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질 사형입니다-120화 (120/141)

<120화>

“…….”

남겨진 건 난데, 어째 쫓아낸 기분이 든다.

나는 집게손가락으로 집고 있는 무본의 머리카락을 아래로 늘어트렸다. 곧 머리카락 끝부분부터 허공에 먹혀들어 갔다.

머잖아 무본의 머리카락이 완전히 사라졌고, 그 자취를 감춘 곳에서 작은 그림자가 생겨났다.

손가락 두 마디 정도 크기의 그림자는 무본의 형상을 띠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림자의 매개체가 무본의 머리카락이기 때문이다. 이건 무본의 그림자다.

‘인형술(술법)’의 일종으로, 그림자는 매개체의 행동을 그대로 따라 한다.

더불어 현재 느끼고 있을 감정도 그림자를 통해 알 수 있다. 느끼고 있는 감정의 종류에 따라 그림자 색깔이 바뀌기 때문이다.

보통의 상태는 분홍색이고, 슬픔이나 자책, 절망에 가까워질수록 푸른색을 띤다. 반면에 분노, 화에 가깝다면 적색을 띤다.

증오와 살의는 검은색이고, 잡념이 가득할 때는 회색을 띤다.

푸른색을 띠고 있는 무본의 그림자를 손끝으로 툭 쳤다.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게, 초옥 바깥에서 어떤 상태일지 짐작이 간다. 속의 생각이 행동으로 다 보이는 성향이니, 이 그림자만으로도 무본을 감시하기엔 부족함이 없을 거다.

이 술법의 지속 시간은 매개체가 되는 주인의 정신을 얼마나 지배했느냐에 따라 다르다. 그 지배의 원천이 공포든, 두려움이든, 다른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

나는 무본의 그림자를 시야 한구석에 놓고 심마를 보았다. 여전히 의식을 잃은 상태인 심마는 누운 자세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정[正]자세로 누워 있는 모습이 지극히 아정했다. 나는 심마 쪽으로 몸을 더 틀며 손을 뻗었다. 해야 할 일이 많다. 우선 옷부터 벗기기로 했다.

왼팔을 심마의 등 아래로 넣어 살짝 안아 들었다. 그러곤 다른 손으로 피가 묻은 겉옷을 벗겼다.

벗긴 검은색 장포는 옆에 잠시 두고 이어서 자색 문양이 들어간 금색 허리끈을 풀었다. 내친김에 안쪽의 묵색 겹옷도 벗기자 새하얀 내의만 남았다.

내의 안에는 단고(짧은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옷을 벗기느라 흐트러진 옷깃 사이로 탄탄한 가슴이 보였다. 그걸 보고 있자니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서 심마의 내의로 손을 가져갔다.

옆으로 여민 가는 끈을 당겨 풀고 옷을 양옆으로 활짝 벌렸다. 그러자 드러난 상체는 미려했다. 살갗은 백옥같이 희었으며 군살 하나 없었다.

탄탄한 근육으로 조여진 몸은 그 자체로 완벽했다.

나는 복근이 선명한 심마의 복부에서 11년 전, 빙옥에서 남소위한테 입었던 상처를 찾았다. 진작에 다 아물었을 거란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그냥, 궁금했다.

“…….”

미끈한 복부에는 그 어떤 상흔도 없었다.

코끝으로 가는 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확인할 건 다 확인했으니 이제 물수건이랑 대야가 필요하다.

술법을 쓰면 얼굴의 핏자국이며 옷의 얼룩쯤이야 순식간에 없앨 수 있지만, …굳이 계속 진기에 닿게 하고 싶지 않았다.

진기와 선기는 서로 나아가는 길이 달라 상충된다. 오직 같은 류의 기운끼리만 어우러지기 때문이다.

물론 내 몸 안에 미미한 양의 선기가 자리하고 있긴 하지만 그뿐이다. 이를 바탕으로 선검을 쓸 수 있고, 선술의 법진을 그려 낼 수 있어도 최종적으로 선기를 운기할 순 없다.

선법진을 그려도 거기에 담기는 건 귀기여서 선술의 발현을 기대할 수 없고, 선검 또한 고작해야 이기어검술에 한하여 진다.

결국 운기할 수 있는 기운은 진기로 제한되어 있으니, 나는 심마의 내상 회복을 비롯한 운기조식도 도울 수 없다.

심마는 침상에 그대로 두고 주방으로 나갔다.

좁은 주방은 한쪽엔 아궁이가 있었고 옆으론 찬장과 뒤로는 탁자와 선반이 있었다.

주방 집기들은 아궁이 옆의 부뚜막 위에 놓여 있었다.

찬장과 선반들을 한차례 훑어봤다. 벽곡단을 먹던 사람이 살았는지 주방 쪽 세간은 협소했다. 탁자 옆의 흙과 돌을 쌓아 올린 턱에 기대앉아선 팔짱을 꼈다.

물수건은커녕 살면서 대야를 쓸 일이 없었는지 대야도 없다. 구비되어 있는 거라곤 기본적인 조미료들과 각각 두 개씩 있는 식기들, 그리고 구색만 갖춘 조리 도구들뿐이었다.

팔짱을 낀 손의 검지로 팔을 툭-, 툭, 두드리며 잠시 고민에 잠겼다가 이윽고 결정을 내렸다.

낙주에 잔존해 있을 동동들을 이용해….

“…….”

…아니, 아니다. 동동이 괜히 선사들 눈에 띄었다간 번거로워진다.

생각을 바꿔 그냥 내가 직접 움직이기로 했다. 금방 다녀올 테니 연연에겐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겠지. 심마는 아직 깨려면 멀었고.

나는 무본의 그림자만 챙겨선 바로 순간이동술을 발현했다. 아주 미약한 기만 운기한 데다가 내공인 척 속임수까지 써, 단숨에 낙주의 시가지 한복판인 저잣거리에 도착했다.

연연과 함께 거닐었던 그 거리였다.

나는 골목 안쪽에서 바깥의 대로를 보며 의관을 단정히 했다. 양 소맷자락을 가볍게 떨치며 두 손을 느슨히 뒷짐 지고선 바깥의 거리로 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간간이 보이는 선사들은 그대로 스쳐 보내며 피식 웃었다.

선사들이 아무리 많다 한들 내가 자유로이 운신하지 못할 곳은 없다.

-자, 이제 대야와 물수건을 사러 가 볼까.

코끝으로 가벼운 숨을 내쉬며 사람들 사이로 섞여 들어갔다.

대야와 물수건을 사 들고 돌아오는 데까진 대략 일각(15분)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미리 물을 받은 대야를 옆구리에 끼고선 초옥 안으로 들어갔다. 곧장 주방을 가로질러 안방으로 통하는 겹문을 열었다.

드르륵-

문지방 너머로 성큼 걸음을 내디뎠다가 일순 멈칫했다. 뭔가 잘못되었단 걸 알아챘기 때문이다.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잠깐 멈칫했던 걸음을 빨리해 안쪽의 침상으로 걸어갔다.

가림막을 돌자마자 보이는 침상에는 역시 아무도 없었다. 길게 늘어진 휘장 너머는 텅 비어 있었다. 왠지 허탈해져서 어깨를 늘어트렸다. 슬쩍 시선을 돌려 옆구리에 끼고 온 대야를 보았다.

대야 가장자리에 걸쳐져 있는 수건까지 보곤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러다 코끝으로 무거운 숨을 내쉬며 아예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려 버렸다.

바깥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여전히 두 개다. 연연과 무본.

“…….”

곁의 탁자 위에 대야를 올려놓은 뒤 걸음을 돌렸다. 비스듬히 돌아서는 내 시야로 심마가 들어온 건 그때였다. 동시에 아까까지만 해도 느껴지지 않았던 기척 또한 느껴졌다.

“…너….”

나도 모르게 입술을 달싹여 심마를 불렀다. 너무 뜻밖이라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내 등 뒤에 있었던 거야? 왜? 언제부터?

그새 의관을 단정히 갖춘 심마는 날 보며 엷게 미소 짓고 있었다. 날 볼 땐 대부분 저 표정이었다. 희미하게 호선을 그리고 있는 눈매와 살짝 위로 올라간 양 입꼬리.

“진연.”

심마가 나를 불렀다. 그의 눈이 내가 내려 둔 대야와 물수건 따위를 잠깐 일별한다. 그에 순간 왠지 모르게 심기가 불편해져서 설핏 미간을 찡그렸다. 그런 내게로 심마가 조금 더 다가와 마주 섰다.

심마는 두 손을 등 뒤에 진 채였다. 뒷짐을 지고 있다기보단 뭔가 숨기고 있는 모양새에 가까웠다. 내가 대놓고 그리로 시선을 주자 심마의 미소가 짙어진다. 수상쩍은 모습에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였다. 그리고 미간을 좁힌 채 심마를 빤히 보다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내민 손끝을 까닥거리자 뒷짐 지고 있던 손을 슬그머니 푼다.

곧 심마가 내가 내민 손 위로 자신의 주먹 쥔 오른손을 올렸다. 심마의 손이 천천히 펼쳐지며 그 안에 숨겨져 있던 세침(細針, 가는 바늘) 두어 개가 내 손 위에 놓였다.

…조금 전에 기척이 안 느껴졌던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기습할 생각이었나 보군.

손 위의 세침을 보았다. 공간전이술이든 뭐든 선술을 이용해 숨기려 했다면 얼마든지 숨길 수 있었을 거다. 그런데 그러지 않고 고스란히 내놓았다는 것이, …미묘하게 거슬렸다.

나는 그대로 손바닥을 뒤집어 받은 세침을 전부 바닥에 버려 버렸다. 그거로도 모자라 발끝으로 툭 차 시야에서 아예 치워 버렸다.

“당신이 날 여기로 데려온 거야?”

심마는 버려진 세침에는 눈곱만큼도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나만 바라보았다. 온 신경이 내게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 또렷하게 느껴졌다.

“저건 뭐야?”

기어코 내 뒤의 대야와 물수건을 언급하는 심마에 인상을 썼다. 대꾸하지 않고 그대로 지나치려는 내 옆을 심마가 따라붙는다.

“…나…, 다시 누울까?”

심마가 말했다. 웃음기가 배어든 목소리였다.

“물벼락 맞고 싶으면 그러던가.”

툭 던지듯 말했다.

“네 얼굴에 부어 버리려고 가져온 거거든.”

“…그럼, 물수건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

“뭘 생각하는지 몰라도 그런 거 아니야.”

능청스런 표정을 짓는 심마를 향해 삿대질하며 말했다.

“그런 거 아니라고.”

재차 분명히 말해도 심마는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됐다. 말을 말자.

정면으로 싸늘히 시선을 돌리며 걸음을 빨리했다. 심마가 그런 내 옆에 붙어서선 걷는다. 붙지 말라고 팔로 툭 밀쳐도 웃으며 다가오니 뭘 더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주방으로 나가는 겹문은 좁아서 둘이 나란히 나갈 수 없었다. 심마가 먼저 알아서 뒤로 물러났다. 자연히 내가 앞장서서 나가는데 등 뒤로 심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마워.”

짤막한 인사였다.

“나 두고 가지 않아서.”

“…….”

“사실 꼼짝없이 버려질 줄 알았어. 그런데 당신은….”

“내가 이제부터 너한테 뭘 할 줄 알고 벌써부터 고맙다는 거야?”

“뭘 할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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