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sion1. Find a job (2)
템스 강 남쪽에 위치한 SIS 런던 본부로부터 강을 건너 북쪽을 따라 런던 동부 구 슬럼가 외곽에는 다 무너져가는 섬유 공장의 폐허가 있었다. 그곳이 영국 정부의 비밀 정보국에서 숨기고 있는 진짜 비밀이 물리적으로 ‘묻혀’ 있는 장소라는 걸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MI6, 혹은 SIS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영국 외무부 산하 비밀 정보부에서는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진 대외 정보활동 외에도 한 가지 중대한 비밀을 품고 있었다. 외무부 안에서도 최고위 관료만이 그 기관이 존재를 어렴풋이 알고 있는 비밀스러운 ‘두 번째 기관’의 존재였다.
SIS의 진짜 비밀본부는, 지하를 따라 끝없이 파들어간 거대한 요새로 그 구조를 모조리 파악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게 정설로 통할 만큼 철저한 보안을 자랑했다.
실제로 지하요새는 설계 당시부터 각각의 설계자에게 구획을 나누어 공사를 진행시켰고 각 구획을 잇는 브릿지만을 공유하는 방법으로 건축돼 있다. 덕분에 기지에서 일하는 요원들조차 권한이 있는 구역 외에는 발을 들일 수 없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모든 구획이 비밀에 부쳐져 있는 것은 아니었다. 런던 동쪽 지구 지하에 미로처럼 뻗어 있는 비밀기지 중 일부는 시내의 일반 건물과 이어져 있었으며, 개중 일부는 런던 언더그라운드를 통해 출입할 수 있도록 은밀한 입구가 설치되어 있기도 했다.
그런 비밀기지 안에서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것은 행정업무 전반이 이루어지는 관리부서였다. 다루는 모든 정보가 대내비(対内秘)로 취급되는 만큼, 관리부서의 비밀스러운 운영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
그중에서도 비교적 외부인의 출입이 잦은 사무실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인사부 채용과가 이용하는 지하 19층이었다. 아무리 지하요새에 꽁꽁 숨어 있다고는 하지만, 새로운 인재를 받아들이기 위해 면접이라는 과정을 거쳐야 했으니 외부인을 완전히 단절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현재.
SIS -B 지구 관리 본부 인사부 채용과의 과장 겸 인사부 부장 대리인 코드넘버 0042 ‘페어리’의 개인 업무실의 소파에는 약물로 인한 수면에 들어간 인간 ‘케일리’가 힘없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의 산에서 쉴 새 없이 펜을 놀리던 페어리는 곧 쾅! 거친 소리와 함께 사무실 문을 박차고 들어온 예의 없는 사내를 향해 고개를 들지도 않은 채 인사를 건넸다.
“에드워드,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군요.”
검은 라이더용 가죽 재킷이 놀라우리만치 어울리는 화려한 금발 사내를 향해 페어리가 그렇게 말했다. 자신을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서류를 처리해가는 페어리에 문을 열고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분명 푸른빛을 띠었던 남자의 눈동자가 서슬 퍼런 분노를 드러냈다.
눈동자에 불이라도 붙인 것처럼 홍채를 타고 선홍빛 물이 들어가는 모습이 장관이었으나, 늘어진 케일리와 서류에 집중한 페어리는 그 모습을 목격할 수 없었다.
“이빨 요정, 이건 또 뭐 하자는 장난질이지?”
남자가 눈을 붉히거나 말거나 제 업무에만 몰두하던 페어리는 결국 멱살이 잡힌 채 공중부양을 했다. 자신을 노려보는 남자를 마주한 채, 그는 입술 끄트머리를 비죽 올려 얄밉게 웃었다.
“뭐긴요, 댁이 그렇게 도망만 다니니 제가 직접, 손수, 고생해서 파트너를 구해온 거 아닙니까.”
그리고 한 번만 더 이빨 요정이라고 부르면 내부감사에 사내 권력형 폭행(Power Harrassment)으로 찌를 거다, 새끼야.
노래하듯 아름다운 목소리와 상반되는, 대단히 비열한 협박이 곧장 이어졌다.
SIS-B.
통칭 -B 지구 소속의 원년 멤버이자 엘리트 요원인 코드넘버 0002, ‘에드워드’는 자신에게 멱살이 잡힌 볼썽사나운 꼴로도 한마디 지지 않는 이빨 요정을 내려다보며 빠득, 이를 갈았다.
-B 지구의 행정 업무를 총괄하는 관리 본부에서 윗자리를 차지한 것은 실무를 중심으로 모인 원년 멤버였다. 관리 본부의 상층부를 실무에서 올라온 요원으로 구성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였다. 덕분에 SIS-B는 모체인 SIS의 권력자들과는 완전히 별개의 의미로, 각각의 부서에서 실권을 꽉 틀어쥔 실력자들이 지배하는 튼튼한 피라미드를 자랑했다.
그중에서도 인사부와 채용 전반을 총괄하는 채용과 과장 페어리는, 정신 나간 이빨 요정(Crazy Tooth Fairy)이라는 별칭으로 더 유명한 실권자였다.
페어리의 악명은 다방면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는데, 첫째로 현대에 노예계약이 있다면 그가 만든 근로계약서를 말하는 것이 분명하다는 것, 둘째로 인원이 모자랄 때 데리고 오는 단기 스켓 요원이 하나같이 출처를 짐작할 수 없는 공포스러운 인맥이라는 게 곧잘 꼽혔다.
뿐만 아니라 페어리 본인이 -B 지구에 하나밖에 없는 ‘요정’이기도 한 특별한 존재였다. 모든 인류가 유년기에 가질 것이 분명한 페어리 테일 환상을 1톤짜리 해머로 두들겨 산산조각 낸다는 점에서 그러했다.
어찌됐건 SIS와 함께 두 세기를 이어온 -B의 역사 그 자체인 동시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과격한 일처리로 그 악명을 나날이 드높이고 있는 페어리에게 대거리를 할 수 있는 존재가 손에 꼽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자는 없었다.
“난 파트너 같은 거 필요 없어. 있어봤자 임무에 방해만 되는 것들을 계속 달고 다니라고? 대체 지금껏 뭘 보고 배운 거지?”
그 손에 꼽는 소수파 안에서도, 역시나 또 다른 악명을 떨치고 있는 에드워드는 페어리와 조합했을 때 가장 위험도가 높아지는 -B 지구의 시한폭탄이었다.
둘이 함께 있는 것을 목격한다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 자리에서 최대한 멀리 도망가는 것만이 목숨을 부지하는 최선이라는 소리가 공공연하게 흘러다닐 정도였다.
실상을 까보면 대체로 -B 지구의 킹 오브 진상이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을 에드워드가, 인사부의 업무 가이드라인을 개무시 한다는 게 근본적인 문제였다.
뿐만 아니라 그에 따른 징계마저 교묘하게 피해가다 보니 페어리의 입장에서는 그를 좋아하려야 좋아하기가 힘든 사이였다. 적어도 페어리에게는 에드워드를 개인적, 그리고 업무적으로 대놓고 싫어할 만한 정당한 변명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게다가 굳이 업무를 끌고 들어올 필요도 없이 저 망할 뱀파이어는 동족들 사이에서마저 ‘뱀파이어의 수치’라 불리는 화상이었다.
어느새 날카로운 송곳니까지 고스란히 드러내며 위협조로 으르렁거리는 에드워드를 향해 페어리가 어깨를 으쓱했다.
“네가 필요 없다고 해봤자 그게 규칙이고! 룰입니다! 여기가 무슨 디즈니랜드입니까? 호그와트예요? 공무원이면 공무원답게, 규칙과 질서를 지켜야 할 것 아닙니까? 그게 마음에 안 들면 고소라도 하시든가.”
어떤 면에서 따지면 페어리의 제안은 대단히 합리적이었다. 에드워드는 2인 1조로 움직이는 게 필수인 필드 업무를 홀로 뛰었고, 룰이 마음에 안 든다면 특례를 만들든지 뭐라도 액션을 취하는 게 맞았다. 이대로 무시하기만 하는 건 제 살 깎아먹기다.
그런 페어리의 조언에 에드워드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고소를? 어디에, 어떻게 하라는 뜻이지?”
“그거야 저도 모르죠. 법원은 안 받아줄 테니까 알아서 찾아보시든지.”
내가 댁 보모도 아니고 거기까지 가르쳐줘야 합니까?
툴툴거리며 미간을 찌푸리는 페어리를 패대기치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눌러 참은 에드워드가 다시 한 번 빠드득, 이를 갈았다. 끓어오르는 폭력성을 참아내느라 하얗게 질렸던 손이 움켜쥔 상대방의 멱살을 짜증스럽게 내던졌다. 물론, 화가 풀렸기 때문에 놓아준 것은 결단코 아니었다.
“이빨 요정, 이번에야말로 네가 나갈지 내가 나갈지 담판을 지어볼까?”
검은 가죽 재킷을 벗어 소파에 던지며 에드워드가 말했다.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해, 이 빌어먹을 모기새끼!”
페어리 또한 지지 않고 대거리했다.
“모기도 안 먹을 음식물 쓰레기 주제에 말이 많군.”
“너만 빼면 다 좋아하거든, 미각치 날벌레 같은 게!”
서로를 어떻게 하면 더 하찮은 존재로 끌어내릴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게 인생의 거대한 목표인 것처럼, 짧은 악담이 오갔다. 날이 선 시선이 허공에서 교차했다. 목을 따 템스 강에 수장하면 딱 시원할 것 같은 상대를 마주한 채 두 남자는 어떤 묘수를 써야 저 빌어먹을 놈을 무너뜨릴 수 있을까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이미 100년하고도 수십 년을 함께 일한 동료를 향한 존중이나 동료애 같은 건 눈을 씻고 찾아도 없었다. 파지직, 서슬 퍼런 시선 사이로 불꽃이 튀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구겨진 셔츠 깃을 불쾌한 표정으로 갈무리한 페어리의 검지가 소파에 늘어져 있는 케일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 어쨌든 난 이제 모르겠으니까 쟤를 파트너로 쓰든지 아니면 댁이 나가 직접 고르시든지.”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파트너’를 향해 에드워드가 덩달아 시선을 옮겼다. 안 그래도 구겨진 표정이 흡사 음식물 쓰레기라도 보는 듯 대번에 일그러졌다.
“너…… 이빨 요정 너 이 새끼, 나한테 일부러 이러는 거지?”
“아, 또 뭐가 말입니까! 댁이 그랬잖아? 청결하고 목숨 아끼느라 빌빌거리지 않으면서 댁한테 절대로 반할 일 없는 데다 영생에 미련 없는 덜떨어진 놈이지만 가르치면 데리고 다닐 만한 신체 건장한 인간이면 파트너 하겠다며!”
숨도 쉬지 않고 다다다 쏘아져 나오는 그 말에 에드워드가 일순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면 그 비슷한 말을 한 기억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완전히 별개의 문제로, 페어리가 데리고 온 파트너가 자신이 말한 조건에 부합한다는 걸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페어리가 아무렇지 않게 가리킬 수 있는 걸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소파에 널브러진 인간의 몸에서는 어디 쓰레기장에서라도 거하게 굴렀다 왔나 의심스러운 고약한 냄새가 진동했다.
대체 저런 건 어디서 주워 온 걸까.
설마 지금까지의 원한을 모으고 모아 강제로 불량품을 떠넘기는 복수를 계획한 건 아닌가.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잘 봐줘야 홈리스 꼴을 한 인간에게서는 청결함의 청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가르치면 데리고 다닐 만하다는 말의 수위는 결코 알파벳부터 가르치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 모든 사실을 무시하고 어디서 걸레짝을 주워 와 들이미는 페어리를 마주한 채 에드워드가 심호흡했다.
그러고는 마음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온 진심 어린 경멸을 담아 단어 하나하나에 힘을 줘 이렇게 말했다.
“그 대단하신 요정 눈깔에는 저게 쓸 만해 보이나 보지?”
화를 내고 말을 하든, 말을 하고 화를 내든 페어리는 그의 투정에 동조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니 자신이 고생해서 데리고 온 에드워드의 새 파트너를 놓아줄 생각 또한, 없는 게 당연했다.
애초 2인 1조 체제로 굴러가는 필드 업무에서 파트너 없이 임무를 수행하는 건 에드워드뿐이었다. 사회인이라는 게 다 그렇듯 직장의 규칙에 따라 가끔은 제 고집도 접을 줄 알아야 한다. 아무리 사람이 아니라 뱀파이어라지만, 하물며 사설 회사도 아니고 정부조직에서 일하는 주제에 임무 수행에 있어 가장 중요한 규칙을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B 지구는 모체인 SIS와 달리 대외정보수집의 지분이 낮은 편이었다. SIS에서 00 코드네임을 가진 요원이 두 세기 역사를 통틀어 단 세 명뿐이었던 것에 비해, -B는 모든 필드요원이 00 코드네임의 소유자였다. 즉, -B 지구는 소속된 필드요원 전원이 살인면허를 가진 무시무시한 정부의 비밀조직이라는 뜻이었다.
배틀 필드에서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위해 만들어진 몇 안 되는 규칙마저 무시하는 건 좋은 본보기가 아니다. 하물며 원년 멤버인 에드워드가 그걸 콧등으로 비웃으며 무시한다는 건 말도 안 됐다. 물론 말을 한다고 들어먹는 뱀파이어가 아니었기 때문에 일이 여기까지 늘어진 것이기는 했다.
어떻게든 그에게 파트너를 붙이겠다는 각오로 맞춤형 마법광고까지 내건 페어리에게는 더 이상 물러설 구석이 없었다.
“좋은 꿈 꿨나요, 케일리?”
하필이면 에드워드가 잔뜩 약이 오른 타이밍에 깨어난 케일리를 향해, 페어리가 싱긋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페어리.”
구인광고를 보고 전화를 했다 약에 당해 이제야 눈을 뜬 인간 같지 않은 반응이었다. 마치 아침잠을 자고 일어난 것처럼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소파에 자세를 고쳐 앉는 케일리는 확실히 보통 사람들에 비하면 목숨을 함부로 하는 타입 같다.
에드워드가 지껄였던 목숨 아끼느라 빌빌거리지 않는 부분에는 문제가 없겠군, 여상히 생각하며 페어리는 에드워드에게 일단 닥치고 앉아보기나 하라는 양 손짓했다.
재기 불가능한 A4 용지마냥 구겨진 얼굴을 한 에드워드가 코를 부여잡았다. 케일리에게서 나는 악취를 참을 수 없다는 무언의 시위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페어리는 케일리의 맞은편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근로계약에 필요한 서류 몇 가지를 테이블 위에 올렸다.
얼른 앉지 않고 뭘 하냐는 양 날아오는 페어리의 시선에 에드워드가 가볍게 혀를 찼다. 지금껏 요리조리 피해왔지만 결국 반세기 전에 한번 끊었던 연쇄를 다시 시작해야 하는 모양이었다.
‘그놈의 규칙. 망할 놈의 파트너십.’
그래 봤자 당장 하던 일을 때려치우기도 어려운 입장인 에드워드에게는 선택지가 적었다.
어찌어찌 앞으로 서로의 목숨을 믿고 맡기며 함께 일할 파트너가 될 예정인 두 사람을 마주 앉힌 페어리는 오랜 숙원사업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은 단꿈에 젖어들었다.
임무 내용을 무시하고 멋대로 구는 데다 자원의 무단유출도 아무렇지 않게 자행하는 에드워드에게 감시 겸 꼬리를 달아 제대로 컨트롤하는 것. 그리고 에드워드의 어떤 협박과 회유도 통하지 않을 난공불락의 심지를 가진 인간을 달아 그의 복장을 터지게 만드는 것. 어찌 보면 소박하기 짝이 없는 그 두 가지가 페어리가 가지고 있던 일생일대의 꿈이었다.
에드워드가 내민 조건에 몇 가지를 덧붙인 마법구인은 마지막 수단이었다. 그런 괴상한 조건을 모조리 충족시키는 인간이 정말로 존재하기는 하는지 페어리는 언제나 의문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보란 듯이 케일리가 걸려든 걸 보면 건방진 독일 철학자의 말과는 달리 아직 신은 죽지 않은 게 분명했다.
꿈은 이루어진다.
처음으로 요정이라는 종족에게 어울리는 동화 같은 생각을 떠올리며 페어리는 케일리를 향해 만면의 미소와 함께 오른손을 내밀었다.
“대 브리튼 북아일랜드 연합 제국 내각, 외무 및 영국 연방부 산하 비밀보안국 -B 지구 관리 본부 인사부 채용과 과장 및 부장 대리를 겸임하고 있는 페어리입니다.”
“케일리입니다.”
둘 사이에서 가볍게 맞잡은 악수가 오갔고, 이어서 페어리가 에드워드를 향해 성의 없이 눈짓했다.
인사도 할 줄 모릅니까?
모기라서 그래요?
입으로는 부족한지 시선까지 동원해 자신을 모자란 곤충 취급하는 페어리를 향한 분노를 폭발시키지 않기 위해 에드워드가 심호흡을 했다. 깽판을 치더라도 페어리에게 끌려온 홈리스 인간은 돌려보낸 후에 치는 게 낫다. 이종에 비해 약한 인간들은 까딱 잘못하면 죽어 자빠진다. 그런 쓸데없는 일로 시말서를 쓰고 싶지는 않았다.
“……에드워드다.”
짧고 퉁명스러운 통성명이 그렇게 끝났다. 구제할 여지가 없는 성격에 대해서는 기대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페어리는 곧장 테이블 밑에서 ‘WELCOME TO SIS-B, Quick start guide’라 적힌 팸플릿을 꺼내 들었다.
“먼저 간략하게 이 기관이 어떤 곳인지, 케일리 씨가 어떤 일을 맡게 될지를 설명하겠습니다.”
그렇게 뒤로 넘긴 속지 첫 표지에는, 영국 국기를 배경으로 한 채 완벽하다는 말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비율과 화려한 얼굴을 당당히 드러낸 금발 벽안의 남자 모델이 서 있었다. 정부 팸플릿이 아니라 패션화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은 그 사진을 케일리가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아무래도 이 모델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이빨, 너 이 새끼! 팸플릿 전량 폐기했다며? 감히 나한테 사기를 쳐?”
케일리의 악취를 피해 소파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있던 에드워드가 버럭 소리쳤다. 아무래도 자신의 눈썰미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케일리는 새삼 그가 보기 드물게 아름답다는 사실을 깨닫고 조금 감탄했다. 물론 표정과 언어 습관에 다소 문제가 있어 보이기는 했다. 아니, 사실은 문제가 많아 보였다.
“에드워드,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제 설명이 끝난 후로 부탁드리겠습니다. 먼저 기관에 대해서. SIS -B는 -B 지구라고 불리며 기본적으로는 영국 정부의 산하조직입니다. 아마 케일리가 알고 있는 SIS와는 맡은 업무도, 역할도 완전히 다른 별개의 기관일 겁니다.”
가능하다면 다시 멱살을 잡아들고 대거리를 시작하고 싶었다. 하지만 순박한 얼굴로 “그렇군요.” 하고 대답하는 인간을 무사히 돌려보낸 후에도 할 수 있는 일이다.
망할 놈의 시말서. 그게 뭐라고 속을 썩혀가며 빌어먹을 이빨 요정에 대한 분노를 삭여야 한단 말인가. 에드워드의 머릿속에 몇 번이나 저울질이 오갔다.
결국 그들의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만 참기로 결정한 에드워드가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선 그들이 무슨 헛짓거리를 하든 자신은 응할 의사가 없다는 무언의 시위라도 되는 양, 소파에 깊게 상체를 파묻었다.
“SIS가 대외정보수집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기구라면, -B 지구는 정보와는 무관한 행정, 사법조직입니다. 그냥 이름만 따온 거나 다름없죠, 사실. SIS는 비밀조직이라는 말을 붙이기도 민망할 정도로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 되어버린 지 오래이니 -B 지구야말로 진짜 비밀조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페어리의 설명은 어딘지 자신이 속한 조직을 자랑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케일리는 부모님에게 단련된 다년간의 설교 경력으로 만들어낸 진지하게 이야기를 듣는 표정으로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군요.” 하고 맞장구를 쳤다. 자신을 고용해줄 사람이니 잘 보여둬서 나쁠 건 없다는 판단이었다.
그 순순한 반응이 지금껏 상대해온 뱀파이어와 라이칸, 마녀와 용들의 오만방자함과 대비되어, 페어리는 점점 더 그가 마음에 들었다.
“-B 지구 안에도 국내외 정보수집을 담당하는 부서가 있기는 합니다. 다만 정보수집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목적에 따른 정보를 수집한다는 게 다른 점이죠. 말하자면 -B 지구에서는 국내 정보조직인 MI5와 국외 정보조직 MI6의 역할을 통틀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MI5와 MI6이 있는데 왜 -B 지구는 따로 있는 건가요?”
“아아, 네, 그거요. 좋은 질문입니다. 케일리의 말대로, 이미 국내외 정보조직이 따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B 지구가 완전히 별개의 조직으로 돌아가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이 조직의 존재 의의가 그 이유죠.”
솜사탕처럼 달콤해 보이는 연한 분홍빛 머리카락이 에어컨 바람에 가볍게 휘날렸다.
더할 나위 없이 달콤한 미소를 지어 보인 페어리에게 무언가 안 좋은 예감이라도 느낀 것처럼 에드워드는 번쩍 눈을 떴다. 뿐만 아니라 갑자기 소파에서 일어나 소파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졌다. 자연재해를 대비하는 해양생물처럼 비장함마저 감도는 그 움직임에 케일리가 의아한 표정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페어리는 케일리를 향한 설명을 계속했다.
“다시 한 번 소개드리겠습니다. 제 코드네임은 ‘페어리’로, 편의상 케일리 당신들 인간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을 뿐 진짜 정체는 ‘요정’입니다.”
그 말과 동시에 페어리의 몸에서, 더 정확히는 등에서부터 육안으로도 확실히 보이는 파스텔 톤의 반투명한 날개가 쏟아져 나왔다. 하늘하늘 등 뒤로 펼쳐 나가는 날개에서는 반짝이며 빛이 나는 가루가 허공에 산란했다.
흩어지는 가루를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는 케일리와는 상반되게,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새파란 얼굴로 입을 막고 선 에드워드의 안색은 당장이라도 속에 든 것을 모조리 게워낼 것처럼 비위가 상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 에드워드를 역시나 비위 상한 얼굴로 가리키며 페어리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기 요정가루를 아주 싫어하는 사악한 종족은 아마 케일리도 익히 알고 있을 것 같습니다만, 인간들 사이에서 주로 ‘뱀파이어’라고 불리는 바로 그 ‘대형 모기’입니다.”
보통 인간들은 상상의 산물이라 여겼던 요정이나 뱀파이어를 앞에 두고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놀라거나 경악하거나, 혹은 혼절하는 이들도 심심찮았으며 개중에는 과도한 흥미를 보이는 자들을 비롯해 미지의 존재에 대한 불쾌감을 드러내는 사람도 있었다.
더 나아가서는 혹시 이 모든 게 더 큰 자극을 바라는 매스미디어의 꼼수가 아닌가 의심하며 숨어 있는 카메라를 찾는 자들까지 있을 정도였다. 어떤 미친놈은 페어리가 날개를 보여주자마자 그걸 뜯어다 이베이에 팔아보겠다며 달려든 적도 있었다.
이번 인간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약간의 경계를 담은 채 상대의 기색을 살핀 페어리는 곧 이어진 단조로운 목소리에 잠시간 할 말을 이었다.
“와…… 뱀파이어랑 요정이 진짜로 있었군요.”
싱겁다 못해 맹숭맹숭한 표정 탓에 어느 정도 감탄이 섞인 것 같기는 한 어투가 퇴색했다. 그러고 보니 이 인간은 약에서 깼을 때도 별달리 놀란 기색 없이 인사를 건네왔다.
지나치게 침착한 건지, 아니면 잘 놀라지 않는 성격인 건지 아직 얼마 겪어보지 못한 터라 판단하기 어려웠다. 어쩌면 구직광고에 걸었던 자신의 마법이 너무 잘 들은 것일지도 몰랐다. 아무래도 에드워드가 내건 조건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조합이다 보니 걸려든 인간도 제정신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
청결하고, 목숨 아끼느라 빌빌거리지 않고, 절대로 에드워드에게 반하지 않을 괴상한 심미안에, 뱀파이어가 가진 영생에도 관심이 없는 그런 인간. 약간 덜떨어져도 상관없지만 기본적인 능력은 출중해 가르쳐놓으면 쓸 만한 신체능력과 지능을 가져야 한다는 부수적인 조건까지 딸린 오만하기 짝이 없는 요청이었다.
물론 지금까지 그에게 붙였던 파트너들과의 역사를 생각하면 에드워드가 예민하게 구는 것도 이해는 갔다. 게다가 이종들 사이에서는 이미 에드워드에 대한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그와 파트너를 하려는 정신 나간 이종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결국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들 사이에서 골라잡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페어리가 건 조건마법은 에드워드의 억지에 완전히 부합하는 인간에게만 보이는 구직광고였다. 이미 10년은 더 지난 그 광고에 정말로 연락이 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사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랬다. 에드워드의 요건을 모두 충족하는 인간은 삶에 의욕은 없는 주제에 쓸데없이 능력치는 높으며 제 목숨 귀한 줄 모르는 동시에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 괴인이었다. 그런 인간은 일부러 찾으려고 지구를 죄다 뒤져도 나올 것 같지가 않다는 게 페어리의 솔직한 감상이었다.
하지만 그런 인간이 정말로 있었다. 게다가 데려다 놓고 보니 너무나 에드워드의 조건에 들어맞는 나머지, 저런 걸 데리고 다니다가는 안 그래도 망가진 성격에 더 심각한 하자가 생길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 만큼 묘한 인간이었다.
어쩐지 눈엣가시 같던 에드워드의 천적을 찾은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페어리는 자신을 대신해 에드워드의 정신을 고문해줄 자랑스러운 미래의 동료를 향해 요정 특유의 달콤한 유혹을 담아 이렇게 말했다.
“이종족 이민 관리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케일리.”
◇ ◆ ◇
매력적인 미소와 함께 환영인사를 건네는 페어리를 가증스럽다는 듯 노려보던 에드워드의 머릿속에 문득, 인간이 요정의 유혹에 매우 취약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에드워드가 반사적으로 케일리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두 손으로 입과 코를 막은 채 필사적으로 요정가루를 피하며 그는 케일리의 상태를 세심하게 살폈다. 어디를 어떻게 봐도 흐리멍덩할 뿐, 결코 심지가 단단해 보이지는 않는 홈리스 인간이다. 저러다 자칫 잘못하면 이빨 요정의 노예계약서에 사인을 할지도 몰랐다.
눈앞에 닥친 현실적인 위협이 에드워드의 경보를 울렸다. 애당초 맛 간 이빨 요정이라는 별명까지 달고 다니는 사이코가 인사부의 총 책임자가 된 이유는, 그만큼 이 일에 적합한 재원이 없기 때문이다.
용을 제외한 모든 종족에게 통용되는 요정의 유혹은 그들이 사용하는 마법에 비하면 인간들이 뿌리는 페로몬 향수에 근접한 약한 환술 정도였다.
하지만 요정에 면역이 없는 인간들에게는 즉효약으로 작용했고, 어지간한 계약서라면 단번에 사인을 끌어내는 훌륭한 방법이었다. 그 계약에는 최악의 경우 목숨이, 그나마 나은 경우에도 팔다리 하나는 거뜬히 걸려 있었는데도 비겁한 요정술을 이겨내고 계약을 거부할 수 있는 종족은 거의 없었다.
게다가 페어리가 쓰는 근로계약서는 요정의 마법에 의해 종속되어 중도파기 같은 건 꿈도 꿀 수 없었다.
과거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서 지독한 사채업으로 전 세계에 명성을 퍼트린 악덕 고리대금업자를 가볍게 뛰어넘는 무자비한 성격까지 더하면, 페어리야말로 인사권을 틀어쥔 책임자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케일리의 연한 밤색 눈동자가 어딘지 흐리멍덩한 기색을 띤 채 페어리를 마주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경계하듯 주시하며 에드워드는 홈리스 인간이 요정의 유혹에 당한 건지, 아니면 처음부터 흐리멍덩했는지를 기억해내려고 애썼다.
……무리였다. 첫인상마저 확신할 수 없을 정도로 흐리멍덩한 덕분에 그가 원래 흐리멍덩했는지 페어리에게 당해서 흐리멍덩해진 건지 떠올릴 수 없었다. 페어리가 노예……가 아닌 근로계약서를 꺼내 들면 그 순간을 사수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이종족이 뭐죠?”
그렇게 에드워드가 제 기억과의 싸움에 기권패 한 사이, 잠시간 멍하니 입을 다물고 있던 케일리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 물음에 페어리는 아무래도 좀 더 적극적으로 공세를 펼쳐야겠다고 생각하며 등 뒤의 날개를 살랑살랑 움직였다. 요정의 능력을 극대화시키는 효과가 있는 요정가루가 사무실 안을 채워나갔다.
보통 인간이었으면 지나친 농도에 침식당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케일리에게서는 별다른 변화가 느껴지지 않았다. 어떻게든 계약을 성사시켜보겠답시고 날개를 흔들어대는 페어리의 만행에 에드워드는 자신의 기관지를 보호하며 그대로 사나운 눈을 한 채 소파로 돌아왔다.
역겨운 요정가루도 가루였지만, 미래를 위해서는 케일리가 사악한 요정에게 넘어가 자신의 의지를 무시하고 계약서에 사인을 하는 걸 저지하는 게 급선무였다.
에드워드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한 페어리는 할 수 있으면 해보라는 식으로 입술을 비틀어 올렸고, 이어서 케일리를 향해 더할 나위 없이 상냥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이렇게 대답했다.
“인간을 제외한 모든 종족을 말합니다.”
그 말에 케일리는 한층 의문이 깊어진 표정으로 잠시간 입을 다물었다.
“그 사람……, 종족들은 어디로부터 이민을 오나요?”
“그들의 고향이겠죠? 보통은 다른 행성이나 다른 은하계에서 옵니다. 다른 세계일 때도 있습니다만, 이민국에서도 전부 파악하고 있는 건 아니기 때문에 제각각 다릅니다.”
여전히 아리송한 표정으로 잠시간 생각에 잠긴 듯한 케일리가 아, 하고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평이한 목소리의 톤을 미세하게 올렸다.
“E.T.처럼요?”
일단 표정만큼은 웃음기 하나 없이 진지한 케일리의 물음이, 진심인지 농담인지 구분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어찌됐건 페어리는 그를 에드워드의 파트너로 묶어놓기 전까지 성심성의를 다할 생각이었다. 케일리의 속도에 맞춰서 느리게, 그러나 정확히 고개를 끄덕인 페어리가 대답을 돌렸다.
“그분은 이민자가 아니라, 난민이었죠.”
굳이 따지면 E.T.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였고 픽션이었기 때문에 -B 지구의 업무와는 하등의 연관이 없었다.
-B 지구의 관할이 국내외를 통틀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종족 이민 관리국 자체는 전 세계에 존재하는 기관이다. 타국에서 벌어지는 이종족 사건의 경우, 관계 당국의 협력요청을 받지 않는 한 -B 지구가 허가 없이 손을 쓰는 것은 외교문제로 이어진다. 그리고 녀석은 미국 외계인이다. 만약 놈이 실존하는 외계인이었다고 해도, 영국의 이민국이 끼어들 일이 아니었다.
케일리의 질문에 적당히 가정한 -B 지구 기준의 답변을 돌린 페어리는 어딘지 대화의 방향이 이상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해야 할 이야기는 케일리에게 업무 내용을 설명하고 근로계약서를 작성해 에드워드와 강제로 묶음배송을 시키는 것이었다.
시답잖은 영화 이야기를 나누기에 적절한 때가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자신의 의도를 알아챈 에드워드가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고 케일리의 옆자리에 엉덩이를 붙인 상태라면 더더욱.
“저런……. 이종족에 대한 난민정책은 어떤가요? 제 생각에 E.T.처럼 온화한 에일리언이라면 시민권을 줘도 괜찮을 것 같았는데, 결국 일이 그렇게 돼서 마음이 아팠어요. 저는 늘 사람과 외계생명체가 공존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왔거든요. 역시 악의 축이었던 우주국의 배후는 NASA였나요?”
그렇게 말하며 케일리는 마치 중대한 국가 정세라도 논의하는 양 페어리를 잔잔한 눈동자로 마주 보았다.
그러니까, 이 인간은 지금 진심으로 저걸 나한테 묻는 걸까?
케일리의 얄팍한 명예를 위해 변명하자면, 그는 결코 NASA나 E.T.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페어리가 꺼낸 ‘이종족 이민 관리국’이라는 말에 대해 앞으로 자신을 고용해줄 상대를 향한 최대한의 성의를 다하고 있을 뿐이었다.
본디 대화라는 건 주고받아 마땅한 것이며, 상대방에게 호감을 사기 위해서라면 더더욱 성의 있게 대답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정치 명가에서 자란 케일리는 똑똑히 학습했다.
문제는 케일리가 대부분의 SF적인 이야기와 톨킨적 판타지 설정에 별다른 관심이 없다는 것에 있었다. 눈앞에서 날개를 보여준다고 해서 요정이라는 지금까지도 별로 생각해본 적 없는 관념이 피부에 와 닿을 리가 없었다. 인간의 피를 주식으로 삼는다는 이야기 속의 뱀파이어라고 소개받은 갱스터 같은 남자가 화려한 금발에 파란 눈을 한 팸플릿 모델이라는 부분에서는 자본주의 사회의 아이러니까지 느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페어리는 자신을 고용해줄 사람이다. 즉, 잘 보여야 하는 상대였다. 그 결과가 케일리의 머릿속에 있는 가장 이종족에 근접한 지식을 꺼내 왔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는 논리적인 수순이었지만, 페어리에게 있어서는 이해할 수 없는 과정이었다는 것이 이 대화의 가장 안타까운 부분이었다.
“……스필버그가 그런 설정으로 스토리를 만들었는지까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케일리의 짐작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음모론을 좋아하니까요.”
표정을 읽으려고 해도 마땅히 보이는 게 없는 데다가, 거짓을 걸러내는 요정의 귀로 들어도 그저 진지하기만 한 케일리의 목소리에 페어리는 자신의 페이스를 되찾으려 노력했다.
다소 구린내를 풍기고 행색이 지저분한 것을 제외하면 지극히 단정하고 말끔한 인상의 인간 청년의 외견에 속아 말려든 걸지도 몰랐다. 심지어 정확한 발음에 몸에 배인 상류측 억양까지 더해져 자연스레 좋은 인상을 주는 청년이었지만 속아 넘어가면 안 된다.
케일리가 어떤 조건마법에 걸려들었는지를 상기하며, 페어리는 그의 언행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쓸모없는 짓이라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그래, 저 홈리스 인간은 겉보기는 멀쩡해도 대형 모기가 내건 온갖 병신맛이 나는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녀석이니 제정신일 리가 없지. 괜히 진지하게 상대했다가는 말려들 게 분명하니 일단 적당한 곳에서 원래 주제로 이야기를 돌리는 게 낫겠어.
일견 무해해 보이는 케일리의 외관을 일종의 카모플라주라 생각하기로 한 페어리가 요정의 자존심을 걸고 다시 한 번 소리 없는 날갯짓을 했다. 사무실 공기를 침식한 반짝이는 요정가루의 양이 늘어나는 것에 비례해, 에드워드의 얼굴이 푸르딩딩하게 질려갔다.
“케일리가 배치될 부서는 ‘필드’라고 불리는 곳입니다. 2인 1조의 파트너제를 기본으로 하며, 말 그대로 필드 업무에 투입되는 전투인력이죠.”
유려하게 이어진 페어리의 설명에 케일리가 다소 침울한 얼굴을 했다.
“전투라면, 일종의 경찰부대 같은 건가요?”
말만 들어도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이름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미 여기까지 와서 다른 직업을 찾거나 혹은 집으로 돌아가는 것보다는 나았다. 무엇보다도 케일리는 한번 시작한 일을 끝내지 않고 다른 길로 새는 법이 없는 성격이었다. 다른 길로 가기 위해 왔던 길을 돌아가는 게 귀찮기 때문이었다.
“비슷합니다. 업무 레벨에 따른 연수기간이 주어지기도 하고, 처음 들어온 요원들에게는 4주간의 종합훈련과 필드 실무 테스트 합격이 필수이니 너무 걱정하실 필요는 없어요.”
케일리를 향해 안심하라는 듯 미소를 지어 보인 페어리가 설명을 계속했다.
“-B 지구가 이민 관리국이라고 불리기는 하지만, 실제 업무 내용은 일반적인 인간들의 이민국보다 훨씬 포괄적입니다. 이종족들이 지구에, 정확히는 영국에 정착할 때 모두가 합법적인 루트를 밟는 게 아니다 보니 불법체류자를 파악하는 것부터 시작하죠.
개중에는 지구의 이종족 이민 관리 규정을 모르는 종족도 있고, 사실 모르는 종족이 더 많다 보니 -B 지구의 주요역할 중에는 아직 지구 정착 규정이 전달되지 않은 종족에게 매뉴얼을 만들어주는 부서가 있을 정도입니다.”
“아하.”
“그 외에도 이종족으로 인해 발생한 범죄를 조사하거나, 범인을 체포한 후 그에 알맞은 재판을 열고 법의 심판을 받게 만드는 과정까지가 모두 관리국의 역할입니다. 이종족을 대상으로 한 작은 정부 같은 개념이죠. 필드 업무는 그중에서도 사법절차와 행정절차를 망라하는 부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인간 세계에 섞여 사는 이종족들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등장한 -B 지구는 말하자면 흔히 비유되는 ‘뒷세계’에 근접한 개념이었다.
일반인들은 결코 그 존재를 알 기회도, 알 필요도 없지만 뒷세계의 주민들에게 있어서는 그들이 살아가는 세계 그 자체. 특정한 장소나 특정한 인물이 아니라, 인간을 제외한 모든 지구 거주 종족이 만들어낸 새로운 사회였다.
그것을 인간들에게 들키지 않고 꾸려나가기 위한 정부, 혹은 자치단체처럼 움직이는 기관은 영국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국가에 비밀스럽게 둥지를 트고 있었다. 영국의 -B 지구를 포함해 전 지구상에 분포한 이종족 이민 관리국이야말로 뒷세계의 진짜 모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이유로, -B 지구의 구인활동은 시민권을 얻은 이종족 이민자를 대상으로 펼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시민권 등록 시 부적격 사유가 없는 이종족에게는 으레 -B 지구의 취직을 권하는 게 관례일 정도였다.
그렇게 전체 이민자의 30퍼센트 정도가 -B 지구에 공무원으로 들어와 인간 사회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나머지 70퍼센트로 말할 것 같으면, 반절이 관광비자를 받아 잠깐 머물다 갔으며, 나머지 반은 실제로 평범한 인간들과 같은 직장을 가지며 인간처럼 살았다.
개중에는 그 종족 안의 지구 이민자 네트워크의 원조를 받아 일 없이도 놀고먹는 자들도 있었으나, 기본적으로는 지구에 열광해 찾아온 너드가 대부분이라 인간 사회를 경험하고 싶어 하는 이들이 많았다.
무엇보다 지구는 한 종족이 문명의 대부분을 장악한 특이한 사례로 근 수억 광년간 꾸준히 인기를 끌어 모으는 핫 플레이스였다. 그 인기가 꽤 오랫동안 지속됐음에도 불구하고 유행에 민감한 우주 힙스터들이 여전히 관심을 보이는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지금에 와서는 지구 마니아를 비롯해 지구 너드까지 생기는 걸 보면 특별한 역시 지구에 매력이 있다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었다.
개중에는 유행에 휩쓸려 이민을 선택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는 지구 자체와 인류에 대한 흥미를 바탕으로 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들 안에는 필연적으로 인류에게 좋지 않은 방향의 호기심을 발휘하는 이종도 있었다.
해서 -B 지구가 이종족 노동자를 선호하는 가장 큰 이유는 호기심이 과해 범죄행위를 저지르고 다니는 이종족을 상대해야 하는 필드 임무에 있어서, 인간의 연약한 정신력과 육체가 부적합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었다. 그 외에도 각종 보안문제나 정보의 공개 가능범위 같은 굵직한 트러블이 산재하기는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으로 이민을 온 모든 이종족이 -B 지구에 취직하는 것은 아니었다. 쓸데없이 넓은 섬나라를 관리하기 위해 인간을 고용하는 건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 영국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국가에서 이민국 안에 일정 비율의 인간 노동자를 고용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고질적인 일손 부족이었다.
“인간들의 이민국에서 담당하는 행정업무와 경리, 회계, 재무, 경영기획, 인사, 업무 서포트를 통틀어서 관리본부라고 부릅니다. 나머지 부서는 팀 단위로 쪼개져 있는데, 현재 기술팀, 커뮤니케이션 전문팀, 이민/이주 서포트팀, 필드팀이 있으며 관리본부 외의 팀은 인간 세계의 사법부와 비슷한 역할을 담당하죠.”
-B 지구의 구조와 간단한 업무 내용에 대한 설명을 끝낸 페어리는 간간이 고개를 끄덕이거나 ‘아하, 그렇군요.’ 등의 맞장구를 치는 케일리가 설명을 시작했을 때와 정확히 같은 표정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 흔들림 없이 일관적인 모습에 불안을 느낀다면 자신이 너무 예민한 걸까?
페어리는 보통 인간을 고용할 때의 가장 큰 고비인 ‘이종족의 존재를 인정하는 부분’을 정말이지 아무렇지 않게 넘긴 순간부터 자꾸만 출처가 분명한 불안이 엄습하는 것을 느꼈다.
뿐만 아니라 케일리는 두 번째 고비인 ‘이종족의 범죄’ 파트에서도 아무런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네가 필드 업무에 배치될 것이며, 그 일은 범죄를 소탕하는 것이라고 친절하고 솔직하게 설명했음에도 말이었다.
평범한 사고체계를 가진 인간은 -B 지구의 역할 중 사법기관을 대신한다는 부분과 이종족의 범죄를 연관 지어 자신의 안전에 대해 발 빠르게 의문을 제기했다.
어떤 생물이든 생존본능이라는 게 존재했고, 일신의 안전을 우선시 하는 건 오히려 정상적인 반응이었다. 그런 의문이 제기되면 페어리는 -B 지구의 가장 큰 금전적인 메리트를 제시해 상대방을 함락시키거나, 아니면 요정의 힘을 써 노예……가 아니라 근로계약서에 사인을 하도록 만들었다.
후자의 방법을 이용하는 건 10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인력난에 시달릴 때 정도였으므로 대부분의 인간은 전자의 조건에서 만족스럽게 협상한 후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B 지구에서 인간 노동자에게 제공하는 메리트 중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첫째가 잘나가는 소규모 기업체 소유자를 가볍게 뛰어넘는 거액의 연봉이었으며, 둘째가 업무와 관계가 있든 없든 무조건적으로 적용되는 보험이었다.
-B 지구뿐만 아니라 뒷세계 근로 인간만을 대상으로 하는 특수한 보험은 이종족 이민 관리 네트워크 안에서 인간을 위한 복지시스템으로 가장 큰 예산을 잡아먹기로도 유명했다. 하지만 그 정도의 보장이 없으면 인간의 입장에서 괴물이 가득한 뒷세계의 정의를 위해 목숨까지 걸 리가 없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였다.
상해 보험뿐만 아니라 가족들을 향한 학비 지원, 의료비 전액 지원, 여가 및 여행비용 지급으로 시작해 끝도 없이 펼쳐지는 보험범위를 거부할 수 있는 인간은 드물었다. 게다가 그 보험은 사고로 인한 사망 혹은 은퇴 후에도 직계가족에게 평생 보장되는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세 번째 매력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 조건이 메리트가 되는 인간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그 때문에 사인을 거부하는 인간도 있는 매니악한 내용이었다.
‘00 코드’의 지급. 살인면허라고 널리 알려진 코드를 지급받고 필드 업무를 나가면, 걸어다니는 치외법권이 될 수 있었다.
그 조항이 금기를 깨트리는 데 일가견이 있는 인간들에게 썩 탐스러운 것인 경우가 간혹 있었다. 그걸 매력으로 느끼는 인간이야말로 정신건강을 의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평화주의자들도 있었지만 늘 그렇듯 힘이 약한 소수파의 주장은 묵살되기 마련이었다.
애당초 이종족 범죄자는 인간 범죄자보다 훨씬 다루기가 까다로웠으며, 인간에게 이종족을 상대하라고 보내놓고 살상을 허가하지 않는 건 그냥 죽으러 가라는 뜻이었다.
종합적으로 거액의 연봉과 다방면으로 적용되는 보험 혜택을 받는 대신 직장과 업무 내용을 비롯한 그 어떤 사항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으며 만약 그 조항을 어길 시 그만한 리스크가 되돌아오는 마법이 발동한다는 내용이 계약에 포함되어 있었다. 모든 계약이 그렇듯 일장일단이 있었다.
페어리가 지금까지 만나온 인간들은 어느 정도 합리적인 근거를 두고 -B 지구에서 일을 할 것인지, 포기할 것인지를 선택했다. 그리고 지금의 페어리에게 들이닥친 문제는, 케일리에게서 그 생존본능이라는 것이 전혀 티끌 한 점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분명 에드워드의 요구 안에 ‘목숨을 아끼느라 빌빌대지 않는’이라는 표현이 들어 있었지만 거기에도 적정선이라는 게 있는 법이다. 자신의 마법이 그 문구를 ‘목숨을 일회용 종이컵처럼 아무렇지 않게 던져버리는’으로 해석한 게 아닐까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하는 건 아닐까.
에드워드의 옆자리에 앉아 팸플릿을 읽어내리는 케일리를 바라보며 약간의 불안을 담은 눈으로 페어리는 생각했다.
더 이상 설명이 이어지지 않자, 잠시간 팸플릿에 시선을 옮겼던 케일리가 고개를 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무해한 표정을 한 채 의구심이라고는 귀를 씻고 찾아도 발견할 수 없는 평화로운 목소리가 페어리에게 물음을 던졌다.
“그럼 저는 이제 여기에 취직이 된 건가요?”
그 말이 흘러나온 순간, 에드워드와 페어리가 처음으로 분노와 적의 없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하공에서 시선이 마주친 순간 두 남자는 같은 표정으로 비슷한 생각을 떠올렸다.
얘, 사실 생긴 것만 멀쩡한 미친놈 아니냐?
아무리 에드워드를 엿 먹이고 싶다지만 정신 나간 인간을 고용하는 게 옳은 선택일까?
인류의 본능마저 초월한 낙관주의와 야망 없음을 제외하면 별달리 특별할 게 없는 엘리트 청년 케일리는, 표정과 시선으로 자신을 평가하는 두 이종족이 어쩐지 레이튼과 비슷한 시선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 그러고 보니까 페어리.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요.”
첫 구직활동이다 보니 중요한 질문을 잊고 있었다. 생각났을 때 물어두는 게 좋을 것 같아 케일리가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잠시간 천적의 괴로움과 자신이 속한 조직의 안녕 사이에서 내적갈등을 겪고 있던 페어리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타이밍이 다소 늦어졌을 뿐, 다른 인간들처럼 일자리에 대해 제대로 된 질문을 하려는가 보다!
그러나 국제 정세를 논하는 중견 정치가와 비견해도 뒤지지 않을 진중함을 담은 케일리의 표정과, 흘러나온 유려한 억양이 담은 내용은 페어리의 마지막 희망마저 산산조각 냈다.
“필드요원은 공무원에 속하나요, 전문직에 속하나요?”
인간을 상대로 어떤 질문을 받아도 당황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던 페어리는, 오늘따라 처음 겪는 일이 참 많은 것 같다는 현실도피적인 생각마저 떠올리며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아버지가 걱정이 많으신 분이라 제대로 된 직장에 취직했다고 말씀을 드려야 하거든요. 제가 잠깐 집을 나와 있는 상태라, 집에서 저를 찾고 있을지도 모르고요.”
어떻게 보면 단정하고 예의 바른 표정임에도 불구하고, 연한 밤색을 띤 맑은 눈동자만이 어딘지 흐리멍덩한 인상을 주었다. 자신을 향해 진심 어린 표정으로 아무래도 좋은 질문을 하는 케일리를 바라보며 페어리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내 생각에 쟤는 지금 아무것도 이해를 못한 것 같아.’
두 세기를 인사부 채용과에서 일한 숙련 요정 페어리는 기나긴 업무 역사상 처음으로, 고용 예정자를 앞에 둔 채 두 손을 들어 머리를 감싸 쥐었다.
페어리의 머릿속에서는 이 인간 남자를 고용함으로 인해 짊어지게 될 리스크와, 이 인간 남자를 고용함으로 인해 에드워드의 입에 처넣을 수 있는 엿의 질과 부피를 양 끝에 둔 치열한 저울질이 벌어지고 있었다.
두 세기 동안 자신의 골치를 썩인 에드워드를 향한 복수인가, 앞으로의 업무에 크나큰 재앙이 될 거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존재란 걸 인정하고 쫓아낼 것인가.
고민에 빠져 있던 페어리는 철천지원수를 시원하게 골로 보낼 카드를 손에 쥐었으나, 눈물을 머금고 그 패를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래, 아무리 복수에 눈이 멀었어도 하면 되는 일이 있고 안 되는 일이 있는 거지. 소중한 직장에 저런 정체 모를 재앙을 들이는 건 프로페셔널 하지 못……하…….
그렇게 생각하며 아버지에게 전문직이라고 알릴지, 공무원이라고 알릴지 고민 중이라는 케일리를 향해 시선을 돌린 순간, 시야의 끝에 걸린 에드워드의 그것 보라는 듯 대놓고 자신을 비웃는 비틀린 표정이 소중한 직장을 선택한 페어리의 결단을 완전히 뒤집었다.
“케일리, 일단 계약서를 보면 알게 될 테지만 -B 지구의 인간 요원은 이곳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바깥에서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첫 4주간의 필드 연수기간에는 바깥과 접촉할 수 없으니 만약 가족과의 연락이 필요하다면 4주 뒤로 미뤄주세요.
필드요원의 기본적인 고용형태는 기간 갱신제 정직원입니다. 수명이 짧은 인간 요원이 주로 무기한을 선택하고, 인간 외 요원은 기한제를 선호하는 편이죠. -B 지구는 엄연히 말하면 내각 산하의 기관이니 공무원이라고 하셔도 상관없습니다. 원하시면 SIS 쪽에 명함을 팔 만한 적당한 자리를 만들어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페어리는 숨 한번 쉬지 않고 단번에 설명을 마쳤다. 여전히 입과 코를 두 손으로 막은 볼썽사나운 꼴로 스턴 건에 맞기라도 한 양 파들거리는 에드워드를 향해 온 마음을 담은 비웃음을 돌려주는 것은 덤이었다.
애초에 2인 1조를 기본으로 하는 필드 업무를 혼자서만 고독한 라이칸 코스프레를 하는 미친 뱀파이어가 문제였다. 순순히 파트너를 데리고 다니기만 하면 될 것을, 애꿎은 요정을 귀찮게 만드냐 그 말이다.
어차피 에드워드는 저보다 더 나은 파트너를 구할 수 없었다. 인간을 제외한 모든 종족은 뱀파이어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으며, 그들의 영생을 손에 넣으려 어떻게든 접근했다. 게다가 뱀파이어의 매혹은 요정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작용해 같은 뱀파이어를 제외한 모든 종족에게 통하는 매력적인 무기였다.
그 모든 것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종족이 만에 하나 존재한다면, 모든 생명체의 욕구를 뛰어넘어 열반의 경지에 든 고타마 싯다르타를 배출한 인간 정도밖에 가능성이 없었다.
그렇게 고타마 비슷한 인간을 구해온 자신의 노력을 개무시한 것뿐만 아니라, 기껏 구해온 조건이 들어맞는 인간을 보며 비웃어대기나 하는 뱀파이어는 호되게 당해도 쌌다.
어느새 케일리의 앞에 펼쳐진 팸플릿 위로 요정의 마법이 걸린 근로계약서까지 착실하게 올려놓은 페어리는 홈리스답지 않게 굳은살이 하나 없는 그의 오른손에 자신의 만년필을 살포시 쥐여주었다.
“자, 읽어보고 수정하고 싶은 조항이 없으면 마지막 장에 사인하세요. 만약을 위해서 미리 말씀드리지만, 이 계약서는 요정의 마법으로 종속되기 때문에 절대로 파기할 수 없으며 모든 조항이 이행된 후에는 자동 소멸합니다.”
페어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케일리는 제법 두꺼운 계약서를 제일 마지막장으로 넘겼다.
‘아니, 저 인간은 근로계약서 조항은 일단 한번 읽어야 한다는 상식도 없는 거야? 보통, 보통 인간들은 계약을 할 때는 변호사까지 대동하잖아! 그게 인간의 계약 문화 아니었어?’
경악 어린 표정으로 상식의 붕괴를 겪는 페어리에게는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사인을 하기 위해 잉크병에 만년필을 담았다 뺀 케일리가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뒤늦게나마 문제점을 깨달았다니, 참으로 다행이었다.
법보다 무서운 마법으로 묶여, 중도파기가 가능한 것도 아닌데 목숨까지 걸린 계약서를 조항 하나 확인하지 않고 사인하는 머저리가 아니라서, 진심으로 다행이었다.
그렇게 페어리는 자신이 잡은 마지막 희망줄마저 썩은 줄이었다는 것을 이어지는 케일리의 질문에 통감할 수밖에 없었다.
“풀네임을 써야 하나요?”
왜! 대체 왜! 물어야 할 건 안 물어보고, 아무도 안 물어보는 아무래도 좋은 것만 물어보냔 말이야, 왜!
에드워드가 얄밉지만 않았어도, 자신을 비웃지만 않았어도, 두 세기 동안 미친 뱀파이어처럼 굴지만 않았어도 이런 미쳤다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겉만 멀쩡한 인간을 고용할 페어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그만큼 얄미웠고, 자신을 비웃었으며, 두 세기 동안 미친 뱀파이어처럼 굴었다. 그것을 인정하니 페어리는 왠지 모르게 들끓던 마음속이 평안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는 케일리의 질문에 가만히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온화함보다는 좀 더 포기와 달관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범죄이력이라도 있으십니까?”
“그런 건 아닌데, 성은 빼도 되면 이름만 쓰고 싶어서요.”
“자필로 쓴 진짜 이름이기만 하면 계약은 유효합니다.”
‘포기하면 편하다.’
인간들 사이에서 도는 표현을 인용하며 페어리는 케일리가 계약서에 사인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어이, 너, 너, 이 멍청한 인간이!”
그 일련의 과정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멍청하게 바라보기만 하던 에드워드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케일리의 계약서를 낚아챘다. 안타깝게도 정확히 같은 타이밍에 케일리의 이름이 완전히 적힌 계약서는 페어리의 요정가루와 같은 빛을 뿜어내며 마법이 성립되었음을 알리고 있었지만 말이다.
“이, 이, 이, 이거 완전히 미친놈 아니야! 야 이 미친 새끼야! 넌 계약서에 사인할 때는 그걸 제대로 읽어봐야 한다는 상식도 없냐?”
마법이 발동된 계약서를 처참하게 구겨 휴지조각으로 만들어봤자 화풀이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에드워드는 자신의 손 안에서 종이쓰레기가 된 그것을 케일리에게 집어 던지며 고래고래 소리쳤다. 그런 에드워드를 바라보며 케일리가 마음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오는 의문을 제기했다.
“전 아이튠즈 업그레이드 팝업에 동의 누르면서 한 번도 약관을 읽어본 적이 없는데요.”
만약 에드워드가 뱀파이어가 아니었더라면 정신 붕괴의 위기를 겪었을지도 몰랐다. 평소 같았으면 ‘사내폭력, 내 눈앞에서는 절대 반대’를 외쳤을 페어리는 요 근래 철천지원수에 등극한 에드워드를 짠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케일리의 언어중추가 어떻게 생겨먹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떻게 반박하기도 어려운 신박하다 못해 가능하다면 절대로 말을 섞고 싶지 않은 혼란스러운 화법이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런 케일리를 파트너로 데리고 다니며 목숨을 맡겨야 할 뱀파이어를 향해 세상 누구보다 평화로운 얼굴로 성호를 그은 페어리가 마음속으로 그를 위해 기도했다.
‘불로불사니 죽지도 못하고 딱 죽을 만큼 힘들어보라지, 하하.’
미묘하게 핀트가 어긋난 주제에 인과관계만 정확한 케일리의 대답에 잠시간 말이 막혔던 에드워드가 지독한 정신공격의 데미지를 딛고 현실로 돌아왔다. 정신을 차린 에드워드는 탕, 탕! 주먹 쥔 손으로 정확히 두 번 테이블을 내리쳤다. 뒤이어 생물이라는 공통점으로부터 비롯된 진심 섞인 고함이 노도처럼 터져 나왔다.
“너한테는 아이튠즈 업그레이드가 목숨이랑 동급이냐?!”
목소리를 높이는 에드워드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한 케일리는 기껏해야 ‘여기 휘핑크림 들어갔나요? 들어가든 말든 별로 상관없긴 하지만요.’ 정도의 무게밖에 담기지 않은 여상한 목소리로 그를 향해 반문했다.
“여기에 목숨도 걸려 있나요?”
“…….”
“…….”
이번에는 페어리도 마냥 에드워드를 비웃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지금부터라도…… 읽어보시겠습니까?”
이론상 마법으로 성립된 계약을 중도파기할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케일리에게 주어진 것은 계약을 포기하고 리스크를 짊어지거나, 혹은 계약을 끝까지 이행해 성공시킨다는 두 가지 선택지뿐이었다.
목숨이 걸렸다는 말을 과장된 표현이라 가볍게 여기는 이들도 분명 존재했다. 하지만 임무 중 목숨을 포함한 그 어떤 일이 생겨도 외부에 발설할 수 없으며 외부의 도움을 받을 수조차 없다는 필수조항의 무게를 제대로 알고 있는 쪽이 훨씬 많았다.
-B 지구의 임무로 인해 목숨을 잃게 되면 가족들은 그가 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하다 죽었는지조차 영영 알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만큼 적절한 보상금이 지급되었고, 가족이 포함된 보험 또한 직계가족에게 평생 동안 보장되지만 그걸 목숨을 맞바꾸는 데에는 어느 정도의 각오와 고민이 필요했다.
케일리가 사인한 계약서는 인사부에서 ‘표준계약서’라고 불리는 기본적인 내용의 서식을 조금 변형한 것으로, 에드워드의 파트너 계약에 중점을 둔 것이었다. 다행인 점은 그 계약서가 세 단계에 걸친 기한 제한을 두었다는 것이었다. 가장 가까운 가능성을 꼽자면, 첫 번째 기한인 4주간의 필드 연수 결과에 따라 자동파기 될 가능성도 없지는 않았다.
보통 필드 연수에는 2주간의 실내 연수와 2주간의 현장연수에 각각의 점수를 매기기 위한 담당 교관이 대동된다. 첫 번째 연수를 무사통과하면 파트너가 배정되며, 통과하지 못한 이들은 -B 지구에 대한 기억을 소거한 후 원래 세계로 돌려보낸다.
파트너를 배정받은 후 두 번째 기간인 3년간의 계약이 자동으로 갱신되며, 마지막 기간은 그 3년간의 계약을 갱신할지, 파기할지를 정하는 일종의 유예기간이었다.
그러니 케일리가 사인한 표준계약서대로라면 그가 이 계약을 파기하고 싶을 경우 4주간의 연수를 어떻게 굴려도 써먹을 수 없을 정도로 쓰레기 같은 성적으로 끝낸다는 방법이 있었다. 그 후에는 기억이 지워진 채 원래의 홈리스 생활로 돌아가겠지. 만약 연수를 무사통과 한다면 꼼짝없이 3년을 미친 뱀파이어의 파트너로 목숨 댕강한 현장에서 근무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페어리는 솔직한 심정으로, 케일리가 4주 연수에서조차 살아남을 수 있을지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이종족 이론처럼 듣기만 하면 끝나는 강의 형식의 연수는 그렇다 쳐도, 현장연수는 도무지 희망이 보이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어차피 벌써 사인한 거잖아요? 괜찮아요.”
점점 더…… 확고해지기만 했다.
휴지조각이 되어 나뒹구는 계약서더미를 주워 든 케일리는 그것을 에드워드의 손에 곱게 쥐여주었다. 그러고는 머리 하나가 큰 금발의 뱀파이어를 향해 흡사 어떤 경지에마저 오른 듯 모든 것을 포용하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에드워드 씨, 너무 걱정 마세요. 원래 산다는 게 다 그런 거잖아요. 어차피 일은 닥치는 거니까 닥치고 나서 어떻게 할지 생각하면 되는 거예요.”
그 태도만 해도 본인이 처한 처지와 위험도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게 분명한데, 저런 놈을 자신이 데리고 다녀야 한다는 사실에 눈앞이 암담했다.
하지만 이 오도 가도 못하는 좆같은 상황에서 에드워드가 가장 참을 수 없는 것은, 머릿속에 뇌를 대신해 온갖 맛이 나는 젤리를 처넣고 다니는 게 분명한 케일리의 크나큰 착각이었다.
“대체 뭘 잘못 처먹으면 내가 널 걱정한다고 착각할 수 있는 거지?”
에드워드가 한 것은 걱정이 아니라 분노였다. 게다가 눈앞의 인간은 계약서를 제대로 읽지 않았으니 아직 모르고 있겠지만, 2인 1조라고 페어리가 설명한 그 1조로 함께 묶일 상대는 다른 누구도 아닌 에드워드 자신이었다. 만약 놈이 계약서를 제대로 읽었다면 본인이 뱀파이어와 파트너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알아서 물러갔을지도 몰랐다.
아니, 물론 목숨을 아이튠즈 약관 정도로 생각하는 인간이 위험하기 때문에 뱀파이어를 피해야 한다는 논리적인 추론이 가능할 것 같지 않기는 했지만 그 정도 희망은 가져도 되는 거 아니겠는가.
인간들의 사회에 알려진 전설에 따르면 뱀파이어는 인간의 피를 마신다. 뱀파이어의 흡혈행위에 당한 인간은 같은 뱀파이어가 되거나, 혹은 어떤 B급 영화에서는 시체를 파먹는 구울이 되는 것이 그나마 살아남는 결말이었다. 나머지 경우 피를 모조리 빨려 재가 되거나, 나무토막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요정들이 하는 짓이라야 베개 밑에 놓인 이빨을 달러로 바꿔주는 신개념 환전시스템의 효율적인 운용 정도이니 케일리가 페어리를 향해 별다른 공포를 느끼지 않는 게 이해가 되었지만, 뱀파이어는 아니다. 포식자에 대해 일말의 경계심조차 가지지 않는 피식자는 생태계에 혼란을 야기한다.
그리고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케일리는 인간과 비교하면 모든 부분에서 월등히 뛰어난 뱀파이어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그런가요? 하기야 초면에 인종……이 아니라 종족도 다른데 걱정을 하는 게 더 이상하겠죠? 오해해서 죄송합니다.”
잘못을 인정하는 속도와 정중한 사과만큼은 흠잡을 구석 하나 없이 깔끔했다. 문제는 케일리가 이상한 부분에서만 지나치게 정상인처럼 구는 점이 에드워드를 더 미치게 만든다는 것 정도일까.
“에드워드, 포기하고 받아들이세요. 이런 걸 보고 인간들은 카르마라고 하지 않던가요? 다 뿌린 대로 거두는 겁니다.”
한술 더 뜨는 페어리는 이미 성사된 마법을 뒤집을 방법이 없는 김에 에드워드를 철저히 농락하려 마음먹은 것 같았다.
“다시 한 번 동료가 된 것을 환영합니다, 케일리.”
“저야말로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페어리. 그리고 에드워드.”
“으아아아아아아아악!”
요정과 요정가루, 불결한 것, 무능함, 비굴함, 속물적임에 더해 혐오하는 것 목록에 ‘케일리’라는 명사가 하나 더 추가된 듯 보이는 에드워드를 지켜보며, 페어리는 그제야 케일리에게 요정가루가 통하지 않는 이유를 깨달았다.
요정가루는 본디 요정이 가지고 있는 타 개체를 매료하는 속성을 증폭시키는 보조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게 강력한 힘도 아니었고 그래서 어떤 종족에게는 기가 막히게 들어먹히지만 어떤 종족에게는 그저 불쾌한 나방 가루 정도로 취급받기도 했다.
페어리가 알기로, 그 효과의 차이는 근본적인 요정가루의 작동구조에서 왔다. 처음부터 욕망의 농도가 옅은 종족을 향해 증폭능력을 사용해봤자 효과가 미미할 뿐이란 것은 당연했다. 인간의 경우 다방면의 욕망을 누구나가 가지고 있었으며 요정 페어리에게는 그것을 효율적으로 끌어낸 다년간의 경험이 있었다.
하지만 그 또한 본디 욕망의 총량이 많은 인간과 그렇지 않은 인간 사이에서 차이를 보였으며, 케일리는 그 극단적인 예라고 볼 수 있었다. 처음 페어리의 구인광고에 걸린 조건에 정확히 부합하는 케일리는, 모든 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기본욕구가 희박하다 못해 없다시피 한 존재였다.
애초에 증폭시킬 욕구가 없으니 요정가루가 효용하지 않는 건 당연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페어리는 케일리가 어딘지 딱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당장 지저분하긴 했지만 이목구비 자체는 단정했고 아마 씻겨놓으면 요정의 눈으로 봐도 그리 나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입고 있는 옷 또한 구겨지고 고약한 냄새를 풍기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닳거나 낡았다는 인상은 주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자세히 뜯어보면 하나하나가 입이 떡 벌어질 정도의 명품이었다. 억양은 상류층의 그것이었고 몸에 배인 사소한 동작 하나하나가 좋은 교육을 받았음을 암시했다.
환경적 요인이 아니라면, 항상 종족 간의 먹이사슬과 각종 분쟁에 휘말려 있는 이종족들의 눈에는 소꿉장난 같은 난이도의 인간 사회에서조차 살아남기에 부적격한 저 성격은 태생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어쩌다 이렇게 종잡을 수 없이 요상한 인간이 걸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본인의 입으로 범죄자가 아니라고 한 것과, 당장 집을 나와서 가족들이 찾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까지 꺼낸 걸 보면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거겠지.
-B 지구 입장에서야 4주의 연수기간 후 정식계약을 맺거나, 혹은 계약이 파기되어 기억을 소거한 후에 그가 가족에게 돌아가든 길거리로 돌아가든 그의 개인사정까지 시시콜콜 신경 쓸 이유가 없다.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활동을 포괄하는 -B 지구 특성상 신체적 요건뿐만 아니라 언어와 문화 전반에 대한 이해를 비롯해 다양한 지식이 필요했다. 에드워드의 황당한 조건만으로 임시채용 한 케일리가 4주라는 짧은 시간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페어리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연수 동안 고통받을 에드워드를 상상하며 만족하기로 했다. 의욕이 넘쳐서 사고를 치는 것보다야, 의욕이 너무 없어서 치는 사고가 훨씬 안전할 것 같기도 했고.
◇ ◆ ◇
페어리는 미친 듯 악을 쓰는 에드워드를 무시한 채, 케일리를 향해 파트너십에 대해 설명했다.
“처음 말씀드렸던 것처럼 필드요원은 2인 1조로 이루어집니다. 두 명이 팀을 이루어 임무를 수행하죠. 필드 파트너의 경우 기본적으로 업무 이상의 교류를 강요하지는 않습니다. 목숨을 걸고 한다고 말은 해도 모든 임무가 위험하기만 하지도 않는 데다, 프라이버시는 중요하니까요.
게다가 이종족 간의 교류에는 다양한 애로사항이 발생하기 마련이라 서로의 목숨을 맡기는 절친한 친구가 되라는 건 어려운 일입니다. 그저 서로에게 가능한 것, 불가능한 것을 제대로 파악하고 적재적소에서 활약하면서 상대방을 향한 최소한의 백업을 해주면 그걸로 충분하죠.”
단조롭게 이어지는 페어리의 목소리를 머릿속에 입력하던 케일리가 아, 하고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제 파트너도 이종족인가요?”
이종족에 대한 지식이 전무하다시피 한 케일리에게 있어서 예측 가능한 종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는 산타클로스, 이빨 요정, 샌드맨, 잭 프로스트, 부기맨, 뱀파이어, 라이칸 정도의 라인업이었다. 산타클로스와 잭 프로스트가 이종족인지 인간인지 혹은 제3의 존재인지 확신할 수 없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대충 그 정도다.
색소 옅은 밀빛 속눈썹이 느린 동작으로 깜빡이는 눈꺼풀을 따라 팔랑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페어리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케일리. 게다가 당신의 파트너는 필드요원 중에서 실적만 따지면 분기마다 1위를 놓치지 않는 우수한 요원이죠.”
“대단하네요. 연수를 시작할 때 소개받나요?”
“아니요, 사실 이미 소개는 끝났습니다.”
“벌써요?”
“네, 그렇습니다.”
싱긋 웃으며 그렇게 대답하는 페어리를 올려다보며 케일리가 생각에 잠겼다.
나는 수상한 녀석이다를 주장하던 정부요원 둘과 페어리, 에드워드를 합쳐서 총 네 명밖에 만나보지 못했으니 자신의 파트너는 그중 하나일 테다. 학생시절부터 유용하게 이용 중인 소거법으로 케일리는 매 분기 실적 1위는 따놓은 당상이라는 엘리트 요원을 맞혔다.
“제임스 본드가 이종족이라니, 감쪽같네요.”
자신에게 수면가스 비슷한 것을 마시게 만든 요원 둘을 떠올리며 케일리가 감탄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2인 1조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수상한 녀석이다가 2인 1조일 것이라 생각했지만 아니었던 모양이다.
리무진으로 자신을 마중 나온 검은 요원 둘 중 하나가 자신의 파트너일 것이라 확신한 케일리의 말을, 페어리는 단번에 이해하지 못했다.
달콤한 이목구비 위에 미소를 띤 채 “본드……라는 건 프레드릭과 알프를 말씀하시는 건가요?”라고 페어리가 묻자 케일리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절 데리러 왔던 분들?”
“하하, 아닙니다. 프레드릭과 알프는 확실히 이종족이지만 둘이 한 팀이라 케일리의 파트너는 다른 이종입니다.”
“다른 이종…….”
소거법에 의거해 제임스 본드 두 명이 지워지면 남는 건 페어리와 에드워드뿐이었다. 케일리는 잠시간 고민에 빠졌다. 요정과 뱀파이어라고 하면 당연히 뱀파이어가 더 강해 보였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검은 가죽 재킷을, 그것도 바이크용 재킷을 입고 있었다. 짙은 허니 블론드는 아무렇게나 헝클어져 있었으며 목에 걸고 있는 짙은 빛의 고글을 종합한 후 케일리의 경험과 배경 지식과 섞으면 그는 대체로 길거리에 돈을 뿌리고 다니며 부모 등골을 빨아먹는 니트족일 확률이 높다.
케일리가 가진 편견에 에드워드의 뒷골목 갱스터 같은 패션이 한몫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자신이 비교적 수동적인 니트 지망생이라는 것뿐만 아니라 현재 홈리스 같은 꼴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케일리는 잠시간 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는 건 좋지 않은 일이다.
“에드워드는 보기와는 달리 아주 유능한 뱀파이어였군요.”
악의 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결론지은 케일리가 말했다.
많아야 이십 대 초중반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 젊은 인상의 에드워드는, 10년 전 반항기에 빠져 머리를 금발로 물들이고 집 한 채 값의 커스텀 바이크를 헬멧 없이 몰고 다니다 반신불수가 될 뻔한 소꿉친구 렌필드를 연상시켰다. 하지만 아직 잘 모르는 뱀파이어를 자신의 인생에서 바닥에 바닥을 친 인간과 비교하는 건 미안한 일이다.
케일리의 밑도 끝도 없는 칭찬에 떨떠름한 얼굴을 한 에드워드는 어떻게든 이 인간을 필드 연수에 나가기 전에 떨궈내야겠다고 다짐했다.
파트너십의 맹점은 24시간을 줄곧 붙어 지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가끔 찾아오는 임무 끝과 새 임무 시작의 사이의 짧은 시간 정도가 겨우 돌아오는 개인시간이다. 바꿔 말하면, 2인 1조란 함께 먹고 자고 같은 공간에서 사는 것뿐만 아니라 임무를 나가서도 그 상황이 지속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에드워드에게는 4주라는 시간이 주어진 것과 진배없었다. 케일리를 영원히 자신의 곁에서 얼씬도 하지 못하게 만들기 위한 4주. 그 시간을 놓치면 적어도 3년은 저 인간을 달고 다녀야 했다. 그렇게 될 경우 필드 임무에서 죽으라고 나뒹굴게 내버려두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파트너십의 문제점은 파트너에 대한 연대 책임으로도 이어졌다. 에드워드는 세상에는 자신과 같은 성격으로 해나갈 수 있는 일이 극단적으로 적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이 직업을 잃으면 이번에야말로 뱀파이어 사회의 웃음거리로 전락해 수백 년을 두고두고 회자될 것이었다. 그것만은 피해야 했다.
어딘지 덜떨어진 인간을 파트너를 얻은 걸로도 불쾌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보다도 중요한 몇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에드워드는 케일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리 나쁘지 않은 외모임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흐릿한 인상인 이유는 뭘까?’
인상을 찌푸린 채 생각하며 에드워드는 자신을 향해 마주 뻗어온 오른손을 잡았고 가볍게 흔들었다.
“일단은, 잘 부탁한다고 해두지.”
“저야말로, 아직 -B 지구에 대해서 모르는 게 많아 부족한 파트너지만 에드워드의 짐이 되지 않도록 함께 노력해요.”
“하하, 에드워드에게 파트너가 생긴 걸 보니 제 마음이 다 든든하군요. 이제 인사부에서도 징계 위원회를 데리고 뱀파이어 사냥을 갈 필요가 없어졌으니 다행입니다.”
‘……?’
언제나와 같은 페어리의 헛소리는 그렇다 치고, 어딘지 껄쩍지근한 케일리의 인사말에 에드워드는 잠시간 그 말의 의중을 고민했다. 분명 특별한 구석 없는 인사였고 앞으로 파트너가 될 사람에게 건넬 만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케일리의 입에서 부드럽게 흘러나온 마지막 단어가 이상했다.
‘노력할게요.’가 아니라 ‘함께 노력해요.’
보통 스스로의 부족함을 인지하는 사람은 겸손해지거나, 미안해하거나,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더라도 더 열심히 하겠다고 주장하는 게 일반적인 태도였다. 그러니까, 케일리는 지금 ‘너도 같이 노력하세요.’라고 요구하는 걸까? 그렇다기에는 지나치게 겸손하고 평화로운 표정이었기 때문에 에드워드는 잠시간 혼란에 빠졌다.
분명 같은 인간들의 언어를, 영어를 쓰고 있는데 대화를 하고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커뮤니케이션을 쌍방향의 소통이라는 의미에서 캐치볼이라 비유한다면, 지금 이 사무실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건 과격한 스쿼시였다. 셋이 마주하고 있었지만 서로가 벽을 향해 미친 듯이 공을 던지고 있을 뿐, 누구도 상대방의 공을 받아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케일리는 붙임성이 있어 누구와든 금세 친해지는 외향적인 성격은 아니었지만, 오랜 기간 정계 명가에서 자랐으며 사람을 대하는 데는 일가견이 있었다. 게다가 일곱 번의 사업을 말아먹는 동안 거래처와 안면을 트기 위해 수십, 수백의 파티와 식사를 다니기도 했다. 상대가 사람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앞으로 잘 보여야 할 상대와 어떻게 시작할지는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케일리는 먼저 에드워드와의 공통 주제를 찾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에드워드는 뱀파이어라고 했죠?”
오늘 처음 알게 된 뱀파이어의 실재에 아무런 의문도 품지 않은 채, 있는 그대로의 사실로 받아들인 케일리가 에드워드를 향해 레이튼에게 특훈 받은 영업용 미소를 지어 보였다.
“머리 뒤로 넘기고, 검은 셔츠 입으면 이종족 계의 아이돌로 데뷔해도 될 만큼 잘생기셨네요.”
페어리와 에드워드가 동시에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 건 당연했다. 그리고 한 타이밍 늦게, 그게 뭘 뜻하는지 이해한 페어리가 먼저 웃음을 터트렸다.
“풋……, 아, 실례. 미안합니다. 그렇죠, 에드워드는 이종족계의 아이…… 푸흐흡……!”
언뜻 듣기에 케일리의 그것은 칭찬이라고 부르는 사교상의 인사말에 가장 근접했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그 이야기를 최근 수년간 지겹도록 들어왔고, 아주 지독하게 싫어했으며 페어리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인간.”
인내심과 수억 광년 떨어진 에드워드의 목소리가 채 억누르지 못한 분노에 떨려나왔다.
“네?”
분위기를 파악해도 맞추고자 하는 의욕이 없는 케일리는 어째서 칭찬을 했는데 화를 내는지에 대해 합리적인 의문을 떠올리며 새빨갛게 물든 에드워드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금빛 머리칼 사이로 광기 어린 안광이 어둡게 빛났다.
그러고 보면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의 눈은 파란색이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빨간색이 된 걸까. 뱀파이어들은 컬러 렌즈가 필요 없을 것 같다는 아무래도 좋은 생각을 떠올리는 케일리를 향해, 에드워드가 빠득 이를 갈며 위협하듯 낮춘 목소리로 말했다.
“한 번만 더 그 이야기 꺼내면 네 조막만 한 새대가리에 수도꼭지를 박아서 물구나무 세운 다음 런던에 사는 뱀파이어를 죄다 모아놓고 콸콸 틀어버릴 거다, 알아들었냐?”
지옥에서 막 기어 나온 듯 바닥을 긁는 낮은 목소리와 이를 가는 소리가 하모니를 이뤘다. 케일리는 그가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고 뒤이어 금기의 단어를 입에 올렸다.
“이야기요? 아, 트와일라잇의 에드워드 닮았다는 말…….”
“아아아아아악!”
배를 잡고 끅끅대며 터진 웃음보를 주체하지 못하는 페어리조차, 이 파트너십의 미래는 결코 밝고 희망찰 수 없으리라 확신했다.
◇ ◆ ◇
발광하는 에드워드를 뒤로한 채 페어리는 사무실 한켠에 마련된 샤워실로 케일리를 안내했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일주일가량 길거리를 말 그대로 뒹굴거리며 지낸 케일리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그리 보기 좋은 꼴이 아니었다. 이미 계약서에 사인을 받은 페어리가 악취를 참고 있을 이유가 없어진 탓도 있다.
에드워드가 전 세계 십 대 소녀들에게 역병처럼 퍼진 뱀파이어 로맨스를 원망하는 사이, 케일리가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페어리가 건네준 여벌의 옷을 껴입은 케일리는 덜 말린 머리카락 탓일까, 어딘지 소년같이 앳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바닥에 뚝뚝 떨어지는 물 자국을 만들면서도 개의치 않는 그에게 어느 정도 적응한 듯 페어리가 샤워실에 들어가 새 수건을 꺼내 왔다.
“머리, 제대로 말려야죠.”
멀뚱멀뚱 눈만 끔뻑이는 케일리를 잠시간 내려다본 페어리는 순한 밤색 눈동자에 담긴 것이 왜 머리를 말려야 하냐는 의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어서 그것을 증명하듯 갸웃, 기울어지는 고개를 바라보며 페어리가 말없이 작은 머리통 위에 수건을 덮었다. 말로 해서 안 되면 행동을 하는 게 빠르다는 게 오랜 세월을 살아온 그의 지혜였다.
“케일리의 직원카드도 만들어야 하고, 에드워드의 파트너에게 맞춘 4주용 연수 프로그램을 따로 편성해야 하니 시간이 걸릴 겁니다. 보통 필드요원은 헤드 헌팅이나, 분기별 정기채용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미리 준비되어 있지만 케일리는 갑작스러운 충원이라 이쪽에서도 시간이 필요합니다.”
부드러운 손길로 푹 젖은 케일리의 머리카락에 수건을 몇 번 움직이자 거짓말처럼 물기가 사라졌다.
‘이런 것도 요정의 힘일까? 드라이기가 필요 없다는 점에서 차세대 에너지 혁명을 가져다줄 것 같네.’
여상히 생각하며 케일리는 좋은 향이 올라오는 앞머리를 만져보았다. 그러고 보니 벗어놓은 옷가지에서 올라오는 악취가 고약하기는 했다. 일주일 내내 맡아 후각이 마비되어 있었던 케일리는 샤워룸을 나오면서야 페어리와 에드워드가 왜 앞다투어 자신을 샤워실에 밀어 넣었는지 깨달은 참이었다.
“마침 9월 입사로 채용한 신규 필드요원의 연수가 진행 중이라, 케일리가 원한다면 같은 연수원에 숙소를 마련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신규요원의 경우 4주 연수에 통과하지 못하면 그대로 채용이 취소되고 -B 지구와 관련된 기억을 소거한 후 SIS로 인사이동 되는 게 보통입니다만, 케일리는…… 이미 우수한 파트너가 내정되어 있으니 그런 걱정은 없겠네요.”
자상한 목소리와는 달리 비웃음 담긴 시선이 파트너라는 말을 꺼낼 때마다 에드워드에게 머물렀다.
“연수원 말고도 숙소가 있나요?”
“말씀드린 것처럼, 필드 파트너십은 24시간 체제로 돌아갑니다. 당연히 에드워드와 같은 숙소를 사용하게 되죠. 연수원에 먼저 들어가고 싶다면 그것도 괜찮고, 어차피 머무르게 될 곳이니 숙소에 있고 싶으면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기숙사 같은 건가 봐요?”
“환경적인 부분만 생각하면 훨씬 낫죠. 이종족 필드요원의 경우 특성에 맞는 서포트가 경비선에서 모두 됩니다. 거주 환경도 포함해서요.”
똥 씹은 얼굴로 페어리의 옆에 서 있는 에드워드는 이미 마법으로 맺어진 계약서를 포기한 참이었다. 이러나저러나 뱀파이어에게 요정의 마법을 와해할 방법은 없었고 무슨 짓을 해서라도 케일리를 연수기간 중에 부적격으로 떨어뜨리는 게 최선이었다.
어차피 뭐 하나 제대로 할 것처럼 생기지도 않은 덜떨어진 인간이다. 자신의 집에 있는 냉장고 문만 열어도, 가득 찬 혈액 팩을 보고 질려 뱀파이어라는 게 얼마나 인간과 다른 스펙트럼인지 뼈저리게 느낀 후 겁을 집어먹을 게 분명했다.
그런 에드워드의 악의 가득한 계획을 알 바 없는 케일리는 현재 자신의 인맥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기숙학교 시절의 동기를 떠올리던 참이었다.
‘거기에는 레이튼이 없어서 불편한 점이 많았지. 그러고 보니 레이튼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
문득 일주일하고 대략 하루 전쯤의 레이튼을 떠올린 케일리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으로 본 레이튼은 저녁식사를 하는 자신의 접시에 자꾸만 굴을 담아주었다. 케일리는 가리는 음식이 거의 없었지만 물컹거리는 감촉 탓에 생굴을 싫어했다. 어린 시절부터 케일리를 보살핀 레이튼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럼, 에드워드의 숙소로 할게요.”
어쨌든, 케일리에게 있어서 모르는 예비 동료들보다 이미 정해진 파트너가 훨씬 친숙하다는 것만은 분명했기 때문에 그는 별다른 고민 없이 에드워드를 골랐다.
“그렇다고 합니다.”
에드워드의 라이프 포인트는 0에 수렴했다.
계획은 계획이고, 현실은 현실. 최소 4주는 저 인간을 데리고 살아야 한다는 스트레스에 기진맥진해진 에드워드가 페어리의 웃는 얼굴을 바라보며 가운뎃손가락을 올렸다.
‘그래, 하나로는 부족하지.’
곧이어 나머지 한 손이 합세했다.
“곧 저녁이고, 저는 퇴근 준비를 해야 하니 에드워드가 앞으로 묵게 될 숙소까지 안내해줄 겁니다. 에드워드?”
“알았어. 데리고 가면 되잖아.”
“케일리는 인간이니까 식사도 잘 챙겨야 합니다. 에드워드, 당신의 요구조건에 들어맞는 파트너가 케일리뿐이고 인사부에서 더 이상의 파트너를 구해올 수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으리라 믿어요.”
“이빨 그만 까고 일이나 하시지.”
평소 같았으면 이빨 이야기에 지랄 발광을 했을 페어리가 오늘만큼은 관대하게 그들을 보내주었다. 에드워드의 앞에 훤히 열린 고생문만으로도 사흘 밤낮이 다 뭔가, 300년은 매일같이 행복하게 지낼 자신이 있는 페어리였다.
사무실을 나오자 어깨를 움츠리고 에드워드의 시선을 피하는 인사부 채용과 직원들이 보였다. 그들의 사이를 지나 문을 나서자 어둡고 긴 복도가 이어졌다. 케일리는 별다른 말 없이 긴 다리를 휘적거리며 어디론가 걸어가는 에드워드의 뒤를 따라갔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에드워드는 자신의 옆모습을 아주 가끔, 뱀파이어의 예민한 감각으로나 겨우 느껴질 만큼 불명확한 시선이 느껴졌다. 만약 자신이 뱀파이어가 아니었더라면 눈치채지 못했을 조심스러운 시선이었다.
“뭐 할 말이라도 있냐?”
한참이나 그것을 무시한 에드워드가 결국 사나운 눈길로 제 옆의 작은 머리통에 시선을 옮겼다. 인간 사내, 케일리는 어딘지 놀랍다는 듯 아주 조금 눈동자를 움직였고 이내 설핏 웃으며 말끝을 흐렸다.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에요.”
보통 인간에게서 나는 냄새의 십분의 일이 겨우 될까 말까 한 희미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초면에야 어디 쓰레기장을 뒹군 듯 악취가 가득해 눈치채지 못했지만, 지금은 확신할 수 있었다.
케일리는 에드워드에게 있어서 썩 괜찮은 파트너가 아니었다. 페어리의 마법으로 고른 파트너니 어떻게 생각해도 좋은 방향으로 튈 리가 없기는 했지만.
“뭔데, 짜증나게. 하려면 하고, 아니면 그딴 식으로 쳐다보지 마.”
어떤 시선이든, 자신을 향한 모든 감정이 성가신 에드워드가 딱 자르자 케일리는 잠깐 고민하는가 싶더니 말했다.
“그럼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곧이곧대로 대답해줄 생각도 없었으나 내버려두는 것도 거슬렸다. 게다가 눈앞의 인간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태어나서 처음으로 요정과 뱀파이어, 그리고 조국을 비롯한 자신이 살아온 세계의 새로운 이면을 알게 되었다. 궁금한 게 많아야 정상이었다.
한번 해보라는 양 에드워드가 눈짓하자 몇 초간 뜸을 들이는가 싶던 케일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뱀파이어는 처녀의 피를 좋아한다던데, 여성 뱀파이어도 그런가요?”
“……뭐?”
“왜, 영화에서들요. 뱀파이어는 처녀의 피를 좋아한다고 하는데 여성 분들도 처녀의 피를 좋아한다는 건지, 아니면 인간 남자들 중에 쓰레기 같은 애들이 처녀만 좋아하는 것처럼 판타지를 가진 남성 뱀파이어가 그런 건지 늘 궁금했거든요.”
말하다 보니 생각났는데, 그러면 게이 뱀파이어들은 어떡하죠?
맑은 피가 좋으면 채식주의자를 선호할 것 같은데 그건 어떤가요?
사람들 식성처럼 걸쭉한 피를 좋아하는 뱀파이어도 있는 건가?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말까지 합쳐져, 에드워드는 피로가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페어리가 갑자기 불러내는 통에 식사 도중에 뛰쳐나와 목도 제대로 축이지 못한 참이었다. 빨리 집에 가서 한 팩 시원하게 들이켜야지 싶었다.
“처녀 안 좋아해. 동정도 안 좋아하고, 채식주의자도, 고기만 처먹는 놈들도 별로야.”
짜증 섞인 목소리로도 꼬박꼬박 돌아오는 대답에 케일리가 납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질문은 없었다. 정말로 그것만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몇 분을 더 걸어 복도의 끝에 다다랐고, 에드워드가 생체인식 키로 문을 열었다. 다음 순간 케일리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끝이 보이지 않는 층층과 계단으로 이어진 문, 문, 그리고 문이었다.
“-B 지구에서 필드요원의 숙소는 전부 여기로 이어져 있어. 네 생체정보가 등록된 문만 열 수 있으니 호수를 제대로 기억하도록.”
계단을 내려가 비슷비슷하게 생긴 문 앞을 조금 걷자 ‘-B F13V’라 적힌 문패가 나타났다. 그것을 가리키며 간략히 설명하는 에드워드에게 케일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나 생체인식 키로 문을 열자 문의 반대편에는 아주 조금 삭막하다는 것 외에는 그리 특별할 것 없는 실내가 펼쳐졌다.
“여기가 네가 당분간 지내게 될 숙소다.”
4주간의 연수에서 어떻게든 떨어뜨려주겠다고 다짐한 에드워드가 쪼잔한 조건을 붙여 설명했다. 한 걸음 앞서 문 너머로 걸음을 옮기던 에드워드는 특유의 흐릿한 표정으로 끝없이 이어진 문을 가만히 구경하는 케일리를 재촉했다.
“안 들어오고 뭐 해?”
느린 동작으로 에드워드를 향해 고개를 돌린 케일리가 조금 웃었다.
“여기, 좀 몬스터 주식회사 같아서 재미있다고 생각했어요.”
다들 생각은 하지만 저작권 때문에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한마디였다.
그렇게 별다른 미련 없이 에드워드의 숙소에 발을 들이는 케일리의 얼굴에 재미있어 보이는 기색이라곤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가 없었다.
◇ ◆ ◇
같은 시각, 로체스터 공작가의 대저택.
자선행사에서 돌아온 로체스터 공작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안절부절못하고 휴대전화에 대고 큰소리를 내는 레이튼의 모습이었다. 수십 년을 로체스터 가의 집사로 일하면서도 레이튼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것을 몇 번 보지 못한 공작은 눈을 가늘게 뜨고 노집사에게 다가갔다.
레이튼은 노련한 집사였고, 그가 감정의 동요를 숨기지 못할 만한 상황이란 그리 좋지 않은 것임이 뻔했다. 게다가 지금 로체스터 가에는 굳이 머리를 써 추리하지 않아도 충분히 산출할 수 있을 만큼 확실한 문젯거리가 있었다.
“케일리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겼는가?”
요 근래 런던 거리에서 절찬리 홈리스 생활에 심취해 있다던 둘째 아들의 소식을 매일같이 보고받고 있던 공작이었다.
그래 봤자 케일리처럼 비공격적이고 의욕 없는 홈리스 생활에서 다른 사람과 육체적인 트러블이 발생할 확률은 희박했다. 이쯤이면 슬슬 배를 곯겠구나 정도가 그의 걱정거리였다. 레이튼이 목소리를 높일 만한 일이 케일리에게 일어날 것이라는 생각 자체가 괜한 걱정이라는 것을 로체스터 공작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파랗다 못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입술을 깨문 노집사의 떨리는 목소리의 의미를 곧바로 이해할 수 없었다.
“사라졌습니다.”
“음……?”
“케, 케일리 도련님께서 감시를 따돌리고 감쪽같이 모습을 감추셨습니다. 주인어른, 이 일을 어찌해야 좋을지…….”
일곱 번째 사업을 말아먹은 후 가출한 막내아들에게는 감시를 따돌릴 정도의 적극적인 능력이 없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두 남자의 표정에 위기감이 번졌다. 로체스터 가의 가출한 아들이 실종된 아들로 진화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