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질 사형입니다-129화 (129/141)

<129화>

“그럼 다녀오십시오!”

무본이 내게 말했다.

“그런데 저…, 선군. 많이 늦으시는 거면, 그…, 주방에 밥이 없던데 제자분 식사는 어떻게 할까요? 그리고 저도…. 헤헤…. 명실상부 선군이 제 명줄이니 그래도 밥은 좀…. 소인이 밥심으로 살아서 말입니다요.”

“…….”

“……그냥 굶을까요…?”

‘쯧.’

속으로 작게 혀를 차며 미간을 구겼다. 그리고 대꾸도 않고 바로 술법을 펼쳤다. 심마의 곁에 있는 동동을 도착 지점으로 한 순간이동술이었다.

빠르게 운기 되는 법진 속에서 내가 마지막까지 시선을 두고 있었던 건 연연이었다.

“사부, 빨리 와.”

연연이 내게 말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사위가 바뀌어 나는 다시 아까의 그 숲에 와 있었다.

깊이 숨을 들이 삼키며 정면을 바라보았다. 여기에 심마가 있다.

가볍게 주위를 둘러봤다. 당연히 지근거리에 동동을 두고 있을 줄 알았는데, 막상 와 보니 보이는 건 동동뿐이다.

곁으로 다가오는 동동을 일별한 뒤 앞으로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발아래로 나뭇잎과 꽃잎 따위가 돌멩이와 함께 밟힌다. 곁을 스치는 모든 것이 시야 가장자리로 들어온다.

비탈진 언덕에 늘어져 있는 덩굴 잎줄기, 기슭의 수풀과 사방으로 뻗친 들풀들. …그리고 내 앞의 커다란 고목.

구불구불하게 얽힌 뿌리 일부가 땅 위로 드러난 저 고목을 안다.

이제 여기가 어디인지 알겠다. …동동 혼자 여기 있는 건 우연일까, 아니면 심마의 어떤 의도일까.

어쨌든 이 장소는 내게 묘한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여기서 원멸 이전에 들었던 말과 정반대되는 말을 들었기 때문인 것도 있고, 심마가 눈물을 보였기 때문도 있다.

‘…가지 마.’

그리고 이어서, 원멸 이전에 심마가 한 말이 머릿속에 울린다.

‘가. …안 찾을게.’

‘그렇게 울 것 없이, 내가 미우면 날 욕하면서 떠나.’

원멸 이전이나 이후나 너는 달라진 것 없이 여전하단 걸 알기에 기분이 이상하다.

나는 앞의 고목을 바라보았다.

심마가 저 고목에 기댄 채 쓰러져 있었던 게 불과 한 시진(2시간) 전의 일이다.

고목 바로 앞에 서서 그 우거진 나뭇가지를 올려다봤다. 파랗게 돋아난 새순 사이로 햇빛이 비쳐든다. 부는 바람에는 아직 한기가 스며 있다.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나를 스치며 내 소맷자락을 흔들던 바람이 내게 작은 꽃잎을 가져왔다.

어깨 위로 내려앉은 꽃잎을 한 손으로 집어 눈앞에 들어 보였다. 풋풋하면서 달콤한 향이 어디선가 부드럽게 끼쳐 온다.

나는 꽃잎을 집은 손을 그대로 놓았다. 꽃잎은 바람에 날려 보내고 나는 고목에서 시선을 돌렸다. 구불구불하게 얽힌 나무뿌리에서도 비스듬히 걸음을 튼 채 시선을 살짝 내리깔았다.

심마가 그믐달 밤이 적기란 걸 내게 알려 줬을 때 생긴, 내 안의 잡념이 그 크기를 키웠기 때문이다. …‘혹시나’하는, 그런 기대가 말이다.

“…….”

나는 내리깔았던 시선을 바로 하며 다시 한번 더 고목을 곁눈으로 일별했다. 그러곤 곧바로 한 손을 뻗어 곁을 맴돌고 있는 동동을 잡아챘다.

손에 힘을 주자 동동이 내 손아귀 힘을 이기지 못하고 서서히 찌그러진다. 손가락 틈새로 가쁘게 튀는 푸른 불꽃이 산란하다. 그 상태로 내 눈앞까지 가져와, 푸른 불꽃에 싸여 있는 동동의 동공을 직시했다.

심마를 찾기 위해서 쓸 수 있는 수가 그리 많지 않다. 기감을 펼쳐 기척을 찾는 방법은 자칫 다른 선사들의 이목을 끌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일이 성가셔지니 최대한 은밀하게 움직여야 한다.

…이를테면, 동동의 눈이 마지막으로 심마를 보았던 장소로 나를 전송시킨다던가, 하는 방법으로 말이다. 지금까지 한 번도 시도해 본 적은 없지만, 동동의 동공을 통해 전송받을 수 있다면 전송할 수도 있겠지.

그 첫 시도가 나 자신이라는 게 걸리긴 해도 지금으로썬 그게 가장 빠르게 시도할 수 있는 방법이다.

나는 과감히 동동의 동공을 향해 다른 손을 뻗었다. 손끝에 맺힌 진기가 동동에게로 뻗어 나갔다. 여러 갈래로 뻗친 가닥이 어느 순간 하나로 모여 동동의 동공에 투과되는 순간, 주변의 공기 흐름이 미세하게 바뀌었다.

흘깃 곁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주위 경관도 아까와는 달라졌다. 고목이 있던 자리에는 덤불과 평범한 나무가 자리 잡고 있었다.

나를 전송시키는 방법이 무탈하게 성공한 거다. 여기가 동동이 마지막으로 심마를 보았던 장소다.

손안의 동동이 가장자리부터 푸른 불꽃으로 화해 스러져 간다. 한순간이긴 했지만 그 찰나도 나를 감당해 낼 수 없었던 거다.

동동은 더 버텨 내지 못하고 그대로 소멸해 버렸다.

나는 동동이 소멸하고 빈손을 가볍게 주먹 쥐며 등 뒤로 돌려 뒷짐 졌다. 미약하게 남은 진기의 잔흔은 그대로 흐트려 버렸다.

이제부터는 내가 직접 움직여야 한다.

여기서는 진기를 쓰지 않을 작정이라 당연히 술법은 쓸 수 없다. 게다가 기감 또한 펼치지 않을 거라 주변의 기운도 기민하게 알아챌 수 없다. 하지만 일정 거리 안의 기척은 느낄 수 있다.

…일단 한 번 운에 맡겨 볼까.

나는 여기서 가장 가깝게 느껴지는 기척을 향해 눈길을 돌렸다. 어디로 갈지는 우선 정해졌다.

여기서 내가 바라는 건 바로 거기에 네가 있는 거다.

“…….”

홀연히 걸음을 움직였다.

뒷짐 지지 않은 다른 손으로 검집째 선검을 들어 앞을 가로막는 나뭇가지며 수풀을 부러트리고 헤집었다. 전혀 길이 나지 않은 터라 내가 나아가는 대로 새로운 길이 만들어졌다.

얼마나 걸었을까.

앞서 느꼈던 기척이 점점 가까워진다. 내가 계속 그를 향해 걸어갔기 때문이라기엔, 거리가 좁혀지는 속도가 빠르다. 상대도 이쪽으로 오고 있는 거다.

덕분에 찾아가는 수고를 덜었다. 걸음을 빨리하며 앞을 가로막은 수풀을 검집으로 밀어젖혔다. 뒷짐은 어느새 푼 상태였다.

선검을 쥐지 않은 다른 손으로 곁의 나무를 짚으며 앞으로 성큼 걸음을 내디뎠다가, 다음 순간 바로 뒤로 몸을 물렸다.

조금 전 내가 발을 디뎠던 자리에 예기가 서린 나뭇잎 하나가 꽂혔다.

나는 바로 고개를 들어 정면을 보았다. 전방에는 아무도 없다. 코끝으로 무거운 숨을 내쉬며 이어 시선을 올렸다.

유독 나뭇가지가 우거져 그 아래로 응달이 진 키 큰 나무, 그 위에 오연히 선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나뭇가지 위에 선 그는 하나로 높이 묶은 고수머리를 관비녀로 고정하고 있었는데, 머리카락이 하얗게 센 백발이었다. 노인의 흰머리처럼 쇠약해 보이는 백발이 아닌, 몹시 희어 아름답게 느껴지는 백색이었다.

간혹 햇빛이 닿을 때면 은빛으로 빛나 신성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용모 역시 매우 준수했다. 뚜렷한 이목구비는 수려했으며 깊은 눈매에는 기품이 서려 있었다.

나는 냉엄한 얼굴의 남자를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나뭇가지 사이로 산란한 빛이 남자에게 닿을 때마다 찬연한 은빛이 되어 그 자체로 후광이 되었다.

속세를 벗어난 지고한 아름다움이었다.

“누구냐?”

입을 떼 물으면서도 속으론 상대가 선군일 거라 단정 지었다. 도통 인간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필 마주쳐도 저런 자와…. 하여간 재수가 없다.

속으로 투덜대며 살짝 인상을 썼다. 그리고 곁의 나무 뒤로 슬쩍 몸을 숨겼다. 이 시점에서 쓸데없는 마찰은 사양이다. 지금 내가 여기 온 건 심마를 데려가기 위해서지, 누군가와 충돌하며 괜한 시간 낭비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

“잠시 실례하겠소.”

남자가 내게 말했다.

그에 나는 한쪽 눈썹을 추켜올렸다.

부는 바람에 나뭇가지가 흔들려도 남자의 옷자락은 미약한 움직임 하나 없었다. 바람의 흐름이 저를 비껴가게 한 거다. 그래서 남자의 자태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실례?”

남자에게서 한 시도 눈을 떼지 않으며 나직이 입을 뗐다.

“이렇게 경우 없는 건 처음이군.”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쥐고 있던 선검을 천천히 들어 남자를 향해 겨누었다. 남자의 시선이 그런 내 움직임을 따라 움직이다가, 검 끝이 본인에게 겨눠진 순간 긴 눈꼬리가 살짝 가늘어지며 풍기는 기세가 날이 선 것처럼 예리해졌다.

그에 나는 한쪽 입꼬리를 삐딱하게 올리며 곧장 검을 고쳐 잡았다. 여전히 팔은 남자를 향해 내뻗은 채 검의 중앙을 가볍게 움켜쥐고선 깊이 숨을 들이 삼켰다가 곧장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나는 곤륜에서 온 선사 진연이오! 그대는 누구요?”

“…….”

상대는 말이 없었다. 날 주시하는 그의 기도가 일변한 건 그때였다. 다음 순간, 땅에 깔린 나뭇잎 수십 장이 천천히 허공으로 떠올랐다. 하나같이 예기를 담고 있어 그 끝이 비수처럼 날카로웠다. 나도 모르게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먼저 통성명까지 시도했는데 돌아오는 건 문답무용[問答無用]이라.

설마하니 바로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는데.

하기야 처음부터 비수를 날리고 본 인간이니 아주 놀랍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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