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연연이 그런 내 손에 집중한 게 보인다. 나는 속으로 설핏 웃었다.
“그런데 선군은 여기 낙주에 천태자가 있단 걸 어떻게 아셨습니까요?”
“몰랐는데.”
대충 대답하며 이제 막 세 번째 손가락을 접었다.
“…모르셨다고요?”
소설란이 벙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 저는, 어쩌면 선군도 소인과 같은 방법으로….”
“본좌는 별자리는 잘 못 읽어. 북두성군(도교에서 인간의 수명(죽음)을 관장하는 신.)과 사이가 좋지 않거든.”
네 번째 손가락을 접었다.
“북두성군과는 왜…, 아니, 그보다 소인이 별자리 읽기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단 걸 선군께 말한 적이 있습니까요?”
“…….”
나는 잠깐 멈칫했다.
“어.”
일부러 소설란과 똑바로 눈을 맞추며 대답했다. 전부 원멸 이전에 안 것들이긴 하지만, …그때의 너는 지금과 같이 여전히 말이 많았고, 내게 비밀이 없었다.
내 당당하다 못해 뻔뻔한 대답에 소설란이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빠르게 깜박인다. 머릿속을 되짚어보는 것 같은데 그래 봐야 떠올릴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을 거다. 그날의 일들은 전부 없던 게 됐으니까.
“…그런 적 없는 것 같은뎁쇼?”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소설란이 말했다. 찌푸려진 미간에 억울함이 서려 있다.
“그럼 내가 그걸 어떻게 아는데?”
내가 바로 반문했다. 그러자 소설란이 애매모호한 얼굴로 고개를 반대편으로 기울인다. 두 눈엔 날 향한 의심이 얕게 깔려 있다.
“…그야…, 선군은 처음부터 절 알고 있었으니, 혹시 저에 대해 뭔가 조사 같은 거라도,”
“나에게 네가 천태자와 같은 급인 줄 알아?”
“…예?”
“네놈이 천태자 뒤를 밟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인데, 내게도 그만한 이유가 있겠느냐는 거다.”
“…….”
소설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아랫입술을 말아 물더니, 곧 입을 열었다.
“그런 대단하신 선군께서 저같이 보잘것없는 영물은 어떻게 알고 계시는 겁니까요?”
소설란이 소심하게 따져 물었다.
“…예전에 네놈이 기연이라도 얻었나 보지.”
나는 대수롭잖게 받아쳤다.
“기연? 선군이 제 기연이라고요?”
소름 돋는단 표정을 감추지 않으며 소설란이 반문한다.
“그런데 제 기억에는 없는데요?”
“…….”
“……우리…, 언제 만난 적 있어요?”
“…….”
“선군.”
무시로 일관하는 나를 한차례 부른 뒤 소설란은 기어코 바위 끝자락에 앉았다. 눈치를 보느라 제대로 앉지 못하고 끝에만 살짝 걸터앉은 채 내 낯빛을 살폈다.
“…하이고야-. 알겠습니다요. 그러면 나중에 꼭 말해 주십시오. …그리고 선군. 선군은 소인이 반금부에 들어가겠단 개인적 욕심으로 천태자 뒤를 밟는, 아니, 뒤를 쫓는 무뢰한으로 보시는 모양인데, 물론 따져보면 그도 맞고, 그분과 의도적인 우연을 만들어 어떻게든 인맥 좀 만들려 하는 것도 맞는뎁쇼. 그런데 그렇다고 그걸 토대로 반금부에 들어갈 운명을 만들겠단 것도……, 뭐… 맞기야 합죠….”
스스로 제 무덤을 파는 소설란의 작태에 나는 코끝으로 비소했다.
“우연에 인연을 더해 인맥을 만들고 거기에 운명까지라. 그러려면 필연적으로 천태자와 정을 쌓아야겠군.”
내 직설에 소설란이 발끈한다.
“아까 네 말대로 말이지.”
이어지는 내 말에 소설란이 도로 어깨를 축 늘어트린다.
하여간 입이 화근이라며 제 주둥이를 툭툭 쳐대는 꼴을 일별했다.
머잖아 소설란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예-. 선군의 눈에 제가 어떻게 보일진 잘 알겠습니다요.”
그 말에 나는 속으로 차게 비소했다.
알긴.
알면 지금 당장 꽁지 빠지게 도망갔을걸.
“아무튼! 아까 소인이 하려던 말은, 소인이 진정 쫓는 건 ‘귀인’이란 것입니다요. 아무리 소인이 별자리 읽기에 천부적인 재능을 지녔다고 한들 어떻게 천태자의 행방을 읽겠습니까요? 설령 읽을 수 있다 한들, 함부로 읽어 봐야 사달만 날 뿐입죠.”
소설란이 장황하게 말을 이어 갔다. 나는 그 말을 한 귀로 들으며 남은 손가락 하나를 마저 접었다.
이제 손가락 다섯 개가 전부 접혔다. 그걸 다시 폈다 접었다 잼잼을 하며 연연의 반응을 살폈다.
“그러니 소인은 천태자의 뒤를 밟은 것이 아닌, 귀인의 뒤를 쫓은, 아니, 쫓았다기보단 앞서 나아가 귀인이 오시길 기다린 것이지요. 바로 저 스스로의 운명을 읽어서 말입니다요!”
소설란이 외쳤다. 말을 하면서도 제 말에 흥분했는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는 게 느껴졌다.
“소인의 귀인이 이 낙주에 있다는데, 그 귀인이 누구일지야 아주 뻔한 것 아니겠습니까요?! 허허-. 소인이 가장 가고 싶은 곳이 반금부이니, 단연 그곳의 수장인 천태자 전하인 게 확실합니다요!”
확신에 찬 소설란의 목소리가 끝에 달할수록 점점 커졌다. 그리고 마침내 끝맺을 땐 흥분에 휩싸여 있었다. 물론 나는 그에 일말의 관심도 주지 않았다. 내가 듣고 싶은 건 소설란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입을 통해서 듣고 싶은 건 하나다.
나는 연연만 주시하며 내보이는 반응 하나하나에 집중했다.
“선군?”
내 반응이 시답지 않아서인지 소설란이 나를 불렀다.
“제 이야기는 그….”
말끝을 애매모호하게 흐리며 소설란이 어색한 웃음을 흘린다.
“계속 말해.”
소설란을 보지 않은 채 말했다.
연연은 어느 순간 내 가까이에 다가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내 품에 안겼다. 나는 그런 연연을 받쳐 안아 내 허벅지 위에 앉혔다. 그러자 연연이 두 팔을 뻗어 내 허리를 끌어안으며 내 가슴에 얼굴을 묻는다.
틈 하나 없이 딱 달라붙은 연연을 내려봤다. 축 처진 강아지 귀 모양으로 묶어 놓은 머리가 반쯤 풀어져선 양 갈래머리나 다름없게 되었다.
나는 연연의 정수리에 턱을 괬다. 그리고 한 손으로 연연의 등을 토닥였다.
“…나는 사부가 좋아.”
품 안에서 연연이 웅얼거렸다. 그에 나는 작게 목을 울려 답했다.
“응.”
“…….”
연연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무거운 숨을 내쉬며 연연의 정수리에 댔던 턱을 뗐다. 그러곤 자세를 바로 하며 시선을 들어 소설란을 보았다. 나와 연연을 번갈아 보고 있던 소설란이 흠칫 떨며 곧장 내게 시선을 맞췄다.
“또 무슨 이야기를 할깝쇼? 그런데 정말 제가 말하는 게 듣기 좋은 것입니까요? 그렇다기엔 별로 관심이…,”
“내 관심을 이끌어 낼 만한 걸 말해 봐.”
“선군의 관심이라면, 어떤…?”
조심스러운 물음에 나는 살짝 눈을 내리깔았다가, 다시 바로 소설란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네놈이 가장 잘 아는 것.”
“…선군. 소인이 눈치가 없어 도저히 선군의 심계[心界]를 헤아릴 수 없으니 부디 그냥 하문해 주십시오.”
소설란이 두 손을 꼭 모아 쥐며 말했다. 퍽 간절한 어투였다. 나는 그런 소설란을 빤히 응시하다가 살짝 입을 달싹였다.
“내 제자와 사이가 좋던데.”
“선군님 제자분과요?”
소설란이 금시초문이란 듯 되묻는다. 나는 눈을 돌려 시선을 흘렸다가 다시 소설란을 봤다.
“선인과는 어떻게 인연이 닿았지?”
“선인? 무슨 선인…, 아. 선군님 말입니까요?”
“……나 말고.”
“선군 말고라면…, 에잉-. 소인이 그런 게 어디 있겠습니까요? 하이고야-. 있으면 제가 이 고생을 하며 천태자 꽁무니를 뒤쫓고 있겠습, 하이고-, 이놈의 입이 또 방정을-! 헤…헤헤…. 방금 건 부디 잊어 주십,”
“소설란.”
“예!”
기합이 단단히 들어간 목소리로 대답하는 소설란을 보며 눈썹을 찌푸렸다.
그리고 이번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내 제자가 왜 너를 감싸는 거지?”
그리고 왜 네놈을 감싸며 처음으로 ‘사부’ 외의 다른 말을 한 거고.
대체 어떤 관계로 엮인 사이이길래.
속에서 엉기는 말들은 꺼내지 않고 품 안의 연연을 예의주시했다.
예상외로 연연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소설란 또한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그건…, 측은지심이 아니었을는지…. 으음-. …그리 생각해도 그건 소인의 생각일 뿐인지라 잘은 모르겠습니다요.”
정말 모르겠단 낯짝으로 소설란이 말했다. 기만의 기색은커녕 맹하기만 한 면상이다.
소설란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은근슬쩍 연연을 눈짓하며 장본인에게 물어보란 뉘앙스를 풍겨댔다.
“…….”
그에 나는 고개를 살짝 내저으며 코끝으로 긴 숨을 내쉬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오연’ 알아?”
그래서 그냥 아예 대놓고 물어봤다. 아무리 미끼를 던져도 물고기가 낚이지 않으니, 어쩌면 이게 처음부터 빈 호수가 아닐지 하는, 그런 생각까지 든다. 그럴 리 없단 걸 알면서도 말이다.
그래, 저건 그냥 물고기가 아닌 미꾸라지다. 왜냐하면 이 호수는 애초부터 고요하지 않고 밑에서부터 계속 흙탕[湯, 흙이 풀리어 몹시 흐려진 물]이 올라오고 있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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