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1권) (1/41)

[BL]영국 비밀보안국의 비밀 1

#Intro

턱을 괴고 창밖을 내다보는 눈동자가 참으로 흐리멍덩했다.

텅 비었을 게 분명한 사장놈……이 아니라 사장님의 생각 주머니를 샌드백으로 쓸 수만 있다면 좋았을 텐데. 만약 그랬더라면 자신의 위가 이십 대 청년의 것처럼 건강했으리라. 여상한 얼굴로 그렇게 생각하며 성실한 비서 레이튼은 업무에 집중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있잖아요, 레이튼.”

늘어진 해파리처럼 흐물거리는 목소리가 레이튼의 청신경을 오염시켰다. 저걸 샐러드 해 먹을 수도 없으니 해파리보다 쓸모없는 것만큼은 분명한 사장님이셨다.

‘무슨 말을 하든 인생에는커녕 사업에도 하등 도움이 안 될 말일 테지.’

레이튼은 바다 건너 먼 나라의 훌륭한 흑인 대통령 오바마가 의료보험을 개혁하고 싶어 하는 만큼 확신할 자신이 있었다.

“난 아무래도 전생에 식물이었던 것 같아요.”

기대를 배신하지 않는 헛소리였다.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인 레이튼은 시선을 서류에 고정했고 입술만 움직여 사무적인 목소리를 내뱉었다.

“예, 저도 동의합니다.”

사장이 무슨 말을 하든 말든 무시로 일관하던 평상시에 비하면 썩 마음이 담긴 대답이기는 했다. 어쨌든 대답을 해줬다는 점에서 보자면, 그러했다.

레이튼의 잦은 국어책 읽기에 익숙한 사장은 대답을 받았다는 사실 하나로 환하게 환하게 밝아졌다. 그래 봤자 대체로 표정근이 일을 덜 하는 인간인 터라 표정 자체에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 사장은 “역시 그렇지?” 하며 스스로의 생각이 아주 합리적인 추론이라는 인정을 받기라도 한 양 가볍게 뺨까지 붉혔다.

칭찬에 박한 레이튼이 반응을 돌려준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양 다시 일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 사장의 모습에 충실한 비서는 성실히 움직이던 펜을 멈추고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

사장은 올해로 스물일곱이다. 자신이 젊었던 시절에는 철이 드는 것뿐만 아니라 책임감 있게 제 가족을 꾸릴 나이였다. 아무리 시대가 변했다지만, 어째 저 도령은 너덧 살 먹은 시절부터 변할 줄을 몰랐다.

지금만 해도 그랬다. 일은 일대로 벌여놓고-그가 주범이었던 적은 의외로 손에 꼽았지만, 어쨌든 사고를 몰고 다니는 태풍의 눈이었다.- 나 몰라라 등을 돌리면 끝나는 줄 알던 어린 시절과 다를 바가 없다. 그에게 한 회사를 등에 업은 책임감 같은 건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었다. 통탄할 노릇이었다.

갓 이유식을 먹기 시작할 때부터 지켜봐온 사이였다. 대체 어쩌다 이런 인간으로 자란 걸까. 자신의 방향성에는 하등의 문제가 없었던 것 같은데, 정말이지 이상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큰 도령들에게 밀리지 않도록 체계적으로 엄선한 교육을 시켰다. 그 모든 걸 떨어지기는커녕 넘칠 정도로 해내는 게 어린 시절 수재로 이름을 날린 사장이었다. 그런데 왜! 대체 어디서 뭘 어떻게 잘못했기에 이따위 결과물이 나온 걸까.

레이튼은 이 해파리 같은 사장놈 덕분에 다이아 수저를 물고 태어나 걸음마 걸을 때부터 돈을 처바른 영재교육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반평생을 귀족 자제 교육에 쏟은 그에게 있어서 사장놈의 존재는 굴욕적이기 짝이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오죽 분했으면 계약기간이 끝난 후에도 자발적으로 남아 사장놈의 곁을 지켰겠는가.

결과적으로 레이튼이 사장놈 옆에서 적지 않은 시간을 거하게 허비했다는 점을 되돌아보면, 한낱 감정에 휘둘린 잘못된 선택에 후회를 곱씹을 수밖에 없는 것도 당연했다.

두개골을 까보면 분홍빛 뇌를 대신해 투명한 해파리 젤리로 가득 채워져 있을 게 분명한 사장놈을 멀쩡한 인간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세상천지에 존재할 수 없으리라. 레이튼은 확신했다. 자신이 못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도 불가능하리라는 안이한 판단은 아니었다. 그것만은 20년 전 발병한 만성 위염에 대고 장담할 수 있었다.

사장놈은 병원균이다. 백신을 만들 수도 없이 시시각각 변화하는 변종 바이러스의 일종일 가능성도 있었다. 저 게으른 해파리 증후군은 주변에 있는 사람들까지 병들게 만드는 전염병이다. 심지어 병원체인 본인을 제외한 모든 주변인들에게 만성 두통이나 신경성 위염을 동반하는 악질적인 종류의.

만약 사장놈이 그의 말대로 해파리가 아니라 식물이라면, 분명 겉보기에 멀쩡한 데다가 심지어는 지극히 안전해 보이기까지 한, 치명적인 독풀일 게 분명했다. 해파리가 그런 것처럼, 언뜻 보기에 평화로운 외견 자체가 전부 독성 가득한 본질을 숨기기 위한 위장일 테니 말이다.

생각해보면 바다에 두둥실 떠다니는 해파리나 땅에 뿌리박고 서 있기만 하는 식물이나 움직임이 극단적으로 적다는 점에서 사장을 꼭 빼닮기는 했다.

다시 일로 돌아가기 위해 검토하던 서류를 다음 장으로 넘긴 레이튼이 짤막하게 덧붙였다.

“사장님이 훌륭한 파리지옥이라는 건 사실이죠.”

일반적인 사고를 하는 상식인이라면 결코 칭찬으로 여길 수 없을 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장은 레이튼의 말에 재차 동의한다는 양 고개를 끄덕이며 쑥스럽게 웃었다.

왜 거기서 쑥스러워하는지 정상적인 사고의 레이튼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어떤 사고의 흐름을 거쳐야 파리지옥을 칭찬으로 들을 수 있는 건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사장놈은 파리지옥이 뭔지 모르는 모양이다. 해서 레이튼은 부러 파리지옥에 대해 부연설명 하지 않았다. 언젠가 파리지옥에 대한 진실을 알고 충격이나 먹어보라지.

네발로 기어다니던 시절부터 모셔온 도련님에 대해 불경하기 그지없는, 그러나 평소와 다름없이 가차 없는 평가였다. 그에게 할애하는 시간이 아까워진 레이튼은 쌓인 일을 경이로운 속도로 해치워갔다. ‘이 회사가 아직까지 망하지 않은 유일한 이유는 바로 제 덕분이라는 걸 사장님 빼고 모두가 압니다.’라는 당연한 사실은 굳이 입 밖으로 꺼낼 필요도 없었다.

레이튼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길이 없는 사장은 혼자서 세상의 평화를 다 짊어진 얼굴로 흐느적거렸다.

하늘은 높고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했다. 여느 때와 같이 평화로운 한낮의 일이었다.

◇ ◆ ◇

사람들의 표정은 전에 없이 암담했다. 입을 벌린 채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아버리는 사람도 있었다. 충격적인 현실에 멍한 얼굴로 눈물만 글썽이는 이도 적지 않았다.

그럴 만도 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아도 이것보다는 덜 충격적이겠다.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어 길바닥에 나앉게 생겼다. 이 상황에서 하하호호 웃을 수 있으면 그게 사람이겠는가.

평소 같았으면 드나드는 손님으로 북적일 로비였다. 그곳에는 사장을 비롯한 전 사원이 모여 비통함에 잠겨 있었다. 누구 하나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젊은 사장, 케일리 로체스터는 모든 사람의 시선이 집중된 대형 스크린의 리모컨 전원을 눌러 껐다.

삑.

소리와 함께 신명나게 흘러나오던 뉴스가 까만 화면으로 바뀌었다. 케이블 채널 리포터의 흥분한 목소리가 사라진 로비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화사하게 볕이 들어오던 로비의 통유리는 블라인드가 내려져 있었다. 외부와 단절된 그 광경이 절망적인 상황을 더욱 드라마틱하게 만들었다.

“……큰일이네요.”

그 속에서 케일리는 부드러운 갈색 눈을 반달 모양으로 휘며 곤란하다는 듯 웃었다.

정말이지, 큰일이네. 이번에도 또 망하면 사업 같은 거 때려치우고 얌전히 장가나 가라고 했는데.

케일리가 생각하기에 자신은 아직 결혼을 하기에는 젊었으며, 어머니가 데리고 오는 여자들은 그리 좋지 않게 엮인 과거가 많았다. 어머니의 인맥으로 데리고 올 수 있는 상대에는 한계가 있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면 연애결혼을 하라는 말이 돌아오니, 착실히 일이나 하겠다고 얌전히 입을 다무는 게 현명했다.

그 착실한 일도 오늘 아침 도산해 변명으로 써먹을 수 없어지기는 했다만.

어차피 이렇게 된 김에 아무 회사에나 들어가면 안 될까. 어릴 적 잠깐 어울렸던 백작가의 레오폴드의 회사라면 웬만해서는 도산하지 않을 테다. 녀석에게 어릴 적 빌려줬던 손수건을 아직 돌려받지 못했으니 대신 일자리 하나만 받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건 그렇고 이번에는 대체 뭐가 문제였을까. 처음부터 끝까지 컨설턴트가 시키는 그대로 따라 했는데, 그래도 망하다니 이제 더 할 수 있는 게 없다.

회사 하나를 거나하게 도산시켜놓은 태풍의 눈 안에서, 여느 때와 다름없이 저 혼자 평온한 케일리를 바라보며 그의 비서 레이튼은 질린 표정을 한 채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구제의 여지가 없는 사장놈은 대부분의 일에 어이가 없을 정도의 천재성을 자랑했지만, 사업에서만큼은 그렇지 못했다. 재주도 없고 야망도 없는데 돈을 퍼내고 싶다면 차라리 헬기 하나를 사, 파운드로 가득 채운 후 런던 거리에 뿌리고 다니라고 조언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왜 하필이면 사업이란 말인가. 대체 런던 경제의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들어서.

어딘지 책망하는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레이튼을 스윽 피한 케일리가 기가 막힐 정도로 느긋한 어조로 가만히 읊조렸다.

“또 망했네요.”

장장 일곱 번째 사업 실패였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