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묘하게 자신감에 찬 심마의 말에 없던 호기심도 생기려 한다. 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원래는 이소운에 대해 별 관심도 흥미도 없었다.
[네가 알려 주는 게 진짜란 보장은 어디 있는데?]
[보장은 없지. 하지만 그런 거 필요 없이 날 믿어 줄 거잖아. 왜냐하면 우리에게 있어 신용이란 인연의 바탕에 있는 거니까. 당신한테서 날 믿는단 말을 듣고, 그다음엔 우리가 벗이란 말을 들었지. 그리고 나는 벌써 믿고 있어. 당신이 날 믿어 줄 거란 걸.]
‘……말이나 못 하면.’
나는 심마를 흘깃 일별한 뒤 다시 이소운을 보았다.
“그렇군요.”
달리 할 말이 없어서 그 말만 짤막하게 했다. 그러자 이소운이 뭐라 다급히 입을 떼려는데, 뒤로 물러나 있던 아효가 자연스럽게 앞으로 치고 나오며 이소운에게 슬쩍 눈길을 준다. 그러자 이소운이 아쉬운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도로 입을 다물었다.
“그러면 연화경, 그리고 귀군. 저희는 다시 수색하도록 할까요?”
이염과 심마에게 번갈아 포권의 예를 차리며 아효가 말했다.
연화경은 눈을 살짝 내리까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심마도 딱히 대꾸해 주지 않고 그들 사이를 가로질러 이염에게로 향했다. 나도 심마를 쫓아 연화도들 곁을 지나쳤다.
스쳐 지나가는 찰나 동안 이소운의 시선이 내게 따라붙은 걸 알았지만 아는 체하진 않았다.
“그럼 가자!”
등 뒤로 아효의 힘찬 외침이 들려왔다.
잠깐 머뭇대던 걸음들은 곧장 아효의 지휘에 따라 사방으로 흩어졌다. 몇 명씩 짝을 지어 움직이는 듯했다. 머잖아 연화도의 기척이 멀어졌다.
나와 심마는 이염과 얼마간 거리를 두고 섰다.
그러면 이제 무슨 일을 하는 거지?
신선으로 추정되는 연화경이 있는데 굳이 심마까지 소환되는 일이라.
[무슨 일이길래 연화경만으로 해결이 안 되는 거야?]
[연화경만으로 해결하면 안 되는 일이지.]
곧장 답해 오는 심마의 어투는 마치 수수께끼를 내는 양 의뭉스러웠다.
장난을 치는 게 분명했다. 거기에 어울리지 않으려고 다시 묻지 않았다.
“사승[私乘].”
이염이 또다시 그 이름으로 심마를 불렀다.
나직한 목소리는 진중했다. 낯은 여전히 무표정하고 눈빛에선 한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한 자락 흔들리지 않는 옷자락엔 엄격한 기품이 어려 있었다.
“‘귀불’은?”
이염이 말했다.
귀불?
그게 뭐지?
[귀불이 뭐야?]
처음 듣는 단어라 생소해서 심마에게 물었다.
[귀기가 느껴지는 불, 귀불. 당신이 동동이라고 부르는 그거야.]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는 심마의 어조는 평이했다.
“결계 안에 가둬 놨어.”
심마가 이염에게 말했다.
[연화도 한 명이 동동을 발견하곤 잡으려 다가가다가 반대로 당했어. 동동 아래에 깔려선 꼼짝달싹 못 하는 걸 지나가던 행인이 발견하고 다른 연화도들을 불렀는데, 그들만으론 동동을 어떻게 할 수 없어서 나와 연화경을 부른 거야.]
전음으로 내게 현 상황을 설명해 주는 심마를 곁눈으로 힐끔 쳐다봤다. 심마는 양 입 끝을 살짝 휘어 올린 채 정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 산의 모든 동동이 내가 친 결계 안에 갇혀 있어.]
이어지는 심마의 말에 나도 그에게서 시선을 돌려 앞을 보았다.
[내가 제대로 관여한 상태니 걱정 마.]
심마가 이어 말했다. 얄미울 정도로 태평한 어투였다.
[…뭐가?]
[진연. 내가 왜 이렇게 이 일에 관심을 두겠어?]
내 물음이 반문으로 되돌아왔다.
[동동의 잔기로 그 주인을 추적할 수 있잖아.]
내가 뭐라 답하기도 전에 심마가 알아서 이어 말했다.
심마의 그 말은 뜻밖이면서도, 나를 위해 준다는 말이 아주 의외로 다가오진 않았다.
가슴 안쪽에 따뜻한 감정이 뭉글뭉글하게 퍼진다. 나는 미간을 좁히며 살짝 인상을 썼다. 그러곤 팔꿈치로 심마의 옆구리를 슬쩍 쳤다. 그러자 심마가 나를 돌아보는 게 느껴진다.
나는 정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심마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에 옅은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진연도 같이 갈 거야.”
심마가 이염에게 말했다.
이염의 스산한 눈길이 심마를 지나쳐 내게 닿았다. 나를 보는 그의 한쪽 눈썹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결계를 친 곳이 어디인데?”
“궁관.”
이염의 물음에 심마가 짤막하게 답했다. 그 대답이 못마땅했는지 이염의 낯빛이 매서워진다.
“궁관은 외지인은 물론, 외부인에게도 엄격히 제한되어 있어.”
“그래서 진연과는 궁관 입구 근처까지만 갈 거고, 물론 혼자 두지도 않을 거야. 결계는 바깥에서도 풀 수 있으니까.”
심마의 어투는 느긋했다.
[내 결계에는 아무나 풀 수 없는 술식이 걸려 있거든.]
심마는 이염에게 말하는 와중에 내게 전음으로 잘난 척을 할 정도로 여유로웠다.
“마음대로 해.”
차가운 음성과 함께 이염은 그대로 휙 뒤돌아섰다.
이염은 보법을 써 앞장서 가 버리고 나와 심마는 뒤에 남겨졌다.
“먼저 가 봐야 소용없을 텐데.”
심마가 피식 웃으며 곧 나를 돌아봤다.
“자, 그럼 우리도 갈까?”
내게 슬쩍 내미는 오른손을 힐끔 본 뒤 심마를 마주 올려다봤다.
“동동의 기운을 추적하는 걸 막는 거 아니었어?”
아까 전음으로 내게 한 말을 따져 물었다.
바깥에서 쳐둔 결계만 회수하고 연화경 혼자 안으로 들여보내는 식의 한 발 빼는 태도로, 어떻게 추적을 막겠단 거야?
“방금 말했잖아. 먼저 가 봐야 소용없을 거라고.”
심마가 손을 내게로 더 가까이 뻗는다.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날 보는 얼굴엔 퍽 간절한 빛이 떠올라 있다. 손을 잡아달란 재촉이 표정에 또렷이 드러나 있다.
나는 심마의 곱게 잘생긴 얼굴을 바라보다가 픽 웃으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무슨 속셈이야?”
내 물음에 심마가 갑자기 반색하며 씩 웃는다.
“왜? 어울려 주려고?”
그 물음에 나는 팔짱을 꼈다.
“…내가 왜 여기 왔는지 잊었어?”
“아니.”
냉큼 대답하며 심마는 내게 내밀었던 손을 천천히 거뒀다. 얼굴엔 웃음의 여운이 남아 있었다.
심마가 먼저 앞으로 걸음을 내디디고 나는 자연히 그를 쫓았다.
“나를 데리러 온 거잖아.”
앞서 걷는 그에게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는 바람에 심마의 머리카락이 차분히 흔들리며 나부끼는 옷자락과 어우러진다.
그를 스쳐 지나온 바람이 청아하다.
어느 순간 심마가 걸음을 늦췄다. 나란해진 우리는 얼마 안 있어, 심마가 걸음을 멈추며 자연히 내가 앞장서게 됐다.
얼마간 거리가 벌어져도 쫓아오지 않는 심마에 나 또한 멈춰서서 뒤를 돌아봤다. 심마는 멈춘 그 자리 그대로 서 있었다.
“그런데 왜… 나를 내버려 두지 않는 거야?”
심마가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조심스러운 물음이었다.
쏴아아-
부는 바람에 근방의 나무들이 흔들리며 잎과 꽃잎이 우수수 흩날렸다.
“다친 나를 두고 가지 않고 데려가서 보살펴 준 거, 그리고 지금 나를 데리러 온 거. 전부 나를… 걱정해서지?”
“…….”
나는 선뜻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방금 말한 것 중 첫 번째는 네가 나 때문에 다쳐서였고, 두 번째는 그저 단순히 목독에 관해 묻기 위해서였다고 말하기가 어렵다.
“…안 갈 거야?”
결국 대화를 피하며 눈길을 돌려 먼 허공에 시선을 두었다.
“왜 내 면사를 벗겼어?”
그런 내게 심마가 다시 물었다.
“불편해 보였으니까.”
이번엔 바로 대답했다. 그리고 심마에게 비꼈던 시선을 돌려 다시 그를 봤다.
심마는 미소 짓고 있었다.
이내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더니 내게로 성큼성큼 다가와 바로 앞에 마주 선다.
“고마워.”
그 말만 짤막하게 하곤 심마는 나를 지나치며 한 손으로 내 왼 손목을 움켜잡았다. 그 바람에 나도 덩달아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너…!”
당장 이 손 놓으라고 말하려는데,
“진연, 그런데 왜 나를 믿겠다고 한 거야?”
앞에서 심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람처럼 그냥 스쳐 지나가는 물음이었다.
“네가 믿어달라고 했잖아.”
깊게 생각하지 않고 그냥 대답했다.
“하지만 처음엔 날 싫어했잖아.”
“…지금도 마찬가지야.”
“그러면 왜 믿겠다고 한 건데? 내가 당신을 속일 수도 있고, 배신할 수도 있는데.”
심마의 가벼운 어투엔 스산함이 배어 있었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배신, 속임수. 그것들이 없을 거라고 확신하진 않는다. 하지만 정말 있을 거라고도 생각하고 싶지 않다.
…어쨌든, 나는 내일 그믐달이 뜨면 심마가 말한 대로 신당에 찾아갈 거다.
“……아니면, 내가 배신하든 속임수를 쓰든 상관없는 건가?”
내 침묵 하에 심마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혼잣말에 가까운 물음이었다.
심마의 보폭이 넓어지며 다리에 채이는 그의 옷자락이 사납게 펄럭인다.
“심마. 내 믿음이 어디서 왔을 것 같아?”
문득 내가 물었다.
심마의 걸음이 잠깐 멈칫했다.
“날 배신하면 그땐 널 싫어하지도 않을 거야.”
결연함을 담아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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