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질 사형입니다-125화 (125/141)

<125화>

강하게 휘몰아치는 바람 너머로 강한 타격음 소리가 들려왔다.

마구 나부끼는 머리카락과 옷자락 사이로 흙먼지와 풀잎이 정신없이 날린다. 나는 무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진짜 정체가 무엇인지, 그 낯짝이라도 보려고 날린 살수였기 때문이다.

무본은 그새 법술로 결계를 쳐 자신과 연연을 보호하고 있었다. 결계의 테두리 안에 있는 연연을 힐끔 보았다가 도로 무본을 보았다.

충격을 완전히 피할 순 없었는지 무본의 코에서 검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쌍코피다. 내상도 입었는지 침과 함께 피를 뱉어 낸다.

“사부…!”

연연이 나를 불렀다.

놀라 크게 떠진 연연의 두 눈이 잘게 흔들리고 있었다. 내가 자신이 있는 곳을 향해 손을 썼단 걸 믿을 수 없어 하는 눈치였다.

충격받은 게 뻔히 보이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연연에 일부러 더 무표정을 유지했다.

“…사부.”

재차 나를 부르는 연연을 일별한 뒤 무본을 노려보았다. 무본의 신형이 일렁이고 있다.

변용술이 풀리는 것이다. 그러나 쌍코피에 각혈까지 하느라 정신이 없는 무본은 거기까진 신경을 못 쓰는 듯했다. 아니면 아예 알아채지 못했거나.

나를 올려다보는 면상에 핏대가 섰다.

“…씨-.”

곧 무본이 씨근덕대며 입을 열었다. 이어 나를 향해 삿대질까지 하려다가, 아직 이성이 아예 나가진 않은 건지, 그대로 꼬옥 검지를 말아 쥔다.

나는 무본이 하는 양을 지켜봤다.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이오?! 웬만한 핍박이면 그냥 넘어가려 했는데, 이 무슨…! 정말 너무하구려!”

목에 핏대까지 세우며 버럭버럭 외쳐대는 무본의 고함 사이로,

“사부. 나 무서워.”

연연의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내가 미처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무본의 변용술이 완전히 풀렸다.

얼굴을 가리고 있던 인면피가 녹아내리며 드러난 건….

“내가 뭘 잘못했다고! 소인도 더는 못 참겠습니다요! 방금 힘의 위력을 보아하니 역시 선군[仙君, 신선의 경칭] 같은데, 선군이면 다요?! 아니, 애초에 선군이 막 이래도 되는 겁니까요?”

흥분해서 뭐라 소리쳐대는 무본의 말이 희미하게 멀어진다. 애초부터 귀담아듣지 않았던 것이 이제는 아예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강한 파랑이 가슴 안에서 휘몰아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이 온통 먹먹하게 잠긴 것처럼 느껴진다. 모든 소음이 물먹은 것처럼 멀어지고, 나는 천천히 입술을 달싹여 중얼거렸다.

“…소설란.”

내 목소리가 귀에 또렷이 들리며, 이어 잠겨 있던 바깥의 소음이 일제히 내게 쏟아졌다. 폭력적으로 선명해진 소리들에 나는 설핏 인상을 찡그렸다.

“뭐 이렇게 괴팍해선…, …예?”

무본, 아니, 소설란의 표정이 어리벙벙해진다. 맹한 목소리를 흘리는 그녀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인면피가 떨어지고 드러난 아름다운 얼굴은 무척 낯익었다.

…그야 그럴 수밖에.

“…나를 알아…, 아니, 잠깐! 내 인면피!”

두 손으로 제 얼굴을 마구 더듬으며 소란을 피우던 것도 잠시,

“…떠, 떨어졌네….”

곧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소설란이 내 눈치를 힐끗 본다. 낯짝에는 어색한 웃음이 띠어져 있었다. 웃는 듯 우는 듯 묘한 표정이었다.

“흠흠-. …뭐,”

소설란은 작게 헛기침하더니 말을 돌렸다.

“그런데 제가 ‘소설란’이란 건 어떻게 알았습니까요?”

주위를 환기시킬 목적으로 돌린 주제가 정말 궁금해졌는지 소설란이 재차 묻는다.

“나를 알아요?”

날 보는 눈이 크게 깜박인다. 나는 그런 소설란을 말없이 응시했다. 내 침묵을 두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소설란의 표정이 갑자기 음흉해진다.

“그보다 이젠 내가 누군지 알았으니, 이전처럼 함부로 안 대할 거죠?”

느닷없이 기가 산 소설란을 차갑게 응시했다. 내 침묵이 계속 이어지자 소설란이 지레 쭈그러들어 내 눈치를 본다.

“…선군…?”

나보고 ‘선군’이라고 헛소리를 해대는 소설란은 내 기억 속 그때와 똑같았다. 원멸 이전 화계(육계 중 하나)에서 처음 만났을 때와.

그 당시 소설란은 어리숙하고 멍청하게도 봉족(봉황)에게 얻어맞고 있었다. 변덕을 부려 그걸 구해 줬더니 대뜸 제 진명부터 알려 주었었다.

‘가족들은 나를 ’청호[晴好]‘라고 불러요. 선군도 나를 그렇게 불러도 돼요. 참고로 ’청호‘가 내 진명이에요.’

‘…진명은 함부로 알려 주는 게 아니야.’

영물의 진명에는 각별한 의미가 따로 있단 걸 알기에 한 말이었다.

‘나도 알아요. 그래서 선군한테만 알려 주는 거니까, 이게 우리의 암호인 거예요.’

‘…….’

‘이런 암호라도 없으면 내가 어떻게 선군을 알아봐요?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전혀 모르겠는데. 이름도 안 알려 주고. 어쨌든 나중에 꼭 정령계로 와요! 와서 백호 일족의 청호를 찾으면 내가 바로 달려갈게요, 선군. 그때에 오늘의 빚을 천 배, 만 배로 갚아 줄 테니까 꼭 다시 나를 찾아와요!’

그리 말하며 의기양양하게 웃던 얼굴이 새삼 떠오른다.

“…….”

소매 아래 주먹 쥔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가며 손톱이 살갗을 찌른다. 나는 깊이 심호흡하며 어지럽게 들끓는 심상을 억지로 덮어 두었다.

…무본, 그러니까, 소설란은 정령계의 백호 일족인 영물이다. 그녀가 그때에도 지금에도 내 진기를 알아채지 못하는 건 본인의 수행이 부족한 것도 있고, 귀신과 대척점에 선 신선이 아니기 때문도 있다. 그래서 방금의 공격에서도 진기를 알아채지 못한 거다. 그 공격은 진기를 내공으로 눈속임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그러니 나보고 ‘선군’이라고 헛소리나 해대는 거지.

어쨌건 무본의 정체가 소설란이었다니.

연연과 깊이 관계되어 보이는 무본의 일로 심기가 불편했던 게 방금 전인데, 무본의 진짜 정체가 소설란이라고?

심장 한편이 싸늘하게 가라앉으며 공포가 스며들었다. 그건 불가해한 것을 마주하는 데서 오는 공포였다.

어째서 네가 무본이란 이름으로 여기에, 연연의 곁에 있는 거지?

‘이게 내 낭군의 뜻이고, 이 순간이 내 낭군의 염원이야. …알겠어? …왜냐하면 이건 룡존이 남긴 단 하나뿐인 유언이거든.’

원멸 이전 소설란이 내게 한 말이 머릿속에 쟁쟁히 울린다.

‘왜냐하면 룡존 전하는 단 한순간도…, 단 한순간도 네 놈 같은 사특한 종자 따위 사랑한 적 없으니까…!’

그 환청에,

챙그르르르-.

잘린 손가락에서 빠진 반지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와 겹친다. 겹치고 뒤섞여서 같이 울려 퍼진다. …그리고 남은 건 약지의 반지흔뿐이다.

“선군?”

다시 나를 부르는 소설란의 맹한 낯짝에, 나는 일단 모든 감정을 무표정 아래로 감췄다. 마치 가면을 쓰는 것처럼 말이다.

“…왜 여기서 개방 걸개 노릇을 하고 있는 거지?”

소설란을 차갑게 응시하며 물었다.

이렇게 바로 직접적으로 물을 줄은 몰랐는지 소설란이 애매모호한 얼굴로 눈을 굴린다.

“…예…, …헤헤… 헤….”

그러다 웃음으로 어물쩍 넘긴다. 그 꼴을 말없이 지켜만 보고 있자 소설란의 낯빛이 차츰 흐려진다.

“…그런데 내가 먼저 물었는데….”

혼자서 궁시렁 대는 목소리가 크다. 들으라고 하는 말인 게 보였다.

말한 직후 소설란은 다시 내 눈치를 힐끔 보더니 어깨를 축 늘어트린다.

“…예예. 알겠습니다요. 힘없는 영물이야 지고한 선군이 말하라면 말해야지요. …그런데 그 전에 저와 약조 하나만 해 주십시오.”

새끼손가락을 내밀어 보이며 소설란이 말했다. 어떻게든 약속을 받아내겠단 결연한 눈에는 묘한 불안감이 서려 있었다.

“보아하니 선군은 저를 아는 듯하여 노파심에 그러는 것인데…, 혹시라도 제가 여기 있단 걸…, 그러니까, 그냥 제가 여기 있는 것 자체를 못 본 걸로 해 주면…, 특히 아버지한테는, 아니, 제 일족 전부한테 비밀로 해 주세요!”

흥분과 초조로 점점 빨라지던 목소리는 끝에선 힘이 팍 들어가며 높이 울려 퍼졌다.

나는 여전히 내게 내밀어져 있는 소설란의 새끼손가락을 보았다. 이때까지 내 성정을 느꼈으면서도 정말로 내가 저기에 손가락이라도 마주 걸어 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정말이지 예전 기억 속과 달라진 게 없다.

짜증이 치밀며 마음도 삐딱해진다.

“본좌가 왜.”

더는 선군이란 소리도 듣기 싫어서 내가 귀왕이란 암시까지 흘렸다.

그런데 소설란은 내가 흘린 암시를 받아들이긴커녕 대수롭잖게 넘겼다. 그에 관해선 아무 생각도 없는 낯짝이었다.

“그…, 서, 선군께서도 소인이 아쉽지 않습니까요? 처음부터 제 쓸모를 알아봐 주신 게 선군이신데…. 제자분도 제가 맡아 주고, 그리고 또 뭐시다냐…. 아무튼! 선군도 소인이 필요하지 않으십니까요? 헤… 헤헤헤.”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내 눈치를 살핀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25)============================================================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