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sion1. Find a job (1)
현대 영국이 왕정시대인 것은 아니었으나, 이곳에는 엄연히 신분제도가 잔존했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고 자본이라는 새로운 계급이 섞여든 후로, 작위만으로는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계층이 형성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한 현대 영국 사회에서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세습귀족이라고 한다면, 몇 가지 논쟁의 여지야 있겠지만 대표적으로 세 가문이 꼽혔다. 맥코이, 구블러, 로체스터.
세 가문 중 가장 역사가 긴 맥코이 백작가는 흔히 맥코이 재벌로 총집되는 재력가였다. 그들 가문이 이끄는 맥코이 그룹은 웬만한 중소 규모의 국가 예산을 가볍게 뛰어넘는 자금을 아무렇지 않게 융통하는 공룡 기업체이기도 했다.
맥코이 그룹의 총수이자 현 맥코이 백작은 서른을 갓 넘긴 레오폴드 시도어 맥코이였는데, 다소 특이한 성격과 눈에 띄는 외모로 세간의 주목을 모으는 사내였다.
그런 백작이 동성연인과 결혼을 전제로 진지한 관계를 이어나가고 있다고 커밍아웃을 한 덕분에, 동성결혼법의 시기와 겹쳐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던 것은 그리 멀지 않은 과거의 일이다. 인권단체에 거액의 기부를 이어온 맥코이 그룹이었다. 백작의 선택이 오히려 기업 이미지의 상승효과를 가지고 왔다는 분석이 나올 정도로 세간의 시선은 뜨거웠다.
그의 행보를 탐탁찮게 여기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맥코이 그룹은 여전히 불굴의 아성이었으며, 누가 뭐래도 영국 경제의 주축에 선 우량기업이었다.
두 번째로 꼽을 구블러 공작가로 말할 것 같으면, 대대로 예술과 학문에 조예가 깊었다.
얼마 전 아직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뜬 공작으로 말할 것 같으면, 힉스 입자에 대한 새로운 시각의 연구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을 정도로 뛰어난 학자였다. 그 공을 인정받아 여왕의 공로훈장을 받기도 했지만 구블러 가에서는 흔한 일들 중 하나였다.
어렸을 때부터 뛰어난 두뇌를 자랑하던 전 공작이 전대에 직접 설립한 몇 개의 연구시설은 특허로 벌어들이는 수입만 해도 어마어마하다는 소문이 공공연히 돌았다. 실제로 구블러 공작가는 100여 년간 제약, 생물학, 물리학, 화학 부문의 최첨단을 달려왔고 그만큼 금전적, 인적 자원이 풍부했다. 공작가를 물려받은 장자는 학문에 도통 관심이 없었지만, 그 집에 입양된 둘째는 공작을 넘어서는 천재로 가문의 미래를 밝혀주었다.
마지막 가문인 로체스터 공작가는 세 공작가를 나란히 놓고 비교하자면 국가 예산이나 신기술을 주무르는 대단한 가문은 아니다. 그럼에도 영국의 세습귀족 중 영향력으로 줄을 세워놓으면 제일 먼저 입을 모아 말하는 것이 바로 로체스터 공작가였다.
로체스터는 기업가인 맥코이와 학자 구블러와는 달리 직접적인 의미에서 국가에 봉사하는 세습귀족이었다. 단일 가문에서 가장 많은 장관을 배출한 가문으로도 유명한 로체스터 가는, 영국 내각의 역사와 함께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거기에 더해, 상원에서 정치활동을 하는 이들까지 합치면 로체스터 가문의 영국내 입지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알 만했다.
상원의 권한이 비교적 제한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내각을 이루는 장관과 상원, 그리고 선거로 선출된 하원까지 합치면 국민들에게 가장 친숙하며 영향력 있는 귀족가로 로체스터 가문이 꼽히는 이유가 쉽게 드러났다.
당연하게도 세습귀족이라고 해서 아무나 내각에 발을 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로체스터 가문은 대대로 청렴결백했으며 타의모범이 되는 윤리관으로 영국민을 최우선시 하는 훌륭한 귀족이었다. 천지가 개벽하지 않는 한 그들은 앞으로도 그러리라는 국민들의 신뢰를 등에 업고 국가에 봉사하는 타의 귀감이었다.
그리고 현재.
영국민의 신뢰를 한몸에 받는 로체스터 공작 가문의 저택에는 때 아닌 피바람의 전조가 감돌았다.
◇ ◆ ◇
로체스터 공작가는 커다란 사유지 안에 몇 채의 건물이 흩어져 있는, 일종의 작은 부락이었다.
장남과 장녀 내외는 본가에서 차로 십 분 정도 떨어진 각각의 별채에 살았고 미혼인 차남은 기본적으로 본가에 머물렀다. 대학생인 삼남과 막내딸은 통학을 위해 학교와 가까운 곳에 집을 얻어 살았지만, 졸업 후에는 당연히 저택에 돌아올 예정이었다.
그 외에도 몇몇 방계의 친척들까지 합치면 로체스터라는 성을 단 사람들은 대부분 사유지 안에 거주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규모로 보나 역사로 보나 가장 크고 훌륭한 저택인 본가에는 현재 로체스터 공작 부부와 미혼에 학업을 마친 차남만이 남아 있었다. 가족 외의 사용인들을 세면 머릿수는 늘어났지만, 아침식사를 함께하는 인원에 포함되지 않으니 굳이 세어야 할 이유가 없다.
가족과의 시간을 중시하는 공작은 바쁜 공무를 수행하는 와중에도 아침식사를 가족과 함께하기로 유명했다. 제각각 바쁜 스케줄을 소화하다 보니 그 시간은 로체스터 가문의 직계가족이 모이는 유일한 시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 봤자 지금은 공작 부부와 차남밖에 없지만, 시간이 흐르면 흩어진 가족들이 다시 모일 테고 또 흘러나갈 것이다. 그러니 지금 당장 함께할 수 있는 가족과 그들과의 시간에 집중하자는 것이 공작의 결론이었다.
헌데, 오늘의 아침 식탁은 영 썰렁했다. 셋밖에 없는 구성원에서 하나가 빠지면 삼분의 일이다. 그건 제법 큰 빈자리였다.
“케일리는 아직도 자고 있는 게야?”
한 번도 아니고, 두 번도 아니고, 자그마치 일곱 번째 사업을 시원스레 말아먹은 주제에 ‘조금’ 풀이 죽었을 뿐인 얼굴로 당당히 기어들어 왔던 차남이 보이지 않았다.
사업을 말아먹은 건 그래도 괜찮았다. 뭐라도 시도해보려고 하는 못난 아들에게 자신이 가진 걸 떼어주는 건 어쩔 수 없는 부모의 마음이었다. 차남 케일리는 그리 큰 시도를 하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아직은 공작의 감당범위 안에 있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폐를 끼쳐놓고선 ‘조금’ 풀죽은 얼굴밖에 하지 않는 데에는 못마땅함이 앞섰다. 공작의 입에서 고운 말이 나올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케일리를 비롯한 공작가의 자제들이 어렸을 때부터 돌봐온 집사 레이튼은 공작의 물음에 대답이 없었다.
대대로 로체스터 가를 보좌한 브룸 가의 레이튼은 로체스터 가의 직계 자식들의 교육을 도맡은 남자였다. 수년 전 막내가 대학에 들어간 후에는 주로 본가에 머무르며 로체스터 가의 관혼상제를 도맡은 유능한 집사였으나, 요 몇 년 케일리의 개인비서로 공작의 걱정을 덜어주는 역할을 도맡은 것뿐이었다. 현재는 제 회사를 도산시킨 케일리 덕분에 백수가 되어 다시 로체스터 가의 집사로 돌아왔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제 손으로 교육시킨 케일리를 못난 친자식처럼 소중하게 생각하는 레이튼은 공작의 물음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한참을 고민했다. 주름진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고, 종내에는 주인을 앞에 두고 땅이 꺼져라 한숨까지 내쉬었다.
“주인어른.”
로체스터 공작을 부르는 목소리가 전에 없이 무거웠다. 그러고는 안주머니에서 하얀 봉투 하나를 꺼내 식사가 준비된 테이블 위로 내려놓는 것이 아니겠는가.
“케일리 도련님께서 가출하셨습니다.”
천근만근 무거운 레이튼의 보고를 들은 로체스터 공작의 미간에 깊게 주름이 팼다. 연륜이 깃든 연녹빛 시선이 하얀 봉투에 새겨진 단정한 글씨에 머물렀다.
“가출이라고…….”
가만히 흘러나온 중후한 목소리는 의문형조차 아니었다. 자신의 둘째 아들이 절대로 하지 않을 일이 있다면 그거야말로 가출이었다. 제 자식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하는 공작은 봉투에 적힌 필체가 빼도 박도 못하는 차남의 것이라는 걸 눈으로 확인하면서도,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친애하는 아버지께.]
다섯 살 먹은 유치원생도 아닌 놈이 그것 참 당당하게 써놓기도 했다. 어버이날에 받았더라면 기분이 좋았을 인사말이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할 말을 잃은 로체스터 공작이 봉투를 집어 들었다. 정갈하게 접힌 내용물을 꺼내 펼치자 역시나 단정한 필체로 짧고 간결하게 용건이 적혀 있었다.
[평범하고 평화로운 삶을 찾아 떠납니다. 당분간 찾지 말아주세요. 케일리 S.]
도무지 어디서부터 바로잡고 넘어가야 할지 모를 내용이었다. 어찌됐건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자신의 둘째 아들이 나이를 그렇게 먹고도 아직 정신을 못 차린 게 분명하다는 것이었다.
녀석이 말하는 평범한 삶이 얼마나 비범한지 잘 알고 있는 공작에게 있어 아들의 편지가 개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세상 물정 모르는 건 둘째치고서라도, 이쯤 되면 둘째 놈을 마냥 풀어놓는 것이 사회 질서와 정의를 어지럽히는 건 아닐까 걱정스러울 지경이었다.
애당초 로체스터 공작은 결코 강압적이거나 가부장적인 가장이 아니었다. 오히려 정계와는 골수까지 안 맞는 둘째 아들을 위해 일곱 번이나 사업자금을 내어준 장본이기까지 했다. 애들은 하고 싶은 걸 하고 살아야 한다는 지론으로 아들의 길을 닦아준 것이 잘못이었을까. 조금 더 엄했어야 하나. 자신의 가정교육이 잘못되었던 걸까.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 와서 후회한다고 다 자란 애가 하룻밤 새 변하는 것도 아니었다. 심지어 스물일곱이나 먹고 다섯 살짜리도 안 쓸 가출편지 하나 달랑 남기는 꼴 좀 보라지. 이건 가정교육 이전의 문제였다. 물론 가정교육에도 문제가 아예 없지는 않았다고 인정하고 있었지만, 어쨌든 그랬다.
“끌고 올까요?”
어제까지만 해도 케일리의 비서였던 레이튼은 어느새 유능한 집사로 돌아와 있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케일리 녀석에게 꼬리를 붙여놓은 것일 테지. 공작은 편지 끄트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잠시간 말이 없었다.
평범한 삶. 그러니까 녀석이 말하는 평범한 삶이란, 매 시즌 유행에 따른 명품 컬렉션으로 온몸을 치장하고 기분에 따라 시계며 구두를 바꾸어야 했고, 삼시 세끼를 훌륭한 프로 셰프가 만드는 삶이었다.
주말이면 상류층 자제들이 모이는 파티에 불려 나갔고 안주머니에 든 수표책에 사인만 하면 무엇이든 원하는 게 손에 들어온다. 그 모든 것을 당연하게 누리는 케일리에게 있어서 평범함은 결코 일반상식선의 ‘평범’이라는 단어로는 수식할 방법이 없는 무언가였다.
비꼼이나 역설이라면 모를까, 녀석이 생각하는 평범이 결코 평범하지 않다는 냉정한 현실을 어린 시절부터 제대로 가르쳤어야 했을까. 하지만 다른 형제들은 같은 교육을 받고도 문제없이 제 길을 잘 찾아갔다. 녀석의 두 동생만 해도 그랬다. 그러니 문제가 있다면, 그건 가정교육이나 환경보다도 케일리 자체에 있다는 게 그나마 타당했다.
케일리도 머리가 나쁜 아이는 아니었다. 오히려 붙여놓은 가정교사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비상해, 내내 영재 소리를 들었다. 그러던 녀석이 어쩌다 이 모양 이 꼴이 됐을까. 공작으로서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같은 교육을 받은 제 형과 누나들은 훌륭한 정치가로 일선에서 활약하고 있는데, 케일리 그 녀석만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았다. 야망이 없는 게 문제일까. 그렇다기에 정치만큼이나 어울리지 않는 사업 이야기를 먼저 꺼낸 것은 케일리였다.
정치를 하느니 샐러리맨이 되겠다고 했고, 그럴 거면 차라리 사업이나 해보라고 권한 멍청이가 있기는 했다. 옆에서 바람을 불어넣는다고 쉽게 움직이는 케일리도 아니었지만, 그 망할 놈에게 원망의 화살이 돌아가는 건 어쩔 수 없는 부모 마음이다.
결과적으로 멀쩡한 사업체를 일곱 번이나 말아먹은 꼴이 되었지만 지난 일을 후회한들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 스물일곱이나 먹고 가출편지와 함께 몸 하나 달랑 나간 아들내미를 떠올리자 나오는 건 한숨이요 느는 건 주름이라, 안타까움 섞인 한숨과 함께 로체스터 공작은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됐네. 당분간이라고 적혀 있으니 곧 돌아오겠지. 어차피 밖에 나가서 적응할 만한 녀석도 아니니 말일세.”
공작의 피로 섞인 목소리에 레이튼은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며 뒤로 물러났다. 시간이 빠듯한 이의 아침식사를 이 이상 방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언뜻 정 없이 딱딱해 보이는 공작이었지만, 사실 그는 정치활동으로 바쁜 와중에도 꼬박꼬박 가족과의 시간을 챙기며 아이들 하나하나가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것, 잘하는 것까지 세심하게 관찰하고 챙겼다. 줄곧 그 모습을 지켜온 레이튼에게는 케일리가 공작의 속을 썩이는 못된 자식 놈으로 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동시에 레이튼은 자신의 젊은 주인, 케일리 로체스터가 저택을 나가서는 하룻밤도 제대로 넘기지 못할 일종의 사회 부적응자라는 사실도 잘 알았다. 더 정확히는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귀족 도련님이었다.
케일리가 제 손으로 할 줄 아는 건 옷 갈아입는 것과 수표책에 사인하는 것 정도였다. 그런 사소한 문제를 제쳐 두고서라도, 대체 그는 멀쩡한 집을 뛰쳐나가서 뭘 하려는 걸까. 의문을 떠올리는 건 비단 레이튼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매사에 의욕 없고 뇌를 장식으로 달고 다니는 것 같은 작은 주인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오늘 밤이나 넘기면 장하지.
케일리 공작 다음으로 잘 아는 충실한 집사의 예상은 결코 어긋나는 법이 없었다.
◇ ◆ ◇
지갑도, 수표책도 없이 터덜터덜 저택을 나와 정처 없이 걸었다. 건강관리를 위한 트레이닝도 아닌데 거리를 걸어다닌다는 건 새로운 경험이었다. 학창시절에는 그나마 학교라도 나갔지만 성인이 된 후에는 저택과 직장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는 스물일곱 해를 산 런던의 시내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집 성애자였다. 길을 따라 걷고 또 걸었지만 로체스터의 사유지를 몇 마일 벗어난 것이 고작이었다.
‘그냥 집으로 돌아갈까.’
근육이 땅기는 다리를 마사지하며 멍하니 생각하던 찰나, 지나가던 차가 정확히 케일리의 앞에 멈춰 섰다. 느릿느릿 고개를 돌리자 나름대로 소꿉친구 비슷한 친분인 렌필드 맥코이가 깜짝 놀란 얼굴을 내밀었다.
“K, 네가 이 시간에 웬일이야? 너 산책 같은 것도 하냐?”
집안끼리 교류가 있어 어린 시절부터 종종 어울렸던 렌필드는 영국 사교계에서도 유명한 로체스터 공작의 과보호를 잘 아는 사람 중 하나였다. 입으로는 엄히 대한다고 하지만, 공작이 제 아이들을 얼마나 예뻐하고 오냐오냐하는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그 로체스터 공작의 자식들 중에서도 가장 특혜를 받으며 자란 것이 바로 모자란 자식 케일리 로체스터였다.
그리고 렌필드가 알기로, 케일리는 산책처럼 비효율적인 운동을 즐기는 성격이 아니었다.
“산책 나온 거 아닌데.”
아니나 다를까 표정근이 파업한 희미한 얼굴로 케일리가 대답했다. 저게 웃는 얼굴이라는 걸 깨닫기까지 얼마나 오랜 세월이 걸렸던가. 그 후에 가족과 함께 나타난 사교모임에서 케일리의 비즈니스 미소를 목격한 렌필드는 녀석이 그렇게 웃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었다.
친구 앞에서는 웃어주는 것조차 아깝다는 듯 박하게 구는 케일리를 바라보며 렌필드는 야밤의 산책이든 뭐든 시간이 늦었으니 일단 그를 조수석에 태웠다. 남의 집 귀한 자식을 반경 몇 마일 이내에 집 한 채 없는 곳에 마냥 떨궈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니, 사실 다른 놈들이었으면 렌필드는 이곳이 남극 한복판이었다 해도 모른 체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케일리 로체스터다. 자신이 아는 사람 중에 가장 생활력 없는 케일리를 방치했다가 안 좋은 소식이라도 날아오면 평생을 미적지근한 악몽에 시달릴 것 같으니 어쩔 수 없었다.
“이 밤중에 왜 산책을 나온 건데? 밤놀이라도 가시게?”
사교계에서도 유명한 집돌이가 무슨 심경의 변화이실까. 가벼운 의문과 함께 던진 물음에 대해 돌아온 대답에 렌필드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아니, 나 가출했어.”
스물일곱 먹은 멀쩡한 사회인의 입에서 나올 만한 대답은 아니었다. 허나 케일리 로체스터는 농담을 모르는 녀석이었고, 바로 어제 그의 일곱 번째 사업이 도산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터라 렌필드는 눈치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그럼 당분간 우리 집에라도 가 있을래?”
아무리 케일리라도 일곱 번이나 회사를 말아먹으면 느끼는 게 있었겠지. 보통 사람의 사고방식으로는 그의 사고를 예측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잊은 렌필드가 측은지심을 가지던 찰나였다. 답지 않게 자상한 렌필드의 제안에 케일리는 잠깐 고민하는가 싶더니 가만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냐, 그건 됐어. 지나가다 적당한 데서 내려줘.”
다른 로체스터 주니어들이 가만히 내버려두면 알아서 디너 코스까지 차려다 우아하게 챙겨먹는 타입이라면, 케일리는 코스요리를 시켜서 떠먹여줘도 턱에 난 구멍으로 질질 흘리는 놈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머리가 나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어렸을 때부터 하도 못하는 게 없어 사람들을 경악하게 만들었을 정도로 재주가 많은 녀석이었다. 단지 지능지수가 높은 것뿐만 아니라, 다방면으로 재능이 넘쳐나는 괴물 같은 놈이었다.
사교계 교양으로 익힌 승마실력은 웬만한 프로보다 뛰어났으며, 사격은 주니어 국가대표에 선출될 정도로 특출하였다. 대부분의 분야는 손만 댔다 하면 보는 이들을 놀래게 만들 만큼 척척 손쉽게 이루어냈다. 언제나 문제는 케일리 로체스터라는 인간 그 자체에 있었다.
녀석은 야망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꿈도 없고 희망도 없다. 욕심의 스펠링도 모르는 게 아닐까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신은 케일리에게 외모와 재력, 고귀한 핏줄, 원하는 건 뭐든 해낼 수 있을 재능까지 주셨지만 정작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의지를 빼앗아갔다.
케일리는 말하자면 다재다능한 해파리였다. 해파리가 다재다능 해봤자 하등 쓸모가 없다. 학창시절 그의 별명은 케파리였다. 평화롭게 심해를 유영하는 해파리Jellyfish와 꼭 빼닮은 케파리Kayllyfish. 정작 본인은 사건 사고를 몰고 다녔음에도 태풍의 눈처럼 혼자서 평온했던 점까지 비꼬는 대단히 적절한 명명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 이유로 로체스터 공작은 유난히 녀석을 싸고돌았다. 그냥 놔두면 알아서 무럭무럭 자라는 대쪽 같은 다른 자식들에 비해, 지지대를 세워주지 않으면 당장 흐물거리며 무너질 것 같은 자식 놈에게 손이 더 가는 건 렌필드도 이해했다. 그 결과가 어딘지 나사 하나가 빠진 채로 무럭무럭 자라났다는 점이 안타깝기는 했지만.
렌필드는 자신이 아는 케일리 로체스터가 시내에 적당히 떨궈두면 요령 좋게 살아남을 만큼 요령이 좋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스스로 도움의 손길을 내치는데 어찌할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본인이 그러겠다는데 몸을 던져 막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렌필드로 말할 것 같으면, 그 자신이 집안의 망나니로 소문난 요주의 인물이었고 스스로도 자신에 대한 주변의 평가를 제대로 인식했다.
그는 결코 케일리의 허술함을 비난하거나 얕잡아 보지 않았다. 게다가 아무리 멍청하다고 해도 명색이 로체스터다. 악명 높은 로체스터 가의 영재교육을 문제없이 소화할 정도로 똑똑한 부분이 있다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게다가 케일리는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사내놈치고는 곱상한 외모에 단정하게 친 옅은 밀빛 머리카락이 순한 인상을 더했다.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는다면 옆에 두고 지켜보기에 딱 좋았다. 그 태풍에 휘말리지만 않는다면, 언제까지고 즐길 자신이 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본인이 이 험한 세상을 한번 헤쳐나가보겠다는데 두 팔 벌리고 막을 정도로 의리 있는 사이가 아닌 것 또한 사실. 어둑한 시내 번화가에 케일리를 내려준 렌필드가 제 길을 떠나며 두어 번쯤 뒤를 돌아봤지만 그뿐이었다.
케일리 로체스터의 길고 긴 세상 나들이는, 렌필드의 쓸데없는 친절과 함께 그 장대한 서막을 올렸다.
◇ ◆ ◇
집을 나온 지도 어림잡아 일주일 정도가 지났다.
일주일 정도라는 애매한 표현은, 오늘의 날짜를 파악할 수 없을 만큼 케일리가 정신을 빼놓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가 삶의 대부분을 정신을 빼놓고 산다는 걸 생각하면 오늘 정신을 빼고 있는 것 또한 그다지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허나 그것이 런던 거리에서 노숙자로 보내는 중이라는 것은 결코 긍정적인 지표가 될 수 없었다.
그가 안 그래도 온전하지 못한 정신을 길마다 뿌리고 다녀도 스물일곱 해를 살아남은 것은, 주변 사람들이 알아서 흩어진 것들을 끌어 모아 챙겨주었기 때문이었다. 케일리 로체스터가 가진 것 하나 없이 거리에서 살아남기에 적합한 개체가 아니라는 사실은 명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 일주일의 시간을 길거리에서 살아남았다는 것 자체가 생존능력이라곤 쥐뿔만큼도 없는 그에게 일어난 작은 기적일 정도였다.
더 정확하게는 생존능력이 없다기보다 생존하고자 하는 의지 자체가 희박한 남자였다. 물에 빠져서도 팔 한번 휘둘러보지 않고 생을 마감할 것같이 궁극적인 위태로움 탓일까. 그를 불쌍히 여겨 콩 한쪽이라도 더 나누어주려는 사람들이 줄을 서는 기이한 현상까지 일으키고 다니기도 했다.
그런 케일리의 이력에 런던 거리의 홈리스가 더해졌다는 사실을 주변인들이 알게 된다면 마냥 웃어넘기지는 않을 테다. 다른 사람이라면 일생의 비웃음거리였지만, 홈리스로 살아남을 만한 최소한의 생존력조차 없는 케일리가 주인공이라면 그건 서바이벌 다큐멘터리가 된다.
대단히 다행스럽게도, 그는 현재 딱딱하지만 추위를 피할 만큼 충분히 따듯한 박스 침낭과 말라빠진 빵조각을 가지고 썩 나쁘지 않은 길거리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모든 것은 사람 좋은 홈리스 청년의 박애주의 덕분이었다.
박스 몇 개를 얼기설기 이어 만든 임시숙소 안에 동그랗게 몸을 만 채 케일리는 꼬르륵, 납작하게 들러붙은 배를 쓰다듬었다. 여기서 얼마나 버틸지 제대로 생각해본 적은 없었으나, 옆 박스의 청년이 자신의 생계를 영원히 책임져주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한계가 찾아올 테다.
구걸을 하는 데 거부감은 없었지만 구걸을 할 만큼 대단히 의욕적인 것도 아닌 케일리는 멍하니 그런 생각을 했다. 산다는 건 늘 어렵다.
그러다 문득 박스 위에 널브러진 휴대전화를 쳐다본 케일리가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 들릴 듯 말 듯 자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배터리가…….”
‘다 됐네.’라는 뒷말은 심지어 소리 내지도 않을 만큼 축 늘어져 있었다. ‘나는 아무런 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아무런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표정으로 말하며 케일리는 이백 살 먹은 거북이가 막 물 밖으로 나와 육지의 바람을 확인하기라도 하는 양 눈을 끔뻑였다. 그게 떨어진 배터리에 대한 유일한 리액션이었다.
‘이래서는 레이튼한테 마중 나와달라고 전화도 못하겠네.’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은 비교적 현실적이었다. 사업 실패로 풀이 죽었던 과거도,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막연히 흘려보낸 케일리의 안에서 슬슬 잊혀져갈 즈음이었다.
일곱 번째 사업 실패가 확정난 후로 일주일 하고도 약 반나절이 지난 참이다. 매사 의욕 없고, 생각 없고, 죄책감마저 없는 그에게 있어서 인생 최장기간의 반성이었다.
길지도 짧지도 않았던 반성을 끝낸 케일리의 마음속에는 집에 돌아가고 싶다는 막연한 희망사항이 스멀스멀 고개를 들었다. 안타까운 점이 있다면, 그는 홈리스에게 불쌍히 여겨질 정도로 생활력이 없었고, 그나마 남아 있는 통신기기인 휴대전화 배터리가 나갔다는 것이었다. 마지막 희망이었던 연락수단까지 사라진 위기상황이었다.
장장 일곱 번에 걸친 사업 실패로도 모자라 알 만한 나이에 가출까지 감행한 케일리를 괘씸하게 여긴 레이튼이, 그 몰래 경호원을 붙여 상황파악을 끝냈음에도 불구하고 모른 척 방치하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알 길은 없었다.
연락수단을 잃은 케일리는 박스집 안에서 심해를 부유하는 해파리마냥 늘어져 오르락내리락 숨만 쉬고 있었다. 숨을 쉬는 것이 인생 최대의 과제라도 된다는 양 그는 숨을 내쉬고 들이켜기를 몇 번인가 반복했다.
다섯 번째 회사를 말아먹었을 때, 방금 파산선고가 내려진 회사 소식을 뉴스로 접했던 때와 비슷한 심신의 평안함이 찾아왔다.
어쩔 수 없는 일은 걱정하지 않는다.
이미 벌어진 일은 뒤돌아보지 않는다.
케일리는 누구보다 빠르게 미련을 버리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포기란 세끼 식사를 챙겨먹는 것보다 간단한 일이었다. 사실, 세끼를 꼬박꼬박 챙기는 게 훨씬 어렵다고 그는 최근 들어 생각하고 있었다.
다섯 번째 파산 당시, 비서이자 집사인 레이튼은 고용주의 상상을 초월하는 뻔뻔함과 느긋함에 혹시 그가 사실은 미안함과 후회라는 단어의 존재 자체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했다. 의심 끝에 요즘 유행하는 공감능력장애 진단을 위해 저녁식사로 레스토랑을 예약했다고 속여 정신병원에 데리고 간 적도 있을 지경이었다.
안타깝게도 검사 결과 케일리의 공감능력은 지극히 정상이었다. 그의 문제는 공감능력이 아니라 무시무시할 정도의 낙관주의였다. 그러나 의사는 낙관을 병으로 규정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거기서 정밀검사를 받았어야 했는데, 병이 아니라는 사실에 짐짓 안심하고 병원 문을 나선 게 문제였을지도 몰랐다.
그가 말아먹은 회사의 직원들에게 현대 정신의학이 저지른 일은 끔찍하고 잔혹하기 짝이 없었다고 레이튼은 그 당시를 회상하곤 했다.
일곱 번째 사업을 시작하며 케일리는 지금까지와 제법 다른 모습을 보였다. 천하의 게으름뱅이 낙관주의자가 의욕 비슷한 걸 보였다. 그 의욕이 경영 컨설턴트를 고용하는 방향이었다는 부분을 무시한 채 레이튼과 공작은 감격에 겨워 눈시울까지 붉혔다.
거기에는 케일리 나름의 이유가 있었는데, 이번에도 회사를 말아먹으면 적성도 아닌 샐러리맨은 때려치우고 괜찮은 상대를 만나 가정이나 꾸리라는 모친의 온화한 조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자애로운 미소를 잃지 않는 그녀가 실질적인 가문의 권력자라는 걸 알고 있는 케일리도 발등에 불이 떨어질 밖에.
그는 아직 결혼에 생각이 없었고, 애초에 가족 아닌 누군가와 더불어 산다는 것 자체가 껄끄러웠다. 자신을 낳고 키우고 돌봐준 혈연과의 생활에 적응하는 데만 해도 20년이 조금 더 걸렸다. 여기서 또 새로운 사람에게 적응하라는 건 지나치게 귀찮고 번거로운 일이었다, 라고 부모와 형제자매들이 들으면 기겁할 생각을 아무렇지 않게 떠올리며 케일리는 박스집 바닥에 뉘인 몸을 장장 반나절 만에 반대편으로 뒤집었다.
집을 나와봐야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는다던 말이 새삼스레 떠올랐다.
그래, 적어도 가족이랑은 평생 같이 살면서 익숙해졌으니까 살 만한 거지. 그러니까 다른 가족을 가지는 건 너무 이르다고 어머니께 말씀드리면 알아주실까. 이번에는 판단을 잘못했다고 솔직하게 털어놓고 다른 걸 해보겠다고 하는 게 나은 것 같기도 해. 사실 사업도 그렇게 하고 싶어서 한 건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앞으론 뭘 해야 하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답이 없는 생각이 이어졌다. 결국 케일리는 자신이 제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적다는 것보다도 할 마음이 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냉혹한 현실에 봉착했다.
이대로 집에 들어가야 하나, 아니면 조금 더 버텨볼까?
어차피 할 일이 없으니 생각만 계속 해도 된다는 점은 긍정적이었다. 적어도 늘어져서 생각만 하는 케일리를 당장 두들겨 일으켜 일을 시키려 드는 레이튼이 없다는 점이 그러했다.
거기까지 생각한 케일리는 아, 역시 좀 더 버텨야겠다. 반성도 고찰도 없이 의식의 흐름에 따라 스스로의 단기적인 미래를 결정 내렸다.
“배고프네.”
그 와중에도 주린 배는 꼬르륵 꼬르륵 소리 높여 울었다. 그러고 보면 일주일 동안 먹은 거라곤 상냥한 홈리스 청년이 건네준 위생상태가 의심스러운 색을 띤 딱딱한 빵과, 출처가 불분명한 브랜드의 생수뿐이었다.
그나마 먹을 수 있었던 것도 홈리스 청년의 친절 덕분이다. 그가 일방적으로 박애주의자가 아닐까 짐작하고 있는 홈리스 청년은 길가에서 주운, 생긴 것만 번드르르한 늘어진 잉여인간에게 기본적인 생존능력은 물론 생존의지조차 희박하다는 사실을 본능으로 감지했다.
눈앞에서 의욕 없이 굶어 죽어가는 최악의 인간을 바라보는 것 또한 정신적인 고문이었다. 그는 평범하게 좋은 사람이었고, 기왕 주워놓은 케일리가 객사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그럴싸한 박스집까지 만들어주었다.
아, 그러고 보니까…….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 불투명한 눈으로 멍하니 생각했다. 생각해보면, 자신은 딱히 집에 돌아가는 게 싫은 게 아니었다. 다만 물리적으로도, 금전적으로도 당장 집에 돌아갈 마땅한 수단이 생각나지 않을 뿐.
휴대전화 충전이 다 됐고 수표책이며 카드를 챙겨 나오는 것도 잊어버렸다. 그저 발 닿는 대로 걷다가 우연히 만난 렌필드의 차에 올라탔고 적당히 런던 시내에서 내렸다. 그게 케일리가 떠올린 죄책감과 반성의 표현이었다. 스스로에게 약간의 벌을 내리는 것으로 행동해 보이겠다는 선택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홈리스 생활이 시작된 후였다.
솔직한 심정으로, 여기서부터 어떻게 할지 생각하고 나올 만큼 생각이 깊었다면 애초에 사업을 주구장창 말아먹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자기객관화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몇 초 지나지 않아 후회를 하는 것마저도 귀찮아진 케일리는 후회를 할 기력도 없을 정도로 배가 고프다는 원초적인 생각으로 넘어갔다.
집으로 돌아갈 방법만 있었더라면 푹신한 침대와 따듯한 욕조, 그럴듯한 식사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텐데. 써도 써도 줄지 않는 수표책과 어디서 샘솟는지 모를 통장잔고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하며 늘어져 있는 건, 당연하게도 눈앞에 닥친 비정한 현실을 타파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물론, 그 사실을 안다고 해서 그가 집으로 돌아가고자 빠릿빠릿 움직이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당장 죽을 만큼 최악이 아니라면 아직 버틸 만하다는 게 그의 결론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칼로리 소모를 우려해 눈알 운동조차 그만둔 채 허공을 부유하던 시야에 문득 너덜거리는 종이 하나가 들어왔다. 케일리의 시선을 끈 것은 종이 그 자체보다는, 거기에 새겨진 선명한 붉은색 로고였다.
[The Economist]
그 익숙한 로고를 단 경제 주간지는 런던 보수파 정치라인의 거대 산맥을 책임지는 로체스터 가문과 성향은 동떨어져 있을지언정 시간을 할애할 가치가 충분한 괜찮은 읽을 거리였다.
경제지라고 해서 경제 이슈만을 다루지도 않으며 다소 진보적인 정치성향을 가졌지만 기본적으로 경제 시사에 대한 논조는 보수파에 가깝기도 했다.
한쪽으로 치우치기보다 관점의 평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만도 두 세기를 꼬박 노력해온 만큼, ‘The Economist’가 많은 정치, 재력가들에게 애호 받는 것은 이상할 일도 아니었다.
그가 박스집 바닥재를 주워 든 것은 한순간의 변덕 때문이었다. 배가 고프기는 했지만 글자를 읽는 정도라면 괜찮은 시간 때우기가 될 것 같았다. 의식을 하고 찬찬히 살펴보니 박스집 안에는 주로 다양한 경제지가 벽이며 바닥을 구성하고 있었다.
렌필드가 케일리를 내려준 거리에서 조금만 걸어 나가면 곧장 페이터노스터 스퀘어가 보였다. 템스 강을 따라 나이트라이더 골목을 지나 뉴게이트 거리 바로 앞에 위치한 페이터노스터 스퀘어로 말하자면, 세계 경제의 중심지라 해도 과언이 아닐 런던 증권 거래소가 위치한 장소였다.
묘하게 경제지의 지분이 높은 박스집의 원인을 그제야 깨달은 케일리가 느릿느릿 손을 뻗어 주간지를 잡았다. 표지에 찍힌 발행날짜는 이미 두 달 정도가 지난 것이었다.
대단히 오래간만에 팔을 움직이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얌전히 주간지를 펼쳤다. 팔을 움직였더니 배가 더 고파진 것 같았다. 배고픔 탓에 단정한 얼굴에 침울함이 담겼다. 뒤이어 눈동자조차 주인의 성정을 드러내듯 느리게 자리만 옮겨, 활자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늘 읽어왔던 것과 크게 다를 것 없는 논조로 시작된 칼럼이었다.
미국발 금융위기 후 세계적으로 경제상황이 나빠져 금융, 증권, 부동산, 보험 4종 세트로 시작된 도산 파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최근 발발한 그리스 붕괴현상의 원인과 미래 예측을 포함한 심층분석. EU의 위기로 스위치가 켜진 글로벌 경제의 적신호는, 중국 시장의 지속적인 과대평가의 버블 붕괴로 이어져 현재 진행형의 재앙으로 도래.
밝은 면이라고는 밤 한 톨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일련의 내용을 읽어내리며, 케일리는 어딘지 가슴 한구석이 따듯해졌다.
런던만 봤을 때는 내가 제일 무능해 보였지만, 시야를 넓히고 세계 전체를 둘러보면 무능한 동료들이 가득하구나.
정말이지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레이튼이 들었더라면 뒷목을 잡고 쓰러졌을 파렴치한 생각이었다.
평소에는 헤드라인을 비롯해 사업에 관련된 주요정보만 읽었지만, 지금의 케일리에게는 넘치는 게 시간이었다. 기사를 걸러주는 레이튼이 없어 첫 페이지부터 기계적으로 읽어나가던 그가, 문득 주간지 사이에 끼워져 있는 생소한 광고지를 발견했다.
학생시절부터 레이튼의 강요로 읽어온 주간지에는 한 번도 팔랑거리는 광고지가 끼워져 온 적이 없었다. 세상에 이런 광고방식도 있었군. 조금 과장해서 표현하면 태어나서 처음 보는 광고세계의 새로운 단면을 케일리가 펼쳐 들었다.
[구인광고!]
크고 굵고 적나라한 강조표시로 시작된 종이는 반으로 접혀져 총 네 페이지에 걸쳐 작은 네모 박스가 각각의 페이지 가득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각각의 박스 안에는 필요로 하는 인재에 대한 짧고 명료한 메시지가 배치된 상태였는데, 이렇게 많은 곳에서 일할 사람을 필요로 한다는 게 조금 신기하기까지 했다.
그러고 보니 자신은 한 번도 구직활동을 염두에 둔 적이 없었다. 해야 할 필요가 없기도 했지만 케일리가 나고 자란 세계에서는 그런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이 과반수 이상이었다.
대부분이 그럴듯한, 아니 썩 훌륭한 가업을 가지고 있었고 일을 하지 않아도 평생 놀고먹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저 놀고먹는 돼지가 되는 이는 의외로 적었다.
천하의 케일리마저도 니트족으로 빈둥거리며 살아간다는 선택지는 고려사항에 넣지조차 않았을 정도였다. 어떤 형태로든 사회의 일원이 되어 봉사하는 건 자신이 누리는 특권에 대한 최소한의 의무였다. 아무리 귀찮고 게으르다지만 어떻게든 무언가를 해보려고 도전했던 건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구인광고를 하나하나 꼼꼼히 살피며 케일리는 자신이 대관절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았다.
레스토랑, 먹는 거라면 몰라도 식탁에 올라오는 최종형태의 요리가 어떻게 생겨나는지 상상조차 안 되니 패스. 청소? 청소는 왜 해야 하는 걸까? 방이 지저분한 것 같을 땐 외출하고 돌아오면 저절로 깨끗해져 있는데.
공사장 음, 아무래도 양심상 어려울 것 같다. 자신이 손을 대면 부실건물이 될 게 불 보듯 뻔하니 영국 국민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기 위해서라도 공사장 근처에도 가지 않는 게 옳았다.
하나하나 지워가다 보니 박스 안에는 남는 것이 거의 없었다. 회계사나 의사처럼 특수한 자격이 필요한 직업을 지금 당장 지원할 수는 없었고, 무엇보다 케일리는 가능하면 업무강도가 낮은 일을 하고 싶었다. 사실 적당히 앉아서 머리를 쓰는 정도로만 끝나는 일이라면, 돈이 들어오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의 이름으로 된 신탁 하나만 들여다봐도, 케일리가 애써 잘하지도 못하는 일을 하면서 돈을 벌러 다녀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확실했다.
이런 경우 보통 사람들은 어릴 적부터의 꿈을 이루어보겠다고 나서겠지만, 그는 달랐다. 옛날부터 남달리 정원에 심긴 정원수를 부러워했던 케일리였다. 그게 아니라면 바다에 둥둥 떠다니는 해양생물 같은 것도 좋았다.
그러나 종족 차별적이게도, 현재의 영국에 해파리를 고용하는 회사는 없었다. 정원수 또한 그렇다. 애초에 정원수가 될 수 있는 기술도 발명되지 않았지만, 어찌됐건 그 두 가지는 선택지에 넣을 수 없는 항목이었다. 자신은 해파리가 아니었고, 심지어 바다생물도 아니다.
바다에 둥실거리며 떠다니다가는 온몸이 띵띵 불어서 물먹은 시체가 될 게 뻔했다. 식물처럼 흙바닥에 묻혔다가는 생매장 당한 시체가 될 테지. 서글픈 일이었다.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없는 케일리는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을 소거법에 의거해 지워나갔고, 최종적으로 마지막 하나 남은 구인광고에 시선을 멈췄다.
[SIS Careers–SIS(MI6-B)는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로, 당신을!
Tel. 020-SISB-MI6B]
마지막 구인에는 자세한 직종도, 업무 설명도 없었다. 다른 광고들에 비해 유난히 여백의 미가 돋보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일리의 게으른 시선을 완전히 매료했다.
아무리 세상 물정에 어둡다고는 하지만 그는 엄연히 영국 엘리트 최전방에서 최상의 교육을 받고 자랐다. 또한 케일리가 몸담은 로체스터 가문은 대대로 영국 의회를 좌지우지한 거물급 정치집단이었다. 그런 케일리가 SIS라는 단어를 잘못 볼 리가 없었다.
Secret Intelligence Service. 약칭 SIS.
외무부 산하의 비밀 정보부로 널리 알려진 그 집단은, 비밀 정보부라는 이름과 동떨어진 공개 구인광고를 누구나가 볼 수 있는 지면에 내걸고 있었다.
애초에 비밀 정보부라면 그 존재까지 철저히 비밀에 부쳐야 하는 게 아닐까.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온 국민, 더 나아가서는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진 시점에서 더 숨겨봤자 구인만 힘들어질 것 같기는 했다. 숨기는 메리트가 없다면 차라리 공개구인으로 인재를 모으는 게 낫기야 하겠지.
나름대로 납득한 케일리가 물끄러미 광고를 쳐다보았다. 로체스터 집안이 영국 정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는 하지만, 명색이 비밀 정보부다. 그 실태가 케일리의 귀까지 들어올 만큼 로체스터의 정치인들은 입이 가볍지 않았다. 덕분에 케일리가 가진 지식이래야 보통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수준이었다. 요컨대, 코드넘버에 00이 붙으면 살인을 저질러도 국가에서 책임을 져준다는 정도일까.
제임스 본드가 분명 007이었지. 00을 살인면허라고 표현하며 비꼬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아마 그 사람들이라고 해서 죽여도 문제없으니 널 죽이겠다는 식으로 무자비하게 굴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게 픽션이라는 사실을 무시한 채 케일리의 머릿속에서는 SIS에 대한 생각이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만약에 자신이 00 코드넘버를 가진다면, 사람을 죽일 만큼 부지런하게 활동하지는 못할 게 분명했다. 영국에 정보를 수집당하는 해외 관계자들의 평화를 위해 SIS에 지원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그렇게 결론을 낸 케일리가 박스집 안에서 몸을 일으키는 것만으로 외출 준비를 마쳤다. 생각이 났을 때 곧장 움직이는 건 에너지 효율을 중시하는 케일리에게 있어서 철칙과 같은 것이었다.
그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던져준 동전 중 몇 개를 주워 든 채 구인광고를 쥐고 박스집 밖으로 나왔다.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두리번거리는 시선은 한 끼 식사를 찾아 헤매는 홈리스의 그것과 다름없었다.
분명 여기 어디에 텔레비전에서 본 전화부스가 있을 텐데.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닥터가 가지고 있는 그것과 비슷하지만, 시공 이동은 못하는 것이었다.
분명히 이 근처 어디에…… 아, 찾았다!
부스 안으로 들어가자 친절하게 전화 거는 법이 설명되어 있었다. 매뉴얼을 따라 수화기를 들고 동전을 넣은 케일리가 구인광고의 전화번호를 다시 확인했다.
“어?”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케일리는 직접 다이얼을 눌러 전화를 걸어본 적이 없었다. 대부분의 전화는 다른 사람이 걸어오면 사장실로 연결되었으며, 먼저 걸 때가 있다고 해도 직접 번호를 누르는 게 아니라 비서에게 맡겼다.
휴대전화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적극적으로 사람들과 교류하는 타입이 아니다. 오히려 휴대전화라는 문명의 이기와 접한 후로 전화를 받는 것 외에 이용해본 역사가 없다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케일리는 태생의 느긋함을 잠시 미뤄두고 잠시 당황하기로 했다.
구인광고에 적힌 전화번호는 020-SISB-MI6B.
케일리의 신뢰도 낮은 상식 안에도 전화번호는 당연히 번호, 즉 숫자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항목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광고에 적힌 전화‘번호’는 뒷자리가 영 이상했다.
이건 번호가 아니라 글자인데. 게다가 키패드에 없는 알파벳…….
세상은 10진수를 바탕으로 굴러간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자신이 모르는 사이 16진수가 표준이 된 걸까. 그리고 구시대의 유물인 전화부스는 세계의 변혁을 따라가지 못했던 걸지도 모른다. 큰일이었다.
오랜만에 무언가를 해보겠다는 의욕이 생겼는데, 시도해보기도 전에 좌초하게 생겼다. 사실 이미 꺾인 것 같다고 확신한 덕분에, 더 고민하기 위해 서 있는 것조차 귀찮아진 케일리가 전화부스에서 나가려던 순간이었다.
“……어?”
이번에는 좀 더 긴 침묵이 이어졌고, 어리둥절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무엇보다도 에너지 효율을 중시하는 케일리로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몇 번이나 눈을 깜빡이고 심지어는 눈을 비벼보기까지 했지만 눈앞의 광경은 변하지 않았다. 놀랍게도, 숫자밖에 없던 키패드의 상단에 알파벳 버튼이 추가되어 있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이 시점에서 방금 전까지만 해도 숫자밖에 없던 키패드에 알파벳이 늘어난 걸 이상하게 여겼을 테다. 하지만 케일리의 효율주의는 사소한 문제를 모르는 척 뒤로 넘기는 데는 최적의 효과를 발휘했다. 별다른 의심 없이 알파벳과 숫자의 조합을 누르자 통화 연결음이 울렸다.
그리고 잠시 후.
- 비밀보안국 -B 지구 인사부 채용 담당자 페어리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라는 사무적인 톤이 수화기 너머로부터 전해져 왔다. 그 목소리는 케일리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들어본 것들 중에서 가장 독특했지만 어떤 점이 그러냐고 물으면 꼽아서 대답하기 어려운 묘한 음색이었다.
잠시 목소리에 정신을 빼앗긴 사이 무언가 단단히 오해를 한 모양으로, 독특한 목소리의 인사부 채용 담당자 페어리는,
- 여보세요?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어이, 뭘 도와주면 되냐고 지금 내가 묻고 있잖아. 너 이 자식, 이번 주 내내 전화 걸었지? 너 그 모기새끼 맞지? 이번에도 장난 전화면 내가 여길 때려치우는 한이 있어도 널 쫓아가서 폭신한 관에다 반으로 예쁘게 접어 넣어 두 번 다시 세상 빛을 볼 수 없도록 대못을 박…….
살벌한 협박 문구를 지치지도 않고 줄줄 읊고 있었다. 아마 비밀보안부에는 장난전화가 자주 들어가는 모양이었다.
어디를 어떻게 들어도 진심으로밖에는 들리지 않는 이야기 속에서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상습 장난전화범이 된 케일리는 어느새 대못을 박은 관에 접어 넣어진 후 쇳덩이를 매달고 심해에 가라앉고 있었다.
끝나지 않는 흉흉한 협박의 향연을 한쪽 귀로 깨끗하게 흘려보낸 케일리가 느리게 입술을 달싹였다. 전화가 연결되었다는 뿌듯함으로 인한 만족에 희미한 미소까지 매단 채였다.
“광고를 보고 전화했는데요.”
빠르고 정확한 발음으로 쏟아져 나오던 협박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잠시간 수화기를 사이에 두고 케일리와 페어리의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하도 대답이 없으니 전화가 끊어진 건 아닌가 생각한 케일리가 “여보세요? 계시나요?” 말을 걸어 확인해도 별다른 대답이 없었다.
아, 혹시 벌써 사람을 구한 건가?
전화부스까지 걸어오느라 등가죽에 달라붙은 듯 납작한 배를 내려다보며 시무룩해진 케일리가 미련 없이 수화기를 내려놓으려던 순간이었다.
- ……광고라고 하셨습니까?
다시 정중하고 사무적인 어투로 돌아온 페어리는 전화를 끊은 게 아니었다. SIS가 케일리에게 남은 마지막 구인광고였기 때문에 이 전화가 끊기면 다시 박스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그는 전에 없이 의욕적인 자세로 페어리에게 대답했다.
“네. 구인광고지에서 봤는데요. 혹시 아직도 사람을 구하고 있나요?”
- 광고지……?
페어리의 태도는 마치 광고를 낸 적이 없는데 어떻게 광고를 볼 수 있느냐는 뉘앙스로 당황한 것 같기도 했고, 어리둥절한 것 같기도 했다. 그런 페어리를 향해 케일리는 친절하게도 손바닥에 든 구인광고를 그대로 수화기 너머에 읊어주었다.
“SIS Careers SIS MI6-B는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로 당신을 020-…….”
문장부호를 완전히 무시한 평이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케일리가 알파벳 섞인 전화번호를 끝까지 말하기도 전에 반대편에서 별안간 의미 모를 탄성이 터져 나왔다.
- 아, 아아아! 그 자리요! 그 자리는 아직 구하고 있습니다. 아주 텅텅 비어서 절찬리 모집 중입니다! 면접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거 이름이랑 사인만 준비해 오시면 바로 계약해드릴 수도 있습니다. 면접이 원래 그런 거죠, 계약서를 쓰기 위해 잠깐 들러보기나 하는 형식적인 절차가 아니겠습니까? 이쪽은 지금 당장이라도 대 환영입니다. 그런 그렇고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미스터? 모시러 갈까요? 주소를 불러주시면 당장 리무진을 보내겠습니다. 영국 어디에 계시는지 말씀만 해주시면…….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페어리의 돌변한 태도에 케일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자리가 텅텅 비어 절찬리 모집 중이라 지금 당장이라도 면접을 오라는 것까지는 이해가 갔지만, 면접이 계약서를 쓰기 위한 형식적인 만남이라는 건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물론 케일리가 구직활동을 해본 적이 없는 데다 자신의 회사에 들어올 사람을 뽑는 면접에도 직접 들어간 적이 없다는 것을 상기하면 처음 듣는 게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게다가 그는 보통 사람들이 구직활동을 할 때 쓴다는 마의 서류, 이력서의 존재조차 구경해본 적이 없었다.
결국 케일리는 비밀보안국이라는 이름의 별달리 비밀스럽지 않은 정부 부처가 적잖이 일손 부족에 시달리는구나,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었다.
- 아, 그러고 보니 통성명도 아직이었군요. 다시 한 번 소개하자면 저는 비밀보안국 -B 지구 인사부 채용 담당자 페어리입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계약부터 정식 업무배치 전 연수기간의 케어를 비롯해 보험처리와 연봉지급, 각종 절차 처리 전반을 담당하게 될 예정이니 편하게 대해주세요.
게다가 케일리의 조건은 아무것도 필요 없다는 듯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채용 후를 이야기하는 페어리의 설명이 느긋하고 게으른 낙관주의자 케일리를 감동시켰다.
지금까지 그가 경영했던 회사에서는 사람 하나를 채용하려고 해도 인사부, 채용과를 거쳐 담당 부서의 상관의 면접에 임원 면접, 그리고 최종적으로 케일리의 채용서류 결재까지 지나치게 길고 손이 가는 프로세스가 필요했다.
하지만 비밀보안국의 채용 담당자는 이쪽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채용 확정을 전제에 두고 애프터케어까지 설명했다.
보통 사람들이었으면 지면광고부터 시작해 알파벳 전화번호며 무엇 하나 수상하지 않은 부분이 없는 일련의 과정 안에서 합리적인 의심을 제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케일리는 안 그래도 구멍이 숭숭 뚫린 그의 상식 너머로 모든 의심과 의문을 미련 없이 내던졌다.
“케일리입니다. 지금 있는 장소는 런던이고, 페이터노스터 스퀘어 근처인데요, 정확히 어디냐고 하면…….”
그가 부스 밖을 살피며 현재 위치를 설명하던 참이었다.
똑똑.
케일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화부스를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검은 선글라스에 새카만 정장을 차려입은 거구의 빡빡머리 남자 둘이 서 있었다.
“미스터 케일리?”
나는 정부에서 나온 수상한 녀석이다! 아주 수상하다!
그렇게 온몸으로 주장하는 두 사람은 신기하게도, 한낮의 거리 한복판에서 투명인간이라도 되는 양 지나가는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런던 주민들이 대체로 개인주의와 프라이버시 존중에 무게를 둔다고는 하지만 이렇게까지 명백히 수상한 사람을 힐끗거리지도 않는다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허나 지나가는 사람까지 살필 정도로 주변에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닌 케일리는 안타깝게도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전화부스 바로 옆에 서 있는 검은 리무진을 가리키는 남자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수화기를 든 채 잠시간 그들이 어째서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는 걸까, 의문을 떠올린 케일리의 귓가에 생각을 방해하듯 페어리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 미스터 케일리, 그럼 잠시 후 본부에서 뵙겠습니다.
그렇게 전화가 끊어졌다. 뚜, 뚜, 통화 단절음이 울려 퍼지는 수화기를 제자리에 돌려둔 케일리는 페어리가 보낸 정부의 끄나풀에게 다가갔다.
“저,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단정한 인상으로 예의 바르게 인사하는 케일리를 둘러싼 두 남자가 리무진 문을 열었다.
“타시죠.”
망설임 없이 올라타는 케일리의 동작은, 어린 시절부터 고용인들에게 늘 받아왔던 에스코트 덕분에 위화감은커녕 군더더기조차 없이 깔끔했다.
소음 하나 없이 미끄러지듯 런던 거리를 나아가는 리무진 뒷자리에서, 케일리는 코끝을 간질이는 화학약품의 냄새와 함께 가만히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자신은 모국의 정부에게 배신당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