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일? 일이라면….”
뭔가 생각하는 무본의 눈이 바쁘게 움직이던 것도 잠시, 곧 두 눈을 크게 뜬다. 하지만 그건 찰나였고 곧바로 혼자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더니, 아까보다 더 골똘히 뭔가를 생각한다.
뭐든 생각해내려는 게 보였다. 그러나 결국 더 생각나는 것이 없는지 주저하며 입을 연다.
“그…, 아무리 생각해도 별일 없었던 것 같은데, …그런데 그렇다고 아주 없는 것 같진 않고…. 뭔 일이 있었다고 딱 부러져 말하기엔 소인의 착각일 수도 있어서 말입니다요.”
한껏 사리는 어투는 조심스러움을 넘어 망설이는 기색까지 있었다. 나는 그런 무본을 심드렁히 쳐다봤다. 그 속내가 뻔히 읽혔다. 얼굴에 대놓고 적혀 있었으니 말이다.
딱 봐도, 자신이 괜한 말을 하는 건 아닌지, 혹 날아올지 모를 불똥을 걱정하는 낯짝이었다.
나는 무심히 턱 끝을 살짝 까닥였다.
곧 무본이 눈치껏 입을 떼 이어 말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섬광을 보았습니다요.”
묘하게 낮아진 목소리였다.
“눈 한 번 깜박일 정도의 찰나였고 딱 한 번뿐이었던지라 소인의 눈이 잘못된 거일 수도 있습니다요. …선사님께서도 아시다시피 현재 소인의 눈에 문제가 좀 있지 않습니까요.”
“…….”
‘섬광?’
…흠.
일단 들어나 보잔 생각으로 잠자코 있어 줬다. 그런 내 침묵 하에 무본은 계속 이어 말했다.
“그런데! 직후에 바람이 크게 불더니-,”
한껏 낮춘 목소리로 무본은 양팔을 휘저어댔다. 제 딴에는 바람이 부는 모양을 실감 나게 흉내 내는 듯했다.
“선사님 제자분의 그림자가 갑자기 커졌습니다요…! …물론 그것도 아주 잠깐이었고,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며 생긴 그림자가 제자분 머리 위로 드리워진 거일 수도 있겠지만….”
연연의 그림자가 갑자기 커졌다고?
순간, 연연에게 겹쳐 봤었던 그 잔상들이 떠올랐다. 가장 먼저 짚이는 게 그것들이었기 때문이다.
“헛것을 봤다기엔 너무 똑똑히 본 것 같아서 말입니다요.”
목소리 크기를 다시 원래대로 키우며 무본이 찜찜하단 듯 말했다.
팔짱을 끼고선 궁시렁대는 무본에게서 시선을 돌려 연연을 보았다.
연연에게 잔영처럼 남아 있던 선기와 겹쳐 보였던 세 개의 잔상.
연연, 오연, 그리고 은발의 남자.
내가 만들어 지금 여기 있는 도자기 인형과 내가 죽여 세상 어디에도 없는 사람, 그리고 내가 처음 보는 낯선 남자.
결국 짚이는 건 한 사람뿐이다. 그는 내 안에 있는 선기와 같은 기운을 가졌고, 정황상 오연과 같은 존재이다. 그리고 어쩌면 조금 전에 연연의 육신(인형 몸)에 빙의했을지도 모르겠다.
그가 누구인지 찾고 싶지만 알아낼 방법이 요원하다. …뭐, 요원하다 해서 아주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내 안에 잔재해 있는 선기로 하여금 촉매제 역할을 하게끔 하면 된다. 선기에 자극을 주는 수준으론 안 되고…, 완전한 운기를 하면 될 것 같긴 한데.
하지만 그러려면 내 안에 그와 상충되는 기운인 진기가 하나도 없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원멸 이후 처음부터 내게 있었던 이 선기를 운기할 수 있다.
이론적으론 그렇다는 거다. 어쨌든 지금으로썬 그 방법을 쓸 수 없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귀신에게 있어 진기의 완전한 소멸은 죽음을 뜻한다. 지금 맞이하는 죽음은 어쨌거나 제대로 된 죽음은 아닐 테지.
예나 지금이나 내 목표는 같다.
원멸과 엮인 모든 원을 해소하는 것. 은원도, 인연도, 우연도 전부 다.
손을 들어 새삼 내 목의 흉을 매만져 보았다. 손끝으로 만져지는 흉을 덧그리듯 쓸다가 가는 숨을 내쉬었다.
…내 목표가 설령, 누군가 숨겨둔 파랑을 끄집어내는 일이 될 지라 하더라도. 아니, 그렇다면 오히려 내가 더 기꺼이 끄집어낼 거다. 그게 이 일상을 전부 덮어 버린다 해도, 나는….
“…….”
목을 매만지던 손을 내리며 깊이 숨을 삼켰다가 내쉬었다.
여전히 내 시야 안에 있는 연연은 화관을 만드는 데 열심이다. 멍하니 그 풍경을 눈에 담았다가 어느 순간부터 그 광경에 집중했다.
선선한 바람이 부드럽게 스치며 근방의 풀과 꽃, 그리고 나무 냄새가 보다 선명하게 다가온다. 청량하다. 느껴지는 모든 것이 유유하니, 그 잔잔한 기류에 평온함이 흐른다.
그 풍경 한가운데에 있는 연연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묘한 괴리감이 느껴진다. 마땅히 나와 유리되어 있어야 할 저 풍경에 내 자리가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래, 저건 지금 내 일상의 한 부분이다. 연연의 작은 두 손 사이에서 완성되어 가고 있는 저 화관이 바로 내 것이니까.
나는 눈을 살짝 내리떴다. 머리 위 화관의 존재가 분명히 느껴진다.
꿈같은 광경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내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나는 손을 쓰는 데 망설이지 않을 거다.
다시 시선을 들어 앞의 연연을 보았다. 막 완성된 화관을 들고 날 보며 웃는 연연을 향해 나도 희미하게 미소 지어 주었다.
“사부!”
내 미소에 화답하며 연연이 내게로 뛰어왔다. 짧은 거리라 금방 내 무릎께에 당도한 연연이 화관을 든 양손을 높이 들었다. 내게 직접 씌워 주려는 것이다.
나는 흔쾌히 머리를 숙여 연연이 마음대로 하게 두었다.
연연은 내 머리 위에 화관 두 개를 겹쳐 씌웠다가, 제가 보기에도 별로였는지 얼마 안 있어서 하나를 도로 뺐다. 그러곤 고심 끝에 제 머리 위에 썼다. 그리고 우물쭈물거리는 얼굴로 나를 본다.
나는 피식 웃으며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사부와 같은 화관이구나.”
같은 사람이 같은 날에 만든 거니 당연한 소리였다. 그럼에도 당연한 말을 굳이 한 건, 그냥, 연연이 쭈뼛거리길래 장난스럽게 한 거였다. 그런데 여기에 옆에 있던 무본이 말을 붙여 온다.
“이리 허물없는 사제지간이라니, 서로 간 정이 두터워 보여 참으로 좋아 보입니다요.”
“…….”
예전의 본래 사제지간이었다면 절대 듣지 못했을 말이었다. 서로의 자리가 바뀌고, 그에 따라 관계도 뒤집히며 듣는 말도 달라졌다.
내가 반응이 없자 무본이 쩔쩔매는 웃음을 띠며 내 눈치를 살핀다.
“소인은 그저, 나란히 화관을 쓴 모습이 정말로 정다워 보여서 한 말입니다요. 허… 허허…. 하이고야, 정말 다른 뜻이 있어서 한 말이 아니라, 기실 사제지간에 격식이며 예의도 중요하다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정[情] 아니겠습니까요? 가슴에 공경을 품었다 한들, 정이 없다면 속의 마음을 무엇이 붙들어 주겠소이까?”
연연이 무본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내 옆에 앉는다. 두 다리는 바위 아래로 내려 동동 흔들었다.
“지난한 풍랑을 만나면 그대로 떠나 버릴 것이 자명하외다. …흠흠. 소인은 그렇게 생각합니다요. 그래서 거지들이 밥그릇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정[情]입죠. 왜냐하면 ‘정’만큼 무서운 게….”
“‘정’이 뭔데?”
유일하게 무본의 말을 경청하고 있던 연연이 도중에 되물었다.
나는 연연이 머리에 잔뜩 묻혀 놓은 풀잎과 먼지를 떼 주다가 소매에서 빗을 꺼내 든 참이었다.
심마가 다시 돌아온다고 했으니 그때까지 여기서 시간을 보내며 기다릴 생각이었다.
“아주… 무서운 것입죠.”
제대로 된 청취자가 생겨 신났는지 무본이 목소리까지 깔며 답한다. 나는 그런 무본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연연의 머리에 빗을 갖다 댔다.
“이게 한 번 생기면, 아무리 미운 일이 생겨도 제대로 미워할 수도 없으니 말입니다요. 스스로의 마음을 제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지요. 왜냐, 정[情]이란 것은 마음을 내주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소이다, 공자. …흔히들 마음이 향하는 곳에 몸이 간다고들 하는데, 그건 누구나 제 마음이 있는 곳에 머물길 바라기 때문이오.”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무본의 말은 저절로 들려왔다. 자연히 아까 들었던 환청 또한 새삼 떠올랐다.
‘오연의 생에 내 모든 정을 네게 주었다.’
“…….”
연연의 머리를 빗질하는 속도가 점점 느려진다. 나는 빗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한데 천라지망 아래, 어찌 한 곳에만 영원히 머무를 수 있겠소이까?”
무본이 이어 말했다.
“만남이 있다면 으레 이별이 있는 법인 것을.”
‘네게 베푼 원멸이란 은[恩]은 그와 비등한 크기인 원[怨]으로 되돌아오겠지만,’
자꾸만 아까의 환청이 겹쳐 들린다.
나는 빗을 쥔 손을 억지로 움직여 계속 빗질을 했다. 헝클어져 있던 연연의 머리카락이 차분하게 정돈되었다.
얼추 빗질이 끝난 것을 보며 옆에 풀러 둔 단색 머리끈을 도로 집어 들었다.
“필연적으로 찾아온 헤어짐은 머물 장소를 가져가 길을 잃게 만들고, 정을 내줘서 텅 빈 마음은 사람을 사람답게 있지 못하게 하는데, 어찌 온전히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요? 그래서 정이 무서운 것입니다요, 공자.”
“…그러면 사부와 나는 무서운 걸 하고 있는 거야?”
막 머리를 묶어 주려는데 연연이 무본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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