 열었다. 한쪽 입꼬리가 저절로 삐죽 올라간다.
“그렇다면 선생이 내게 빚을 진 셈이 되는 거지.”
내 말에 무본의 눈이 동그래진다.
“예?”
“선생에게 빚을 졌단 생각을 가슴에 품게 한 빚.”
“그런 억지가…!”
무본이 울컥하며 반발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내가 미소 지은 채 지그시 바라보고 있으니 알아서 도로 입을 다문다.
제풀에 기가 꺾여선 눈을 내리까는 무본의 낯짝에는 체념이 서려 있었다.
“살살 써 주십시오….”
“내가 어떻게 선생을 쓰겠습니까? 선생이 날 이끌어 주는 것이지.”
“…예. 소인이 제대로 쓸모를 보이겠습니다요.”
“좋습니다.”
유쾌히 말하며 손을 들어 검지 하나를 펼쳤다.
“그래서 일 번?”
이어서 중지도 펼쳤다.
“아니면 이 번?”
“…….”
무본은 입을 꾹 다문 채 손가락 두 개를 펼쳐 들었다. 2번이라.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확인한 뒤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좋아. 그럼 갑시다, 선생.”
기를 운기해 허공으로 높이 어검했다.
옷자락이 크게 펄럭이며 부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날렸다. 연연은 처음에 잠깐 휘청였다가 금방 어검에 적응했다.
“어디로 가는지만 알려 주십시오…!”
등 뒤로 무본이 허겁지겁 허공답보를 펼쳐 달려오며 말했다.
상공의 서늘한 바람이 피부를 스쳐 옷자락을 흔드는 걸 느끼며 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멀리 새파란 천공[天空, 끝없이 열린 하늘]이 시야를 가득 메운다. 발아래에는 낙주가 펼쳐져 있다.
순식간에 숲을 벗어나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골목에 내려섰다. 어검을 마친 선검이 내 의지에 따라 허공으로 떠올랐다. 검 손잡이는 위로 향하고 검 끝은 땅을 향한 채 선 선검은 내 주변을 한 바퀴 선회한 뒤 스스로 내 허리춤에 패용됐다.
이어 등 뒤로 무본이 착지하는 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한 손을 뒷짐 진 채 비스듬히 걸음을 틀어 무본을 돌아봤다.
“여기는… 어젯밤에 온 장원[牆垣] 아닙니까요?”
“맞습니다. 낙주의 장원[牆垣]들.”
거리를 미로처럼 가로지른 높은 담장들. 이 너머에는 제각기 주인이 다른 원림[園林, 집터에 딸린 숲]이 넓게 펼쳐져 있고, 그 안의 커다란 전각들에 바로 내가 목표하는 것이 있다.
이 낙주에 실세로 자리매김한 선사들 말이다. 그 지체 높은 군상들을 내 손안에서 입맛대로 굴리는 게 내 계획이다.
필요한 것은 취하고, 필요하지 않은 것은 쳐내는 것.
“내가 알고 싶은 게 있습니다.”
무본에게로 완전히 돌아서서 그와 똑바로 마주하며 말했다. 무본이 불안한 듯 눈을 굴렸다.
“……인의에 어긋나는 건, 아, 물론 선사님이시니 당연히 그런 쪽은 아니시겠지만서두….”
“도와줄 거지요?”
“……예에. 그런데, 저,”
“하하-.”
나직이 웃음을 터트려 무본의 어물쩍한 말끝을 삼켜 버렸다.
“선생. 옛 선현이 이르길, 사람에겐 타고나길 제 그릇에 맞는 길이 있다던데.”
말을 이으며 무본에게로 한 걸음씩 천천히 다가갔다. 무본이 주춤거리며 뒤로 은근히 몸을 물렸다.
나는 검지와 중지를 아래로 세워선 걷는 시늉을 했다.
“지금 우리가 길을 가는 중이라면 나와 선생의 길이 같을까?”
“…….”
“아니면…, 다를까. 선생은 어떻게 생각해?”
날 보는 무본의 목에는 옷깃에 죄인 흔적이 붉게 남아 있었다. 내게 멱살을 잡혔을 때 생긴 거다.
“…가, 같습니다!”
오래지 않아 무본이 헛숨을 삼키며 답했다. 어떻게든 살아남고자 하는 일념이 두 눈에 넘실거렸다.
나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눈으론 무본을 가늠하듯 보다가 이내 가볍게 입을 열었다.
“흠. 내가 소인배는 아닌데.”
“…….”
“솔직히 우리가 그릇이 같진 않지.”
장난스럽게 무본의 어깨를 주먹으로 치며 그 곁을 지나쳤다. 연연이 그런 날 뒤따라온다.
“같이 낙주 구경이나 합시다, 선생.”
소맷자락을 가볍게 흔들어 젖힌 뒤 느슨히 두 손을 뒷짐 졌다. 뒤에 남겨진 무본은 내가 완전히 저를 지나친 뒤에야 느리게 반응을 보였다.
나는 골목을 벗어나기 직전에 잠깐 멈춰 서서 바깥의 환한 길을 바라보았다.
“…누가 그러던데,”
불쑥 입 밖으로 튀어나온 말은,
“내가 좋은 사람이라더군.”
도로 삼킬 새도 없이 완전히 바깥으로 흘러나와 버렸다. 방금 내가 한 말이 내 귀에도 닿아 다시 가슴 안으로 가라앉았다.
뒷짐 지고 있던 팔을 풀어 한 손을 가슴께에 가져다 댔다. 그 상태로 퍽, 퍽- 두어 번 가슴을 친 뒤 도로 손을 내렸다.
“…….”
속으로 낮게 욕설을 지껄이며 미간을 구겼다.
정말… 지긋지긋하다.
발치의 돌을 신경질적으로 걷어찬 뒤 골목 바깥으로 나갔다. 높게 솟은 전각들이 장원 너머로도 보였다.
저 멀리, 일전에 가까이 갔었던 연못 위 구름다리가 보였다.
저 구름다리에서 심마의 환영을 보았었지. 그때 일이 생생히 떠오른다.
고즈넉한 분위기의 거리는 깨끗했다.
간간이 보이는 상점들과 식당부터가 저잣거리의 가게들과는 그 위용이 달랐다.
하나같이 크고 널찍한 전각으로 지어져서 비교도 안 되는 수준이었다. 편액에 쓰인 서체는 물론, 기둥에 써 붙인 대련[對聯, 문이나 기둥에 써 붙이는 대구(對句)]조차 격조 높은 명필이었다.
드나드는 손님들도 대부분이 선사였다. 그러고 보니 한낮인 시간대임에도 오가는 사람들의 수가 적었다. 그리고 그마저도 일렬로 줄을 맞춰 걷는 선사들이 다수였다. 보아하니 순찰을 도는 듯했다.
나는 주변을 가볍게 둘러봤다. 아침의 저잣거리와는 사뭇 달랐다. 마치 저잣거리와 여기 장원 사이에 보이지 않는 선이라도 쳐져 있는 것만 같았다.
선 안의 이곳과 선 밖의 저곳은 서로 다른 세계인 것처럼 극단적으로 달랐다.
연연은 이곳에선 제 흥미를 끄는 게 없는지 내 옆에 얌전히 붙어 있었다.
“이 거리에는 누가 삽니까?”
먼저 가볍게 운을 뗐다.
“어제 갔던 저잣거리와는 완전히 다른 별천지군요.”
나직한 감탄도 부러 섞으며 말했다.
“…지체 높은 선사들이 무리 지어 사는 곳입니다요.”
나를 향한 경계를 감추지 못하며 무본이 답했다. 나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엷게 미소 지었다.
“그렇다면 저기, 첩산[疊山, 겹겹이 겹쳐 있는 산]을 등지고 높이 세워진 장원이 ‘연화산문’이겠군요. 그 근방은 지위가 높은 연화도의 분가일 테고.”
“…맞습니다요. 저 연화산문 뒤쪽에 설가[家]의 본가가 있습니다요. 본가에는 직계들만 머물고 있습죠. 한데 이건 왜…?”
“앞쪽으론 분가들로 겹겹이 진을 쳐 놨고, 뒤쪽으로는 첩산으로 천연요새라. 전조후침을 크게 확장한 것 같은 모양새니 마치 낙주의 왕 같군.”
내 말에 무본이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 편이 없잖아 있긴 하지만 여기선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요.”
주변 눈치를 보며 내게 주의를 주는 무본에 피식 웃었다.
우리는 장원들 사이로 난 길을 느긋하게 걸었다. 내가 어느 전각에 오래 시선을 주고 있으면 무본이 거기에 기거하는 이에 관한 잡담을 풀어 가는 식이었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무본은 아까보단 긴장이 옅어진 모습으로 또다시 그 주둥이를 나불대기 시작했다.
“‘연화도’들은 저들끼리 아주 끈끈합니다요. 저 장원의 구조가 그들의 그런 성향을 아주 직접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지요. 공처럼 둥글게 뭉쳐선 어딘가로 튕기게 되면 다 같이 퉁겨져 갑니다요.”
“과연. 그래 보입니다.”
“그래서 단합력이 큰 만큼 연화도는 아무나 받진 않습니다요.”
“아하- 그럼 최근에 연화도가 된 인사가 몇이나 됩니까?”
“두 명입니다요. 그중에 한 명이 저 장원에 살고 있는데… 이름은 ‘칠이랑’이라고, 아마 나이대가 선사님과 비슷할 겁니다.”
무본이 근방의 어느 장원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머지 한 명은?”
“아. 나머지 한 명. 그자가 바로 최근에 그, 연화경의 아주 오랜 지인 같단 그 작자입니다요. 듣기론 저 연화산문의 전당[殿堂, 높고 크게 지은 화려한 집.]에서 머물고 있다는데…. 아직 그자에 대해선 소인도 상세히 모릅니다.”
“…불리는 호칭도 모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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