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내게 겨눠진 수십 개의 나뭇잎을 노려본 뒤 다시 남자를 보았다. 나를 보는 무표정한 얼굴엔 어떤 감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나는 남자를 향해 뻗었던 팔을 느리게 거두어 내렸다.
선사임을 뜻하는 선검을 대놓고 보여 줬는데도 저리 나온다는 건 나를 의심하고 있다는 뜻이다.
…아니, 의심 정도가 아니지. 아마 속으론 의심을 넘어 내심 확신하고 있을 거다. 다만 아직은 심증뿐이니 나를 시험해 보려는 거겠지.
저 비수처럼 만든 나뭇잎들로 말이다.
선사라면 응당 법술로 나뭇잎들을 쳐낼 테니까. 거기에 깃든 기운만 보면 가타부타 말 섞을 필요 없이 바로 확인 가능할 거란 속셈이 뻔히 보인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란 거겠지.
속으로 작게 혀를 차며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내가 어떤 빌미를 준 건진 모르겠지만 이래서야 대치가 불가피하다. 앞에 선 남자는 물러갈 생각이 없어 보이고, 그렇다고 날 물러가게 해 줄 생각 또한 없어 보이니 충돌은 피할 수 없다.
‘물러설 수 없다면….’
남은 선택지는 하나다.
고고하게 서선 무표정한 얼굴을 한 남자를 노려보았다. 고결한 풍모는 몹시 준엄해 보였다.
하여간 볼수록 재수 없는 낯짝이다.
‘기어이 본좌를 귀신으로 보겠다면 귀신으로 있어 주지.’
나는 입매를 휘어 비소를 지었다.
결심은 섰다.
선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검집 안의 검이 잘게 요동치는 게 느껴진다. 머잖아 손안에서 검집이 금이 가기 시작했다. 빠르게 가기 시작하는 균열을 느끼며 담담히 표정을 가라앉혔다.
그런데 그때,
‘극악한 길로는 가지 마시오.’
불현듯 심마의 그 말이 떠올랐다. 그믐달 뜨는 밤이 적기란 걸 알려 주던 그 목소리도, 내게 손을 흔들던 천진한 모습도.
…그래, 그러고 보니 지금 눈앞의 상대는 선군이지. 설령 선군이 아닐지라도 그에 필적한 선인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나는 왜 그런 상대를 앞에 두고서도 정기를 앗아 와야겠단 생각은 들지 않았을까.
살아서 너는 나를 배신했고, 죽어서도 그런 유언을 남겨 끝까지 나를 저버렸는데.
‘날 믿어?’
심마의 목소리가 뇌리에 울린다. 동시에 내게 겨눠져 있던 잎들이 일제히 쇄도해 왔다. 하나같이 살기가 분명히 느껴졌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검집을 쥔 손의 힘을 천천히 뺐다. 손아귀 힘이 느슨해지며 검집에 가던 균열도 멈췄다.
언제부턴가 깨물고 있던 입안 여린 살이 터지며 피 맛이 맴돌았다.
결심은 번복되었다.
나는 검을 쥔 팔을 다시 올리며 다른 손으로 단번에 검집을 빼냈다. 그리고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잎을 순수하게 선검으로만 쳐내려는 순간, 가까이서 파공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걸 인지한 찰나에는 이미 무언가가 내 어깨를 맞췄다.
퍽-!
몸이 뒤로 약간 밀리며 휘청였다. 하필이면 선검을 든 팔의 어깨라 그 충격에 검 끝이 흔들렸다. 나는 일단 쇄도해 오는 잎부터 처리할 생각으로 전방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런데 살기를 띠고 날아오던 잎 전부가 허공에 멈추더니 곧 땅으로 다시 나풀거리며 떨어져 내렸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인상을 쓰며 나뭇가지 위의 남자를 보았다가, 빠르게 눈을 굴려 아까 나를 맞춘 것을 찾았다.
뭔가 했더니만, 발치에 떨어져 있는 그건 작은 나무 열매였다.
“…….”
…그러니까, 도토리였다.
나는 시선을 들어 도토리가 날아온 방향으로 짐작되는 곳을 보았다. 때마침 수풀이 젖혀지며 그 너머로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심마.’
입안으로 중얼거렸다.
그는 심마였다.
심마가 이리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나무 위에 서 있던 남자가 지면으로 가뿐히 뛰어내린 건 다음 순간이었다.
“이염[念].”
남자의 곁에 서며 심마가 그를 불렀다. 나는 그런 심마를 바라보며 눈썹을 찡그렸다.
…둘이 아는 사이인 건가?
그런데 왜 아까 나한테 도토리를 던진 거지?
“진연.”
이어서 나를 부르며 심마가 미소 지었다.
“상황이 심상치 않아 보이길래 말릴 생각으로 일단 끼긴 했는데. 무슨 일이야?”
그 말에 나는 다시 힐끔 곁눈질로 땅 위의 도토리를 일별했다.
말릴 생각으로 그랬다고?
그런데 왜 도토리는 나한테 던진 거야? 멀쩡히 지나가던 사람한테 먼저 시비를 건 게 누구인데.
한 명은 다짜고짜 비수를 날리질 않나, 나머지 한 명은 느닷없이 도토리를 던지질 않나.
나는 앞의 두 명을 노려보며 선검을 도로 패용했다. 그러곤 습관적으로 팔짱을 끼려다가, 어깨에서 둔중하게 오는 통증에 미간을 구겼다.
팔짱을 끼려던 손을 풀며 못마땅한 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속에서 올라오는 짜증을 누르며 삐딱하게 서선 턱 끝을 살짝 들었다.
“길게 말할 것 없고.”
내가 말했다.
“어디 한 번 시시비비를 따져 보시지?”
이어 말하며 나는 앞의 두 명을 보았다.
말은 이렇게 해도 정말 따지고들 생각은 없었다. 어쨌든 상황은 일단락되었으니까. 다만…, 이 구도가 좀 마음에 안 든다.
꼭 2대 1같군.
……둘이 무슨 사이인 거지?
“진기를 느꼈어.”
남자, 이염이 말했다. 낮은 목소리는 진중했다.
심마는 내게 눈길도 주지 않고 이염만 보았다. 나는 그런 심마의 옆얼굴을 주시했다. 곧 심마의 입꼬리가 매끄럽게 호선을 그렸다.
“그럴 리가.”
미소 지으며 심마가 일축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이염. 이 공자는 이름이 진연이고 곤륜에서 온 선사야. 그리고…,”
심마가 말을 이으며 이제야 시선을 돌려 나를 보았다.
“이쪽은 연화경이고.”
남자, 이염을 소개하는 심마의 말은 아주 간단했다.
연화경.
하긴 낙주에서 그 호칭이면 여러 말 할 것 없이 충분하겠지.
“…알 게 뭐야.”
입안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물론 다들 귀가 밝으니 전부 들었을 거다.
심마가 나를 힐끗 봤다가 묘한 웃음을 지으며 앞으로 한 발 나선다.
“아무래도 오해가 있었던 것 같은데-.”
“네가 누구를 대신 소개해 주는 건 처음 보는데. 사승[私乘]. 네가 보증하는 거냐?”
이염이 심마를 ‘사승[私乘]’이라고 불렀다.
심마는 나를 보며 모호한 웃음만 지었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내게 느긋이 가까워지던 심마가 어느새 내 옆에 서선 빙글 몸을 돌려 이염을 마주 보며 내게 물었다.
“진연, 이염이 우리가 무슨 사이냐고 묻는데?”
“…….”
나는 고개를 돌려 심마를 보았다. 심마는 앞의 이염을 보고 있다가 천천히 시선을 돌려 나와 눈을 맞추었다.
스치듯 짧은 일별이 아닌, 서로의 시선이 깊이 얽히는 마주침이었다. 내 눈을 바라보는 심마의 눈빛이 깊어지며 입가의 미소가 짙어졌다.
“네가 말해 줘.”
얼마간의 침묵 끝에 심마가 내게 말했다.
심마의 호선으로 접힌 눈꼬리가 가늘게 접히며 싱긋 눈웃음을 띤다.
선선한 웃음이었지만 보이지 않는 기대에 찬 압박이 느껴졌다.
앞에선 이염이 집요한 시선을 보내고 있고, 옆에선 심마가 나를 보며 기대에 찬 눈길을 주고 있다.
…우리가 무슨 사이인지 나보고 말하라고?
삽시간에 머릿속에서 많은 생각이 교차한다.
우사, 백아, 심마. 세 사람과 쌓은 기억과 그 감정들이 갖가지 상념을 불러일으켰다가 종국에는 한데로 뭉쳐 새카매졌다.
백지가 된 머릿속에서 거스러미 같은 목소리 하나가 툭 튀어나온 건 그때였다.
‘이 법진은 선사님 친우분께서 하신 것 아닙니까요…?!’
걸개 무본의 목소리였다.
‘친우’.
그 단어가 내게 각인된 건, 그게 주는 황당무계함과 은은하게 밀려들던 화가 인상 깊었기 때문이다.
‘친우’라.
나는 다시금 그 단어를 곰곰이 곱씹어봤다.
못마땅한 건 여전하지만 ‘사형제지간’이나 ‘원수지간’이란 단어보다는 편하게, 아무렇게나 쓸 수 있을 거다.
둘러대기도 편할 거고.
……어차피 뭐라 부르든, 그 단어에 아무 의미만 가지지 않는다면 상관없겠지. 의미가 없는 호칭 따위야, 허공에 대고 부르는 것과 다를 바 없을 테니까.
그래도 ‘친우[親友]’에서의 ‘친[親, 친밀하다]’은 정말 아닌 것 같아서 그건 쏙 빼고 간단히 한 글자만 발음했다.
“벗.”
조용한 와중에 내 목소리가 나직하게 울렸다.
심마는 나만 보았다. 살짝 크게 뜨여진 그의 두 눈이 아주 느리게 깜박인다. 멍해진 얼굴에 아까의 미소는 사라지고 없었다. 살짝 벌어진 입이 바보 같다.
곧 심마의 낯에 서서히 웃음이 번졌다. 입매가 매끄럽게 호선을 그리며 눈꼬리가 반달로 접혔다.
내게서 시선을 돌려 앞의 이염을 보는 심마의 옆얼굴을 보다가 내 손을 잡아 오는 그의 손에 설핏 눈썹을 찡그렸다.
뒤늦게 잡힌 손을 빼내려 했지만 그럴수록 더 단단히 잡아 온다.
‘흥.’
속으로 콧방귀를 뀌며 더 세게 손목을 꺾으려는 순간,
“아야아-.”
심마가 나지막하게 신음을 흘렸다.
“아파.”
다시 날 보며 울상을 짓는 심마에 멈칫했다. 눈썹 끝이 팔자[八]로 축 쳐져선 제법 불쌍한 표정이었다.
설마 이 손이… 부러진 그쪽 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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