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소매 안에 챙겨 뒀던 건데, 잠깐 팔을 들어 올린 새에 발견한 모양이다.
“연연 곁에 있는 개방 걸개의 그림자야.”
“왜 그자의 그림자를 가지고 있는 건데?”
“그거야 내 제자의 마음이 약해서지. 연연은 무본의 왼쪽 눈이 상하길 바라지 않아 그 곁에 있길 고집하고, …나는 무본을 완전히 믿지 않거든. 그래서 감시 목적으로.”
“…….”
“왜 무본의 왼쪽 눈에 그런 법진을 새긴 거야?”
심마의 손에서 무본의 그림자를 도로 가져오며 물었다.
“잠깐 보모 역할을 부탁하려고 그랬어. …그런데 그게 이렇게 성가시게 될 줄은 몰랐네.”
심마의 시선이 내 손에 들린 무본의 그림자에서 떨어지질 않는다.
“쓸데없는 짓이었단 걸 이제 알겠어?”
마음에도 없는 질책을 하며 무본의 그림자를 소매 안에 도로 집어넣었다.
“응. 다음부턴 안 그럴게.”
예상보다 더 순순한 대답이 돌아왔다.
가면에 가려져 여전히 무슨 표정인지는 보이지 않는다. 나는 발끝으로 지면을 탁, 탁 치며 잠깐 고민하다가,
“가면 안 답답해?”
툭 던지듯이 말했다.
“괜찮은데?”
둔하기 짝이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한쪽 입매를 꾹 늘렸다가,
“그럼 됐고.”
그 말만 내뱉곤 심마에게서 돌아섰다.
“진연.”
그런 나를 뒤에서 심마가 붙잡았다.
“그런데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그 향낭은 어디서 난 거야?”
날 붙드는 손길에 끌려 무심코 반걸음 뒤돌아섰다. 비스듬히 돌린 시선에 비친 건 귀신 가면이 아니었다. 심마의 뚜렷한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진한 눈썹과 수려한 눈매, 반듯하게 잘생긴 옥과 같은 미인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야말로 경국[傾國, 나라를 기울 정도의 미인]이었다.
잠시 멍하니 넋을 놓은 나를 눈치채곤 심마가 옅게 웃는다. 붉은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새하얀 치아가 언뜻 보였다.
“진연.”
다시 나를 부르는 그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가면은 대체 언제 벗은 거지?
심마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 빠르게 살펴보았다. 귀신 가면은 심마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었다. 내가 준 향낭 바로 옆이다.
나는 입을 달싹였다가 결국 꾹 다물었다.
심마의 허리춤에서 귀신 가면을 발견하자마자 하려던 말이 생겼는데, 그걸 뭐라 말로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어서다.
“…내 제자가 선물해 준 거야.”
그래서 대신 심마가 묻는 말에 대해 대답했다.
무슨 향낭을 묻는 건지 물을 것도 없었다. 내게 달린 향낭이라곤 단 두 개뿐이니까.
“그보다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거야? 이제 슬슬 돌아가야 해.”
같이 신나게 놀았던 건 모른 척, 일부러 툴툴대며 말했다.
“돌아가서 먹을 것도 사야 하고. 음식 재료는 아직 아무것도 안 샀네. 서두르자.”
빠르게 말을 내뱉곤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입꼬리 끝이 자꾸만 호선으로 휘어져서 곤란하다.
그리고 그 곤란함은, 심마가 잡고 있던 내 팔을 놓는 순간 사라졌다.
…사라진 온기가 조금 아쉽다.
“뭐 살 건데?”
내 옆으로 다가와 왼손을 덥석 잡으며 심마가 물어왔다. 그에 나도 모르게 심마를 돌아보며 환하게 웃었다.
“꽃빵. 그리고 돼지고기랑 시금치, 미나리, 배추, 죽순, 달걀….”
생각나는 대로 말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어서 다시 심마를 보았다.
“아니면, 교자를 만들까?”
“좋아.”
심마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에 나도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를 만들지 정해졌으니, 사야 할 재료도 명확해졌다.
교자에 넣을 속 재료와 밀가루. 그리고 달걀도 필요하겠다.
우리는 함께 저잣거리를 거닐며 장을 봤다.
물건들은 사는 즉시 내 소매 안 아공간에 넣었고, 덤으로 받은 과일은 그 자리에서 반으로 갈라 나눠 먹었다.
그러던 중 우연찮게 커다란 약방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 사실 아주 우연은 아니었다. 은연중에 계속 눈으로 찾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약방을 보자마자 바로 그리로 달려갔다.
인간의 약이 심마에게도 통할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나로서는 심마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이것뿐이다. 지금의 난 운기조식조차 해 줄 수 없는 형편이니까.
교자 안에 아무리 좋은 한약 재료를 넣는다 한들, 약방에서 파는 환약[丸藥, 둥글게 빚은 약]엔 비할 바가 못 될 거다.
심마는 의아한 낯으로 순순히 따라왔다.
낮은 계단을 올라 약방 앞에 서선 곧바로 문고리를 잡아 밀어젖혔다.
찰그랑-
문 위에 걸어 둔 종이 서늘하게 울렸다. 어둑한 약방 안을 가볍게 둘러보며 안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갖가지 한약 냄새가 고여 있어, 마치 약탕기 안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좌우 벽면을 덮고 있는 약장(약초와 약재들을 구분해 담아 놓은 서랍)을 훑어본 뒤 정면의 겹문을 보았다.
겹문은 바닥까지 내려오는 갈색 천으로 가려져 있었는데, 그 안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얼마 안 있어 주름진 손이 겹문의 천을 젖히며 누군가 안에서 나왔다. 문에 매달린 종소리를 들은 모양이다.
백발이 성성했지만 아직 노인으론 보이지 않는 중년이었다. 겉에는 흰 도포를 걸쳤고, 염소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이쪽을 쏘아보는 신경질적인 눈매에 짜증이 서려 있었다.
전체적으로 예민하면서 피로해 보이는 낯이었다.
“오늘 영업은 끝났소.”
중년인이 우리를 힐끗 일별하며 말했다. 쌀쌀맞은 어투였다.
행색이며 말하는 투까지, 척 보니 이 약방의 주인장이다.
“잠시만.”
도로 겹문으로 들어가려는 그를 불러 세웠다.
그러곤 입구에 들어서면서부터 들고 있던 전낭을 통째로 약방 주인장에게 던져 주었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전낭은 약방 주인의 내민 두 손안에 안착했다.
“이 사람의 몸 상태만 진단하면 되니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것이오. 그리고 그에 맞는 약도 처방받고 싶은데. -되겠소?”
입꼬리를 끌어 올려 씩 웃으며 심마를 눈짓했다. 순간 나와 눈이 마주친 심마가 반사적으로 입꼬리를 휘어 미소 지었지만, 표정엔 여전히 얼떨떨한 감이 있었다.
“나?”
심마가 작은 목소리로 반문했다. 그에 나는 대꾸하지 않고 약방 주인의 반응만 살폈다.
약방 주인은 제 손안의 전낭을 슬쩍 내려다보더니 바로 눈을 내리깔았다. 전낭의 무게가 제법 되니 절로 성정이 온순하게 가라앉나 보다.
“…험험. 들어오시오.”
낮은 헛기침과 함께 약방 주인이 겹문 안으로 들어갔다. 의원을 불러오려나 보다.
나는 웃으며 심마를 돌아봤다. 한 걸음 물러나서 있던 심마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는다.
“나는 왜?”
심마가 물었다.
그에 나는 대답 대신 잡고 있던 심마의 손을 끌며, 다른 손으로 그 손목을 가볍게 감싸 잡았다.
“아직도 아파?”
내 물음에 심마의 눈이 살짝 커졌다가 호선으로 휘어진다.
“이제는 괜찮아.”
“그래도 의원한테 한 번 보여 봐. 아까 내상 입은 것도.”
나를 내려다보는 심마의 두 눈에 정이 넘쳐흘렀다.
“알았어.”
심마가 대답했다.
곧 두꺼운 천이 드리워진 겹문 안쪽에서 초로[初老, 노년에 접어드는 나이]의 의원과 함께 약방 주인이 나왔다.
나는 심마를 앞세워 그 둘에게 다가갔다.
심마가 먼저 의자에 앉고, 의원이 그 곁에 놓인 둥근 의자에 앉아선 맥을 짚었다. 검지와 중지, 약지, 이렇게 세 손가락으로 심마의 손목 안쪽을 지그시 짚더니 심력이 상했다는 진단을 내렸다. 그러곤 곧바로 열 몇 종류의 약재들을 줄줄이 읊기 시작했다.
옆에 있던 약방 주인이 그 말을 주워들으며 재빠르게 움직였다. 완전 속전속결이었다.
약재와 약초들을 이것저것 챙기다 보니 금세 열 꾸러미가 나왔다.
약방 주인이 종이로 싼 한약 열 꾸러미를 밧줄로 주렁주렁 엮어선 내게 내민다.
“이 약들을 하루에 3첩씩 달여 먹으며 몸을 정양하면 사나흘 내로 완쾌할 것입니다.”
의원이 말했다.
나는 약 꾸러미를 받아 든 채 묘한 기분에 잠겼다.
이러니 내가 꼭 심마의 보호자 같네.
“…오른 손목도 다쳤는데, 어떤가요?”
잠시 입을 꾹 다물었다가 물었다.
의원은 곧바로 심마의 오른 손목을 살피더니 고개를 가볍게 내저었다.
“좀 쉬면 자연히 나을 겁니다.”
의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이어 심마도 바로 일어나선 내 곁으로 와 섰다.
환한 심마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도 해사하다.
“감사합니다.”
의원과 약방 주인에게 차례대로 예를 갖춰 감사 인사를 한 뒤 돌아섰다. 심마도 뒤늦게 의원과 약방 주인에게 인사를 전한 뒤 나를 뒤따라 나왔다.
찰그랑-
뒤에서 들리는 서늘한 종소리를 배경으로 낮은 계단을 느긋이 내려갔다.
심마가 가벼운 걸음으로 계단을 두어 개씩 뛰어넘어 내 옆에 섰다.
“진연.”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밝다.
저절로 입꼬리가 휘며 미소가 지어진다. 나는 계단 한 칸을 남겨 놓고선 멈춰 섰다. 그새 계단을 전부 내려간 심마가 빙글 몸을 돌려 나를 마주 본다.
서로의 시선 높낮이가 딱 맞아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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