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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질 사형입니다-140화 (140/141)

<140화>

천천히 허리를 숙여 부서진 가면을 주워 들었다.

“그건 두고 다른 걸 다시 골라 봐.”

심마가 내 손에서 부서진 가면을 가져가며 말했다.

“이건 어때? 부용꽃.”

…부용꽃?

심마가 가리키는 가면을 보았다.

이마 가운데와 양 눈가에 연지로 부용꽃 문양을 그린 반가면이었다.

“꽃말도 좋아. ‘행운은 반드시 온다.’”

부용꽃 가면을 집어 들어서 내게 건네주는 심마에 얼떨결에 받아 들었다.

뒤늦게 거절하려 했지만 그땐 이미 심마가 값을 치른 후였다. 부서진 가면도 함께 계산한 뒤 그건 노점에 두고 왔다.

등 뒤로 주인장의 잘 가라는 인사와 함께 덕담이 들려왔다.

생각지도 않게 생긴 부용꽃 가면을 얼굴에 쓰고선, 귀신 가면을 쓴 심마와 마주했다.

“마음에 들어?”

심마가 물었다. 여전히 맞잡고 있는 손으로부터 단단하게 붙드는 힘이 전해져 온다.

나는 대답 없이 심마에게서 고개를 돌려 앞을 보았다.

그리고 대뜸 물었다.

“…꽃말 같은 거 잘 알아?”

“아는 것만 알아.”

내 동문서답에도 심마는 착실히 대답해 줬다.

“그러면 아까 호연루에 있던 파초나무는?”

“…‘기다림’.”

가볍게 웃음 지으며 심마가 답했다.

“파초나무의 꽃말은 기다림이야. ……지근에 파초나무가 자라고 있는 ‘호연루(좋은 일을 끌어들이는 누각이란 뜻)’에서 들리는 금 타는 소리. 지음[知音, 자기의 속마음을 알아주는 친구]과 나누기 위함이네.”

말을 끝맺으며 내 쪽으로 비스듬히 몸을 기우는 그를, 나는 곁눈으로 힐끗 보았다.

“나는 이 가면 정말 마음에 들어.”

정이 담긴 목소리가 기분 좋게 울렸다.

나는 입술을 살짝 지르물었다가 곧 아주 작은 목소리로 화답했다.

“나도, 마음에 들어.”

그러곤 아까의 복잡했던 심경을 훌훌 털어 버리고 완전히 고개를 돌려 심마와 똑바로 눈을 맞췄다.

“고마워.”

한결 편안해진 목소리로 심마에게 말했다.

내 감사 인사에 심마가 맞잡은 손에 일순 강하게 힘을 준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진 공자.”

곧 심마가 웃음기 담긴 목소리로 시원하게 답했다.

그 머리 위로 보이는 밤하늘의 별. 그 별빛이 언제 심마의 두 눈에 내려앉은 건지, 날 보는 그의 두 눈은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심마와 눈을 맞추는 새에 안 좋은 기분은 사라졌다. 이제야 비로소 미소가 지어진다. 나는 엷게 웃으며 심마와 맞잡은 손을 잡아끌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홍등이 흔들리고, 어디선가 사향 냄새가 실려 온다. 이제 보니 가까이 향낭을 파는 노점이 있다. 수레를 노점으로 꾸며선 거기에서 향낭이며 장신구들을 팔고 있었다.

순간 좋은 생각이 들어, 심마를 데리고 그 노점 앞에 섰다. 가면은 머리 뒤로 넘겨 목에 매달고선 향낭을 살폈다.

금색 문양이 들어간 보라색, 청색 문양이 들어간 은색. 그 두 개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와서 각기 손에 들고 살펴보려 했다. 그래서 무심코 양손을 움직이려다가, 내 손을 맞잡고 있던 심마의 손도 같이 덩달아 움직였다.

“…심마.”

잠시 망설이다가 심마를 불렀다.

“손 놔.”

낮게 속삭이며 심마가 여전히 잡고 있는 내 왼손을 눈짓했다.

곧 심마의 손이 미적거리며 천천히 떨어졌다.

갑자기 비게 된 손이 왠지 어색하게 느껴졌지만, 내색하지 않고 바로 향낭을 집어 들었다.

연연과 나눠 가진 향낭 하나가 허리춤에 매달려 있긴 하지만, 여기서 하나 더 추가해도 괜찮겠지.

“향낭 안에 무슨 약초가 들어 있습니까?”

“여기 보라색 향낭에는 길쭉한 잎의 노란색 꽃을 빻은 다음에 박하, 곽향, 회향을 넣었고…, 그리고 여기 은색 향낭에도 마찬가지로 노란색 꽃을 빻은 다음에 정향, 자단향, 박하를….”

상인의 설명을 들으며 고심하다가 심마를 돌아봤다. 가면에 대한 답례로 선물할 것인 만큼 그의 의향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돌아본 심마는 바로 옆의 옥패를 보고 있었다. 거리에서 흔히 파는 낮은 품질의 옥이었다.

진한 색의 옥들에는 대부분 구름이나 선경[仙境, 무릉도원] 같은 수려한 경치가 새겨져 있었는데 그중 심마가 보고 있었던 건 잔칫날 풍경을 바탕으로 한쪽에 글자가 적혀 있는 거였다.

[進宴]

‘진연…?’

옥에 새겨진 글자를 속으로 읊었다.

‘진연[進宴]’. 내 이름과 같은 음이었지만 한자는 달랐다. 여기 옥패에 새겨진 ‘진연[進宴]’은 경사로움을 뜻하는 거다.

반면 내 이름인 ‘진연[塵緣]’은 경사로움과는 멀다. 속세와의 번거로운 인연을 뜻하는 거니까.

‘저 옥패가 마음에 드는 건가?’

심마가 보고 있는 옥패를 눈여겨본 뒤, 잠시 고민하다가 상인에게 향낭 두 개를 전부 포장해 달라고 했다.

옥패를 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심마가 그제야 시선을 들어 나를 본다.

“아. 향낭은 다 골랐어?”

그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곁눈으론 심마가 보고 있던 옥패를 다시금 슬쩍 봤다.

심마에겐 말하지 않고 사 뒀다가 나중에 주는 게 좋을까, 아니면 저 문양을 기억해 뒀다가 최고급 옥에 똑같이 새겨 주는 게 좋을까.

갖가지 생각으로 번잡해지는 머릿속에 저절로 이맛살이 찌푸려진다.

그때, 내가 은근히 곁눈질하고 있던 옥패에 희고 가는 손끝이 닿았다. 옥패를 집어 드는 손길을 쫓아 시선을 들자 귀신 가면이 보였다. 그 가면 너머, 정이 듬뿍 담긴 눈이 나를 보고 있었다.

“이것 봐. ‘진연[進宴]’. 당신 이름과 같아.”

내게 옥패를 내밀어 보이며 심마가 말했다.

“발음만 같지. 나는 티끌 진[塵]에…,”

나는 옥패를 쥐고 있는 심마의 손 아래 손목 안쪽에 손가락을 대고선 내 이름을 정자로 써 줬다.

“…인연 연[緣].”

마지막 한 획을 그은 다음 힐끗 눈을 굴려 심마를 보았다. 그는 나를 직시하고 있었다.

귀신 가면에 가려져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즉, 이 세상과의 연분[緣分, 하늘이 베푼 인연]을 뜻하는 거네.”

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심마가 말했다.

나는 방금까지 심마의 손목에 글을 썼던 손가락을 구부려 주먹 안에 감추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흔한 이름이야.”

심마가 옥패를 상인에게 건네는 걸 주시하며 아무 생각 없이 계속 이어 말했다.

“기실 이름이랄 것도 없이, 그냥 그렇게 불리다가 이름으로 삼게 된 거지만.”

말하는 와중에도 머리 한편으론 심마가 저 옥패를 사느냐, 사지 않느냐 뿐이었다.

“…누가 그렇게 불렀는데?”

“스승님이.”

상인의 손에서 포장되는 옥패를 보며 대수롭잖게 답했다.

역시 사려는 거구나.

포장된 옥패를 받아 들며 값을 치른 심마의 손이 곧장 내게로 향했다. 내게 내밀어진 그 손엔 방금 포장된 옥패가 들려 있었다.

“자, 여기.”

“응?”

“계속 보고 있었잖아.”

“그건….”

네가 보고 있어서 나도 본 건데.

속의 말을 삼키며 심마가 건네준 옥패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내친김에 나도 지금 향낭을 심마에게 주기로 했다.

방금 옥패를 받았으니 나는 그와 어울리는 은색 향낭을 하고, 심마에겐 보라색으로 줘야지.

음. 검은색 장포에 보라색 향낭이라. 제법 잘 어울릴 것 같다.

조금 전에 포장을 맡겼던 향낭 중 하나를 심마에게 내밀었다.

내 선물이 예상외였는지 심마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곧 받아 들고선 말없이 얼마간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날 보며 지금 허리춤에 차도 되냐고 물어 왔다.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 뒤 방금 심마한테 받은 옥패를 허리춤에 매달았다. 그리고 그 옆에 내가 산 은색 향낭까지 같이 매달자, 주렁주렁 달린 장식들이 퍽 요란해 보였다.

그래도 나쁘지 않아 만족스럽게 미소 지으며 시선을 들어 심마의 허리춤을 보았다. 심마 역시 방금 내게서 받은 향낭을 맨 채였다.

이렇게 바로 착용할 줄 알았으면 굳이 포장하지 않아도 됐을걸.

나는 기꺼운 마음을 괜스레 감추며 손을 입가로 가져갔다. 낮게 헛기침하는데, 이쪽으로 향하는 심마의 시선이 느껴졌다. 이어 심마가 내게 성큼 팔을 뻗었다.

피하려면 충분히 피할 수 있었는데 나는 굳은 채 심마가 하는 양을 바라만 보았다. 심마의 손이 향한 곳은 들어 올린 팔의 벌어진 소매 안쪽이었다.

가슴이 쿵-쿵- 뛰었다.

설마…, 내 소매 안으로 들어오려는 건가?

기대인지 뭔지 모를 생각을 하며 심마를 빤히 지켜봤다. 심마의 손은 내 소매 끝자락을 스치듯 지나치며 그대로 돌아갔다.

심장의 두근거림이 무겁게 가라앉는다.

“이건 뭐야?”

방금 내 소매 안에서 집은 걸 보여 주며 심마가 물었다.

나는 조금 전까지 하던 헛된 망상을 뿌리치며 심마의 손에 들린 것에 집중하려 애썼다.

‘저건….’

그리고 집중하려 애쓸 필요도 없이 보자마자 뭔지 바로 알았다. 초옥에서 챙겨온 무본의 그림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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