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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질 사형입니다-137화 (137/141)

<137화>

“그러면 누각에서 같이 경치를 즐기는 걸로 할게.”

곧 심마가 자신이 원하는 걸 하나 더 말했다. 하지만 두 번째로 내건 소원 역시 내 성에 안 찼다.

나는 좀 전보다 더 깊이 인상을 썼다.

“안 그래도 누각에 갈 생각이었으니까 이것도 소원으로 못 쳐.”

아까와 같이 거절하자, 미소 짓고 있는 심마의 입이 점점 벌어지더니 이내 해사하게 웃음을 머금는다. 환한 안색에 반달을 그리는 눈꼬리, 그리고 위로 싱긋 호선을 그리고 있는 입술.

심마의 입가에 팬 보조개에 잠시 시선을 빼앗겼다가 바로 눈길을 돌렸다.

“소원하는 게 전부 예정된 일이었을 줄이야. 오늘따라 운이 좋네.”

만족해하는 심마의 앞에 마주 선 나는 쿵- 쿵- 뛰고 있는 내 심장 고동 소리에 귀가 멀 것 같았다.

꾹 마음을 내리눌러 감정을 추스르고 간신히 진정 상태에 접어들 때까지 심마와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모르겠다. 내게 닿은 심마의 무수한 눈길을 하나하나 헤아리기엔 스스로의 상태를 돌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궁관 바깥이었다.

멍하니 두 눈을 깜박이며 언제 놨는지 모를 빈손을 쳐다봤다.

심마의 손은 언제 놓은 거지?

…아니, 그보다 동굴에선 언제 나온 거야?

내가 너무 넋이 나가 있었나 보다. 머리를 가볍게 흔드는데 심마가 갑자기 시야 안으로 고개를 들이민다.

“생각은 다 끝났어?”

쾌활한 목소리였다.

웃음 짓고 있는 심마의 두 눈엔 정이 넘쳐흘렀다. 그의 웃는 얼굴을 바라보다 문득 ‘쾌청하다’란 단어를 떠올렸다. 쾌청하고 청명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오래 한 거야?”

심마는 즐거워 보였다.

반면 나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긴….’

내 시선에서 복잡함을 느꼈는지, 심마의 표정이 덩달아 미묘하게 진중해진다.

“진연?”

재차 나를 부르는 심마에 고개를 가볍게 가로저어 보인 뒤 그에게서 시선을 돌려 앞을 보았다.

“저기에 누각이 있어?”

때마침 우리가 서 있는 곳이 비탈이 가파르게 진 경사 위쪽이었다. 그래서 골짜기 너머 절경이 시야에 넓게 들어왔다. 아래를 굽어보자 우거진 나무 사이로 파초나무가 보였다. 다른 나무들과 구분되는 관상목이라 눈에 띄었다.

“호연루[好延].”

옆에 다가와 서며 심마가 말했다.

‘호연루’. 그게 저기 있을 누각의 이름인 모양이다.

나는 산의 지세를 대강 훑으며 발을 딛기 좋은 곳을 물색했다. 내원근을 운기할 수 없으니, 경공을 쓰지 않고도 잘 내려갈 방법을 찾아야 한다.

“저기가 지름길이야.”

내게로 슬쩍 몸을 기울이며 심마가 말했다.

나는 심마가 눈짓하는 방향을 보자마자 속으로 작게 혀를 찼다.

…하필이면.

지세가 가파르고 험해서 내가 가장 뒤로 미뤄 둔 경로이다.

10분 일찍 가려다 10년 먼저 간다고, 경공 없이는 다른 의미의 지름길이 될 공산이 크다.

“…큼. …뭐, 급한 일도 없는데. 굳이 빨리 갈 거 없잖아?”

차마 지금 내 힘이 부족하다고 말할 순 없어서 시치미를 뗐다.

흘끗 쳐다본 심마는 나를 보며 엷게 웃고 있었다.

“그러면 느긋하게 걸어갈까?”

“응.”

냉큼 대답하며 심마가 딴말하기 전에 얼른 내가 봐 둔 경로로 움직였다.

비교적 완만한 길이긴 하지만 지세가 험하긴 여기도 마찬가지였다. 이리저리 튀어나온 돌부리를 가볍게 건너뛰며 선검을 검집째 빼 들었다. 앞을 막는 나뭇가지며 덤불들을 젖히기 위해서였다.

심마는 내 뒤를 쫓아왔고 나는 앞장서서 길을 만들었다.

가끔가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 외엔 내가 나뭇가지를 쳐내는 소리만이 일정하게 탁-, 탁- 울렸다.

한적하다.

한가하고 고요한 이 분위기에 복잡했던 사고마저 평온하게 잠기는 기분이다.

부는 바람에 섞인 냄새가 맑다. 점점 선명해지는 잔잔한 물결 소리를 쫓아 앞의 수풀을 넘어갔다. 그리고 한순간 시야가 화악 넓어졌다.

나는 잠시 멈춰서서 전방을 응시했다.

빽빽했던 나무의 경계는 여기까지였다. 탁 트인 앞엔 호수가 있었다. 내가 발을 딛고 있는 곳까진 흙이었고, 바로 저 앞부턴 작은 자갈들이 깔려 있다.

호수 너머로 3층짜리 누각이 보였다. 누각 위에 달린 편액엔 수려한 서체로 호연루[好延]라 적혀 있다.

“…호연루.”

편액에 적힌 이름을 나직이 읊조렸다.

좋은 일을 끌어들이는 누각이라. 나쁘지 않은 이름이다.

흔쾌한 기분으로 성큼 나아가려다가, 문득 뒤에서 쫓아오고 있을 심마에게로 생각이 미쳤다. 휙 뒤를 돌아봤다.

심마는 멀지 않은 곳에서 한 손으로 나무를 짚은 채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내게서 비스듬히 돌아선 채 등을 구부리고 있어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얼핏 보이는 낯빛이 창백했다. 나무를 짚고 있는 손에도 잔뜩 힘이 들어가 있다.

대체 무슨 일이지?

앞뒤 생각할 겨를없이 심마에게로 뛰어갔다.

수풀을 헤치며 급히 서두르다 보니 뻗어 나온 나뭇가지에 옷이 걸리며 그대로 부욱 찢어졌다.

“왜 그래?”

심마의 곁에 다가서며 물었다.

진작에 내 기척을 눈치채고 있던 심마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내 쪽으로 틀며 구부리고 있던 등허리를 천천히 편다.

나는 그런 심마를 보며 손끝을 움찔거리다가 결국 세게 주먹을 말아 쥐었다.

심마의 어둡게 가라앉아 있던 눈빛이 내게 닿는 순간 따스한 빛을 머금는 걸 보며, 세게 쥐고 있던 주먹에 힘을 더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드는 느낌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결국 주먹 쥐었던 손을 도로 펴 심마에게로 뻗었다. 부축해 주기 위해 심마의 어깨를 한 팔로 안아 주려는데 그런 나를 심마가 가볍게 밀어냈다.

순간 멈칫하며 그대로 굳었다.

“…괜찮아.”

이어 들려오는 심마의 말을 멍하니 들었다.

머릿속이 먹먹하다.

“다 왔어?”

심마의 시선이 나를 스치며 내 뒤쪽으로 향한다.

“…어, 응.”

혼자 일어서는 심마에게서 억지로 눈을 돌리며 대꾸했다. 호수가 있는 전방을 한껏 미간을 찌푸린 채 노려보다가, 나를 지나치는 심마를 흘긋 곁눈으로 보곤 다시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그 손목을 붙잡았다.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나온, …아니, 반사적으로 나온 게 아니라….

……계속 신경 쓰여서 줄곧 이러고 싶었다.

나는 미간을 찡그린 채, 이쪽을 돌아보는 심마와 눈을 맞췄다.

“몸이 어디 안 좋은 거야?”

그리고 결국 말했다.

속이 울렁거리는 긴장감에 저절로 마른침을 삼켰다.

“…….”

심마는 잠시 말이 없었다. 어리벙벙했던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피어나는 걸 뚫어져라 쳐다봤다.

“괜찮아. 기혈이 뒤틀린 것뿐이야.”

곧 심마가 선선히 답했다.

하지만 그걸로는 대답이 충분치가 않다.

“기혈이 왜 뒤틀렸는데?”

“…내상이 있는 상태로 운기를 하는 바람에 심맥이 상했나 봐.”

운기라면, 아까 궁관의 결계를 풀 때를 말하는 건가? 그때 선력을 썼으니까.

“…궁관의 결계를 풀 때 말이야?”

“응.”

역시 내 추측이 맞았다.

“내상은 왜 생긴 건데?”

“그건….”

심마가 말끝을 흐리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는다.

그에 퍼뜩 생각나는 게 하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 나 때문에 각혈한 일이 있었지. 그때 입은 내상이 아직 완전히 낫지 않았구나.

그것만으로도 예상외인데, 그 일에 결계를 푸는 일이 겹쳤다고 심맥이 상할 정도로 기혈이 뒤틀리다니.

어쨌든 그는 천룡인데, 그 일이 이렇게까지 큰 후유증을 불러오는 건….

머릿속이 복잡하다.

지난날 심마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쉽게 다치고, 빠르게 낫지 않아. 나약하기가 유리 같은 몸이지.’

대체 네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생각에 잠겨 있는데 손등에 부드러운 무언가가 닿았다. 바로 상념이 흐트러지며 내게 닿은 심마의 손에 온 신경이 집중되었다.

심마는 제 손목을 잡고 있는 내 손 위로 제 손을 겹치더니,

“이제 정말 괜찮아.”

다정한 목소리로 나를 달래듯 말했다.

“…아까는 선기를 제어하기 힘들어서 내게 닿지 못하게 한 거였어.”

궁금하지도 않은 변명을 늘어놓는 심마를 가만히 바라봤다.

심마가 싱긋 웃어 보이며 고개를 옆으로 비스듬히 기운다.

…갑자기 웬 애교람.

나는 사납게 시선을 돌리며 한쪽 입술을 씰룩였다. 그리고 한 손에 들고 있던 선검을 무심히 툭 놓았다. 내 의지에 따라 선검이 지면에서 반 뼘 정도 떠올랐다.

어검(검을 타고 나는 것)을 할 생각이었다. 되도록 운기하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느껴지는 심마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먼저 검에 올라탔다. 그리고 최대한 태연함을 가장하고선 자연스럽게 심마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다행히 심마는 별말 없이 내 뒤에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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