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흘끗 시선을 내려 내 손을 감싸 잡고 있는 심마의 손을 내려다봤다. 긴 소매에 가려져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설령 이게 그쪽 손이라 하더라도 심마라면 진작에 나았을 거다. 그 가공할 만한 회복력을 잘 안다.
‘누가 믿을 줄 알고.’
엄살을 부리는 게 분명하다. 그런데 그걸 알면서도 매몰차게 대할 수가 없다.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물러진 거지.
입매를 삐죽이며 심마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잡혀 있는 손은 그대로 두었다. 고개를 돌리자 앞에 있는 이염이 자연히 시야에 들어온다.
이염은 재미없는 낯짝을 하고선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 시선은 내게 오래 머물지 않았다. 이염은 말없이 나를 일별하곤 그대로 돌아섰다. 그게 끝이었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이염의 뒷모습을 보았다. 싱거운 끝이긴 하지만, 나로서는 보내야 할 사람이니 당연히 붙잡진 않았는데, 어째 마음에 좀 남는다.
점점 멀어지는 그 등이 조금 눈에 익어서 그런 걸까.
……한 손을 뒷짐 진 채 멀어지는 이염의 뒷모습은 오연과 닮아 있었다.
나는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가 살짝 눈을 내리깔았다.
생각은 곧 다른 쪽으로 뻗어 나갔다.
이염은 보냈지만, 아직 내겐 남아 있는 게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심마 말이다.
……그래서, 심마랑 연화경 이 둘은 무슨 사이인 거지?
사승? 그 이름은 또 뭐인 거고.
나는 심마를 향해 돌아섰다. 다시 마주하니 도토리에 맞았던 것이 새삼 생각났다. 그러자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오른다.
도토리 때문에 생긴 통증 따위야 가신 지 오래지만 그렇다고 맞은 게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니다.
“…….”
…생각할수록 거슬린다.
심마가 분쟁을 해결하려 나선 거란 건 알겠다. 알겠는데, 왜 도토리에 맞는 사람이 나인 거야?
도토리에 무슨 짓을 했는지 그때의 타격감은 꽤 매서웠다.
“너…,”
일단 심마를 보며 입을 뗐다.
“응.”
채 말을 꺼내기도 전에, 심마가 해사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기분이 무척 좋아 보인다.
“…….”
나는 왠지 말문이 막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인상을 쓰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웃는 얼굴의 심마를 마주하고 있자니 이상하게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다.
결국 그냥 도로 입을 다물었다.
해야 할 이야기는 초옥으로 돌아가서 마저 하자.
무심코 내린 시선이 발치의 도토리에 닿았다. 저 나무 열매를 보고 있자니 다시금 심사가 뒤틀려, 일부러 내딛는 걸음 폭을 재 도토리를 발아래에 두었다. 그리고 지그시 힘주어 밟았다.
와작-
발아래에서 도토리가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심마가 내 앞으로 휙 돌아섰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의 어깨에 걸쳐져 있는 검은 장포가 크게 펄럭이며, 내 앞을 가로막고 선 그의 얼굴이 가까이 보였다. 굳은 표정이었던 얼굴은 나와 마주한 순간 유하게 풀렸다.
심마의 한 손은 여전히 내 손을 잡은 채였다.
다음 순간, 날카로운 살기가 쏘아졌다. 주변 공기 흐름이 순식간에 불안정해지며, 나는 눈을 크게 뜬 채 심마의 어깨 너머를 보았다. 수십 개의, 예기를 띤 잎이 허공에 떠올라 이리로 쇄도해 왔다.
아까 이염이 내게 날려 보냈던 비수가 다시 재현된 거다.
일의 인과가 어떻게 된 건지 능히 예상이 갔다.
나는 차게 비소했다. 아마 발치에 부서져 있을 그 도토리가 화근일 거다. 이제 왜 아까 비수의 살기가 일제히 사라졌던 건지 알겠다.
나를 맞춘 저 도토리가 그 살기를 전부 흡수해서 그랬던 거고, 지금은 도토리가 부서졌으니, 거기에 담겨 있던 살기가 바깥으로 나와 이렇게 된 건 게 분명하다.
그나저나 그때 당시에도 비수와는 이미 지근거리라 피할 곳이 없었다. 이대로라면….
나는 반사적으로 내 앞을 가로막고 선 심마를 보았다. 심마가 내 쪽으로 비스듬히 몸을 숙이며 귓가에 대고 나직이 속삭였다.
“도토리는 왜 부쉈어?”
다정한 목소리였다.
그 말에 순간 정신이 들었다. 잠깐 굳어 있던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인 건 다음 순간이었다. 나는 이것저것 잴 거 없이 곧장 한 팔로 심마의 허리를 안으며 옆으로 빙글 몸을 돌렸다. 그리고 다른 팔을 비수가 날아오는 방향으로 뻗었다가 우리가 아직 손을 잡고 있는 채란 걸 깨달았다.
“놔!”
다급히 외쳤다.
방해된다.
“…아.”
비수를 곁눈질하며 심마가 짧게 침음을 내뱉었다.
“응.”
곧 부드럽게 답하며 심마가 잡고 있던 내 손을 놔줬다. 그러곤 내 품에 살며시 기대 온다. 그런 심마를 밀쳐 내고 싶었지만 눈앞의 상황이 긴박해 저것부터 처리해야 했다.
나는 앞으로 내뻗은 손끝을 아래로 까닥였다. 내 손짓을 따라 강한 돌풍이 일었다. 날아오던 비수들이 그 돌풍에 짓눌려 땅에 처박혔다. 그러고 다신 허공으로 떠오르지 않았다.
바람에 희미하게 섞인 진기가 느껴진다. 이염이 얼마나 멀어졌던, 그건 중요치 않다.
그가 정말 선군이라면 이 진기를 알아챘을 거다.
‘다시 쫓아올 수도 있겠군.’
가는 숨을 내쉬며 고개를 옆으로 돌려 아직도 내 품에 안겨 있는 심마를 보았다.
“돌아가자.”
내가 말했다.
“이염이 선군이라면 벌써 진기를 느꼈을,”
“연화경?”
웃는 낯으로 명칭을 정정하는 심마에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혼자만 이름으로 부르고 싶다는 건가.’
대체 무슨 각별한 사이길래 저리 독점욕을 드러내는 거지?
“…연화경과는 무슨 사이야?”
최대한 지나가는 투로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벗이야.”
대답은 곧장 돌아왔다.
‘…저쪽도 벗이라고?’
“그리고 그쪽에 대해선 걱정할 거 없어, 진연.”
“내가 무슨 걱정을,”
“진기를 느끼고 다시 올까 봐 걱정하는 거잖아. 걱정 마. 다시 오진 않을 테니까. 당신이 귀신이란 걸 알면서도 물러갔는데 왜 또다시 오겠어? 안 그래?”
“…내가 귀신인 걸 알면서 물러갔다고?”
생각지도 못한 말에 바로 되물었다.
애초에 잘 속여 넘긴 게 아니었던 거야? 그리고 심마는 그걸 알면서도 내 거짓된 신원을 보증한 거고?
“그렇다면 연화경은, …귀신인 내가 선사인 너를 벗이라 한 걸 묵과한 거야?”
내 물음에 심마가 싱긋 웃는다.
“맞아. 당신이 날 벗이라고 했지. 저기, 진연. 언제부터 날 벗이라 여기고 있었던 거야?”
“별 뜻 없이 그냥 둘러댄 거야. 괜한 착각 마.”
옆으로 다가오는 심마를 팔꿈치로 툭 밀치며 말했다.
“…그런 줄 알았으면 그때 그냥 흑망검을 소환해도 될 뻔했군.”
“아까 전에 말이야?”
“그래. 어차피 그땐 이미 네가 근처에 있었으니까.”
“……그 말은, 내가 당연히 당신 편을 들 거라… 생각하는 거고?”
…말이 그렇게 되는 건가.
나는 잠시 말문을 잃었다. 심마가 그런 내게 치근덕댄다.
“진연, 나를 믿고 있었어?”
“…아니.”
짤막하게 대꾸했다.
그런 날 보는 심마의 두 눈은 부드러운 빛을 띠고 있었다. 그 눈꼬리에 어린 친밀감이 탐탁지 않아 설핏 미간을 구기며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심마가 성큼 걸음을 옮겨 다시 내 시야 안에 들어왔다.
“믿어도 돼. 나는 신의[信義, 믿음과 의리를 아우른 말]가 있는 남자거든.”
이어진 그 말은 우리의 관계를 못 박는 듯했다.
‘신의는 무슨.’
속으로 중얼거리며 한쪽 입매를 씰룩였다.
‘신의’라니. 벗이라는 내 말에 큰 의미를 둔 것 같은 단어다. 내겐 아무 의미도 없는, 그저 임기응변식으로 내뱉은 허울뿐인 표현에 불과한데.
내게 ‘벗’이란 소리를 듣고 환하게 웃던 심마의 얼굴이 문득 떠올랐다.
기분이 저조해진다.
“네가 신의가 있는 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퉁명스러운 어투로 읊조리는 말에,
“당연히 상관있지.”
심마가 곧바로 대꾸한다.
날 보는 그의 눈빛은 무척 깊었다. 속내를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깊었지만, 그 안에 따스함이 느껴졌다.
심장이 쿵- 한 번 떨렸다.
그리고 동시에 가슴 깊은 곳에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큰 슬픔이 넘실거렸다.
“벗이잖아.”
“나는 아니야.”
심마의 대답에 나는 망설임 없이, 되려 조금 다급해 보일 정도로 빠르게 대꾸했다.
내 말에 심마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뭔가 생각에 잠긴 것처럼 눈매가 살짝 가늘어지더니, 무언가 가늠하듯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였다. 입가의 웃음은 옅어졌지만, 그건 정말 잠깐이었다. 곧 다시 표정이 누그러져선 혼자서 엷게 웃는다.
부드럽게 호선을 그리는 입매가 멋스럽다.
“알았어.”
심마가 대답했다.
그리 답하는 입가의 웃음이 묘하게 의뭉스러워 보인다.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미간에 골이 패는 게 느껴졌다.
“뭘 알았다는 거야?”
“당신한텐 신의가 없다는 거. 하지만 상관없어. 이 관계에 내가 받는 게 없다고 해도.”
“헛수고라도 하겠단 거야?”
듣자 하니 거슬려서, 말을 도중에 끊으며 날카롭게 물었다.
“…수고롭다고 생각하지 않아.”
잠깐의 침묵 뒤에 심마가 답했다. 살짝 찡그린 눈썹과 달리 입가에는 여전히 온화한 웃음을 띠고 있다. 그 아래로 옅게 패인 보조개가 일순 내 시선을 앗아갔다.
심마가 돌연 허리를 숙여 땅에 있는 도토리를 주워 들었다. 내가 부숴 버린 그 도토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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