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오연의 생에 내 모든 정을 네게 주었다.’ 그 말에 머릿속이 멍해졌다.
사고가 제대로 되질 않는다.
‘네게 베푼 원멸이란 은[恩]은 그와 비등한 크기인 원[怨]으로 되돌아오겠지만, 그래도 무엇도 아쉽지 않구나.’
그게 마지막이었다. 무엇도 아쉽지 않단 말을 끝으로 더는 어떤 환청도 들려오지 않았다.
환영이 사라진 자리엔 오롯이 연연만이 있었다. 내가 만든 도자기 인형.
연연[然緣].
문득 지난날이 떠올랐다. 오연에게 거둬지고 그에게 처음 구배지례(제자가 스승에게 올리는 절)를 올린 날이 말이다.
계수배(큰절)를 올리는 내게 오연은 단 한마디의 말만 했다.
‘앞으로 네 모든 언행에 내 책임이 뒤따를 것이다.’
뒷배가 되어 주겠단 말과 다름없다고, 그 당시에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리고 지금 오연은… 없다.
‘…스승님.’
속으로 낮게 뇌까렸다.
이젠 정말 모르겠다. 나한테 당신은 뭐였는지, …그리고 당신한테 나는 뭐였는지. 내 몽경 안에 남아 있는 원멸 이전 기억은 오직 나한테만 초점이 맞춰져 있어, 나를 중심으로 단편적으로만 존재한다. 그래서 내가 알 수 있는 건 내 마음뿐이다.
그런데 이제는 내 마음조차 모르겠다. 내 마음을 만드는데 일조한 그러한 것들이 다, 전부 맞춰지지 않은 퍼즐이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 이면에 남겨졌을지 모를 퍼즐 조각이 숨긴 진실이 이제까지의 모든 걸 통째로 부정할 정도의 강한 파랑[波浪]이라면. 그 파랑이 지금의 내 감정을 전부 덮을 정도라면….
“사부.”
이제야 뒤를 돌아봤다가 나를 발견한 연연이 희게 미소 짓는다. 그런 연연을 내려다보며 나도 흐리게 마주 미소 지었다.
…이제라도 그 파랑[波浪]에 몸을 던져야겠다. 그래야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무엇도 남지 않게 전부 완전히 끝을 볼 수 있을 거다.
“무본이랑 잘 있었어?”
“응.”
고개를 끄덕여 대답하며 연연이 화관을 두 손으로 들어 내게 내민다.
날 올려다보는 얼굴에 배시시 웃음이 지어진다. 기대에 차 반짝이는 눈을 마주하며 나는 화관을 받아 들었다.
“사부 주려고 연연이 만든 거야?”
“응!”
나는 피식 웃으며 손안의 화관을 만지작거렸다. 생각보다 더 정성스럽게 잘 만들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잘 만들 수 있는 거지? 화관 만드는 방법은 안 알려 줬는데.
무본이 알려 줬을 리도 만무하다. 저 걸개의 그림자는 내내 제 머리만 부여잡고 있는 상태였으니 말이다.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이며 한쪽 눈썹을 까닥 치켜올렸다.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고, 처음 만드는 게 분명한 상태였을 텐데도 이렇게 잘 만들었다고?
아무래도 연연에게 잔영처럼 남아 있던 그 선기가 의심스럽다. 지금 연연은 그릇이 텅 빈 상태이니 그새 누가 잠시 깃들었다 해도 아주 말이 안 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육신의 역할을 하는 인형 몸 안에는 오연의 잔혼만이 있으니까.
하지만 잔혼일지라도 어쨌든 몸의 주인은 있는 상태라 저항은 있었을 테고 그 흔적이 육신인 그릇으로 나타났을 텐데, 연연의 몸엔 아무런 흔적도 없다.
지금 내 앞의 연연은 아주 멀쩡해 보였다. 뿐만 아니라 그 선기는 연연에게 겹쳐 있는 잔상 세 개를 보여 줬다. 환영도, 환청도 전부 다 그 선기가 촉발제가 되어 나로 하여금 떠올리게 만든 거다.
…또, 내 안에 잔존해 있는 선기와 같았다.
내 생각에 이 선기는 오연과 아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은발은 아주 높은 확률로 오연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일지 모른다.
뭐, 전부 내 가정일 뿐, 그 정체에 대해 확실한 건 아직까진 아무것도 없지만.
어쨌든 그 은발을 찾아야 한다. 그자가 내가 놓친 퍼즐 조각일 확률이 아주아주 높으니까.
“사부?”
화관을 든 채 생각에 잠겨 있는데 연연이 그런 날 부른다. 퍼뜩 상념에서 깨어나 연연과 눈을 맞췄다.
“아. 응. 너무 잘 만들어서. 이건 어떻게 만든 거야?”
화관을 머리에 쓰며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연연은 내 머리에 올려진 화관과 나를 번갈아 보다 양손을 펼쳐 들었다.
“손으로 했어.”
“…….”
그야 당연히 손으로 만들었겠지.
보아하니 연연에겐 더 물을 게 없다.
나는 연연이 펼쳐 보인 양손에 내 두 손을 짝-! 소리 나게 맞부딪친 뒤 씩 웃었다.
“고마워.”
조금 휘둥그레졌던 연연의 눈이 내 감사 인사에 반달로 휜다.
“응!”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 뒤 연연은, 나를 지나쳐 꽃이 가득 핀 잡초더미로 갔다. 그 사이에 웅크리고 앉아 꽃줄기를 뜯기 시작하는 연연을 돌아봤다. 화관을 엮은 게 아까 그 선기의 소행이라면, 지금의 연연은 화관을 만들지 못할 거다.
나는 꽃줄기와 잎을 꼬고 묶는 연연의 손을 보았다. 엉성할 거란 예상과 달리 연연은 제법 능숙해 보였다.
“…….”
그러면 화관 만들기도 오연 본연이 지닌 재주인가. 젓가락질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때까지 오연이 화관 만드는 걸 한 번도 보지 못했는데….
그새 화관 만들기에 푹 빠진 연연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집중하고 있는 그 옆얼굴을 물끄러미 보고 있는데, 그런 내 시선이 신경 쓰였는지 연연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나를 본다. 그에 나는 연연이 만들고 있는 화관을 눈짓하며 말했다.
“화관 또 만드는 거야?”
“응. 사부 거야.”
내 거?
“내 건 여기 있는데?”
쓰고 있는 화관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이것도 내 거고, 저것도 내 거라는 연연의 답변을 얻었다.
두 개씩이나 필요는 없지만 화관을 만드는 연연이 퍽 즐거워 보여 그냥 두었다.
그리고 무본이 앉아 있는 널따란 바위로 가, 그 위에 자리를 잡았다.
어느새 무본은 바위의 가장자리로 엉덩이를 옮겼다. 나와 최대한 거리를 벌리려는 게 보였다. 그러면서도 일어날 생각은 않고 꿋꿋이 앉아 있는 게 참 그다웠다.
나는 자리의 평평함보단 연연이 잘 보이는 각도를 우선시해 앉았다. 처음엔 자연스럽게 한쪽 무릎을 세우고 거기에 팔을 걸쳤다가, 다시 자세를 바꿔 가부좌로 앉았다. 그러곤 선사들이 참선을 할 때처럼 양 무릎에 두 손을 올려 각각 엄지와 중지를 맞댔다.
그리고 잠시 숨을 고른 뒤 좌선에 들어갔다.
세간[世間]에서부터 오는 모든 심상을 끊고 정신을 집중하는 일반적인 좌선이 아니기에 두 눈은 감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건 무념무상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이 아닌, 이치의 근본을 꿰뚫는 것이다.
뿌리, 시초, 그 본질에 닿기 위해 정신을 흩트리는 사리분별만 끊을 뿐, 오히려 번뇌의 중심에 들어서는 행위였으니, 따져보면 좌선이라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애초에 좌선의 취지와는 아예 반대되니 말이다.
어쨌든 시선은 연연에게 둔 채 내 안에 조금 고여 있는 선기를 들여다봤다. 아까 전 연연에게 잔영처럼 있던 선기와 같은 것이고, 또 그 선기가 스몄으니 잘만 이용하면 조금 전의 환영을 다시 볼 수 있을 거다.
나는 깊이 숨을 골랐다.
‘후….’
…좋아. 그러면 일단, 어떻게든 아까처럼 촉매제 역할부터 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것부터 시작이다.
“…….”
그런데 그 촉매제 역할을 하게 만들 방도를 모르니 우선 가장 기본적인 것부터 했다.
건드리고, 두드리고, 억지로 움직여 보다가 일순 기혈이 뒤틀려 각혈할 뻔했다.
속에서 올라오는 핏물을 삼키며 코끝으로 긴 숨을 내쉬었다. 온갖 자극을 줘 봤지만 별 성과가 없다. 뭉개고 비틀어 봐야 괜히 내 내상만 생기는 꼴이었다.
피로함을 느끼며 시선을 옆으로 움직였다. 눈동자의 동공만 왼쪽으로 굴려 옆의 무본을 보았다. 무본이 나를 곁눈질하던 중이었기에 바로 시선이 딱 마주쳤다. 곧장 시선을 피해도 이미 늦었다.
나는 좌선을 하느라 단정히 했던 자세를 느슨히 풀며 한 손으로 반대편 어깨를 주물렀다. 그러다 팔을 휙휙 돌려 어깨의 근육을 마저 풀고는, 이어 목도 좌우로 꺾으며 몸을 이완시켰다.
“무본.”
눈은 여전히 무본에게 고정한 채 툭 내뱉듯 불렀다. 내가 듣기에도 정말 성의 없는 부름이었다.
꿋꿋하게 연연만 보고 있던 무본이 그제야 어색한 웃음을 띠며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예예…. 좌선은 끝나셨습니까요?”
“…….”
“헤… 헤헤. 소인은 수양이 얕아 잘은 모르지만, 선사님의 얼굴이 그새 핼쑥해지고 눈이 푹 꺼진 걸로 보아, 아주 높은 경지의 수행이었나 봅니다요. 하이고야-, 과연 선사님이십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엄지까지 척 내미는 무본의 따봉을 말없이 응시했다.
무표정한 얼굴로 반응해 주지 않자 무본이 슬며시 엄지를 내리며 손을 거둔다.
다소 뻘쭘한 낯짝으로 내 눈치만 보는 무본을 얼마간 바라보다가 가는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별 기대는 없지만 일단 물어나 볼까.
“무본.”
재차 부르자 무본이 두 손을 무릎 위로 공손히 모으며 허리를 꼿꼿이 편다.
“예, 예…!”
저 나름 빠릿하게 대꾸하는 무본을 시큰둥히 쳐다봤다.
“내가 잠시 눈을 뗀 사이에 무슨 일은 없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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