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나는 그런 소설란을 마뜩잖게 쳐다보며 미간을 구겼다.
…확실히… 그렇긴 하지.
소설란이 없으면 연연이 다시 말문을 닫을 수 있으니까.
둘 사이에 뭐가 있는진 몰라도, 어쨌든 지금 소설란의 쓸모는 연연에 한해선….
생각을 이으며 곁눈으로 연연을 보았다. 연연은 퉁퉁 부은 얼굴로 나만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계속 나만 보고 있었단 건 사실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연연의 두 눈이 그렁거린다. 소설란이 그런 연연의 어깨를 두 손으로 감싸 잡았다.
“맡겨만 주십시오!”
울먹이려는 연연의 입을 한 손으로 슬그머니 틀어막으며 소설란이 외쳤다. 나는 그런 소설란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오직 연연만 보았다.
연연은 제 입을 틀어막은 소설란의 손을 양손으로 붙들긴 했지만, 떼어 내려고 안간힘을 쓰는 정도까진 아니었다.
“…둘이 많이 친해졌네.”
낮게 읊조리듯 말하며 연연과 시선을 맞췄다. 눈 맞춤이 깊어질수록 연연이 시선을 내리깐다. 마침내 고개를 숙이는 연연에게서 눈을 돌려 바로 뒤의 소설란을 보았다.
“그렇게 해.”
내가 말했다.
소설란의 눈이며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진다.
“예! 예, 선군. 그러면 소인이 왜 여기서 개방 걸개 노릇을 하고 있었느냐, 소상히 말씀드리겠습니다요! 그게 실은, 견문을 넓히고자 개인 수행을.”
‘-빙자한 가출이군.’
속으로 짧게 조소하며 이죽였다. 안 봐도 비디오다.
“…….”
…‘비디오’라.
느닷없이 튀어나온 낯선 단어에 멈칫했다가 그냥 흘려보냈다. 한두 번 이런 것도 아니고.
소설란이 앞에서 계속 말을 이었다. 강호출두니, 선문세가나 정파에 들어가려 했는데 개방이 가장 규율이 느슨하고 자유로워 좋았다느니, 그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말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운지 뿌듯하게 웃는 소설란을 보며, 나는 연연과 무슨 관계냐고 물을까 말까 속으로 고심했다.
지난 악연이 악연이니만큼 소설란의 존재 자체가 거슬렸다. 일단은 연연에 한해선 그 쓸모가 분명히 보여 참아 주겠지만, 끝까지 두고 볼 생각은 없다.
애초에 지금의 내 인내는 그녀를 향한 것이 아닌, 그녀의 쓸모를 향한 것이다.
소설란. 이번엔 네가 날 원망하게 만들 일은 없을 거야.
“…그렇습니다요!”
말을 마친 소설란이 씩씩하게 외쳤다. 방금 한 생각에 대한 대답 같은, 뭔가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나도 모르게 한쪽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가며 쓴웃음이 지어졌다.
상념에서 빠져나와 앞의 둘을 새삼 다시 보았다.
“…….”
나는 길게 고민하지 않고 바로 물으려 했다.
가령…, 오연이란 선인을 아느냐는 식으로 말이다. 소설란은 단순하고 생각하는 게 다 표가 나니 이런 단순한 질문만으로도 알아낼 건 다 알아낼 수 있을 거다.
“그래서 선군도 여기에 오신 건가요?”
그런데 내가 묻기도 전에 소설란이 먼저 물었다. 나는 살짝 뗐던 입을 도로 다물었다.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소설란이 하는 말 대부분을 흘러들었더니 잘 모르겠다. 그렇다고 다시 묻는 것도 싫어서 그냥 짧게 목을 울렸다.
“음.”
이러면 알아서 또 떠들 거다. 1년을 함께 지냈던 시간이 있어서 잘 안다.
“‘천태자’말입니다요.”
과연 소설란이 다시 말을 해 왔다.
‘천태자’라면 천계의 태자를 말하는 건가.
원멸 이전에도 직접 부딪친 적은 없어서 그에 대해선 잘 모른다.
“선군도 인연이 닿으면 출셋길이 열릴까 봐 오신 것이지요? 사실 제 최종 목표가 천태자 산하의 ‘반금부’에 들어가는 것입니다요.”
반금부라면 천계에서 가장 성가신 놈들이 모여 있는 부대이다.
원멸 이전에 나와 가장 많이 부딪쳤고, 나를 천옥에 끌고 가 가둔 것도 그 반금부이다.
천제[天帝]의 개인줄 알았더니 천태자의 개였군.
“……선군께선 안 비웃으시네요. 영물인 제가 반금부에 들어가겠다고 했는데.”
앞에서 들려오는 소설란의 말에 한쪽 눈썹을 까닥 치켜올렸다.
“소인이 반금부라니. 천계에서 영물이 갖는 위치만 생각해 봐도 말이 안 되는 건데…. 가당치도 않은 소원이지 않습니까요.”
내 눈치를 살피며 소설란이 이어 말했다.
관심도 없는 이야기다.
“그래서?”
지루한 기색을 드러내며 코끝으로 긴 숨을 내쉬었다. 그런 날 보는 소설란의 표정이 어리벙벙해진다.
혼자서 ‘그래서, …그래서…,’란 말만 되뇌더니 갑자기 낯빛이 밝아진다. 그러곤 바위 끝자락에 슬그머니 엉덩이를 들이민다.
누가 봐도 근처에 앉으려는 자세에 나는 한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러자 소설란이 도로 엉거주춤 일어섰다.
“…앉으면 안 되는 겁니까요?”
“앉고 싶어?”
“……아니요.”
이리저리 눈을 굴리다가 고개까지 도리도리 흔들며 소설란이 대답했다. 그에 나는 가는 숨을 내쉬며 가부좌를 틀고 앉은 자세에서 한쪽 무릎을 세웠다.
무릎 위에 한쪽 팔을 대고선, 팔꿈치를 굽혀 손등에 뺨을 기댔다. 느른하다 못해 방만하기까지 한 자세였다.
그 상태로 연연과 소설란 사이 어디쯤에 시선을 두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 손으로 앉아 있는 바위를 탁, 탁 두드렸다.
일정한 간격으로 울려 퍼지던 소리가 어느 순간부터 음을 타기 시작했다. 나는 마치 피아노를 치듯 손가락을 유려하게 움직였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서 정수리만 보이는 연연이 내 손짓에 관심을 갖는 게 느껴졌지만 일단 그대로 두고, 힐끗 시선을 들어 소설란을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소설란이 어색하기 그지없는 웃음을 짓는다. 그 낯짝을 무표정하게 지켜보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더 말해 봐.”
“뭘 말입니까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선 멀뚱히 묻는 소설란에,
“-아무거나.”
대수롭잖게 이어 말했다.
그에 소설란이 영 감이 안 잡힌단 얼굴로 되묻는다.
“…아무거나요?”
막상 멍석을 깔아 주니 주저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래서 내가 친히 화두를 던져 주기로 했다.
“여기 낙주에 대해서도 좋고, 연화경이나…, 아니면 가령 천계에 관한 것이라거나.”
“하지만 소인이 뭘 말해도 선군이 아는 것에 비하지 못할 텐데….”
“상관없어. 네가 말하는 걸 듣고 싶은 거니까.”
“제가 말하는 걸요?”
날 보는 눈이 ‘왜요?’라고 묻고 있다. 물음을 한가득 담고 있는 그 눈을 주시하며 입매를 미미하게 호선으로 휘어 올렸다.
“가장 잘 아는 걸 말해 봐.”
‘가령 ‘오연’이라던가.’
나는 뒤의 말을 잇지 않고 소설란만 보았다.
소설란은 그런 날 이상하게 쳐다보다가, 내 여흥 같은 거라 생각하기로 했는지 갑자기 속 편해진 낯으로 선뜻 입을 열었다.
방금 내 말이 부탁 따위가 아닌 명령이란 걸 서로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인이 가장 잘 아는 것이라면, 현재로써 소인이 가장 관심을 둔 것이겠고…, 그렇다면야 단연 태자 전하이시겠지요.”
천계의 태자인 천태자 ‘염행’.
소설란은 그의 치적에 대해 줄줄이 읊었다. 주로 반금부와 엮인 그 일화들은 어떤 것은 소상하고, 어떤 것은 간략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대부분이 어떤 귀신을 잡았고, 무슨 괴물을 때려잡았느냐의 식이었다.
따분한 이야기는 천계의 혼돈에 이르러선 지루함의 절정에 달했다.
“천계의 동쪽에 있다는 혼돈은 상고시대 때부터 존재해 왔다던데, 선군께선 보신 적 있으신가요?”
관심 없다.
내 심드렁한 태도에서 답을 읽었는지 소설란은 더는 묻지 않고, 혼자서 주절주절 잘만 말을 이어 갔다.
“사실 제가 반금부에 들어가고 싶은 게 그 혼돈 때문이거든요. 반금부의 주요 임무 중 하나가 혼돈을 감시하고 경계하는 것이니, 반금부에만 들어가면 자연히 혼돈을 볼 수 있겠죠. 그래서 소인이 반금부에 들어가려는 것입니다요.”
“…….”
“흐흠. 소인이 왜 혼돈을 보고 싶어 하는지 궁금하//진// 않으십니까요?”
소설란이 씩 웃어 보이며 신나선 말을 잇는다. 나한테 질릴 정도로 당했으면서, 저 천진난만함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건지 모르겠다.
“그 전에 소인이 어떻게 천태자의 행방을 찾았는지, 그 비법이 무엇인지 궁금하시겠지요. 크흠-, 기실 천태자의 행방을 저 같은 영물이 무슨 수로 알겠습니까요? 사사로운 것부터 중대한 것까지 하나같이 전부 다 은밀한 데다, 그분 자체도 워낙 성정이 고고하셔서 단독 행동하는 경향이 짙으시니, 천계에서도 천태자의 행방을 속속들이 아는 이들은 극히 드물 겁니다요.”
말을 이으며 소설란이 바위에 슬쩍 몸을 붙인다. 여차하면 그대로 앉을 기세다. 나는 그 모습을 못 본 척하며 연연을 슬쩍 곁눈질했다.
연연의 몸은 어느새 내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나는 바위를 두드리던 걸 멈추고 손을 살짝 들어 펴 보였다. 그리고 느긋하게 손가락을 하나씩 접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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