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진연.”
다정한 목소리로 나를 부르는 심마에 긴 숨을 내쉬었다.
심마는 손안의 부서진 도토리를 굴리며 매만지다가 묘하게 웃었다.
“아까 화났었지? 내가… 당신한테 도토리를 던져서 말이야.”
잠시 묻어 두었던 화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나는 팔짱을 끼고 서선 시선을 비껴 허공을 보았다. 그러고 잠시 있다가 깊이 숨을 삼키며 다시 심마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그러곤 삼켰던 숨을 천천히 내쉬며 눈꼬리를 치켜떴다.
“…화라니. 내가 바쁜 사람 붙잡은 거 아닌가 하는 생각만 좀 했지.”
어깨를 가볍게 으쓱여 보이며 태연자약하게 입을 열었다.
심마가 웃음 띤 얼굴로 한쪽 눈썹을 추켜세운다. 어디 한번 들어보겠단 모습에 나는 이어 말했다.
“신의는 이쪽에 두고, 비호는 저쪽한테 하고.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수완이 아주 좋네.”
“…….”
“다음엔 도토리가 아닌 검을 던져. 날 제대로 저지하고 싶으면 말이야.”
싸늘하게 말을 끝맺으며 표정을 굳혔다.
‘신의는 얼어 죽을.’
속으로 나지막이 욕설도 내뱉었다.
생각해 보니 믿음이 없는 건 심마도 피차 마찬가지였다. 저 도토리가 비수의 살기를 전부 흡수한 것 자체는 나를 위한 게 맞지만, 결과적으론 검을 든 내 어깨를 맞췄다. 그건 심마가 만에 하나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단 뜻이다.
혹시라도 내가 이염에게 살수를 쓸지도 모른단 가능성. 그러니 도토리로 나를 맞춘 행위는 아마도… 내게서 풍겼을지 모를 살의 또한 흡수하려 했던 의도였겠지.
…그때 내가 들고 있던 건 고작해야 제대로 써먹지도 못할 선검 한 자루였는데 말이다.
“…신의랑 비호가 나뉠 수 있는 거였나?”
짧은 침묵 끝에 심마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와 여전히 입가에 띠고 있는 미소가 대비되었다.
“나는 못 나눠.”
단정 짓는 어투는 단호했다.
“그것만 빼고는…, 응. 진연 네 말이 맞아. 그때 당신을 저지하려 했던 것도 맞고, 바쁜 것도 맞아. 이제부터 다시 현장으로 돌아가야 하거든. 같이 가 줄 거지?”
내게 손을 내밀며 심마가 말했다. 내가 당연히 제 손을 잡아 줄 거라 여기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는 내게 내밀어진 심마의 손을 보며 고민했다. 물론 그 손을 잡을지에 대한 고민이 아니었다.
심마의 손은 당연히 잡을 생각 없고, 내가 묻고 싶은 건….
…그래, 이에 대해 깊게 신경 쓰는 것 자체가 마음에 안 들지만 그래도 물어봐야겠다.
물어서, 거슬리는 이 의문 자체를 치워 버려야겠다.
“연화경에게도 신의를 갖고 있다면 왜 내 편을 들었어?”
대놓고 진실을 호도하면서까지 말이다.
내 물음에 심마는 슬쩍 눈을 내리깔았다가 다시 나를 봤다. 곧게 맞춰 오는 시선이 진지하다.
“내가 비호한 건 당신이야.”
곧 심마가 말했다.
차분한 어조는 침착했다.
“믿어 달라고 말한 것도 당신한테만이고.”
“…….”
“그리고 믿는다는 답을 들었고, 벗이란 말도 들었지. -신의는 없다지만.”
장난스럽게 말을 끝맺으며 심마가 미소 지었다. 진지했던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가벼워진다.
나는 입매를 꾹 다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끝까지 내민 손을 잡지 않자, 심마가 천천히 주먹을 쥐며 그대로 거두었다. 그러곤 등 뒤로 가볍게 뒷짐을 지며 내게서 비스듬히 돌아선다.
“여기서 아직 할 일이 남았어. 끝마치고 나서 같이 돌아가자.”
“…….”
“진연. 나를 데리러 온 거잖아. 응?”
목소리 끝에 애교가 묻어났다. 나는 속으로 가볍게 혀를 차며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면 데리고 가 줘야지.”
그렇게 말하는 심마의 머리 너머로 매 한 마리가 활공해 날아왔다. 겉보기에는 구름다리 위에서 보았던 전령용 매와 다를 바 없었지만, 그 본질은 그때와 달리 실제 매가 아니었다.
보자마자 전령의 실체화란 걸 알았다. 매의 형상을 띤 법진인 거다.
심마의 왼 어깨 위로 전령이 안착하는 걸 보며 나는 끝끝내 걸음을 돌리지 않았다. 괜히 발치의 돌을 툭 걷어차며 심마의 곁으로 걸어갔다.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내디딘 걸음 보폭은 심마와의 거리를 성큼 좁혔다.
그리고 마침내 그 옆에 서서 어깨를 나란히 했다.
매의 형상을 띤 법진이 양 날개를 크게 펼쳤다. 날개 자체의 크기는 변함이 없었지만, 그 아래로 드리워진 날개 그림자는 빠르게 그 크기를 키워갔다.
매의 그림자가 심마는 물론, 나까지 덮었을 때쯤, 그늘이 법진으로 변모하고, 매의 형상은 수십 개 술식 문양으로 무너져 내렸다.
옆을 돌아보니 심마가 나를 보고 있다. 방금 전에 매의 법진을 발현시킨 탓인지 그에게서 희미하게 선기가 느껴졌다.
“거기에 가면 궁관[宮觀, 사원]이 하나 있어.”
심마가 말했다. 나만 바라보는 그 눈에는 따스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날 향한 감정이 몽글몽글하게 전해졌다. 그게 더없이 불편하고 꺼려져서 나는 미간을 구기며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그 아래로는 호수를 끼고 누각[樓閣, 사방을 바라볼 수 있도록 문과 벽이 없이 다락처럼 높이 지은 집]이 한 채 있지. 경관이 꽤 좋아.”
다정한 목소리가 부드럽게 울렸다.
지금 이 말을 하는 이유가 궁금했지만, 묻진 않았다. 괜히 말했다가 또 쏘아붙이는 어투가 나오면, 그러면 뭔가를 망쳐 버릴 것 같았다. 그게 뭔지는 똑똑히 말할 순 없지만…, 심마의 목소리가 듣기 좋단 건 알겠다.
매일 내 악몽에서나 나오던 목소리인데도, 그런데도 좋았다. -그리고 그게 얼마나 내 마음을 복잡하게 만드는지 누구도 모를 거다.
왜냐하면 그 모든 일을 기억하는 건 나뿐이니까.
법진이 발현되며 서 있던 장소가 바뀌었다. 예상대로 공간이동술이다.
다른 장소에 도착하기 무섭게 옆에서 심마가 슬쩍 손을 뻗어 내 손을 맞잡았다.
[일이 끝나면 잠깐 놀러 갈까?]
이어서 내 머릿속으로 그의 전음이 들려왔다.
나는 가벼운 콧숨을 내쉬며 심마를 흘겨봤다.
‘누가 너랑.’
속으로 콧방귀를 뀌며 내 손을 잡고 있는 심마의 손을 뿌리쳤지만, 이내 다시 붙들렸다.
손을 잡은 채 닿아 오는 심마의 시선이 내게서 떨어지질 않는다. 날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띠어져 있다.
[다들 보고 있어.]
심마가 전음으로 말했다.
나는 한쪽 입매를 삐뚜름하게 휘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들 보고 있단 건 나도 알고 있다. 장소가 바뀌기 무섭게 수십의 시선이 느껴졌으니까.
매의 법진에 지정된 도착 장소에는 연화도로 추정되는 선사들이 포진해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게 연화경이었다.
[그래서 뭐?]
내가 퉁명스럽게 전음으로 되묻자, 내 손을 잡은 심마의 손에 가볍게 힘이 실린다.
[우리는 벗이잖아. 사이좋게 지내야지, 진연.]
…벗은 무슨.
[그럼 가서 연화경 손이나 잡아.]
차갑게 말하며 내 손을 잡은 심마의 손을 다시 한번 떨쳐 내려 했지만, 이번엔 도통 떨어지질 않는다.
[연화경과 내가 벗인 건 모든 연화도가 다 알아. 하지만 나와 당신이 어떤 사이인진 아무도 모르니까, 당신 손 잡을래.]
[…….]
나는 더 대꾸 없이 심마에게 잡힌 손에 힘을 풀었다. 그리고 가볍게 시선을 돌려 주변을 훑어봤다.
그나저나 여긴 어디지?
[연화산문 뒤의 첩산[疊山, 겹겹이 겹쳐 있는 산]이야.]
다시 머릿속에서 전음이 울려 퍼졌다.
대답은 참 눈치껏 잘하는데, 여전히 내 손을 꼭 맞잡고 있는 손은 정말 눈치가 없다.
마음을 바꿔 다시 손에 힘을 줘 심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다가,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 곁눈으로 힐끔 심마를 살폈다.
…하필이면 다쳤다는 오른쪽 팔이다.
무거운 숨을 내쉬며 손에 다시 힘을 빼는 것과 동시에,
“귀군, 옆의 분은 누구신가요?”
저들끼리 어리둥절해하며 눈치를 주고받고 있던 연화도 중 한 명이 물었다.
‘귀군’이라.
연화도가 심마를 부르는 호칭에 잠깐 집중했다가 그대로 흘러 넘겼다.
심마가 연화경을 벗이라 하고, 연화경이 그걸 묵인했을 때부터 예상했던 일이다.
무본이 말한 귀군은 역시 심마였던 거다.
…연화도의 귀군이자, 연화경의 벗이라. 나도 모르는 새에 대체 무슨 일을 벌이고 다닌 건지.
무본이 말한 최근 연화경의 행적엔 수상함이 많았고, 그중 가장 수상쩍은 게 귀군의 존재였다. 그런데 그 정체가 심마라니.
다시 생각해도 절로 한숨이 쌓인다.
“내 벗이다.”
옆에서 심마의 대꾸가 들려온다. 밝은 목소리에선 한 점 시름도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이 일방적으로 잡고 있는 내 손을 살랑살랑 장난스럽게 흔드는 것도 그렇고. 정말 태평하다.
심마의 소개에 연화도들이 일제히 내게 포권의 예를 취한다. 그 사이로 연화경, 이염만 고고하게 서 있었다. 시선은 먼 데 둔 채 내 쪽은 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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