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벗긴 면사는 옆의 탁상에 올려 두고 심마의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편하게 쉴 수 있게 내의만 남기고 전부 벗길 생각이었다. 그다음에 물수건으로 얼굴과 몸을 닦아 주고….
“…….”
생각을 잇다가 멈칫했다.
…내가 다른 사람한테도 이렇게까지 했던가. 아무리 머릿속을 뒤져 봐도 귀곡에서의 근 11년 동안 누군가를 간호해 준 적이 없었다.
때마침 방 안으로 들어온 두 기척이 가림막 안쪽으로 들어섰다.
“-사부.”
이어 날 부르는 연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로 시선을 돌리자, 나만 보는 연연과 그 뒤로 쭈뼛대고 있는 무본이 보였다.
그 둘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코끝으로 가는 숨을 내쉬며 한쪽 팔을 벌렸다. 순간 연연과 무본의 반응이 갈렸다.
연연은 환하게 웃음 짓고 무본은 사색이 되어선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동시에 연연이 내게 달려왔다.
“고…, 공자….”
무본의 손끝이 허공을 허망하게 내젓는다.
“사부.”
내 앞에 선 연연이 두 손을 내 허벅지 위에 올린 채 나를 불렀다. 나는 무본을 싸늘히 일별한 뒤 연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연연이 기다렸단 듯이 이어 말했다.
“그러지 마.”
말을, 했다.
순간 놀라 두 눈을 크게 떴다. 연연이 말을 했다.
“연연, 너….”
이젠 내가 말을 잇지 못하며 연연을 빤히 쳐다봤다.
어떻게 말을 한 거지? 이제까지 ‘사부’란 말밖에 하지 못했던 애가 어떻게….
사부 외에 처음 한 말이 무본을 편드는 것이라 심기가 조금 상하긴 했지만, 그보다 놀라움이 더 컸다.
시선을 돌려 무본을 보았다. 울상을 짓고 있는 걸개 놈의 다른 쓸모가 보였다. 무슨 조화를 부렸는지 몰라도, 뭐가 어떻게 됐든 이건 좋은 신호였다.
연연이 말을 한다. ‘사부’ 외의 다른 말을.
나는 무본을 보며 웃음 지었다. 그러자 무본의 낯이 우중충해진다.
“그러지 말까?”
다시 연연을 보며 되물었다. 연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나는 연연의 한 쪽 어깨를 감싸 쥐고선 고개를 숙였다.
“알았어.”
연연과 이마를 맞댄 채 말했다.
“그럴게.”
나직이 속삭이며 고개를 들고 감싸 잡고 있던 어깨를 놓았다.
“가서 무본과 같이 있어, 연연.”
“…….”
연연이 침상에 누워 있는 심마를 힐끔 곁눈질하더니 내 손을 잡아 왔다.
“…사부.”
꼭 잡고 놓지 않는 연연의 손을 일별한 뒤 입가에 가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다시 시선을 맞췄다.
“그럼-, 사부가 연연과 함께 있을까?”
“응!”
즉시 돌아오는 대답에 연연을 지그시 보다가 무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무본이 찔끔한 표정을 짓는다. 이어, 한쪽 눈썹을 까닥 치켜올리자 아예 두 손을 비비며 굽실거린다.
만면에 어색한 웃음을 띤 채 슬금슬금 거리를 벌리는 무본을 향해 한 손을 까닥였다. 그러자 언제 물러섰냐는 듯 후다닥 다가와 곁에 선다.
“무본.”
내가 먼저 입을 떼 말했다. 무본이 내 눈치를 살핀다.
“왼쪽 눈의 법진은 지우지 않을 거야.”
“…예.”
예상했단 듯 무본은 좀 전보다 더 침울해졌을 뿐 별 반응이 없었다.
“하지만 법진의 내용을 바꿔 줄 순 있지.”
“…예?”
무본이 살짝 숙였던 고개를 화급히 든다. 그런 무본을 웃음기 없는 낯으로 응시했다.
“연연과 잘 지낼 수 있겠어?”
무본에게 물었다.
방금 전의 내 말에는 ‘눈이 안 뽑혀도’란 말이 생략되어 있었다. 무본도 그걸 알아챘는지 잠깐의 멈칫거림 끝에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예! 예!”
“좋아.”
그럭저럭 만족스런 반응이라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무본은 뒤늦게야 왜 그런 걸 자신한테 부탁하는지 의아해하는 눈치였지만,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그래서 나도 굳이 그 이유를 알려 주지 않았다.
맹하게 날 보는 무본의 왼쪽 눈을 직시했다. 동공에 새겨진 법진을 살펴보며 한쪽 무릎에 올려 둔 손끝을 까닥였다. 순간 무본의 동공 안 법진이 빙글 돌면서 숨겨져 있던 암호문이 드러났다.
‘흠.’
속으로 낮게 침음을 흘렸다.
암호문이라. 파훼하지 못할 건 아니었지만, 그러려면 진기를 써야 한다. 물론 코앞에서 대놓고 써도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다만, 몸에다 직접적으로 쓰는 건 말이 다르다.
아무리 무본이라 해도 제 몸에 대고 진기를 쓰면 알아차릴 거다.
그냥 단순히 법진 수식 일부만 바꾸려고 했는데. 이래서야.
“흠.”
침음을 내뱉으며 한쪽 눈썹을 까닥 치켜올렸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흘러간다고 여겼는지 무본이 긴장한 낯짝으로 마른침을 삼킨다.
나는 검지 끝으로 내 허벅지를 툭, 툭 두드리다가, 돌연 싱긋 미소 지었다.
성가신데, 그냥 법진과 함께 통째로 터트린 다음에 동동의 핵이 왼눈을 대신하게끔 할까.
그러면 자연히 시야 공유도 할 수 있을 터다. …뭐, 동동의 핵이 지닌 진기에 무본이 서서히 잠식되어 가다가 자아를 잃을 수 있단 작은 문제가 있긴 하지만.
귀신(귀족)의 삶도 썩 그리 나쁘진 않다. …아마도.
“선사님…, 저…, 어떻습니까요?”
그새 인내심이 다했는지 무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글쎄- 어떡할까.”
나는 입가에 옅은 호선을 그린 채 연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연연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 연연과 지그시 눈을 맞추며 입을 열었다.
“연연. ‘무본’과 노는 게 좋은 거야?”
다소 뜬금없을 내 물음에 연연이 느리게 눈을 깜박이다가 고개를 휙 돌려 무본을 쳐다보았다.
그런 연연의 옆얼굴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곧 다시 내게로 고개를 돌린 연연이 나와 심마를 번갈아 본다.
잠시간 그러더니 내게 기대고 있던 몸을 천천히 뗐다. 그러곤 귀곡에서 귀돌이, 귀순이에게 갈 때처럼 내게서 돌아서기 전에 내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늘 이런 식이었다. 처음부터 있던 버릇 같은 거였다.
마치 내 얼굴을 제 뇌리에 각인이라도 시키듯이 날 빤히 바라보다가 아주 느리게 돌아선다. 그리고 그걸로 끝이었다.
한 번 돌아서면 다신 뒤돌아보지 않는다.
연연은 무본에게로 갔다. 그런 연연의 뒷모습을 보았다.
“연연.”
괜히 그 뒷모습에 대고 한 번 불러 봤다.
연연은 내게서 등진 채 무본의 앞에 섰다.
“무본이랑 같이 있을 거야?”
“응.”
단호한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힘 빠진 웃음을 내비쳤다.
연연이 갑자기 왜 저러는지 아주 짐작이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잘 모르겠다.
설마하니 아까 내 말의 숨겨진 내심을 알아차렸을까 싶다가도, -아니, 그래, 정말 알아차렸다 치더라도 이 행동의 저의를 완전히 알 수가 없다.
연연은…, 오연은 늘 그런 사람이었다. 뭐든 안개가 자욱이 낀 것처럼 다가왔다. 우횡산처럼 말이다. 그래서 산과 같은 그늘을 내게 드리웠나.
“사부는?”
마지막으로 서운한 투를 담아 물었다. 연연의 저의를 알기 위해 던진 마지막 수이기도 했다.
“…괜찮아.”
연연이 대답해 왔다. 이번에도 ‘사부’란 단어 이외의 말이었다. 그게 놀라우면서도 쓴웃음이 지어졌다.
나는 코끝으로 무거운 숨을 내쉬었다.
그래, 이편이 여러모로 다 괜찮겠다. 연연도 무본과 있을 때 말이 트이는 걸로 보아, 나와 있는 것보단 무본과 함께 있는 편이 좋을 거야.
생각을 정리하고 비스듬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래.”
짤막하게 답하며 허벅지 위에 올려 둔 내 손끝을 잠시간 응시하다가, 다시 시선을 들어 연연과 무본을 보았다.
“…그렇게 됐으니까, 무본. 잘해.”
“…예? 뭘 잘하라는…, 아니, 그보다 제 눈은-”
“아. 그래. 눈에 다른 법진을 넣는다고 했었지. 지금은 왼쪽 눈에 심마의 법진이 있으니-,”
말꼬리를 늘리며 손끝을 까닥였다.
“엇?”
무본이 짤막한 소리를 내뱉는 것과 동시에 내 손에는 방금 막 뽑힌 무본의 머리카락 한 가닥이 쥐어져 있었다.
“나는 이 머리카락 하나로 대신하지.”
임시방편이긴 하지만.
이제 그만 가 보란 의미로 무성의하게 손을 내저었다. 그러나 무본은 머뭇대며 도통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선사님…!”
미적대던 무본이 기어코 입을 열었다.
“그게 아니라, 제 왼쪽 눈의 법진을 좀 어떻게 해 달라는 그런…, 그런 이야기였는데 말입니다요…. 그리고, 뭐시다냐, 그…, 머리카락은 왜…?”
멋대로 주절대는 무본을 말없이 응시했다.
“…그…, 헤헤…. 음….”
무본은 점점 말끝을 흐리다가 찔끔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크게 심호흡하더니,
“어쨌든 꼭 좀 부탁드리겠습니다요, 선사님!”
목소리를 높여 크게 말했다. 꿈지럭대던 두 손은 꼭 맞잡고 있다.
“연고도 인맥도 개뿔 없는 이 낙주에서 소인이 붙잡을 지푸라기는 선사님뿐입니다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란 속마음을 당당히 꺼낸 뒤 무본은 다급히 말을 끝맺었다. 그러곤 잊지 않고 연연도 챙겨선 가림막 바깥으로 나갔다. 이어, 두 기척이 완전히 초옥 바깥으로 나가는 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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