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오연….”
소설란이 낮게 읊조리는 말에 품 안에 안겨 있던 연연의 몸이 일순 경직된다. 찰나긴 하지만 분명 몸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그게 뜻하는 바는 하나다.
선선하다 느꼈던 바람이 이제는 으스스하며 쓸쓸하게 다가온다. 나는 일부러 연연을 보지 않고 소설란만 보았다.
심경의 변화가 내 시선에 드러났는지 소설란이 마른침을 한번 삼키곤 어정쩡한 웃음을 짓는다.
“그…, 소인이 아는 분입니까요?”
이어지는 소설란의 얼빠진 물음에 나는 코끝으로 긴 숨을 내쉬었다.
내 차가운 반응에 소설란이 변명을 늘어놓는다.
“-아니, 전 선군을 모르는데 선군은 저를 아시니, 오연이란 분도 소인을 아는데 소인은 모르는 건가 싶어서 드리는 말씀이온대…, 예, 소인이 실언을 했습니다요.”
넙죽 몸을 낮추는 소설란의 시인에 나는 싸늘히 시선을 거뒀다. 이로써 질문의 대상이 잘못되었단 게 확실해졌다. 이 일에 대해 물어볼 만한 이는 소설란이 아닌 연연이다.
연연에게 왜 소설란을 아끼느냐고 물어야 한다.
나는 속으로 잠시 고심하다가, 연연을 내려다보았다. 연연은 내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가만히 있었다.
“연연.”
내가 부르자 미약하게 반응이 오긴 하는데, 고개는 들지 않는다. 요지부동하려 애쓰는 게 보이지만 그렇다고 봐줄 생각은 들지 않았다.
‘연연, 소설란은 너한테 무슨 의미를 갖고 있어?’
“무본이 알고 보니 소설란이던데. 알고 있었어?”
속엣말은 삼키고 연연이 고개를 들든 말든 내 할 말만 이어 갔다.
“사부 몰래 비밀을 만들다니. 그래, 뭐.”
일부러 호쾌한 어투로 말하며 한쪽 어깨를 으쓱였다. 이 전부가 연연을 의식한 계산 속의 행동들이었다.
지금 내가 보이는 태도가 연연에게 어떻게 다가갈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내 노림수는 통했다. 연연의 망부석 같은 자세가 조금 흐트러졌다. 굳게 닫혀 있던 문의 빗장이 열리는 것처럼 슬며시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본다.
긴가민가한 표정엔 아직 경계심이 서려 있지만, 어쨌든 내게 얼굴을 보였다는 게 중요하다. 덕분에 연연과 눈을 마주할 수 있게 됐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제 들켰으니 비밀이 아니네.”
싱긋 웃으며 말했다. 연연의 눈이 동그래진다. 슬쩍 시선을 내리깔아 내 눈을 피하는 연연을 따라 고개를 움직였다.
“연연. 너한테 있어 쟤는 뭐야?”
나도 모르게 ‘쟤’라는 호칭으로 얼버무렸다. 무본과 소설란, 어느 한쪽을 분명히 짚어 말하면 돌아오는 대답 또한 분명해질 거란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저 말씀입니까요?”
여기서 ‘쟤’를 맡고 있는 놈이 눈치 없이 끼어들었다. 연연은 말이 없었다. 나는 대화에 끼어든 소설란을 차갑게 노려본 뒤 다시 연연에게 시선을 돌렸다.
“…뭔지는 알아야 참아 주지.”
내 말에 연연이 침을 한 번 꼴깍 삼킨 뒤 입을 연다.
“참아 주는 거야?”
연연이 물었다. 나는 고개를 옆으로 비스듬히 기울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한쪽 눈썹을 까닥이며 모호한 미소를 지었다.
“사부는 무본이… 싫어?”
“너는?”
곧장 되묻자 연연이 입을 꾹 다문다. 그러곤 잠시 고민하더니 곧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불쌍해.”
…불쌍하다고?
“왜?”
“……미움받고 있으니까.”
나는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가 다시 시선을 들어 연연과 눈을 맞추었다.
“사부가… 잘 대해 줬음 좋겠어?”
내 물음에 연연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은 뒤 말했다.
“내가 할게.”
“…….”
본인이 잘해 주겠다는 건가.
무본을 정말 마음에 들어 한다는 건 잘 알겠다. …다만 그게 진짜 무본인지, 아니면 소설란인지는 모르겠지만.
가슴 안에 가시가 하나 박힌 것 같다. 그 거슬림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다시 물었다.
“…연연, 무본이 소설란인 거 알았어?”
“알 리가 있겠습니까요?”
소설란이 옆에서 중얼거렸다.
“선군도 제 인면피가 떨어지기 직전까지 몰랐고, 그리고 소인은 저 공자를 보는 게 이번이 처음이란 말입니다.”
“그러면 왜 네놈이 연연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는 거지?”
“…예? 특별… 하다니요?”
소설란의 물음을 무시하며 연연만 바라보았다.
“연연. 너는 지금…, 소설란이 있어서 말을 하는 거야?”
내 말에 연연이 천천히 고개를 가로젓는다.
“사부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모르겠어.”
“…….”
“그런데 나는 사부랑 말하는 게 제일 좋아.”
예상치 못한 말에 순간 숨이 턱 막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올곧게 나를 향한 연연의 눈을 보았다. 그리고 그 눈에 비치는 나를 직시했다. 연연의 양어깨를 움켜잡은 두 손에 살짝 힘이 실렸다.
“……무본이 소설란인 거 알았어?”
다시 재차 물었다. 연연의 시선이 나를 비끼며 비스듬히 뒤를 돌아본다. 나도 눈을 굴려 연연이 돌아보는 방향에 있는 소설란을 보았다.
“…아니.”
곧 연연이 답했다.
“하지만 둘 다 같아. 같은 사람이잖아. 그렇지, 사부?”
다시 나를 돌아보며 연연이 물었다.
“…아니.”
길게 끌다가 나지막이 답했다.
“하나는 걸개 무본이고, 또 하나는 백호 일족의 소설란인데. 둘을 같은 선에 둘 수는 없지. 연연, 이 관계에 묶인 건 걸개 무본인 거야. 너는 걸개 무본과 어울린 거고.”
소설란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이로써 확실해졌군. 소설란은 이 관계 어디에도 없다는 게.”
천천히 시선을 내리깔아 연연을 보았다. 연연은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옆으로 까닥이며 눈썹을 치켜올렸다.
“무본!”
그 상태로 소설란, 아니 무본을 불렀다.
“예, 예! 선군!”
빠릿하게 대답하는 무본에게로 연연을 살짝 밀었다. 내가 저를 밀어낼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지 연연이 놀라선 나를 부른다.
“사부?”
“…사부는 잠시 찾으러 갈 게 있으니 여기서 무본과 함께 기다리고 있어.”
저물어가는 날을 보며 진작부터 생각해 둔 일정이었다. 위험할지도 모르니 연연은 여기에 남겨 두고 나 혼자 다녀올 생각이었다.
“같이 가, 사부.”
예상대로 연연이 고집을 부리며 내 옷자락을 꼭 붙잡아 왔다. 손이 새하얗게 질릴 정도로 힘을 주는 걸 보곤 다시 입을 열었다.
“알았어.”
선뜻한 허락과 함께 연연과 깊이 눈을 맞추며 주의를 하나 주었다.
“대신 위험할지도 모르니까 옆에서 떨어지면 안 돼.”
“응!”
“좋아. 그럼 같이 가자, 연연.”
호쾌히 말하며 입가에 가벼운 웃음을 띠었다. 그리고 곧바로 시선을 돌려 우리를 멀뚱히 보고 있는 무본에게로 곁눈질을 했다. 안타깝단 듯 눈썹을 찡그리자 미간에 저절로 골이 패인다.
나는 코끝으로 무거운 숨을 내쉬며 입을 뗐다.
“일이 이렇게 됐으니 무본만 안 됐군.”
“예?”
“사부?”
내 말에 연연과 무본이 동시에 반응을 보인다. 나는 내게 집중된 시선을 느끼며 입꼬리 끝을 살짝 휘어 올렸다.
“앞으로는 외눈으로 살아야 할 테니.”
“그게 무슨…?! 허, 헛! 호, 혹시…, 고, 고, 공자!!”
무본이 동아줄이라도 찾는 것처럼 냅다 연연을 불렀다. 동시에 연연이 내 옷자락을 꼭 잡았다. 그에 나는 눈썹 끝을 팔자[八]로 휘며 연연을 내려다봤다.
“무본은 안 데려갈 거야.”
내가 말했다.
“내가 곁에 둔 건 너뿐이니까, 연연.”
“…….”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 내 옷자락을 붙잡고 있는 연연의 손힘이 느슨해진다. 나는 그걸 물끄러미 보다가 연연에게 바짝 얼굴을 들이밀며 물었다.
“왜?”
내 물음이 기폭제가 되었는지 연연이 잡고 있던 내 옷자락을 놓는다.
완전히 놓은 걸 힐끔 확인한 뒤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마음이 바뀌었어, 연연? 사부와 같이 안 갈 거야?”
“…….”
“내 제자가 갑자기 왜 이럴까?”
연연이 입을 삐죽 내민다. 토라진 옆얼굴은 삐져 있었다.
“공자…….”
옆에서 무본이 감격한 소리를 낸다. 나는 가벼운 숨을 내쉬며 몸을 바로 했다.
“흠.”
작게 침음을 내뱉으며 뒤로 살짝 몸을 뺐다. 내가 일어나려 하자 연연이 내 허벅지 위에서 내려온다.
나는 연연을 두고 혼자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손으로 옷자락을 가볍게 떨쳐 의관을 대충 정돈한 뒤, 소맷자락을 크게 펄럭이며 등 뒤로 뒷짐 졌다. 그러곤 연연을 내려다보았다.
“변덕이 이렇게 심해서야. …아니면 동정심이 지나친 건가. -뭐든 간에 그러고 싶으면 그렇게 해, 연연.”
“…….”
“내가 허락할 테니.”
말을 끝맺으며 연연을 일별했다.
“무본!”
그리고 이번엔 무본을 호명했다. 그러자 무본이 후다닥 무릎을 꿇으며 예를 차렸다.
“예! 공자는 소인이 잘 보살피겠습니다요!”
재깍 나오는 대답에 나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고 바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런데 무본의 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어서 내게 하나를 더 물어왔다.
“그럼 이 관계가 끝날 때까지 전 무본입니까요?”
그 물음에 가슴 한편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래.”
짧게 대답했다.
그럼으로써 이 관계에 선이 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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