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질 사형입니다-133화 (133/141)

<133화>

“아. 귀군의 벗이셨군요.”

아까 말을 걸었던 연화도가 대표로 나서서 계속 말을 이었다.

나머지 연화도들은 한 발 뒤로 물러선 채 이쪽을 주시했다. 보아하니 지금 나선 이가 저들 중 가장 선배 같았다. 항렬이든 뭐든 가장 높으니 나서는 걸 아무도 제지하지 않는 거겠지.

“저는 연화산문을 본관으로 두고 있는 ‘아효’라고 합니다.”

연화산문에 대해선 대충 알아 둔 바가 있다.

그중 하나가 항렬에 따라 돌림자를 쓴다는 거다. 이대 제자의 돌림자가 분명 ‘효’였다. 그리고 연화산문의 특이한 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같은 배분 사이에서 가장 뛰어난 이에게 돌림자와 함께 ‘아[我]’자를 이름으로 준다는 거다.

즉, 효자 배에서 가장 뛰어난 이는 ‘아효’가 되는 셈이다. 그러니 바로 눈앞의 소년이 이대 제자 중에서 동량(중요한 인재)이 되겠다.

나는 짧게 저를 소개한 아효를 보았다. 이제 10대 중반으로 보이는, 풋내가 느껴지는 소년이었다.

긴 머리를 어깨선부터 느슨하게 하나로 땋아 허리까지 길게 늘어트렸고, 왼쪽 귀에는 작은 귀걸이를 착용하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강아지 같은 온순한 인상이다.

내 화답을 기다리고 있는 눈치인 아효를 보며 속으로 잠시 고심하다가 이내 가볍게 싱긋 웃었다.

어쨌든 지금은 선사로서 있을 생각이니까 맞춰 줘야지.

…심마의 벗이라고도 한 참이고.

괜한 소란을 만들 생각 없으니 이 상황을 무난히 넘기기로 하고 마주 포권을 취하려고 했다. 그런데 한 손이 여전히 심마에게 잡혀 있다.

이래선 포권을 할 수가 없다.

설핏 미간을 찡그리며 심마를 흘깃 쳐다봤다. 계속 나만 보고 있던 심마가 눈이 마주치자 희미하게 웃는다. 그에 난 더욱 미간을 찌푸리며 심마가 잡고 있는 내 왼손을 턱짓했다.

그러나 심마는 요지부동이었다.

눈치도 줬는데 왜 알아듣지 못하고 손을 안 놓는 거야?

[그만 손 놔.]

전음으로 말하며 손에 약하게 힘을 줬다.

[하지만…,]

[이만하면 다들 우리가 어떤 관계인지 알았을 거야.]

심마의 말을 중간에 자르며 강경하게 말했다. 그러곤 나와 깊이 눈을 맞추는 심마를 향해 한쪽 눈썹을 추켜올렸다. 내 말이 맞단 의미로 눈에 팍 힘을 주자 심마가 맞잡은 손에 힘을 천천히 풀었다.

아주 느리게 내 손을 놓으며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리는 그 옆얼굴엔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

[알았어.]

곧 대답이 들려왔다.

나는 심마의 옆얼굴을 불퉁한 눈으로 잠시 바라보다가 앞으로 휙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자유가 된 손으로 포권을 했다.

“곤륜에서 온 선사 ‘진연’이라 합니다.”

마찬가지로 짤막한 소개를 되돌려 주었다.

“곤륜이라 하셨습니까?”

아효 옆에 있던 연화도가 대뜸 물어 왔다.

“저도 거기서 왔는데…! 아, 저는 ‘이소운’이라 합니다. …대협.”

“이소운은 곤륜에서 낙주로 수학 온 학도[學徒]입니다. 본관이 같다면 서로 알 수도 있겠네요.”

나와 이소운이 없는 해후라도 풀길 바라는지, 아효가 뒤로 조금 물러나 준다. 그 때문에 이소운과 마주하게 되었다.

이소운은 훤칠하게 잘생긴 소년이었다. 아효와 비슷한 나이대로 보였고 두 눈에는 나를 향한 호기심과 희미한 호감이 서려 있었다.

같은 본관일지도 모른단 게 크게 작용한 듯했다.

“제 형님이 ‘이목’입니다. 곤륜에서 왔다면 저는 몰라도 제 형님은 알 수 있을 듯하여….”

이어지는 이소운의 말을 흘려들으며 ‘이목’이란 이름을 속으로 뇌까렸다.

곤륜의 이목이라면 사해혈사 때 그 후기지수 중 한 명이다.

이소운이 이목의 동생이었군.

별 감흥 없이 앞의 이소운을 보았다. 쑥스러움을 많이 타는 성격인지 주절주절 말을 잇는 이소운의 귓불이 불그스름했다. 그 열기가 목덜미까지 번지는 걸 별생각 없이 보고 있는데,

[현재 곤륜산의 소가주가 ‘이목’이야.]

심마가 전음으로 말해 왔다.

소가주라. 하긴, 그때로부터 11년이나 흘렀으니 그럴 법도 하다.

“‘이목’이라면 이름은 들어 봤습니다.”

담담한 어투로 짧게 대답했다. 그런 날 보는 이소운의 눈이 살짝 커진다.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곤륜에서 왔다면서 이목이란 이름에 데면데면하게 구는 게 이상한가 보다.

뭐, 이소운의 안에 이목이 어떤 존재감을 갖고 있는진 알겠다.

“곤륜에서 온 선사라 해서 모두가 곤륜산에 적을 둔 건 아니니까요.”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띤 채 대수롭잖게 말을 이었다.

곤륜산을 심드렁하게 대하는 내 태도에서 뭔가 깨달음을 얻었는지 이소운의 얼굴이 빨개진다.

방금의 제 자부심이 얼마나 본인 중심적이었는지 알았나 보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이제야 본인이 내 앞에 마주 설 생각이 들었는지, 이소운이 묘하게 흥분한 얼굴로 아까보다 더 정중히 포권의 예를 취해 왔다.

“대협. 다시 소개하겠습니다. 소생은 곤륜에서 온 ‘이소운’이고 현재는 낙주에서 수학 중입니다.”

포권을 풀며 이소운이 공수 자세를 한다. 그에 나도 포권을 하고 있던 두 손을 내려 한 손을 자연스럽게 뒷짐 졌다.

“진연입니다.”

짤막하게 답하며 입꼬리를 휘어 올렸다.

“낙주에서 본관이 같은 분은 처음 뵙습니다.”

“산문에서 외출에 매우 엄격한 모양이군요.”

“아. 그런 건 아닙니다. 물론 외출할 때마다 허락을 받아야 하긴 하지만 낙주 내 순찰이 수행에 포함되어 있어서 운신의 폭이 타 문파에 비해 넓은 편입니다. …아무래도 낙주와 곤륜의 거리가 꽤 되니, 그래서인지 이곳에선 곤륜에 관한 것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말이 끝에 다다를수록 목소리가 작아지며 어투에서 씁쓸함이 느껴진다.

이소운의 입꼬리가 아래로 묘하게 쳐졌다.

고향을 향한 향수에 젖어 있는 듯했다. 풀이 죽은 이소운을 바라보며 잠시 속으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떠나온 곳이 그립다면, 그곳에서 함께 온 동문과 담소를 나누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겁니다. 고향은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나눈 정과 쌓은 기억에 있는 법이라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나누는 담소 속에 곤륜이 있을 테지요.”

여전히 담담한 목소리를 바탕으로, 그 기저엔 은근히 떠보는 투를 깔고선 나직이 말했다.

“…같이 온 동문은 없습니다.”

짧은 침묵 끝에 이소운이 멋쩍은 웃음과 함께 말했다.

“그래도 오늘 본관이 같은 대협을 만났으니, 괜찮다면 이 인연을 소중히 하고 싶습니다!”

이어지는 말소리는 차츰 그 속도가 빨라지다가, 끝에 가선 목소리를 높이며 쩌렁쩌렁하게 끝맺었다.

옆에서 아효가 이 상황을 지켜보며 흥미롭단 듯 눈을 반짝이고 있다.

나는 말없이 미소만 지어 보였다.

‘교류도 없는 타지에 동문 한 명 없이 혼자 수학하러 왔다.’라.

이건 말이 수학이지, 제 입으로 ‘끈 떨어진 뒤웅박’이라고 한 거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오늘 인연이 하나 생겼군요.”

속의 생각을 내색하지 않고 담담히 말하기 무섭게,

“아니.”

옆에서 심마가 말했다.

“인연이 생기기엔 부족해.”

“부족하다고?”

생각지도 못한 말에 심마를 다시 보았다. 심마는 앞의 이소운을 응시한 채 옅게 웃고 있었다.

“응. 왜냐하면 당신은 귀군의 벗이 아니라,”

이소운에게서 시선을 돌려 나를 가볍게 일별하며 심마가 이어 말했다.

“내 벗이니까.”

“…….”

“저 소생이 말한 인연은 ‘곤륜에서 온 귀군의 벗’일 거고. 하지만 지금 내가 분명히 말하건대, 당신은 연화경과는 아무 상관 없이 그냥 내 벗이야.”

고개를 정면에 둔 채 눈동자만 굴려 나를 힐끗 보며 심마가 말했다.

“그러니 신용이 부족할걸?”

싱긋 웃는 심마에게서 앞의 이소운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이소운의 얼굴엔 묘한 낭패감이 어려 있었다.

…과연, 그런가.

하기야 곤륜에서 왔다는 것만으론 신용이 생기기에 부족하지.

그나저나 방금 심마가 선을 그었다. 나는 귀군의 벗이 아닌, 자신의 벗이라고.

‘…만약을 대비해 내가 귀신(귀족)인 게 탄로가 나도 연화경에게는 탈이 없게끔 감싼 건가.’

심마의 방금 그 행동은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다.

[연 맺을 거 없어.]

살짝 퉁명스러운 전음이 날아오기 직전까진 그랬다.

[인연을 맺는 건 서로 알아 가기 위함인데 그럴 필요 없으니까. 그런 수고 들일 거 없이 내가 다 알려 줄게.]

…당사자 본인도 아니면서, 다 알려 주긴 무슨.

속으로 작게 툴툴대며 한쪽 입술을 삐죽였다가 속으로 가볍게 피식 웃었다.

[그렇게 잘 알아?]

짐짓 무뚝뚝하게 대꾸하며 이소운을 보았다. 내가 저를 보자 이소운이 살짝 흠칫거리더니 다급히 입을 연다.

“상관없습니다.”

이소운이 답했다.

[뭐가 알고 싶은데?]

머릿속으론 심마가 대답했다.

“신용이란 인연의 바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연을 바탕으로 두고 쌓아 가는 것이니까요. 오늘 본적이 같은 대협을 만나 기쁜 마음은 진심입니다.”

[내게 알려 달라고 말하면, 내가 알려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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