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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질 사형입니다-121화 (121/141)

<121화>

바로 돌아오는 물음에 잠시 입을 다물었다.

뭘 할 거냐니. …그야-, …아무것도.

“…….”

마땅히 할 말이 없어서 괜히 성질을 부리며 거칠게 걸었다. 그런 내 뒤로 심마가 쫓아오는 게 느껴졌다.

“나와 뭘 할 거냐니까? 응? 진연!”

심마가 신나선 외쳐댄다. 나는 절대 뒤돌아보지 않고 당연히 대꾸도 안 했다. 양팔을 휘저으며 빠르게 걸어 초옥에서 나갔다. 동시에 심마가 잽싸게 내 옆을 지나쳐 앞에 마주 섰다.

생글생글 웃는 낯이었다.

“알았어. 안 할게.”

내게 말하는 심마의 목소리는 어딘가 어르는 투였다.

‘…건방지긴.’

속으로 중얼대며 옆으로 턱짓했다. 길 막지 말고 꺼지란 뜻이었다. 그러자 심마가 입을 슬쩍 다물더니 눈썹 양 끝을 축 내린다.

“나… 아직 아픈데.”

그러면서 슬그머니 손까지 뻗어 온다. 내 팔을 잡으려 하길래 매정하게 쳐냈다.

탁!

그러나 심마는 포기가 없었다.

이번엔 내 옷소매를 살짝 잡아 온다. 내 옷소매 끝자락을 살포시 잡고 있는 심마의 손을 보았다.

허-, 참.

어이가 없어서 저절로 기가 찬 탄성이 나온다.

이번에도 당연히 심마의 손을 쳐내고 아예 손을 등 뒤로 돌려 뒷짐을 져버렸다. 그러곤 심마를 보며 한쪽 눈썹을 까닥였다.

이제 뭘 어쩌지 못하겠지.

“비켜.”

턱 끝을 살짝 치켜들며 고압적으로 말했다. 그러면서 곁눈으론 심마를 힐끔 훔쳐봤다.

심마의 내리뜬 시선은 거부당한 제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만면에 띠고 있던 미소가 얇게 얼어붙으며 냉한 무표정이 덧씌워졌다.

심마는 내려다보고 있던 손을 천천히 들어 제 얼굴로 가져갔다. 면사로 가려지지 않은 제 턱을 쓰는 그의 손끝이 입가에 얼핏 닿았다. 순간 심마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올라갔다 느꼈는데, …내 착각인가?

다시 본 심마는 여전히 침울해 보였다. 무표정한 얼굴에 자리 잡은 건 쓸쓸함이었다.

“…응.”

어딘가 처량 맞은 어투로 심마가 대답했다. 그리고 순순히 옆으로 비켜선다. 이제 앞의 길이 트였다. 그런데 바로 걸음을 뗄 수가 없다.

…엄청 신경 쓰인다.

음전한 모습으로 선 심마를 안 보는 척 곁눈으로 살피며 잠시 망설이다가, 깊은숨을 내쉬었다.

신경 쓰지 말자. 신경 쓰지 마. 이래야 알아서 나가떨어지지.

마음을 다잡고 보란 듯이 앞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심마를 지나쳐 얼마간 걷는 내내 등 뒤의 기척에 집중했다.

심마는 제자리에 멈춰서선 영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안 쫓아올 생각인 건가.

…그래, 안 쫓아오면 뭐. 저대로 가라지.

“이 초옥은… 당신 거야.”

그때 심마가 여전히 제자리에 선 채 말했다. 나는 여전히 앞으로 나아가는 중이었다. 걸음은 알게 모르게 조금 늦춘 상태였지만, 그래 봐야 거리는 계속 벌어질 거다.

“어.”

왠지 불퉁한 기분에 대충 대꾸했다.

심마는 이대로 헤어질 속셈인 것 같았다. 나는 그를 향해 펼친 기감을 거두었다. 그리고 그 절묘한 순간에 커다란 날갯짓 소리가 들렸다. 이어 일순 강한 돌풍이 불었다.

매의 깃 한 장이 바람에 실려 내 얼굴 옆으로 스쳐 지나갔다. 동시에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그때서야 방금 심마의 말이 어딘가 미묘했단 걸 깨달았다.

‘이 초옥은… 당신 거야.’라니. 그건 질문이 아니었다. 내게 알린 것이다. 저 초옥은 내 거라고.

심마는 그 자리 그대로 서 있었다. 가슴께까지 올린 왼팔에는 매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전령용 매이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내 물음에 심마가 입을 연다.

“손수건, 매, 그리고 여기.”

“…….”

나직하게 이어진 그 말에 모든 게 명료하게 이해됐다.

“그러니까, 저 초옥이 원래는 네 거라고?”

“내 것만은 아니야.”

심마가 말했다.

아까의 처량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날 보며 미소 짓는 그만 있었다.

은근히 즐거워 보이는 그 속내를 이해할 수가 없다. 나는 심마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어 물었다.

“…그러면 누가 또 있는데?”

아까 주방에서 보았던 식기를 떠올리며 물었다. 분명 각각 두 개씩 있었다. 목독의 주인에 대한 실마리가 거기에 있을지 모른다.

“……그건, 이미 당신이 ‘어’라고 답했잖아.”

심마가 대답했다.

내가 기대한 대답과는 완전히 궤를 달리한 말이었다. 그래서 머릿속 사고가 바로 되질 않았다.

잠시 침묵한 사이 심마가 손끝으로 매의 부리를 건드렸다. 이번에는 같이 가자는 말도 없었다. 금방 다녀오겠단 말만 남기고 그렇게 혼자 가 버렸다.

사라진 심마의 자취를 눈으로 좇았다. 순간이동술로 떠난 거라, 그 기의 흐름이 아직 허공에 남아 있었다. 지금이라도 충분히 뒤쫓아갈 수 있다.

나는 우두커니 서선, 소매 아래의 두 손을 꽉 주먹 쥐었다. 뒤늦게 많은 말들이 목 언저리에서 맴돌았다.

심마의 ‘내 것만은 아니야’와 ‘…그건 이미 ‘어’라고 답했잖아.’라는 말에 따져 묻는 말들이었다.

그러면 저 초옥의 주인이 너와 내가 되는 셈인 건지, 어떻게 그렇게 간단히 내게 내줄 수 있는지, ……주방에 각각 두 개씩 있던, 내가 오늘 처음 본 그 식기들은….

…많은 물음들이 심장 깊은 곳에 켜켜이 쌓여 간다.

우리 관계가 뭔데. 너랑 나 사이가 대체 뭔데. …너는 다른 사람인 것처럼 내게 다가왔고, 그러니 나도 너를 알아보지 않을….

속의 말이 끝맺어지지 못하고 도중에 허물어진다.

‘그렇게라도 그와 함께 있고 싶어?’

속에 이는 물음은 내가 나한테 던진 것이다.

원멸 이전 우사와의 은원, 원멸 이후 백아와의 인연. 그리고 지금 심마가 반복하고 있는 우연들.

진작 세 번의 우연을 넘긴 이 만남에 내가 욕심이 생긴 걸까.

‘우사, 백아, 심마.’

세 개의 이름을 속으로 되뇌며 주먹 쥐고 있던 손에서 힘을 천천히 풀었다.

…일단, 그래, 일단 더 중요한 게 있다. 이건 나중에 차차 생각하고…, 우선 저 초옥의 본래 주인이 심마란 걸 알았으니까 목독에 대해서 물어볼 수…….

‘그렇게라도 그와 함께 있고 싶어.’

“…….”

머릿속에 불쑥 떠오른 잡념에 한 손을 머리에 갖다 댔다. 그리고 몇 번 세게 내리쳤다.

퍽-! 퍽!

시야가 흔들리며 둔중한 통증이 울린다. 긴 숨을 토하며 그대로 머리카락을 세게 움켜쥐었다가 놨다.

그리고 발치의 흙을 세게 걷어찼다가 스스로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자리에 웅크리고 앉아선 아래의 땅만 노려봤다.

“…아…….”

한참의 침묵 끝에 낮은 침음만 흘렸다. 그러곤 이내 한 손을 들어 뒷머리를 대충 헝클이며 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로 앞의 땅에 푹 패인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아까 전, 걷어차는 바람에 생긴 거였다.

땅의 파인 부분을 발끝으로 비벼 도로 평평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휙 뒤돌아서서 초옥 뒤편의 기척 두 개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무본과 연연은 주방 뒤쪽에 붙어 있는 겹채 근처에 있었다. 본래 안뜰(마당)이었을 거긴 내가 오늘 아침에 목독을 보았던 곳이다.

주변으로 울타리가 쳐져 있고 깨알만 한 크기의 꽃들이 잡초와 한데 뒤섞여 피어 있었다. 내가 숲에서 꺾어 화병에 꽂은 것보다 더 작다.

그 점점이 피어 있는 색색의 꽃들 안쪽에 널따란 바위가 놓여 있다. 무본은 그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림자를 통해 본 것 그대로 침울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연연은 내게 등을 진 채 서 있었다. 바위 근처에 서서 저 멀리 숲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연연의 뒤통수를 보았다.

한 손에는 주변의 꽃을 엮어 만들었는지 화관이 들려 있었다. 아주 작은 꽃들을 용케 촘촘히 엮었다.

연연의 뒷모습을 보며 부를까, 말까 고민하다가 그냥 부르지 않고 천천히 다가갔다.

내 기척을 눈치챈 무본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나를 본다. 그에 얼른 한 손을 들어 입에 검지를 가져다 댔다.

쉿.

무본은 크게 뜬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슬그머니 목을 움츠렸다.

나는 입에 댔던 손을 내리고 연연의 지척까지 다가갔다.

그 작은 등 뒤에 가까이 선 순간, 아까는 느끼지 못했던 희미한 기운 한 자락을 느꼈다.

굉장히 맑은 선기였다.

무본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격이 높았다.

나는 얼핏 인상을 쓰며 그 기운을 향해 손을 뻗었다. 허공으로 흩어지기 전에 잡아채서 이 기운의 근원을 알아낼 속셈이었다. 그러면 이 기운이 무엇인지, 왜 연연에게 잔영처럼 남아 있는지 알 수 있을 터였다.

내민 손끝에 아지랑이와도 같은 기운이 닿는 순간 날카로운 두통이 일었다. 무시하며 손끝을 오므려 기운을 움켜잡았다. 그와 동시에 시야가 흐려지며 앞에 서 있는 연연의 뒷모습이 두세 개의 잔상으로 나뉘어졌다.

연연과 오연, 그리고… 처음 보는 낯선 이의 뒷모습이었다.

반 묶음 한 긴 은발을 위로 높이 틀어 올려 황금색 관비녀를 썼고, 견장처럼 단 양어깨의 경갑옷 아래로 짙은 보라색 망토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망토 군데군데에 짙게 물든 자국을 보았다.

저건 핏자국인가?

그보다… 저자는 누구지?

연연에게 겹쳐 보이는 걸로 보아, 정황상으론 오연과 깊이 연관된 이일 확률이 높다. 어쩌면… 오연의 분신 같은 존재일지도 모르고.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다. 완벽히 풀리지 않는 의문에 설핏 인상을 쓰는 그때, 두세 개로 나뉘었던 잔상이 하나로 완전히 합쳐지며 손안에 쥐었던 한 자락의 기운이 내 안으로 스며들었다.

진기와 선기는 상충되기 마련인데, 그 기운은 아무 저항도 일으키지 않았다.

내 안에 이미 있는 소량의 선기와 같은 기운이었기 때문이다.

11년 전, 우횡산에서 오연을 죽일 때 내 힘을 폭발적으로 이끌어 내는 데 도움을 준 그 잠재된 기[氣]와 같았다.

그 당시에는 그게 우사가 도와준 거라고 생각했는데….

‘믿지 않겠지만,’

한 자락 기운이 내 안에 잠재된 선기와 합쳐지는 순간 환청이 들려왔다.

‘오연의 생에 내 모든 정을 네게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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