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질 사형입니다-136화 (136/141)

<136화>

[…….]

확실히 현재 상태로 과한 선기에 노출되면 본원진기가 상할 거다.

…하지만 방금 심마와 이염의 대화를 미뤄 보아 안에 있는 건 기껏해야 영기다. 진기와 상충되는 건 선기이니, 영기는 내게 해를 끼치지 못한다.

그리고 궁관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다.

[어차피 저 안에 있는 건 영기잖아.]

대충 대답하며 그대로 심마의 곁을 지나쳐 궁관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영기가 아니라 선기야…!]

그런 내 뒤로 심마의 전음이 다급히 들려왔다.

[먹을 가까이하면 물들 듯, 건을선군을 모시고 있는 신당을 지척에 둔 연못에 단순히 영기만 깃들었을 것 같아? 애초부터 영기가 아니라 선기였어. 내가 연못을 영기로 얕게 덮어 버려 귀불을 꾀어냈고, 그렇게 연못에 빠진 귀불은 진기와 선기는 상충된다는 이치에 따라 안에서 옴짝달싹 못 하게 된 거야.]

[…동동을 꾀어냈다고?]

[그래. 그리고 아까 결계를 풀 때 운기한 기운으로 연못 표면을 덮은 영기를 날려 버리며 연못의 선맥[仙脈]을 자극했어. 연화경이 연못 안의 동동을 꺼내기 위해 약간이라도 운기하면, 그 순간 연화경의 힘과 맞물려 연못의 선력이 폭발적으로 증진하도록.]

[…….]

심마의 말대로라면 동동은 연못 안에서 선기에 침식되어 소멸되었을 거다. 일순간에 전부 재가 되었을 거고, 그 재가 선기와 닿으며 뿌연 안개를 일으켰겠지.

이제 왜 궁관에서 희뿌연 안개가 흘러나왔는지 알겠다.

[폭발적으로 증진한 선력은 건을선군의 상징인 연꽃을 피워 냈을 테고, 흐드러지게 핀 연꽃의 자욱한 향에는 선력이 가득 스며 있겠지. 그런데 그런 곳에 들어가겠다고? 내원근의 운기를 막은 상태로?]

심마의 어투가 흥분한 듯 다소 거칠어진다.

나는 살짝 눈을 내리깔았다가 다시 시선을 들어 앞의 궁관을 보았다.

결심을 번복하지 않고 다시 앞으로 걸음을 떼는데,

[저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지 내가 전부 말해 줬잖아.]

다시 심마의 전음이 머릿속에 울렸다.

방금 심마가 한 말의 저의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전부 말해 줬는데, 왜 굳이 안에 들어가 보려는 거냔 거겠지.

나는 대꾸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머잖아 심마가 내 옆으로 따라와 붙었다.

“…정 견학이 필요하다면 같이 가.”

나직한 말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나는 고개를 돌려 심마를 힐끔 쳐다봤다.

심마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뼈마디가 분명한 가늘고 긴 손가락과 굳은살이 얕게 박인 손바닥을 물끄러미 내려봤다.

“진연?”

머리 위로 심마의 부름이 들려온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날 내려다보고 있는 심마를 바라봤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심마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연다.

“저승길도 벗이 있어야 좋다잖아.”

그리 말하며 내 손을 먼저 덥석 잡아 왔다.

손을 감싸는 온기가 다정하다. 나는 굳이 손을 빼지 않고 그냥 잡힌 채 입술을 씰룩였다.

‘…말이나 못 하면.’

심마에게 한 손을 잡힌 채 나란히 궁관 안으로 들어갔다.

동굴로 이뤄진 궁관 안은 빛이 들지 않아 어둡고 스산한 한기가 감돌고 있었다. 매끄러운 벽면은 울퉁불퉁했고, 점점 고도가 높아지는 천장에는 종유석이 자라 있었다.

똑- 똑-

어디선가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곳곳의 기암괴석을 지나쳐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점점 커진다. 내 손을 잡은 심마가 반걸음 정도 앞장섰다.

궁관 입구에서부터 여기까지 오는 내내 자욱하게 껴 있는 안개는 단 한 번도 내게 닿지 못했다. 안개에도 선력이 잔존해 있을 거라 생각한 모양이다.

지금 안개가 내게 닿지 못하게 밀어내고 있는 이 무형의 힘은 분명 심마일 거다.

나는 앞서 걷고 있는 심마를 흘깃 보았다. 그러다 맞잡고 있는 손으로 시선을 내렸다. 가볍게 힘이 실려 있는 심마의 손은 내 손을 꼭 잡고 있었다.

“…….”

심마의 말대로라면 지금 이 공간에는 선력이 가득할 텐데, 덕분에 조금도 힘들지 않다.

심마의 옆얼굴만 눈으로 좇느라 어느새 연못을 앞에 두고 있단 것도 몰랐다.

“다 왔어.”

멈춰 서며 심마가 말했다. 그제야 나는 심마에게서 눈길을 돌려 앞을 보았다. 커다란 연못에 수백 송이의 연꽃이 만개해 있었다. 자욱하게 낀 물안개가 호수를 덮어, 마치 신기루 속에서 피어난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그 호수 너머에는 말갛게 빛을 발하고 있는 작은 신당이 있었다. 한백옥으로 지어졌는지 몹시 희고 아름다웠다.

나는 전방을 가볍게 둘러봤다. 동동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남겨 둬 봤자 짐만 됐을 거야.”

문득 심마가 나직이 말문을 뗐다.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내 눈치를 보고 있단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나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설마 내가 저를 원망할 거라 생각한 건가.

“그래도 당신만 손해 보게 두진 않아. …내가 나중에 더 쓸 만한 걸 줄게.”

이어지는 심마의 말에 결국 참지 못하고 가볍게 웃었다.

나만 손해 보게 두지 않겠다고?

심마, 네가 만든 이 상황에서 가장 이득을 본 건 나인데?

처음부터 내가 손해 보지 않게끔 이 상황을 설계한 장본인이 또 뭘 챙겨 주겠단 건지.

연화경의 앞에서 내 신분을 보증하고, 동동을 호수에 가둬 그렇게 없앤 것까지, 그것만으로도 이미 넘치도록 받았다.

덕분에 연화경에게 끝까지 책잡히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

“됐어. 단순한 소모품이었으니까.”

일부러 대수롭잖게 말하며 그만 나가자고 눈짓했다. 나 때문에 생긴 되도 않는 부채감을 되도록 빨리 없애 버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심마가 울망한 눈으로 날 보며 좀처럼 움직이질 않는다.

“그래도 어쨌든 많이 잃었잖아.”

“괜찮아.”

어차피 동동들도 원하는 바였을 거다.

그들에게 죽음은 결국 나한테서 벗어나는 길이니까.

“진연.”

괜찮다고까지 말했는데도 심마가 좀처럼 물러나질 않는다. 날 보는 그의 눈은 퍽 간절한 빛을 띠고 있었다.

왜 이렇게 자꾸 내게 뭘 해 주려고 하는 거지?

…이렇게 나온다면 나도 할 말이 있다.

“좋아. 내게 원하는 거 하나 말해 봐.”

살짝 인상을 쓰며 흔쾌히 말을 내뱉었다. 그에 심마가 의아한 얼굴로 눈썹을 찡그린다.

[공과[功過, 공로와 과실을 아우르는 말]를 논하자는 거 아니었어? 공이 과를 완전히 덮었으니 그 답례를 해야지.]

이어서 전음으로 전했다.

“소원 하나를 들어줄게.”

끝말은 직접 목소리를 내 말했다.

“…….”

그리고 심마는 좀처럼 말이 없었다. 날 잡은 손에 일순 강하게 힘이 실리더니, 곧 다시 부드럽게 내 손을 고쳐 잡으며 엷게 웃었다.

“되려 소원 하나를 얻어 낼 줄이야.”

내게로 조금 더 바짝 몸을 붙이는 심마의 눈빛이 은근히 반짝인다.

“그렇다면 그 소원에 조건이나 제한은 있어?”

조건이나 제한?

세세히 따져 물을 줄은 몰랐기에 나는 미간을 설핏 찡그리며 잠시 고심했다.

‘흠.’

소원을 하나 들어준다고 했지만 정말 아무거나 다 들어줄 순 없는 노릇이다. 적정한 선이란 게 있으니까.

순식간에 생각을 정리하곤 심마와 똑바로 눈을 맞추며 입꼬리를 휘어 올렸다.

“없어.”

그리고 그 선을 시험해 볼 생각이다.

심마가 어디까지 넘어오는지.

내 말이 심마에게 있어 의외였는지, 아니면 예상 가능한 범위였는진 모르겠다. 표정이 약간 오묘해지며 눈빛에 의미심장한 빛이 실렸지만, 입가의 미소는 여전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심마의 안색은 아까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심마는 눈을 느리게 깜박이더니,

“아.”

나직한 탄성과 함께 내게 기울였던 몸을 천천히 바로 했다. 그러곤 내 손을 잡지 않은 다른 한 손을 들어 제 입가로 가져간다. 주먹 쥔 손을 입가에 댄 심마의 표정이 좀 전보다 더 오묘해진다.

“그러면… 식사를….”

답지 않게 뭐라 웅얼대는 심마를 유심히 지켜봤다.

“식사?”

일단 들린 단어만 냉큼 되물어봤다.

그러자 심마가 낮게 헛기침하며 입가에 댔던 주먹을 내려 뒷짐을 진다. 그러곤 새침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진연, 당신과 함께 식사를 하고 싶어.”

나는 심마의 붉어진 목덜미를 힐끗 본 뒤 다시 시선을 올려 그의 얼굴을 봤다.

소원의 적정선에 대해 생각하긴 했어도…. 이렇게 허무하게 본좌가 내건 소원을 낭비할 줄은 몰랐다.

식사를 대접받는 걸 소원으로 쓰겠다니. 식사쯤이야 의례적인 감사 의미로 왕왕 쓰이는 거잖아. ……남는 것도 없고.

속으로 콧방귀를 뀌며 ‘안 돼’라고 말했다. 그리고 곧바로 왜 안 되는지 그 이유를 말해 줬다.

“그건 소원 축에 못 껴.”

단호히 거절한 뒤 심마가 실망하기 전에 선수 쳐서 이어 말했다.

“원래 오늘 같이 식사하려 했으니까. -의례적인 감사 의미로.”

내 말에 심마가 멈칫하더니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방금 어둠침침했던 낯빛이 해가 떠오르는 것처럼 밝아진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36)============================================================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