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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질 사형입니다-135화 (135/141)

<135화>

“그러면 나를 끝까지 믿어.”

나직이 답하며 심마가 비스듬히 몸을 돌려 나를 돌아봤다. 걸음은 멈추지 않고 그대로 뒤로 걸으며 날 보는 진중한 얼굴에 어쩔 수 없단 듯 쓴웃음이 번진다.

“당신이 날 믿는다면, 그러면… 내가 당신한테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될 테니까. 배신자인지, 아니면 …벗인지.”

“…….”

“나는 당신의 벗이야, 진연.”

내 손목을 잡고 있던 그의 손이 미끄러지듯 내려가 내 손끝을 가볍게 잡는다.

전해져 오는 온기가 따스했다.

* * *

심마가 말한 궁관은 깎아지른 벼랑 안쪽에 난 동굴이었다. 그래서 궁관으로 가기 위해선 낭떠러지 위에서 뛰어내려야만 했다.

낭떠러지에서 뛰어내리면 대략 9척 아래에 가파른 턱이 하나 있는데, 그 턱 안쪽에 궁관이 있다고 했다.

궁관 입구인 동굴 앞에 연화경이 있을 게 분명하니 심마는 자신에게 안기라고 했다. 그에 내가 싫다고 하자 내밀었던 두 팔을 선뜻 거둬 뒷짐을 진다.

“그러면 다른 방도가 있어?”

“방도를 찾을 것도 없어.”

대충 대답하며 나는 낭떠러지 끝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이 정도 높이면 대충 뛰어내려도 크게 다치진 않을 것 같다.

나는 높이를 가늠한 뒤 바로 훌쩍 뛰어내렸다.

“진연!!”

그런 내 뒤로 심마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이어서 낙하 중인 내 팔을 커다란 손이 단단히 움켜잡았다. 그 반동에 낙하 중이었던 내 몸이 비스듬히 돌며 심마와 마주했다. 심마는 내 허리를 힘있게 끌어안았다. 청아한 향이 바람에 실려 내게 훅 끼쳐왔다.

함께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져 그 턱에 착지하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착지와 동시에 나는 두 팔을 들어 심마의 어깨를 밀쳐 냈다. 그에 심마가 휘청하며 뒤로 반걸음 물러났지만, 물린 오른발을 지축으로 삼아 더 단단히 중심을 잡았다. 그러곤 아까보다 더욱 힘껏 나를 끌어안았다. 그 탓에 나는 심마에게 조금 전보다 더 깊이 끌어안기며 발꿈치를 살짝 들었다.

그의 어깨에 턱을 댄 채 두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심마는 내 목덜미 안쪽에 얼굴을 묻은 채 나직이 숨을 골랐다.

숨결이 닿을 때마다 가슴이 쿵쿵 뛴다.

더는 참아 줄 수가 없어서 이번엔 작정하고 힘을 줘 심마를 밀어냈다. 기습적인 반동에 이번엔 심마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나를 끌어안고 있던 두 팔이 맥없이 풀린 것도 그 순간이었다.

물귀신처럼 끌어들이지 않고 혼자 넘어지려는 모습에 나는 인상을 쓰며 반사적으로 손을 내뻗었다.

한 손으로 심마의 멱살을 움켜잡아 도로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서로의 얼굴이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가까이서 본 심마의 두 눈엔 오롯이 내 얼굴만 담겨 있었다.

“아.”

심마가 멍한 탄성을 내뱉으며 넋을 놓는다.

그야말로 멍청한 낯이다.

순수한 팔 힘과 허릿심만으로 심마를 도로 똑바로 세워 준 뒤 잡고 있던 멱살을 놨다.

날 멀거니 바라보던 심마가 열없이 웃은 건 다음 순간이었다.

“이걸 고맙다고 해야 하나?”

옷깃이 잔뜩 구겨진 채 심마가 난처한 척을 한다. 그의 눈빛이 짓궂게 빛나는 걸 보며 나는 콧방귀를 뀌며 그대로 돌아섰다.

“내가 떨어지는 걸 두고 볼 수 없었던 거야?”

“애초에 널 민 게 누구인지 잊었나 보지?”

옆으로 따라붙는 심마를 의식하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앞에는 궁관의 입구로 보이는 동굴이 있었다. 우리가 내려선 턱과 가까웠다.

궁관으로 다가가자, 이염이 어디선가 훌쩍 뛰어 내려와 우리 앞을 가로막고 섰다.

팔짱을 낀 채 서 있는 그는 여전히 무표정이었지만 느껴지는 기도는 날이 서 있었다.

심마가 앞으로 나서며 은근히 나를 가리고 선다. 심마에 의해 반쯤 가려진 시야 너머로 보이는 이염의 시선이 나를 스쳐 지나갔다.

심마는 다짜고짜 말없이 선기를 운기했다. 결계의 술식을 푸는 건 그에겐 아주 간단한 일이었는지, 궁관 입구를 막고 있던 불투명한 푸른 막이 단번에 사라졌다.

“조심해.”

거침없이 궁관 안으로 들어가는 이염의 등에 대고 심마가 말했다. 돌아오는 대꾸는 없었다.

이염의 옷자락이 궁관 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옆에 선 심마의 옆얼굴을 힐끔 쳐다봤다. 심마는 궁관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저 궁관에 남겨 둔 수가 뭐야?]

내가 전음으로 물었다.

[연화경이 마땅히 조심해야 할 일.]

이번에도 두루뭉술한 대답에 완전히 몸을 틀어 심마를 똑바로 보았다. 그제야 심마가 궁관에서 눈을 떼 나를 본다.

[진연, 너는 내 수가 연화경한테 통할 거라고 생각해?]

[…이제껏 자신만만하게 굴었으면서 지금 와서 무슨 소리야.]

[날 보는 당신 눈에 그다지 신용이 없는 것 같아서.]

심마는 살짝 허리를 숙여 자세를 낮추곤 나와 똑바로 시선을 맞추며 내게 말했다. 유하게 호선을 그리고 있는 입꼬리 끝이 위로 살짝 올라가 있다.

[…무슨 작전인지나 말해.]

내 말에 심마가 숙였던 허리를 도로 펴며 자세를 바로 한다. 그리고 다시 시선을 돌려 가까이 궁관을 보며 입을 뗐다.

“저 궁관 안에는 작은 연못이 있고, 그 연못 너머에 신당이 하나 있어. 그리고 그 신당의 주인이 천태자이지.”

‘천태자?’

연화산문 후방을 감싸고 있는 첩산에 천태자를 모시고 있는 신당이 있었다니.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천태자 건을선군. 속세에선 그의 신상을 묘사하길, 정결한 군자의 표본이라. 그래서 사람들은 신상의 손에 정결함의 상징인 연꽃을 들려 주고, 다른 한 손엔 고매한 성인의 수호신이란 속설에 맞게끔 향로를 들려 주었어. 전해져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 향기는 애욕을 끊어내게 해준다지.”

“단애약수와 비슷한 건가?”

불현듯 든 생각에 나도 모르게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다 곁의 심마를 의식하곤 바로 입을 다물었다. 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단애약수가 마음을 없앤다면, 향로는 감정을 끊어내게 해. 이전의 기억과 감정은 전부 살아 있지만, 그 감정이 이어지지 않는 거지. 그래서 결은 다르지만…, 결과적으론 비슷해.”

짧은 침묵 끝에 심마가 깊게 잠긴 목소리로 답했다. 가라앉은 분위기가 더욱 무겁게 침잠한다.

궁관 안쪽에서 희뿌연 안개가 흘러나오기 시작한 건 그때였다. 이어서 그 안개 사이로 낯익은 사람의 형상 하나가 보였다. 부드럽게 허공을 스치며 순식간에 궁관을 빠져나오는 그의 옷자락이 부드럽게 나부끼고, 흰 머리카락은 공중에서 안개와 함께 은빛으로 흔들린다.

이염이었다.

이염은 심마의 앞에 착지해 섰다.

“연못. -네 짓이야?”

이맛살을 찌푸리며 이염이 다짜고짜 말했다. 앞뒤 맥락 없는 말은 무슨 이야기인지 유추할 수도 없었다.

[이제 궁관 안에 동동은 없어.]

동시에 심마가 전음으로 내게 말을 걸어 왔다. 누가 친우 사이 아니랄까 봐, 둘 다 똑같이 앞뒤 맥락이 없다.

[그게 무슨 소리야?]

바로 되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한 말을 똑같이 따라 하며 심마가 이염에게 물었다.

‘…….’

나는 코끝으로 숨을 내쉬며 일단 이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왜 귀불(동동)을 전부 연못 속에 가둬 놨지?”

“가둬 두다니.”

웃음기가 설핏 담긴 목소리로 심마가 운을 뗐다.

“나는 궁관 안에만 뒀을 뿐이야. 저들이 알아서 연못에 깃든 희미한 기에 끌려 그 안에 들어간 거겠지.”

“…….”

“지척에 건을선군이 주인인 신당을 모시고 있는 만큼 연못에 영기[靈氣, 영험한 기운]가 생기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닐 테니까. 그리고 귀불과 같은 미물들이 미약한 기운에 끌리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

그 말을 끝으로 심마는 더 말하지 않았다. 옅은 미소만이 입가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염은 그런 심마를 스산한 눈길로 응시하더니 곧 그 곁을 스치며 지나쳐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이염이 가고 이제 심마와 나 단둘만 남았다.

나는 그 즉시 궁관으로 향했다. 심마에게 더 물을 것 없이 그냥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할 속셈이었다.

그런 내 뒤를 심마가 황급히 쫓았다.

“잠깐…!”

심마는 순식간에 나를 앞질러 앞을 가로막고 섰다.

“비켜.”

내 말에도 심마는 요지부동이었다. 드물게 강건한 표정이었다.

“내가 외부인이라서 막는 거야? 아니면 내가,”

귀신이라서?

그 뒷말을 꺼내기도 전에 심마가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지금은 안의 기운이 너무 강해.”

그에 나는 전음으로 대꾸했다.

[…어차피 그믐달 밤에 올 곳이야. 내일 올 곳을 지금 미리 가 보겠다는데 무슨 상관이야.]

[당연히 상관이 있지.]

마찬가지로 심마도 전음으로 대답해 왔다.

[그때는 지금처럼 내원근의 운기를 막은 상태가 아닐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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