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41)

#Mission2. Who are you? (1)

“목이 마르군.”

목소리에서 기분이 드러난다면 아마 에드워드의 현재 상태는 매우 지쳤음이라는 피켓이 어울릴 것이다. 축 처진 어깨로 어두운 복도를 빠져나가자, 집 주인의 취향을 드러내듯 가구가 적은 거실 왼편에는 확 트인 아일랜드식 주방이 이어져 있었다.

거실 오른편이 통유리로 되어 바깥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일 인테리어가 무색하게, 이중으로 된 암막커튼 탓에 밤인지 낮인지도 분간이 가지 않았다.

케일리의 체감상 공중전화 부스를 찾았던 즈음 근처에서 일하던 증권맨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으니 그때가 대충 점심시간이었을 테다. 거기에 가스로 인해 기절해 있던 시간을 한두 시간으로 더하면 슬슬 해가 질 무렵으로 계산이 들어맞았다.

에드워드를 따라 문을 닫고 복도를 건넌 케일리가 힐끗 뒤를 돌아보자 -B 지구로부터 이어져 있던 문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저 문은 섬나라 우방국에서 유명한 22세기에서 온 파란 너구리 로봇의 사차원 주머니에서 꺼내기라도 한 걸까. 아니면 22세기로부터 온 파란 너구리 로봇이 사실은 현실을 기반으로 한 이야기였던 걸까.

세계에서 세 번째 정도로 유명할 공상 로봇의 땅딸막한 외관을 떠올리며 케일리가 에드워드의 뒤를 따라갔다.

복도를 건너 조금 걷자 발치에서 도도도, 자그마한 발소리가 들렸다. 에드워드의 몸에 가려 무언가 다가왔다는 사실밖에 파악하지 못한 케일리가 배꼼 고개를 내미는 사이, 익숙한 동작으로 허리를 숙인 에드워드가 몸을 일으켰다. 일어선 그의 손에는 검붉은 액체가 담긴 팩이 들려 있었다.

“이분은 누구신가요?”

케일리가 가리킨 것은 에드워드에게 주스 팩을 건네준 땅딸막한 생명체였다.

그-혹은 그녀-는 얼굴의 삼분의 일 정도를 차지하는 커다랗고 동그란 눈동자를 두어 번 깜빡이는가 싶더니 쪼르르 주방을 향해 달려갔다. 뒷모습으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그 생명체가 빨간 땡땡이 무늬가 박힌 눈 아픈 크리스마스 고깔모자를 뒤집어쓰고 있다는 정도였다.

에드워드의 허벅지에 거우 머리가 닿을 그것은 주방에서 부스럭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흔적 하나 없이 조용해졌다. 아마도 에드워드에게 주스 팩을 전달하기 위해 모습을 드러낸 모양이었다.

“집요정.”

팩에 붙어 있는 빨대를 뜯어 꽂은 에드워드가 성의 없이 대답했다. 집요정……. 영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그 단어를 되짚으며 케일리는 잠시간 조용해진 주방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다른 사람의 저택에 방문했을 때 보았던 사용인과는 동떨어진 외관이었다. 게다가 일 미터가 채 되지 않을 만큼 작은 데다 뱀파이어인 에드워드가 아이를 키울 것 같지는 않으니 진짜 집요정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집요정의 존재를 깔끔하게 납득한 케일리에게 다른 의문이 생겼다. 그가 알고 있는 집요정은 대개 집안일을 대신 해주고 장난을 치고 가는 페어리 테일에 등장하거나, 혹은 2000년대 판타지 업계를 휘어잡은 포터 일가의 대단한 일생 이야기를 위시한 노예근성 투철한 생명체의 이미지였다.

그중에서도 가사를 꼽자면 식사와 청소, 빨래가 될 텐데 현대에는 그런 것들을 대신 해주는 가사도우미라는 직종이 집요정을 대체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평범한 식사를 하지 않을 뱀파이어에게 그다지 효용성 있는 존재가 아닐 것 같았다.

“뱀파이어한테 집요정이 필요한가요?”

어느새 빨대를 꽂아 쭉쭉 빨아먹는 주스의 색은 검붉은 핏빛이었다. 미간을 찌푸린 채 그것을 빨아들이는 입의 주인이 뱀파이어라는 것을 상기하지 않아도 충분히 그로테스크한 장면이었다.

그럼에도 케일리는 별다른 동요 없이 질문을 던진 후 가만히 대답을 기다렸다. 에드워드가 단번에 팩 하나를 동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주방에서 달려 나온 집요정이 두 손을 내밀었다. 비쩍 마른 손 위에 빈 주스 팩을 건네며 에드워드는 귀찮은 얼굴로 간략히 대답했다.

“쟤는 내 집요정이 아니라 우리 가문의 집요정.”

가문…….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에 케일리가 잠시간 침묵했다. 혹시 에드워드가 사는 영국의 킹스 크로스 역에는 9와 3/4 승강장도 존재하는 게 아닐까.

아주 잠깐 그답지 않게 꿈과 희망이 넘치는 생각을 해보았으나 당연하게도 금세 머릿속에서 흐릿해졌다. 그런 승강장이 있든 없든 킹스 크로스 역까지 가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테니 아무래도 좋았다. 그보다, 귀찮지만 달고 있어야 하는 가문의 사용인이라고 하면 케일리에게도 두엇 생각나는 얼굴이 있다.

인간이나 뱀파이어나 사는 모습은 그게 그거로구나.

에드워드가 들었으면 기함할 생각을 아무렇지 않게 떠올리던 케일리가 문득 주방으로 돌아가 부스럭거리는 집요정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일반 가정집보다는 정육점 창고에 놓이는 것이 훨씬 어울릴 철제 냉장고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흡사 헌혈 트럭 하나를 통째로 옮겨놓은 양 차곡차곡 수납된 검은 팩 속에서 하나를 집어 든 집요정이 에드워드에게 다가와서 그것을 내밀었다. 순순히 두 번째 혈액 팩을 넘겨받은 에드워드는 다시 주방으로 사라지는 집요정을 눈짓하며 케일리를 향해 말했다.

“봐, 저 새끼는 저렇게 순진한 얼굴로 내가 정량을 다 처먹을 때까지 절대 안 놔준다고. 내 집요정이었으면 당장 옷을 던져버렸을 텐데.”

“옷은 왜 던져요?”

“됐다고 말을 해도 귓등으로도 안 들어 처먹는 집요정은 잘라버려야지.”

“그렇게 마음에 안 들면 옷을 던지면 되는 거 아닌가요?”

“저건 내 집요정이 아니라니까.”

“하지만 여기는 에드워드의 집이잖아요?”

케일리의 질문은 지극히 논리적인 귀결이었지만, 에드워드에게 있어서는 그저 무능함을 타박하는 것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집요정은 순박하고 가련해 보이는 외견에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마법을 지니고 있었다. 뱀파이어도 쉽게 당해낼 수 없을 만큼 강력한 것이었다.

에드워드 또한 과거 저 망할 집요정을 떼어내기 위해 별의별 수단을 다 썼지만-심지어 무력까지 동원할 정도로 진지했다.- 모조리 실패했다.

실패한 전적이 손가락으로는 더 이상 꼽을 수 없을 만큼 많아졌을 즈음, 집요정의 강력한 마법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고 있는 자들은 하나같이 그의 도주행위를 비웃어댔다. 그래서 포기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게 있다는 걸 인정하는 건 정말이지 더러운 기분이었다.

“넌 일단 연수나 받고 와라. 그래야 대화가 좀 진행될 것 같다.”

자신이 집요정의 마법에 대항할 수 없다는 현실을 제 입으로 설명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에드워드는 두 번째 혈액 팩에 빨대를 꽂으며 대화 주제를 바꾸기로 했다.

당분간 함께 지내야 한다고는 해도 지금까지와 달라지는 건 따지고 보면 별로 없었다. 이 맹탕스러운 인간 사내놈이 이종족들의 신체능력으로도 버티기 힘든 연수를 따라올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당분간이라는 전제 하에 케일리의 존재를 어느 정도 납득한 에드워드가 거실을 지나쳐 반대편 복도를 따라 걸었다. 복도 끄트머리의 방문을 연 에드워드는 여전히 주방을 기웃거리는 케일리에게 손짓했다.

“여기가 네 방.”

그곳에는 거실과 크게 다를 바 없이 삭막한 정경이 펼쳐져 있었다. 잘 개켜진 시트 위에 베개가 놓여 있는 침대가 하나, 그리고 아무것도 놓여 있지 않은 책상과 사무용 의자가 하나.

비즈니스호텔이 이보다 호화롭겠다 싶을 정도였지만 최근 길거리에서 박스 몇 개를 얼기설기 붙여 지냈고 주어진 방에 침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냥 기뻤다.

“침대가 있네요!”

그답지 않게 얼굴에 드러나게 즐거운 표정이 떠올랐고, 에드워드는 별것 아닌 침대 하나가 그렇게 기쁠 만한 일인지 잠시간 고민했다. 하지만 케일리가 처음 거지꼴로 나타났던 것을 상기하자 홈리스에게 집이 생겼으니 기쁠 만도 하지, 납득했다.

거지꼴을 하고 길거리를 어슬렁거리느니 살풍경하나마 지붕 밑에서 비 피할 수 있고 푹신한 침대에 몸 뉘일 수 있는 게 좋은 건 당연했다.

케일리가 최근 자신의 총 자산의 일곱 배 정도 되는 회사 하나를 깔끔하게 도산시켰다는 사실을 모르는 에드워드의 순진한 결론이었다.

“여기에 사람이 먹을 만한 건 액상 철분제밖에 없으니까 식사가 필요하면 로라, 집요정한테 말하고.”

에드워드가 지칭한 액상 철분제 한 팩이 또다시 바닥을 드러낸 참이다. 쪼글쪼글해진 팩을 커다란 손으로 구겨 쥔 에드워드가 이야기가 끝났다는 듯 뒤돌아선 순간, 방 안으로 들어가다 말고 케일리가 물음을 던졌다.

“그거, 맛있나요?”

케일리가 오기 몇 번 전의 파트너였던 라이칸에게도 같은 질문을 들었던 기억이 있었다.

뱀파이어가 흡혈을 하는 이유는 그게 움직이기 에너지를 습득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생명활동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인간이 그저 생명활동을 위한 행위인 식생활 안에서 맛을 즐기거나 향을 즐기기도 하는 것처럼, 뱀파이어에게도 미식이라는 개념이 있었다.

모든 뱀파이어가 미식가인 것은 아니나, 미식가인 뱀파이어도 있다는 정도의 개념이었다. 그중에서도 에드워드가 마시는 혈액 팩의 내용물은 말하자면 공장제 레토르트 식품과 같은 분류나 다름없었다. 신선함이라고는 혀를 씻고 찾아도 느껴지지 않는 데다 부패 방지를 위한 약품가공까지 끝난 저급식량이었다.

“혀를 망치는 적선의 맛이지.”

에드워드는 수혈 팩에서 느껴지는 감정의 잔재를 가장 싫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득불 수혈 팩만 찾는 데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다. 그는 살아 있는 생물에게서 흡혈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위선을 조미료로 한 적선의 맛이 참을 만할 정도로 아주 싫어했다. 살아 있는 대상의 피는 속이 뒤집어질 만큼 역겨운 맛이었으니 차라리 적선을 참고 마시는 게 나았다.

짜증스럽게 대답하는 에드워드를 향해 케일리가 느릿느릿 눈을 깜빡이며 잠시간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고개를 기울였다.

“적선이라는 게 맛의 종류였나요?”

“아니.”

“그럼 왜 맛이라고 하는 거죠?”

“내 능력이 그거라서.”

“맛을 느끼는 거요?”

“아니, 멍청아. 감정을 읽는 거.”

“아하…….”

드디어 연결이 된 에드워드의 이야기에 케일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자발적으로 피를 나눠주는 사람들의 감정이 혈액에서 느껴진다면 그것을 마시는 에드워드가 적선의 맛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그럴듯했다. 물론 헌혈을 한 이들은 자신의 혈액이 이런 식으로 사용되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겠지만.

“게다가 이건 수혈용으로 쓸 수 없어진 폐기물이라고. 가끔 동물 피도 섞여 있어. 동물만 섞이면 그나마 다행이지, 재수 옴 붙은 날에는 망할 이종족들의 피까지…….”

그의 짜증과 분노를 드러내듯 꽉 움켜쥔 혈액 팩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거기에 찍힌 로고가 자신이 사인한 근로계약서의 것과 같다는 사실을 깨달은 케일리는 열심히 일하고 지급받은 식량이 폐기물이라는 것이 언뜻 딱하게 느껴졌다.

그 또한 미식에 취미를 둔 적은 없었지만, 어차피 먹는 거라면 맛없는 것보다는 맛있는 것을 먹고 싶었다. 뱀파이어라고 해서 다를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게 맛이 없으면 다른 피를 먹으면 되잖아요? 더 맛있는…… 즐거운, 피라든지?”

혈액에서 감정이 맛으로 느껴진다는 것은 혈액원, 즉 제공자의 감정이 맛에 영향을 끼친다는 뜻인 것 같았다. 하지만 어떤 감정이 맛있는 감정인지까지는 와 닿지 않았다. 적선이 혀를 망치는 맛이라고 하면, 아무래도 즐겁거나 기쁘고 행복한 감정이 맛있는 종류가 아닐까. 그렇게 짐작해볼 뿐이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네 루머, 그거 네가 퍼트린 거지?”

그런 케일리의 물음에 에드워드가 미간을 찌푸리며 툭 내뱉었다. 뜬금없이 튀어나온 프랑스 여자의 이름에 케일리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건 또 무슨 말일까 생각에 잠겼다.

“루머라고 하면……?”

아무래도 짚이는 구석이 없었다. 그런 케일리의 반응에 에드워드는 자신의 농담이 통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소 서글퍼졌다. 이런 걸 두고 제너레이션 갭이라고 부르는 건지, 아니면 눈앞의 인간이 유난히 무식한 건지 모르겠다. 후자면 좋으련만.

나이를 세면 세 자릿수가 되는 에드워드는 설명이 필요한 농담은 실패한 농담이라는 안타까운 사실을 되뇌며 세대 차이의 무서움을 곱씹었다.

“그, 왜 그거 있잖아.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된다는…… 됐고, 그게 그렇게 쉬운 문제면 내가 머저리같이 이러고 있을 것 같아?”

에드워드의 능력은 뱀파이어들 사이에서도 특수한 편이었다. 정신계 능력을 가진 뱀파이어 자체가 소수인 것뿐만 아니라, 그 능력이 흡혈행위 자체에 영향을 미치는 케이스 또한 드물었다.

물론 에드워드처럼 감정을 읽거나 조정하는 데 특화된 뱀파이어가 아예 없는 것이 아니었다. 때문에 그가 흡혈을 대신해 혈액 팩을 마시는 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평범한 편식에 가까웠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다른 뱀파이어들 대부분이 에드워드를 향해 어린놈이 배가 불러서 제 몸을 망친다며 손가락질했다. 소수의 뱀파이어는 그놈 참 까다로운 입맛이라며 신기해하기도 했지만 보통은 비웃었다.

에드워드는 흡혈이 불가능한 게 아니라, 그저 지나치게 까다로운 입맛을 가진 뱀파이어일 뿐이었다. 스스로는 뱀파이어 계의 채식주의자라며 우기고 다녔지만 실상은 동족들 사이에서도 공공연하게 미친놈 취급을 받는 희대의 편식가였다.

물론 에드워드 또한 동족들을 올바른 눈으로 쳐다보는 건 아니었다. 처녀의 피든, 유부녀의 피든, 총각의 피든, 유부남의 피든 살아 있는 피라면 온갖 핑계를 붙여 입에 대지도 않으려 드는 에드워드였다. 입맛 까다로운 그의 입장에서 보면 입에 넣을 수만 있다면 하수 처리장의 똥물이라도 마시는 미개한 동족들이 되었으니 서로를 향한 인식이 개판인건 피차일반이다

다른 뱀파이어들로 말할 것 같으면, 몇 안 되는 순혈이 이상 식성으로 폐기 수혈 팩이나 주워 먹는 꼴을 수치스럽게 여겼다. 에드워드가 -B 지구 유일무이한 뱀파이어 요원인 데에는 그런 이유가 포함되어 있었다. 동족들에게 병신 취급을 받으며 비웃음이나 당하느니, 이민국과 손을 잡고 편의를 제공받는 것이 훨씬 나았다.

‘그 망할 놈의 이빨 요정만 아니었더라면 훨씬 만족도 높은 직장이었을 텐데…….’라고 생각하며 에드워드는 오늘도 변치 않고 자신을 엿 먹인 분홍빛 이빨 요정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그러면 제 피라도 드실래요?”

그런 에드워드를 향해 케일리가 무언가 좋은 생각이라도 난 것처럼 아, 나지막한 탄성과 함께 제안했다. 순간 자신이 뭘 잘못 들었나 싶어 귀를 의심했지만 뱀파이어의 청력은 인간에 견줄 수 없을 만큼 뛰어났다. 인간의 네다섯 배를 듣는다는 개보다도 뛰어난 청력이 뭘 잘못 들을 리가 없었다.

뱀파이어다 보니 정체를 알게 된 상대에게 피를 빨아달라는 유혹은 셀 수 없이 겪어온 에드워드였다. 하지만 그걸 길거리 푸드 트럭에서 파는 소시지 핫도그 정도로 권하는 인간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에드워드는 일순 무어라 반응해야 할지 고민했다.

케일리는 웃는 것, 우는 것도, 싸늘하지도, 그렇다고 멍하지도 않은 특유의 표정 없는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에드워드는 온순해 보이는 밤색 눈에서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그가 가진 순혈 뱀파이어로서의 능력은 자아가 있는 모든 생물의 감정을 읽는 것이었다. 대개의 경우 눈을 마주치기만 해도 흘러들어왔고 그 정도에 영향을 받을 만큼 약한 정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에드워드는 감정을 읽는 능력을 굳이 제어하지 않고 내버려뒀다.

그러니 케일리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꺼냈는지도 자연히 흘러들어와야 했는데, 아무것도 느껴지는 게 없었다. 정말로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있거나, 자신보다 상위의 정신능력을 가졌다는 것 외에는 그럴듯한 이유가 없었다. 어느 쪽이든 환영할 만한 이유는 아니다.

인간들 사이에는 뱀파이어에게 흡혈을 당하면 뱀파이어가 된다는 통설이 있었다. 생각 없이 인간임을 포기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건 생각을 하고 포기하려는 인간보다 대하기 까다롭다. 일단, 그런 어이없는 판단을 내리는 인간을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다는 점에서 그러했다.

“너, 오래 살고 싶냐?”

감정을 읽지 못했다고 해서 아무것도 짐작할 수 없는 건 아니었다. 보통의 인간들이 그러하듯 표정이나 눈빛, 어투, 사용하는 단어와 몸짓 같은 사소한 것들 또한 입을 대신해 많은 것을 말했다.

에드워드는 몸짓을 읽어내는 데에도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허울 좋은 말을 주고받으며 파워게임을 하는 것에 취미가 없었기 때문에, 대개 직설적인 화법을 구사하기는 했지만 말이었다.

케일리를 향해 그런 물음을 던진 것은, 너도 혹시 뱀파이어가 되고 싶냐는 완곡적인 물음이었다. 에드워드가 지금껏 경험한 흡혈 요구자들의 목적을 상기하면 그리 핀트가 엇나간 물음은 아니었다. 상대방이 케일리만 아니었다면, 그러했을 테다.

진지하게 생각에 잠긴 케일리가 입을 다물고 흠, 고민했다. 그 반응이 에드워드를 다소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만약 그가 다른 인간들처럼 자신의 권속이 되고자 한 것이라면 의도를 꿰뚫린 것에 조금쯤 당황해야 옳았다. 지나치게 뻔뻔해서 당황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는 것뿐이라고 해도 눈앞에서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는 건 예상 밖의 반응이다.

그렇게 잠시간 침묵에 잠겼던 케일리는 더 이상 되짚을 기억이 없는 것처럼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것도 안 하면서 편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은 많이 하지만, 오래 살고자 한 적은 없는 것 같네요.”

대단히 진지하게도, 스스로의 나태함을 근거로 에드워드의 물음을 부정한 그 대답에서는 농담을 하는 기색도 없었다.

“뱀파이어한테 흡혈을 청하는 건……, 널 내 권속으로 만들어달라는 것과 같은 뜻이다.”

에드워드가 어딘지 피곤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어딘지 서늘한 시선을 보내오는 그를 향해 케일리는 잠시간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자신의 어휘력으로는 짐작할 수 없는 단어라고 생각했는지 에드워드에게 질문했다.

“흠, 그 권속이라는 게 정확히 뭔가요? 되면 많이 불편한가 봐요?”

케일리의 물음은 만약 불편한 게 아니라면 자신의 피를 얼마든지 마셔도 좋다는 것처럼 들렸다. 차라리 빤히 보이는 수작이라면 쉬울 뻔했다. 뱀파이어의 권속이 된 자는 숙주 뱀파이어가 소멸하지 않는 한, 명을 함께한다. 즉, 불로불사의 육체를 손에 넣게 되는 것이다. 권속이 된다는 건 불편함이 아니라 편리의 궁극적인 형태에 가까웠다.

어떤 점에서 보면 불편함만이 걸림돌인 것처럼 말하는 인간이라면 실상을 알고 나서 좋아 달려들 것 같기는 했다. 하지만 그는 권속은커녕 뱀파이어에 대해서도 아는 게 없는 기색이었다. 아마 실제로도 별로 아는 게 없을 테다. 그렇다면 그냥 생각이 없는 것뿐인 걸까.

아무리 생각이 없다지만 적십자에 헌혈을 하는 것도 아니고, 뱀파이어에게 피를 내어준다는 건 이종족인 에드워드가 생각하기에도 이미 상식의 은하계를 벗어난 일처럼 느껴졌다. 대체 이 인간은 뭔가 싶어 눈을 가늘게 뜨고 마주하던 에드워드의 머릿속에 한 가지 가능성이 스쳤다.

수세기 전 남아시아 카필라 왕국의 왕자는 삶은 고통이라는 개똥철학을 굳게 믿으며 길을 떠나 셀 수 없이 많은 인간들을 대머리로 만들었다. 어쩌면 케일리는 그 카필라의 왕자와 같은 사상을 가진 종교인일지도 몰랐다.

인간들과 비교하면 제법 긴 기억 속에서도 그 독특한 종교인들은 욕심을 버리고 깨달음을 얻어 번뇌에서 벗어나는 경지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는데, 어떤 면에서 케일리의 태도가 그와 비슷했다.

아니……, 사실은 그것도 아니었다. 놈들이었다면 아마 그 사소한 불편함마저 감수해 마땅할 제 몫의 짐으로 여겼을 테니 말이다.

저 인간은 많이 불편하지 않다면, 뱀파이어의 권속이 되든 말든 상관없이 제 피를 제공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걸까?

미간을 좁히며 그렇게 생각한 에드워드는 케일리가 자신의 식생활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를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본인의 목숨이 걸린 일에도 별다른 의문이 없던 케일리를 보고 호기심이 많아서 궁금해하는구나 납득할 정도로 에드워드는 단순하지 않았다.

“대체 그게 왜 궁금한데?”

질문을 던지는 에드워드에 케일리가 잠시간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조금 더 빠르게 대답을 돌렸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열심히 일한 대가가 고작해야 음식물 쓰레기라는 건 너무 하잖아요. 사실 지금껏 살면서 먹는 고민을 해본 적은 없었는데, 최근에 이런저런 일이 있었어요. 덕분에 배가 고프면 곰팡이 핀 빵 같은 것도 먹을 만하게 느껴진다는 걸 알게 됐죠.”

에드워드는 그가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게 먹을 만했다기보다는, 그것밖에 먹을 게 없으니까 그렇게라도 생각해야 했죠.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먹을 게 눈앞에 있는데 못 먹을 걸 먹는 게 불합리하게 느껴졌어요.”

스스로를 ‘먹을 것’으로 표현하며, 에드워드가 잘 먹고 있는 혈액 팩을 ‘못 먹을 것’ 취급하는 케일리의 어조는 지금까지와 별반 다를 바 없이 평이로웠다. 세계포커대회에서도 흠잡힐 바 없을 만큼 완벽한 포커페이스와 셀프컨트롤 능력을 지닌 것이 아니라면, 그건 입에 발린 말이 아닌 그의 진심일 테다.

방금 전까지 길바닥에 굴러다니던 홈리스에게 식생활을 지적 받는 것이 아이러니 하다고 느끼는 건 에드워드가 지나치게 인간들의 사회에 물이 든 탓일지도 몰랐다.

“권속이 된다는 건 네 존재를 포기하겠다는 자살선언이나 다름없어, 이 멍청한 인간아. 너는 적선하듯 식량이 되어주겠다는 알량한 결정으로 네 명에 죽지도 못하는 노예가 되고 싶은 건가 보지?”

사실 반 정도는 거짓말이었다. 한두 번 흡혈을 당하는 것만으로 권속이 된다면, 머지않아 지구에는 뱀파이어와 뱀파이어의 권속만 남게 될 것이었다.

허나 케일리의 의도가 알량한 동정심이든, 진심에서 우러난 불합리함에 대한 저항이든 에드워드가 신경 쓸 바는 아니었다. 그가 흡혈을 하지 않는 이유는 전반적으로 그것이 아주 더럽게 맛이 없다는 이유뿐이었으며, 대개 살아 있는 것들은 흡혈을 당하며 같은 맛을 띤다.

탐욕과 복종, 그리고 욕망을 담은 천박한 맛. 에드워드가 조절할 수도, 피식자가 조절할 수도 없는 자연스러운 감정의 맛이 역겹게만 느껴지는 한 그가 케일리를 먹이로 여길 일은 결코 벌어지지 않을 것이었다.

다소 차갑게 흘러나온 에드워드의 비아냥거림이 섞인 목소리에 케일리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에드워드는……, 자상한 뱀파이어로군요.”

평소에도 인간과 교류하는 것을 즐기지는 않는 에드워드였지만, 대체로 그 생태를 이해하고 있다고 자부했었다. 아마도 스스로의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뭘 어떻게 보면 그게 그렇게 되는 거지?”

자신이 알고 있던 단어의 정의가 바뀐 게 아니라면, 자상이란 ‘자살하고 싶은 거냐, 멍청아?’라는 말을 수식해서는 안 됐다.

이빨 요정의 계약서에 아무렇지 않게 사인이나 휘갈기고, 저가 취직한 곳이 공공기관인지를 궁금해하던 때부터 뇌에 중요한 것 몇 가지를 빼놓고 사는 것 같다 싶기는 했지만, 설마하니 언어중추에까지 문제가 있었을 줄이야.

“아, 이 경우에는 자상함보다는 사려 깊다는 표현이 어울릴까요?”

에드워드의 격한 반응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말을 바꾸기는 했는데 여전히 핀트가 어긋나 있었다.

”보통 사람들은 소나 돼지나 닭이 피식되는 것에 대해 그런 질문을 던져주지는 않죠. 가끔 가다 특이한 사람들이 그들을 일방적으로 동정하기는 하겠죠.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 피식당할 것인지에 대한 선택권을 주는 건 아니잖아요?”

이어서 흘러나온 케일리의 설명에 그게 어떤 논리에서 나온 말인지는 이해가 됐다. 그렇다고 해서 그게 맞는 이야기가 되는 것도 아니었지만.

“너흰 애초에 걔들이랑 대화가 안 되잖아!”

“아, 그것도 그러네요.”

게다가 방금 전까지 잘도 조잘거리던 본인의 어이없는 주장에 별다른 미련도 없어 보였다.

“됐다, 됐어. 내가 이런 것만 주워 먹는 건 그나마 먹을 만한 게 이것밖에 없어서 그런 거지, 제대로 된 먹을거리를 꿍쳐두고 이상한 것만 찾아 먹는 게 아니니까 쓸데없는 착각 마.”

“그런가요?”

“그래. 난 이래 봬도 미식가라고. 쓰레기보다 맛없는 피를 빨아먹을 정도라면, 차라리 공장제 폐기물을 먹는 게 훨씬 낫다 그 말이야.”

“그렇군요, 미식가라면 하는 수 없네요.”

어떤 멍청한 미식가가 거나한 편식으로 레토르트에 귀결하냐는 비웃음에 익숙한 에드워드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하는 케일리에 맥이 탁 빠졌다.

더 이상 말을 섞을 기력도 없었다. 뱀파이어인 덕분에 육체적으로는 언제나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컨디션을 유지했지만, 정신이 피곤했다. 결국 에드워드는 케일리를 방에 밀어 넣고 문을 닫아버렸다.

자정 이후에도 임무가 잡혀 있었기 때문에 쉴 수 있을 때 몸을 쉬는 게 좋았다. 며칠 휴식을 취하지 않는다고 해서 당장 눈에 보이는 문제가 일어날 만큼 허약한 육체는 아니었지만, 다른 뱀파이어들에 비할 바는 못 되었다. 식생활이 부실하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입맛을 이유로 사활을 건 편식생활을 고수하는 에드워드에게 있어서 인간에 가까운 생체리듬으로 살아가는 생활은 이미 익숙한 것이었다. 그걸 지켜보며 배를 잡고 비웃는 동족들이 거슬렸지만 거기까지는 어쩔 도리가 없다.

이미 계약마법으로 묶인 마당에 후회해봤자 뭐가 남겠냐마는, 에드워드는 진심으로 케일리가 연수에서 떨어지기를 바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케일리는 자신과 상성이 좋은 상대가 아니었다.

지금껏 상성이 좋았던 파트너가 있었던 기억이 없다는 점을 무시하고서라도, 이 홈리스 인간이 그 첫 번째 타자가 될 수 없을 거라는 사실만은 단언할 수 있었다.

자신의 능력으로도 감정을 읽어낼 수 없는 인간이라니. 종족을 불문하고 통하는 능력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케일리에게 능력이 통하는 게 아니라 그가 진짜로 아무런 생각이 없다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오늘 처음 뱀파이어를 봤고, 오늘 처음 요정의 존재를 알게 된 인간에게 뱀파이어의 능력을 방어할 수단이 있을 리 없다.

에드워드는 본디 타인의 생각이나 감정에 크게 관심을 가지는 편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상대해야만 하는 상대를 어느 하나 예측할 수 없다는 건 정말이지 짜증나는 일이었다.

케일리의 특징을 하나씩 풀어놓으면, 그 자신이 페어리에게 요구했던 ‘청결하고 목숨 아끼느라 빌빌거리지 않는 성격에 자신에게 절대로 반하지 않고 영생에도 미련 없는 좀 덜떨어졌지만 가르치면 데리고 다닐 만한 녀석’이 된다는 사실을 에드워드는 이미 머릿속에서 하얗게 날려버린 후였다.

그는 실제로 영생에 미련이 없는 데다가, 조건이 된다면 청결함을 유지하도록 몸가짐에 대한 교육을 철저히 받았으며, 목숨의 소중함을 다른 대부분의 것들과 비슷한 위치에 놓아두는 대범함까지 지닌 완벽한 파트너였다.

목숨을 아끼지 않는 만큼 생에 미련이 없다는 점과, 야망은커녕 꿈도 희망도 없다는 부분을 제외하면 대단히 쓸 만한 인재이기도 했다.

문제는 에드워드가 그런 조건을 내건 이유가, 애초에 그런 놈이 세상에 존재할 리가 없다는 가정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허나 그 환상의 레플리콘이 눈앞에 나타난 이상 그는 내뱉은 말을 지켜야 했다.

말이라기보다는 페어리의 마법계약을 강제로 이행하게 된 것이기는 했지만.

◇ ◆ ◇

며칠의 시간이 평온하게 흘러갔다.

낮 시간의 에드워드는 제 방에 틀어박혀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다. 가끔 로라가 혈액 팩을 가져다줄 때가 아니면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다 밤이 되면 복도 끄트머리의 문을 통해 외출을 나갔다. 돌아오는 시간에는 대중이 없었지만, 어느 날에는 늦은 아침인가 하면 또 어느 날에는 아침에 일어나보니 이미 돌아와 있는 때도 있었다.

케일리로 말할 것 같으면, 연수를 위한 사전준비가 끝날 때까지는 숙소에서 대기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끼니때를 놓치지 않고 꼬박꼬박 챙겨주는 로라의 요리는 대단히 훌륭했으며, 서재의 책을 하나씩 꺼내 보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짧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여유를 만끽하는 게 얼마만의 일인지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오늘도 단조로운 하루를 마치고 침대에 들어간 케일리가 문득 몸을 일으켰다.

화장실에 가고 싶었다. 요의에 의해 잠에서 깬 케일리는 방금 일어난 사람 같지 않게 말끔한 얼굴을 하고 방문을 열었다. 단정한 걸음으로 복도를 지나 거실에 도착한 그가 걸음을 멈췄다.

방문을 열고 오른쪽으로 돌아 스무 걸음을 걸으면 화장실이 있어야 했다. 어릴 적부터 사용하던 저택의 3층 화장실은 눈을 감고도 찾아갈 수 있을 만큼 빤했다.

화장실, 화장실이 대관절 어디로 사라진 걸까……?

잠에 취한 정신으로 엉뚱한 생각을 품은 케일리가 느긋한 성격답지 않게 걸음을 재촉해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아랫도리 용무가 급하다 보니 머리보다 먼저 몸이 움직인 탓이다. 땅으로 꺼졌는지 하늘로 솟았는지 모를 화장실을 찾기 위해서는 문이란 문을 모조리 열어보는 게 빠를 것 같았다. 그렇게 판단한 케일리가 자신의 방에서부터 가까운 문을 차례대로 열기 시작했다.

“여기는 아니고, 여기도 아니네…….”

잡동사니가 가득한 창고와 제법 그럴싸한 서재, 잘 정리된 드레스 룸을 비롯해 침대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는 살풍경한 침실까지 지나쳤지만 그중 화장실은 없었다. 샤워부스나 욕실조차 눈을 씻고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케일리는 가볍게 절망에 빠졌다.

아무리 무던한 케일리라고 해도 몽롱한 와중에 당장 방광이 터질 것 같은데 화장실을 찾을 수 없다는 건 끔찍했다. 박스집에서 자다 말고 몸을 뒤척일 자리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잠에서 깨어났던 순간만큼이나 충격적이었다.

마지막으로 제 방 안까지 한 바퀴 돌아 화장실이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한 그가 결국 처음 멈춰 선 거실에 돌아왔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케일리가 밀려오는 요의를 꾹 누르며 절망에 잠겨 있을 때였다.

“어?”

시선의 끝에 아직 열어보지 못한 새로운 문이 들어왔다. 그것은 -B 지구에서 숙소를 통하던 너구리 로봇의 미래 아이템이 아닐까 의심했던 그 문과 정확히 같은 위치에 붙어 있었는데, 첫날 본 것과 모양이 달라진 상태였다.

어딘지 공중변소의 칸막이를 연상시키는 재질의 매끈한 문이었다. 어쩌면 지나치게 간절히 화장실을 소망한 나머지 위대하고 오래된 어떤 존재가 자신을 도와주는 걸지도 몰랐다.

더 망설일 것도 없이, 케일리는 자신에게 남은 마지막 선택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아니나 다를까, 문 너머에는 그가 바라 마지않던 희고 아름다운 변기가 양팔을 벌려 환영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 ◆ ◇

“으음…….”

반쯤 수마에 잠긴 상태에서 화장실을 찾아 헤맸던 케일리는 자신이 찾아낸 화장실이 어딘지 지나치게 시대를 거슬러 올라갔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레트로는 어느 시대에서든 유행하는 키워드였지만 아무리 그래도 정도가 심했다.

21세기 런던의 맨션에 붙어 있는 화장실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다 낡아빠진 화장실이었다. 벽에는 삭은 자욱이 선명했으며, 좁은 공간에는 깨진 좌변기 하나만 달랑 서 있었다.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아 탁 트인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달빛을 통해 사물을 구분할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것이 아마도 과거의 향수에 젖은 뱀파이어가 구시대적 향수를 물씬 남겨놓은 인테리어를 한 것이라면 그나마 납득이 갔다.

시원하게 볼일을 마친 후 다 무너져가는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오며, 케일리는 드디어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자신은 얼마 전 집을 나왔고 숙소의 화장실은 거실을 지나친 복도 반대편에 있었다. 그걸 잊고 자신의 방과 거실 사이의 복도만 뒤졌으니 찾을 수 없는 게 당연했다.

열고 들어온 문을 그대로 열고 숙소에 돌아가려고 한 케일리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잠시간 침묵했다. 화장실에 들어오기 전 지나온 복도나 거실과 일억 광년 남짓 동떨어진 공간이었다.

화장실 들어갈 때와 볼일 보고 나올 때의 기분이 다른 것이야 지극히 이치에 맞는 일이겠지만, 들어갈 때와 나올 때 펼쳐지는 공간 자체가 다른 상황에 난감함을 느끼지 않을 사람은 없을 테다.

복도 끝의 문을 열고 들어온 화장실이니, 문을 열고 나가면 복도가 나와야 맞았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케일리의 앞에 펼쳐진 광경은 어둡고 허름한 공중 화장실이었다. 여기서 나간다고 해서 숙소로 이어진 복도가 나올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완전히 희망을 버리지 못한 케일리가 우선 삐걱거리는 화장실 문을 한 칸 한 칸 조심스레 열어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복도는커녕 지독한 암모니아 냄새만 코를 찔렀다.

남은 문은 이 화장실에서 나가는 출입구뿐이었다. 일단 낡은 세면대로 걸어가 수도꼭지를 돌려본 케일리가 쏴아아, 흘러나오는 물에 손을 씻었다. 수도가 끊기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로 낡은 파이프에서 기분 나쁜 소리가 간간이 새어나왔다.

극적인 감정의 동요랄 것을 느껴본 기억이 없는 케일리에게 있어서도 이 상황이 굉장히 곤란하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저 화장실에 가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화장실에 가고 싶다는 게 그렇게 원대한 꿈이었던 것일까.

크지도 작지도 않은 공중변소 안에 숙소로 돌아갈 문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케일리는 결국 터덜터덜 출입문을 열고 화장실 밖으로 나갔다. 계속 처박혀 있어봤자 몸에 지린내가 배는 것 외엔 딱히 해결책이 나올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공중변소를 나오니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컴컴한 건물 내부가 보였다. 어디로 시선을 옮겨도 성하게 남아 있는 유리창이 하나도 없었다. 덕분에 훤히 비춰 들어오는 달빛이 밝아 걷는 데에는 지장이 없었다. 오히려 시야의 문제보다는 어긋난 철골이 훤히 드러나 아슬아슬하게 붙어 있는 콘크리트 구조물이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이 위험천만해 보였다.

일단 지상으로 내려가서 이 건물을 벗어나고, 현재 위치를 파악해야겠다. 나름대로 현실적인 대책을 세웠으나 아래로 가기 위한 계단이 없었다.

한 층을 쭈욱 돌며 발견한 세 개의 계단은 무너져 내린 콘크리트 더미에 아예 막혀 있거나, 중간 즈음에서 아예 끊겨 계단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뛰어내리라면 못할 것도 없을 높이였지만 그로 인해 바닥이 꺼지기라도 하면 무너진 콘크리트에 깔려 영영 움직이지 못하게 될 것만 같았다.

목숨에 별다른 미련이 없다고는 해도 콘크리트 더미를 얹고 폐건물 안에 갇혀 팔다리만 버둥거리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한 케일리는 뛰어내린다는 선택을 일단 뒤로 넘겼다. 기껏 그럴듯한 직장에 취직했는데 콘크리트에 깔려 버둥거리다 생을 다하는 건 너무했다.

만약 태어나서 처음으로 열심히 구직활동을 하지 않았더라면 미련이 덜 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신문을 뒤지고 공중전화 부스까지 찾아가 생애 처음 면접까지 볼 정도로 적극적인 노력을 해 손에 넣은 직업이었다. 일단 숙소에 돌아가는 걸 목표로 잡은 케일리가 역시나 콘크리트 잔해에 막힌 계단을 뒤로한 채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밑으로 내려갈 수 없으면 위로 올라가봐야지.

잔해조차 남지 않은 창밖으로 보이는 높이는 대략 6, 7층 정도. 주변 건물의 높이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이 건물은 높아봤자 20층이 되지 않을 테다. 뛰어내리기에는 애매한 높이였지만 일단 위로 올라가면 근처 건물로 넘어갈 방법이 있을지도 몰랐다.

게다가 숙소의 문을 통해 빠져나온 것뿐이라 여기가 대관절 어디인지 파악할 수도 없었다. 높은 곳을 찾는 건 꽤 현명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거법을 이용해 결론을 낸 케일리가 망설임 없이 올라가는 계단을 향했다. 고민을 하는 것조차 귀찮은 그는 의외로 행동이 빨랐다. 생각하지 않고 움직이는 것이 고민을 하는 귀찮음에 비하면 훨씬 쉽기 때문이었다.

한 층, 두 층, 세 층…… 창백했던 뺨에 혈색이 오를 즈음이었다. 더 이상 계단이 이어지지 않았다. 문득 고개를 든 케일리의 눈앞에 배꼼이 열린 철문이 보였다. 끼기긱, 손잡이를 돌리자 오랫동안 사용되지 않은 것처럼 기괴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을씨년스러운 폐건물의 옥상이 펼쳐졌다.

몇 개의 컨테이너가 불규칙적으로 널려 있는 옥상에는 버려진 드럼통이며 정체를 알 수 없는 콘크리트 구조물이 번잡스럽게 늘어서 있었다. 흡사 미로처럼 펼쳐진 그곳을 향해 발을 내딛은 순간, 케일리의 시야에 한번 보면 좀처럼 잊기 힘든 미형의 사내가 들어왔다. 그는 옥상 바닥에 바짝 달라붙어 숨죽인 채 어둠 너머를 주시하고 있었다.

푸른 달빛을 받아 음영 진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 살아 있는 생명이라기보다는 하얀 대리석을 깎아놓은 조각이라는 편이 어울릴 듯한 비인간적인 광경이었다.

미와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침을 삼키는 소리조차 방해로 느껴질 만큼, 폐건물 위의 이질적인 공간을 형성한 사내는 흠잡을 구석 없이 아름다웠다.

분명 그곳에 존재했지만 잠깐이라도 눈을 떼면 연기처럼 허공에 흩어지지는 않을까 의심이 들 지경이었다. 극단적으로 숨을 죽인 존재감을 향해 한 발짝 다가선 케일리가 이렇게 말했다.

“오늘은 날씨가 참 좋네요.”

확실히 구름 한 점 없는 밤하늘이기는 했다. 오늘따라 유난히 밝은 달빛을 화제 삼은 산뜻한 인사였다. 밤 산책이라도 나온 사람처럼 잔잔한 미소까지 머금은 것은, 낯선 상황에서 낯익은 얼굴을 만난 케일리 나름의 반가움의 표현이었다.

다 스러져가는 건물 옥상에서 아는 얼굴을 만났으니 어찌 반가움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무엇보다 숙소로 돌아가는 가장 빠른 길은 바로 그곳이 어디인지 아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었다. 에드워드는 사람이 아니기는 했지만, 어찌됐건 활로가 생긴 참이니 기쁠 수밖에.

퍼드득, 번개라도 맞은 것처럼 사납게 몸을 돌린 에드워드가 케일리를 쳐다봤다. 당장 허공의 연기처럼 흩어져 사라진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희미했던 존재감이 간데없었다. 황당함과 분노를 담은 서슬 퍼런 눈을 한 채 에드워드가 입만 뻥긋거렸다.

왜 저러는 걸까?

대단히 충격적인 상황에 당면한 것처럼 말을 잇지 못하는 에드워드를 향해 케일리가 물음을 던지기 위해 입술을 달싹인 순간이었다.

피융.

바람을 가르는 가느다란 소리가 신경을 자극했다. 바람처럼 소리가 들리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린 것은 에드워드였다. 케일리 또한 민감하게 소리를 잡아내어 그와 같은 곳을 쳐다보았고.

쾅, 콰광!

곧이어 고막을 찢어발기는 폭발음이 터졌다.

“아, 위험했네요.”

자신이 처한 상황을 파악했다기보다는, 초인적인 반사신경으로 재빨리 한 걸음을 물러난 그의 밤색 머리카락 몇 올이 허공에서 나풀거렸다. 정확히 그의 머리를 노린 총탄은 간발의 차이로 머리카락 몇 올만을 희생시킨 채 스쳐간 것이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건물 한켠을 완전히 붕괴시킨 총탄은 그것이 날아가 꽂힌 각도로 예측하건대, 에드워드가 숨을 죽이고 주시하던 방향으로부터 날아온 것이었다. 사람을 조준하고 쏘아진 것이라기에 지나치게 폭발범위가 큰 화기였다.

그리고 그 무식하기 짝이 없는 발포자는 기껏해야 잠깐의 여유도 용서하지 않은 채 두 번째 탄환을 쏘아 갈겼다.

피융, 콰앙!

이번에는 정확히 의도를 가지고 날아온 총알을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해낸 케일리가 고개를 기울였다. 중화기로 무장을 한 채 입을 다물지 못하는 에드워드를 바라보던 그가 이렇게 말했다.

“친구 분이랑 밤 운동 중이신가요?”

집요정이 뭔지 물어볼 때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어조의 물음이었다. 그 황당한 반응을 한 템포 늦게 인식한 에드워드가 케일리의 팔뚝을 우악스럽게 잡아챘다. 여전히 적의 사정거리에 훤히 노출된 상태인 멍청이를 제 쪽으로 끌고 온 것이었다.

쿵!

에드워드와 함께 콘크리트 구조물 뒤에 납작 엎드리게 된 케일리는 그 와중에 요령 좋게 낙법까지 구사하고 있었다.

“이런, 미친! 네가 대체 왜 여깄는 거야?!”

이를 악문 탓에 잇새로 새어나온 목소리에는 황당함 반, 노기 반이 섞여 있었다.

“아픕니다.”

별달리 아픈 기색 없이 흘러나온 어투는 방금 생사의 기로에서 살아남은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여상했다. 흐트러지는 법이 없는 그의 목소리가 되레 에드워드로 하여금 이것이 현실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에드워드는 어느새 멈춘 총성에 본능적으로 숨을 죽였다. 느리게 숨을 들이켜며 극도로 예민해진 신경을 곤두세운 에드워드의 낯빛이 일순 변했다.

반경 수 킬로미터 안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이 케일리의 것뿐이었다. 사방이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이건 문제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여실히 존재하던 상대가 완전히 기척을 죽인 이유는 결코 꼬리를 내빼는 귀여운 종류가 아님을 에드워드는 확신했다.

지금까지 자신의 존재를 눈치조차 채지 못하던 상대에게 완전히 인식당한 것뿐만 아니라, 그가 본격적으로 전투태세를 갖춘 모양이다. 당초 목적을 완전히 벗어난 이레귤러였다. 혼자 몸이었다면 실패가 확정된 시점에서 목적을 포기하고 꼬리를 뺐을 것이었다.

뱀파이어는 영생에 가까운 삶을 살았고 어지간한 물리적 데미지를 가지고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을 상위생명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인간과 비교했을 때의 이야기다.

뱀파이어보다 뛰어난 마법을 가진 존재, 뱀파이어보다 빠르고 단단한 육체를 가진 존재, 혹은 뱀파이어보다 끈질긴 목숨줄을 가진 존재만 해도 당장 손가락 발가락으로는 다 꼽을 수 없을 만큼 많았다. 결국 비슷비슷한 장점을 가진 상대와 나란히 했을 때 승패를 결정하는 것은 개인과 개인의 역량 차이다.

빠득, 이를 갈며 고개를 든 에드워드가 옥상 너머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수백 미터 전방의 버려진 건물과 건물 사이의 길에는 유난히 이질적인 중화기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보병들에게 지급되는 중거리용 대전차 화기를 연상시키는 그것은 성인 남성의 허벅다리보다도 몇 둘레 두꺼울 정도로 무식한 외견이었으나, 보기와는 달리 정교하게 만들어진 내부가 오버 테크놀로지라는 말에 딱 들어맞을 정도로 괴물 같은 성능을 자랑하는 물건이었다.

도시 한가운데서 쏘아 갈겨도 소음기를 단 권총 정도의 포음밖에 나지 않는 데다, 목표물을 문자 그대로 산산조각 냈다. 아무리 튼튼한 육체를 가진 에드워드라도, 지방과 단백질이 혼합된 육체를 가지고 저 물건을 상대하는 건 나 이제 좀 죽어도 보고 싶다고 용암을 채운 욕조에 몸을 담그는 꼴이었다.

상대는 반탄력 때문에 보통 인간은 제대로 조준하고 쏘는 것조차 힘에 부치는 물건을 한 손으로 쏘아 갈긴 괴물이다. 무기를 들고 설쳐주는 편이 인간적일 정도로-애초에 인간도 아니었지만.- 상대가 나빴다.

가능하다면 정면승부만은 피하고 싶은 무식한 중화기를 아무렇게나 던진 채 상대는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평소 같았으면 호재라 판단했을 광경에 에드워드의 서늘한 눈동자에 초조함이 감돌았다.

기동력을 낮추는 조준력 낮은 무기를 포기하고, 그 무기보다도 괴물 같은 제 몸으로 직접 상대해주겠다는 완곡어법으로 느껴졌으니 하는 수 없었다.

“빌어먹을, 돌아가시겠네.”

쫓고 있던 상대가 눈에 보이지도, 기척을 드러내지도 않는 것에 에드워드가 이를 갈았다. 그의 임무는 불법개조한 무기밀매조직의 거래상대를 알아내는 것이었다. 에드워드는 구매자의 꼬리를 잡기만 하면 그걸로 충분했다.

그것이 단순한 수집을 위한 것이라면 -B 지구의 관할 밖의 일이 되었고, 연구를 위한 것이라면-종종 이종족 중에는 인간의 무기와 이능을 접목시키는 등의 시도를 하는 자들이 있다.- 더더욱 제지할 명분이 없었다.

평범한 무기밀매뿐이었다면 -B 지구의 관할이 아니지만, 에드워드가 쫓는 것은 보통 사람이라면 들어 올릴 수조차 없는 중화기를 과격파 이종족들 사이에 유통하는 지하조직이었다. 실상 그들이 조직을 이루고 있는지, 혹은 아닌지, 어디서 어떤 방법으로 무기를 개조하는지조차 드러나지 않은 상태에서 겨우 잡은 꼬리였다.

무기밀매조직보다 그것을 사들이는 쪽이 -B 지구에 있어서는 훨씬 가깝고 위험한 상대다. 파는 쪽의 목적은 언제나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확실히 탐욕적이기만 했지만, 사는 쪽의 목적은 일관적이지 않을 뿐더러 가능한 경우의 수만큼 위험이 되었다. 게다가 인간의 육체능력으로는 사용할 수 없는 무기 즉, 이종족을 위한 무기를 필요로 하는 것은 이종족뿐이다.

최근 영국에 흘러들어오는 대 이종족 불법개조 중화기의 구매 목적을 확인한 후, 구매자 사후 대처에 대한 판단을 내리는 것. 에드워드에게 주어진 임무는 그뿐이었다. 미행상대에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필요도, 위험을 자처할 이유도 없었다.

“생각 다 했으면 그만 일어나도 될까요?”

온화한 밤색 눈을 깜빡이며 그렇게 말하는 파트너-임시.-만 아니었더라면, 그럴 예정이었다.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상황에 처했는지에 대한 일말의 이해가 보이지 않는 케일리의 단정한 얼굴을 마주한 에드워드가 빠득, 다시 한 번 이를 갈았다.

게다가 이 인간은 소음이 없는 상태에서 날아온 총알이 건물을 박살내는 물리법칙조차 무시한 비현실적인 꼴을 봤으면, 납죽 어디에 날려도 몸을 날려 피해야 하는데도 느긋하게 표적이 되고 있었다.

케일리가 두 번째 사격에서 살아남은 것은 그냥 기적이었다. 더럽게 운이 좋은 게 아니라면 첫 사격에 바로 이어진 두 번째 탄환을 평범한 인간의 반사신경으로 피할 방법은 없었다.

상대방이 짊어진 중화기가 섬세한 조준을 필요로 하지 않는 무식한 개조무기라는 것을 제외하더라도, 보통 총알이 날아오면 몸을 피하는 게 정상적인 반응이다.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표적이 된 채 다음 총알을 기다리는 건 제정신으로 할 짓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피하는 데에 성공한 것뿐이지, 케일리가 그것을 의도해서 해냈다고는 생각할 수도, 그런 일이 가능할 리도 없었다.

“어이, 너…….”

“네?”

“너…… 혹시 뭐 지금 당장 간절하게 죽고 싶다거나, 그런 생각이라도 하고 있었던 거냐?”

헛웃음과 함께 튀어나간 물음은 반 이상이 진심이었다. 싸늘한 비웃음을 머금은 에드워드의 입술이 비죽이 올라갔지만 새파란 눈동자에는 웃음기가 없었다.

“그 물음에 대답부터 하자면…… 오래 살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죽고 싶다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는데요. 에드워드, 혹시 화나는 일이라도 있었어요?”

몸을 일으키는 에드워드에 따라 일어선 케일리가 그의 차가운 눈빛에 아랑곳하지 않고 느리게 고개를 기울였다. 등에 짊어지고 있던 짐가방 속에서 조립되어 있는 대구경 권총을 꺼낸 에드워드가 눈을 가늘게 떴다.

“내가? 어디서 기어 나왔는지 모를 대가리 텅 빈 인간 하나 때문에 일도 망치고 목숨에 위협까지 받는 상황에서 왜 화가 나겠어?”

고저 없이 흘러나온 에드워드의 목소리는 제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생각하는 듯한 인간을 향한 노여움이 배어 있었다.

당연하게도, 에드워드에게는 케일리가 실제로 그렇든 아니든 목숨은 평등하게 소중하다든지, 살아가는 건 죽는 것보다 훨씬 아름답다는 둥의 개소리를 지껄일 생각은 없었다. 그는 모든 목숨이 평등하다 생각하지도 않을 뿐더러, 자신의 것이 아닌 목숨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지도 않았다.

에드워드의 분노의 이유는 완전히 다른 곳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이 상황의 문제는 케일리가 스스로의 목숨을 가벼이 여기는 것 자체가 아니었다. 근본적으로 그것은 케일리 자신의 문제였으며, 생물의 가장 기본적인 생존본능조차 지니지 못한 이상한 인간이라는 생각을 할지언정 에드워드가 참견할 만한 일도 아니었다.

허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케일리의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행동에 진지하게 분노했다. 인간 하나를 찢어발긴 후에도 만족할 줄 모르고 애꿎은 뱀파이어에게까지 손을 뻗을 개 같은 상대에게, 여기 재밌는 놀이상대가 있다고 온몸을 이용해 광고한 케일리의 미친 짓 덕분에 함께 위험에 빠진 꼴이었다. 거기까지만 짚어도 에드워드의 분노는 충분하고 정당했다.

이대로 숨죽이고 있어봤자 이미 숨어 있는 장소까지 발각당한 후였다.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정도의 대책조차 되지 못할 게 뻔했다. 차라리 만전을 기하는 것이 나으리라 판단한 에드워드는 장전이 끝난 권총의 안전장치를 해제한 후 케일리의 손에 친절히 쥐여주었다.

“네 소중한 몸은 스스로 지키도록 하고.”

이어서 제 팔뚝보다 긴 총신의 자동 소총을 꺼내 든 에드워드는 정막에 잠긴 어둠 한켠에 가라앉은 시선을 던졌다. 총으로 대적할 수 있을 만한 상대가 아니었지만 잠시라도 움직임을 둔화시킬 정도는 기대할 수 있을 테다.

애초에 에드워드는 뭔가를 지키며 싸우는 것은 젬병이었다. 게다가 몇 시간을 들키지 않고 따라붙었던 에드워드가 놈에게 정체를 들킨 원인은 이 멍청한 인간 놈이었다. 혼자 붙어도 승산이 있을까 말까 한 상대와 대적하며 붕어똥 떨어지지 않게 신경까지 쓰라는 건 말도 안 됐다.

무엇보다 에드워드는 케일리를 향해 지켜야 할 최소한의 의리도 없는 생판 남이었다.

“내일 아침까지 살아 있으면 주워줄 테니까, 너무 멀리 가지만 말아라.”

운이 없으면 자신보다 먼저 발견되어 새파란 나이에 세상을 하직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걸 보고 인간들은 팔자요, 제 복이라고 불렀다.

“저……, 그냥 여기 같이 있으면 안 될까요?”

에드워드에게 건네받은 권총을 쥔 채 말없이 내려다보던 케일리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그렇게 살기가 싫으냐?”

잘생긴 미간을 찌푸리며 에드워드가 물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현실은 이랬다. 여기서 자신이 살아 나갈 확률이 9할 정도라면 케일리가 살아 나갈 확률은 대충 때려잡아도 1할 이하다. 단순한 차이였다. 뱀파이어는 웬만하면 죽지 않지만, 인간은 쉽게 죽는다. 육체가 어디까지 견딜 수 있는지를 계산한 것뿐이었지만 지금부터 상대해야 하는 적은 그런 계산이 들어맞는 종류의 놈이었다.

“그런 것보다는 혼자 도망치나 여기 같이 있으나 비슷할 것 같아서…….”

어쩌면 케일리는 생각보다 판단능력이 좋은지도 몰랐다. 말끝을 흐리는 단정한 손이 권총을 쥔 자세가 의외로 허술하지 않다는 것이 에드워드의 시야에 들어왔다.

가늘게 뜬 파란 눈에 이채가 돌았다. 어쩌면, 확률을 따지면 아주 희박해서 소수점 이하까지 내려갈지도 몰랐지만, 아예 못 써먹을 놈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생각해보면 그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페어리에게 내걸었던 조건 속에는 ‘적당히 쓸 만한 놈’이라는 게 포함되어 있었고 그가 정말로 아무것도 못한다면 구인마법의 대상조차 되지 못했을 테니까. 짐덩이가 아니라 쓸 만한 사람이 늘어나면 보다 적은 데미지로 도망칠 수 있을 확률이 높아진다.

그게 과연 옳은 선택일지를 판단하려 생각에 잠긴 에드워드의 귀에, 뒤이어 케일리의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도망가나 안 가나 똑같으면, 가는 편이 귀찮아서.”

“…….”

여상히 흘러나온 그의 목소리에 분주하게 움직이던 손을 멈춘 에드워드가 느리게 시선을 올렸다.

미리 장전해둔 자동 소총은 안전장치를 해제하는 것만으로 준비가 끝났다. 그래 봤자 총기로 어찌해볼 만큼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기에 한두 발 쏘아 갈겨 잠시간 팔다리를 묶는 것에 성공하기만 하면 그럭저럭 괜찮은 수확이라 계산하던 참이었다.

머릿속으로 어떻게 하면 이 엿 같은 상황을 자알 해결할 수 있을까 박 터져라 굴려대던 에드워드가 사고를 멈춘 채 잠시간 케일리의 말간 얼굴을 응시했다.

얘가 대관절 무슨 헛소리를 지껄인 걸까?

에드워드의 머릿속에서 무어라 결론이 나오기 전에 케일리가 아, 하고 입술을 달싹이며 첨언했다.

“게다가 밑에 계단 막혀서 어차피 이 건물에서 못 나가거든요. 막힌 층에서 뛰어내리면 다리 하나는 나갈 텐데, 그러면 도망간다는 목적 달성이 불가능해지잖아요. 비효율적이지 않아요?”

나지막하게 설명하는 케일리의 말에 이번에는 에드워드도 별달리 돌려줄 말이 없어졌다. 그의 말처럼 계단이 막혀 있다면 창문을 통하거나 다른 수단으로 내려가야 건물을 벗어나기라도 할 텐데 그게 불가능하다니 시도가 무의미하다는 말 자체는 옳다.

문제는 그 말을 하기 전에 도망가나 안 가나 죽는 거면 귀찮으니 안 가겠다고 주장한 부분이었다.

“계단이 막혔다면 대체 어떻게 여기까지 기어온 거냐?”

양팔에 하나씩 자동 소총을 장비한 에드워드가 질린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지금의 황당함으로는 얘가 잠결에 텔레포트를 사용했다고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상대가 인간이라고 해서 물리법칙에 무조건적으로 구애받을 거라는 생각은 편견이었다. 세상에는 물리법칙을 완전히 무시하는 마법 또한 존재했고 인간들 중에도 그걸 사용하는 자들이 존재했다.

눈앞의 사내에게 그런 종류의 재능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보다 더 지독한 재능을 가진 것 같다는 생각은 들기는 했다. 대화상대의 복장을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재능이라든지, 입만 가지고 나라를 망하게 만드는 재능이라든지 뭐 그런 류의.

“화장실 들어갔다가 문 열고 나오니까 여기라 방법까지는 저도 잘…….”

보통 인간이었다면 집안에서 문을 열고 들어간 화장실이 폐건물에 이어져 있으면 놀라기만 할까, 스스로의 정신상태를 의심하거나 이때다 하고 매스미디어에 달려갈 정도의 일이었다. 자신이 일종의 공간왜곡 마법을 경험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상태에서도 케일리가 별다른 동요 없이 상황을 설명했다.

어둠에 잠긴 허공을 주시하던 에드워드가 떨떠름한 물음을 던졌다.

“복도 끝에 달린 그 문……?”

“네, 그거요.”

아침까지는 뒤집어져 잠이나 잘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밤중에 기어 나온 것뿐만 아니라 하필이면 그 문에 손을 댈 줄이야.

에드워드의 기억상 임무를 위해 저녁에 문을 통과한 이후 제대로 닫아놓았기 때문에 문의 마법은 자신이 지나오고 문을 닫은 시점에서 효용을 다했어야 했다.

이민국의 각종 임무에서 공간왜곡을 이용한 이동수단으로 흔히 이용되는 ‘문’은 마법능력 없이 간단한 훈련만으로 어느 정도 자유로운 사용이 가능해 편리한 기구였다. 돈이 있다고 살 수 있을 만큼 흔한 것도 아니라 에드워드 또한 -B 지구에서 필드 임무용으로 배급받은 물건이기도 했다.

특정한 조건 하에서만 모습을 드러내는 그 문을 케일리가 어떻게 통과했는지 알아보는 건 미뤄두더라도, 문을 통해서 왔다면 -사실 다른 방법으로 런던 숙소에서 수천 마일이 떨어진 이곳까지 그 짧은 시간 안에 이동할 방법은 없었다.- 이야기가 빨랐다.

“야, 너 나온 데로 다시 가.”

계단으로 내려갈 수 없지만 건물 안에 있다는 건 이 안의 문과 이어졌다는 뜻이었다. 뭘 어떻게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있는 장소로 문을 연결시킨 모양이었다. 왔던 방법을 써서 돌아가라는 에드워드의 말에 케일리가 눈을 가늘게 접고 온화한 미소를 띠었다.

“저도 그러고 싶었는데 오는 문은 있어도 돌아가는 문은 없더라고요. 집주인인 에드워드라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정말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어요.”

말을 개떡처럼 지껄이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듣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닌 게 묘하게 거슬렸다. 그렇다고는 해도 본인이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조차 모르는 놈을 상대로 낭비할 시간은 없었다.

슬슬 모습을 드러낼 때가 됐는데……, 이대로 아무 일 없이 사라질 상대가 아니었기에 옥상 위의 잡동사니를 피해 느린 걸음으로 경계하듯 어슬렁거리기 시작한 에드워드의 옆을 걸으며 케일리가 말했다.

“그런데, 이거 말고 다른 건 없나요?”

에드워드는 그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입술만 달싹여 대답했다.

“뭐가.”

건성으로 돌아온 물음에도 케일리는 별달리 상심하지 않고 의연히 자기주장을 펼쳤다.

“권총은 별론데…… 차라리 산탄총 같은 게 있으면 빌려주셨으면 해서요.”

담담히 흘러나온 목소리에 에드워드가 걸음을 멈췄다.

“산탄총 쏠 줄 알아?”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힐끗 케일리를 쳐다보며 던진 에드워드의 물음에 간결한 대답이 돌아왔다.

“대충 구조만…….”

“구조를 아는 거랑 실전에서 쏘는 건 다르니까 그냥 거기 처박혀 있어. 여차하면 이거 다 가져다 버리고 널 둘러메고 뛰어야 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그때는 네놈도 근수 줄이게 들고 있는 거 다 버릴 준비나 제대로 해둬.”

“그런가요? 그럼 그럴게요. 그런 상황이 오면 잘 부탁합니다.”

그다지 신뢰받을 만한 행동을 하지도 않았는데 가벼운 어조로 목숨을 내맡긴다. 평범한 신경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여기까지 오면 대범하다고 감탄을 해야 할지, 지나치게 텅 빈 두개골을 비웃어야 할지 애매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양팔에 각각 하나씩 쥔 자동 소총을 고쳐든 에드워드가 문득 머리 위를 올려다봤다. 차갑게 식은 시선에 비친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검은 밤하늘이었지만, 그의 곤두선 신경에 이질적인 숨소리 하나가 걸려들었다.

‘놈이다.’

장전한 총을 하늘 위로 겨눈 것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친 것과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철컥, 부자연스러운 쇳소리와 함께 양손의 검지 끝에 걸린 방아쇠를 묵직하게 당겼다.

타타타타타타탕.

귀를 찢는 연사음과 함께 총 두 개분의 탄환이 연사되어 허공을 갈랐다. 양팔에 전해지는 반동은 월등한 뱀파이어의 신체능력으로도 완전히 상쇄할 수 없었다. 총알이 나갈 때마다 조금씩 뒤로 물러나다 보니 어느새 등에 차가운 콘크리트 구조물이 느껴졌다.

달빛이 훤히 비추는 옥상 위로 방금 전까지만 해도 뱀파이어 하나와 인간 하나가 있던 공간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몸집이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멀어졌다. 거구는 날아가는 총알을 말도 안 되는 동작으로 모조리 피한 후 이쪽을 향해 빠른 속도로 접근해 왔다.

“젠……장맞을!”

밤짐승의 것처럼 형형한 안광이 음영 진 얼굴 안에서 잔상을 남겼다. 거대한 육체가 에드워드를 덮쳤다. 휘둘러진 팔은 유기물로 이루어진 살아 있는 육체가 아니라, 무기질적인 철골에 얻어맞는 것처럼 둔탁한 소리를 내며 에드워드의 뒤에 있던 콘크리트 구조물에 내리꽂혔다.

성인의 머리통만 한 주먹은 콘크리트 구조물이 흡사 팬케이크의 반죽처럼 느껴질 정도로 간단하게 처박혔다. 그걸 잡아 빼느라 두터운 팔을 이리저리 흔드는 사내의 덩치는 어림잡아도 7피트-약 210센티미터.-를 가볍게 뛰어넘을 것처럼 거대했다.

“쥐새끼처럼 잘도 피하는군그래?”

바닥을 긁는 듯 기분 나쁜 쇳소리가 흘러나온 순간, 에드워드는 양손에 쥔 자동 소총을 등 뒤로 아무렇게나 던졌다. 뿐만 아니라 다른 무기를 넣어 온 등 뒤의 짐가방도 내팽개쳤다.

상대방이 무기를 버린 것과 정확히 같은 이유로, 에드워드는 자신의 적이 인간이 만들어낸 잔재주로 대적할 수 없는 상대라는 것을 단숨에 꿰뚫었다. 가능하면 팔다리 하나쯤은, 이라는 기대를 품고 총질을 하느니 맨몸, 즉 뱀파이어 본연의 힘으로 상대하는 게 현명한 상대였다.

어느새 콘크리트에 꽂힌 주먹을 빼낸 사내의 뒤에 잘 뭉개진 구조물이었던 잔해가 널브러져 있었다. 무지막지하다는 말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힘과 포유강 영장목 사람과 사람속의 사람보다는 캐나다 도로변을 배회하는 그리즐리 베어에 근접한 외견을 제외하고서라도, 그가 인외의 어떤 것이라는 사실은 명명백백했다.

어딘지 흥미로운 기색으로 눈을 빛내며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으나, 숨을 쉬는 것 자체가 대단히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운동의 일환이라는 인상을 줄 뿐 힘들어 하는 기색은 없었다.

에드워드를 향해 시선을 고정한 채 사내는 무식하게 부풀어 오른 어깨의 근육을 이용해 부웅, 커다랗게 원을 그리며 팔을 돌렸다. 임전 태세에 돌입한 사내를 향해 짐승의 것과 같은 세로꼴 동공을 한 붉은 눈의 에드워드가 물음을 던졌다.

“어이, 네놈이 길바닥에 던져놓은 물건은 못 본 척해줄 테니까, 피차 아무 일도 없었던 셈치고 평화롭게 제 갈 길 가는 건 어때?”

별것 아닌 것처럼 여상하게 던져진 물음에는 바람 빠진 웃음이 스며 있었다. 상대를 향한 것이라기보다는 스스로를 향한 조소에 가까웠다. 듣는 귀를 가지고 있는 상대였다면 처음부터 대화를 시도하지, 총부터 겨누지 않았을 테니 그럴 만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뚝, 목을 꺾으며 에드워드의 코앞까지 걸어온 사내가 슬로 모션 비디오처럼 느린 동작으로 다리를 치켜올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거대한 다리가 믿을 수 없이 빠른 속도로 에드워드의 머리를 내리찍었다.

간발의 차로 공격을 피한 에드워드가 사내의 가랑이 사이로 허리를 숙여 등 뒤로 이동했다. 바닥을 박찬 그가 곧장 체중의 반동을 이용해 부스스한 사내의 뒤통수에 발을 날렸다.

뻑!

무식한 소리와 함께 완전히 먹혀 들어간 킥에도 불과하고, 사내는 1인치도 꿈쩍하지 않았다. 느리게 고개를 돌린 사내가 등 뒤의 에드워드를 내려다보며 누런 이빨을 드러냈다.

“왜 비루먹은 개새끼처럼 흐느적거리는 거지? 더 재밌게 놀아달란,”

전력을 다한 것은 아니지만 제법 힘을 실은 일격에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에드워드가 씁쓸하게 입맛을 다시며 다음 공격을 가늠하는 사이 사내의 거친 목소리가 별안간 끊겼다.

“말이다!”

퍽!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묵직하게 바람을 가른 주먹이 에드워드의 복부에 꽂혔다.

“컥!”

얻어맞은 부위로부터 시작해, 뱃속에 있는 고깃덩이가 모조리 역류하는 기분이었다. 반사적으로 숨을 들이켰으나 다시 내뱉을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도 몸은 본능을 따라 움직였다. 제 복부에 꽂힌 주먹을 반사적으로 움켜쥔 에드워드가 그것을 지지대 삼아 재빨리 다리를 올렸다.

단단한 허벅다리에 날카롭게 꽂힌 발목으로 철근을 걷어찬 것처럼 묵직한 통증이 전해졌다. 아무래도 육탄공격은 통하지 않는 것 같았다.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훨씬 처참한 결과였다.

“망……할!”

이래서는 도망은커녕 목숨 걱정을 먼저 해야 할 판이었다. 신맛과 쇠비린내가 동시에 느껴지는 입에 고인 핏물을 꿀꺽, 삼킨 에드워드의 시선이 사내의 뒤편을 향했다.

여전히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컨테이너 박스와 드럼통 사이에 서 있는 케일리가 보였다. 저 인간은 몸을 숨긴 건지 아닌지 헷갈리는 어중간한 데서 도망도 안 치고 무슨 짓을 하는 걸까.

자세히 보니 놈은 자신이 던져버린 짐가방과 소총 두 정까지 어느 틈엔가 챙겨 들고 있었다. 권총도 제대로 못 다루게 생긴 놈이 산탄총이나 찾는 것도 웃겼는데, 에드워드의 시야에 들어온 광경은 황당하기가 짝이 없었다.

바리바리 챙겨온 짐가방 안에 들어 있던 K14, 저격 소총을 꺼낸 케일리가 스코프에 양각대까지 드럼통에 얹어 제법 그럴싸하게 고정시켰다. 총을 겨누는 자세는 교본에 올려도 될 정도로 각이 잡혀 있다.

저 가까운 거리에서 대체 뭘 저격하려고 하는 건지는 둘째치고서라도, 어찌 어찌 조준을 해도 사용법을 모르면 무용지물일 물건이었다. 저걸 왜 꺼내 들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 전투 도중이라는 것도 잊은 에드워드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는 사이 사내가 킁킁, 몇 번인가 코끝을 들썩거리는가 싶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

“너, 생각보다 약골이로군 그래? 피 냄새가 옅어. 그러고도 뱀파이어인가?”

약점을…… 들켰다.

생각을 하기는 하는 건지 의심스러운 인간에게 정신을 팔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대체 어떻게 자신이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그것도 순혈이라는 걸 알아챈 걸까? 뱀파이어를 구분할 수 있는 이종은 아주 적었다. 그중에서도 순혈 여부는 같은 뱀파이어 정도밖에 모른다.

그가 자신과 비슷한 부류의 이종이 아니라면, 이렇게 쉽게 정체를 간파당할 수가 없었다. 만만찮은 상대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고전할 줄은 몰랐다. 악문 잇새 사이로 욕지거리를 내뱉은 에드워드가 단단하게 쥔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내는 하하, 여유롭게 웃으며 커다란 손으로 그것을 막아냈고 누런 이를 드러내 히죽 웃어 보였다.

“빈혈 걸린 뱀파이어라니, 그것 참 마음 놓고 웃기도 민망한 코미디로군 그래.”

“…….”

“그러면 저건 네 비상식량 같은 건가 보지?”

막힌 주먹이 잡힌 채 상체의 반동을 이용해 반대편 주먹을 날려 거하게 먹혀 들어갔다고 생각했으나 오산이었다. 뻑! 하고 얼굴에서 나는 소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무식한 타격음과 살짝 비틀린 고개를 제외하면 별다른 데미지가 없어 보였다. 빌어먹게도, 튼튼한 몸이었다.

“비상식량이라도 먹고 오면 재밌게 놀아줄 텐가? 저거 하나로는 부족할 것 같다만……. 오랜만에 재미 좀 보나 했더니, 불량품이 걸렸어. 좋다 말았군.”

처음에 비해 확연히 흥미를 잃은 눈으로 에드워드를 내려다본 사내가 손아귀에 쥔 주먹을 으스러뜨릴 기세로 힘을 주었다. 혈관이 불거진 팔을 빼내려 어깨를 흔들어도 꿈쩍하지 않았다.

결국 에드워드가 제 손을 포기하고 장승처럼 선 사내의 정강이를 부러트릴 요량으로 걷어차다가, 지금의 자신에게는 그마저도 여의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 빠득 이를 갈았다. 명색이 순혈 뱀파이어가 피를 못 먹고 살아서 힘 하나 못 쓰고 당하기만 한다니. 지나가던 개도 비웃을 일이었다.

사내의 손 안에서 오른손의 손가락 마디마디의 뼈가 으스러진 것이 느껴졌다. 재생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으스러진 뼛조각 위로 살이 오르다, 다시 부러져 날카로운 뼈에 살점이 찢겨나갔다. 나아진다고 해서 아프지 않은 건 아니었다. 으스러진 손에서 생생히 전달되는 통증이 끝내줬다.

사내의 무릎이 복부를 찍어 올렸다. 에드워드가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무릎에 얻어맞아 갈빗대가 부러졌다. 부러진 뼈가 폐에 꽂히는 감각이 섬뜩했다.

비상식량이라고 했던가. 그의 말대로, 아니, 케일리의 말대로 그의 피를 마셨더라면 이렇게 일방적으로 당하지는 않았을지도 몰랐다. 후회란 언제나 늦은 타이밍에 찾아오는 법이라지만, 이건 너무했다.

내장이 역류하는 고통을 생생하게 겪으며 사내에 의해 멱살째로 잡혀 올라간 에드워드는 퍽, 퍽, 고기 뭉개지는 소리가 귓가를 파고드는 것에 몸서리쳤다. 뭉개지는 것은 자신의 육체였다. 고통과 청각이 분리된 것처럼 기묘한 괴리감이 들었다.

머리를 비롯해 복부, 옆구리, 가슴팍까지 어디라 할 것 없이 사정없는 주먹이 내리꽂혔다. 주먹이라기보다 쇠방망이 철퇴에 얻어맞는 기분이었다.

“정말이지 실망스럽기 짝이 없군.”

멱살이 잡혀 허공에 올라갔다. 버둥거릴 힘도 없이 축 늘어진 다리가 덜렁거렸다. 부어오른 눈두덩을 타고 핏물이 흘러내렸다. 핏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몇 번인가 눈을 깜빡인 에드워드는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까지 다가온 사내의 얼굴이 자신의 모습을 무기질적인 눈으로 내려다보는 것을 마주한 채 인상을 찌푸렸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죽지야 않겠지만 역시 이대로 당하기만 하는 건 좆같다. 맞아서 저민 고기가 되는 것보다 먼저 분에 못 이겨 내장이 녹아버릴지도 몰랐다. 뭔가 상황을 타파할 참신한 수가 없을까, 에드워드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던 참이었다.

“크아아악!”

귀를 찢어발길 듯 뿜어져 나온 비명과 동시에 훅, 끓어오르는 것처럼 뜨거운 액체가 에드워드의 얼굴에 세차게 쏟아져 내렸다. 생각지도 못한 일격에 당한 사내는 물론, 그 광경을 바로 코앞에서 지켜본 에드워드까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에드워드의 얼굴에 뿜어져 나온 뜨거운 액체의 정체는 사내의 안구로부터 터져 나온 체액이었다.

“눈은 피부만큼 단단하지 않은 모양이네요.”

특유의 고저 없는 톤으로 흘러나온 케일리의 목소리는 이 끔찍한 참상을 만들어낸 주인공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평온했다.

졸지에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에드워드가 켈룩켈룩 마른기침하며 두 손으로 바닥을 짚고 일어서 고개를 들었다. 그를 집어 던진 사내는 허억, 숨을 들이켜는가 싶더니 부들부들 떨리는 두 손을 겨우 들어올렸다.

에드워드가 가지고 있는 저격총은 사살용이었다. 관통상보다는 화력에 초점을 맞춘 무식한 모델이기도 했다. 어차피 저격이라는 게 그렇다. 첫 시도를 실패하면 두 번째 시도 같은 건 안 하느니만 못했다. 그러니 첫 한 방을 제대로 갈기라는 의미에서 나쁘지 않은 무기라고 에드워드는 생각했다.

사내의 입에서는 끅, 끄윽, 고통에 찬 쇳소리가 흘러나왔다. 뱀파이어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만큼 튼튼한 사내의 안구를 터트리며 관통해 들어갔지만 두개골을 뚫지 못한 탄환이 머릿속을 헤집는 모양이었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한 고통이었다.

커다란 두 손은 줄줄 핏물 섞인 체액이 흘러나오는 눈두덩을 움켜쥐었다. 굵다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것이 피인지, 안구를 채우던 유리체 내의 액체인지, 그것도 아니면 뇌를 헤집은 탄환에 흘러나온 것인지 어슴푸레한 달빛만으로는 구분할 수 없었다.

꿀렁꿀렁 얼굴을 감싸 쥔 손에서부터 팔뚝, 팔꿈치를 타고 뚝, 뚝, 흘러내리는 뜨끈한 액체와 관통되지 않은 총알이 머릿속을 헤집는 고통에 거구의 사내가 그 자리에 무너져 내렸다. 무릎을 꿇고 얼굴을 감싸 쥔 사내가 크르릉, 목을 울렸다.

“큭, 이, 이 건방진 인간 놈이……!”

소리를 지르다 말고 큭! 고통에 찬 신음을 내뱉은 사내가 별안간 움직임을 멈췄다. 간간이 숨소리와 알아들을 수 없는 기분 나쁜 목소리가 들렸다. 정신을 잃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몸을 웅크리고 파괴된 안구의 재생에 집중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안구가 터진다고 해서 생명에 지장이 생길 상대는 아니었지만, 케일리는 확실히 시간을 벌어주었다. 그것도 에드워드가 미처 생각치도 못한 기발하고 잔혹한 방법으로.

어느새 원래의 색으로 돌아온 에드워드의 파란 눈이 자신을 향하자 케일리가 스코프와 양각대를 자연스럽게 해체했다. 굳이 손을 멈추지도 않은 채 그가 말갛게 웃었다. 저지른 짓에 비해 지나치게 가벼운 태도에 에드워드가 끓는 듯한 숨소리만 간신히 내뱉는 사내를 쳐다보며 다소 질린 얼굴을 했다.

“잠깐만. 그러고 보니 너, 아까는 산탄총의 ‘구조’밖에 모른다며? 아니, 그보다 대체 눈은 어떻게 맞힌 거지? 너 시력이 몇이야? 아무리 스코프가 달렸다지만 그걸 주먹 휘두르고 있는 움직이는 놈 눈에 단번에 맞힐 확률이…….”

거기까지 말한 에드워드가 찌르는 듯한 폐부의 고통에 호흡을 고르는 사이, 케일리는 저격총의 정리를 마쳤다.

“시력은 2.0인데요. 시판되는 총기구조야 이론적으로 알고 있지만, 제대로 쏴본 건 소총이랑 권총밖에 없으니 산탄총은 구조만 아는 게 맞습니다. 저격용도 그렇고요. 평소에 누구 저격하고 다닐 만큼 부지런한 성격도 아니라서……. 보통 그 정도 알면 다 쏘지 않나요? 별로 어려운 것도 아닌데.”

저격 소총을 쥐어본 것이 처음인 주제에, 움직이는 대상을 시야확보도 제대로 되지 않는 어둠 속에서 쏘아 제대로 명중시켰다는 뜻이다. 저격임무를 맡는 스나이퍼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보통 처음 한 발의 정확도였다.

단 한 발, 첫 시도를 실패하는 순간 상대방에게 저격 사실을 들키게 되고, 성공 확률이 처참하게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케일리는 상대방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가장 효율적인 표적으로 눈을 골라잡는 순발력과 판단능력까지 가지고 있었다.

물론 결과적으로 그랬다는 이야기였기 때문에 소 뒷걸음치다 쥐 잡은 격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제일 중요한 건 결과였고 거기에 다다르는 과정이 우연이든 필연이든 중요치 않았다. 우연이 반복되면 그것은 필연이며 동시에 실력이기도 했다.

운도 실력.

언젠가 지독한 불운을 끌고 다니는 캐트시가 꺼냈던 한탄의 말을 떠올리며 에드워드는 잠시간 침묵했다. 혹시 이놈은 그 생선의 반대급부가 이 인간은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그렇게 운 나쁜 행운의 상징이 있다면, 반대로 기분 나쁠 정도로 운 좋은 인간이 있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곰곰이 따져보면 이빨 요정의 마법에 걸려든 시점에서 이놈은 그 운을 상쇄할 정도의 괴상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니 운이 좋다는 게 꼭 좋은 의미로 발현되지만은 않는 것 같았지만.

“그걸 처음 만졌는데 쉬웠다고?”

“그런 건 일단 해보고 생각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안 되면 어쩔 수 없는 거고.”

이번에는 됐으니까 잘됐네요.

그렇게 대답하며 케일리가 어깨를 으쓱했다.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짓을 해냈는지도 모를 뿐더러, 스스로의 능력에 대한 일말의 신뢰조차 없는 태도는 지나치게 무심해 오히려 허심탄회하기까지 한 지경이었다. 보통 사람들이 겸손으로 할 만한 말이었다. 혹은 보통의 케일리와 같은 결과를 낸 사람이 하면 오만으로 들려도 이상하지 않을 내용이기도 했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그게 정말로 저 인간에게는 별달리 감흥 없는 일이라는 걸 직감했다.

“너, 권총은 쏠 줄 안다면서 왜 만져본 적도 없는 산탄총을 내놓으라고 했던 거냐?”

케일리가 말한 제대로 쏴본 것이 어디까지를 의미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구조와 이론만 아는 저격총으로 저 정도의 실력을 보이는 걸 보면 아마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을 숨기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한 에드워드가 문득 권총을 마다하던 모습을 떠올리며 질문하자 어느새 무기가 든 짐가방을 등에 짊어진 케일리가 두어 번 눈을 깜빡이더니 아, 그거 말인데요. 하고 대답했다.

“콜트로는 깨끗하게 관통만 되니까 비효율적이잖아요. 총으로 안 죽는다면 피해범위가 큰 게 좋을 거고, 섬세하게 조준할 필요가 없을 때 위력으로 따지면 산탄총이 그나마 낫죠?”

생긴 건 천생 도련님, 그렇게 유순할 데가 없는 얼굴로 흘러나오는 부드러운 목소리에 비해, 내뱉는 말의 내용에 다소 문제가 있었다.

에드워드도 이민국에서 필드 업무를 뛰며 전투요원으로 활약했지만 기본적으로 맡은 바 임무를 완수하는 것이 목적이었지, 상대방에게 어떻게 하면 큰 피해를 입힐지를 진지하게 고려하는 일은 적었다.

이민국의 필드 임무에도 다양한 종류가 있지만, 에드워드가 소속된 런던 본부에서 파견을 나가는 경우 상호간의 목숨이 긴박하게 오갈 정도의 상황이나 지역이 걸릴 확률이 지극히 낮았기 때문이었다.

이종족 이민국 안에서도 제 3세계 지역 분쟁과 연관된 지역 이라거나, 극히 드문 대규모 무장테러집단을 상대할 때 정도가 아니면 대개 상호간에 인간들의 눈을 피하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이유도 있었다. 평온한 외견에서는 짐작할 수 없는 잔학무도함이었다.

“사격은 어디서 배운 거지?”

자신이 케일리에게 건넸던 것은 군용 권총이었지만 확실히 산탄총에 비하면 목적 자체가 관통에 있는 종류였다. 목표물의 광범위 파괴를 목적으로 한 산탄총이 효율적일 만한 상대에게 관통 권총이 별다른 효용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건 맞는 말이다.

문제는 그런 판단이 필요한 건 분쟁 국가에서 목숨을 이마에 걸어놓아도 시원찮을 사지를 구르다 온 프리랜서 용병이나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파병 군인 정도라는 것이었다.

“아, 처음에 개인교습을 해주러 왔던 건 특수부대를 전역하고 용병으로 뛰던 분이었어요. 그 사람에게 배운 건 잡다한 호신술이었고요. 제가 용병일을 현역으로 뛸 일은 없을 테니까, 적당히 흘려들은 것도 많았죠.

어릴 때 몇 년 배운 것뿐이라 총을 쥔 것도 상당히 오랜만이기는 해요. 선수 그만두고는 사격장 근처에도 안 갔거든요. 사실 사격을 연습해야 한다는 것 자체도 이해가 안 갔고, 연습하는 거 귀찮잖아요. 그냥 쏴보고 맞으면 맞는 거고 아니면 어쩔 수 없는 건데.”

가족의 권유로 시작한 사격과 승마로 주니어 국가대표까지 올라갔던 과거를 떠올리던 케일리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렇게 말했다.

누군가에게 이기고자 하는 마음은커녕 누군가와 실력을 겨루고자 하는 욕구가 없는 그에게 있어서는 곤란하기만 한 감투였다. 사격이며 승마며 테니스를 비롯해 다양한 스포츠를 익혔지만 그것은 케일리에게 있어서 살아가기 위해 해야만 하는 필수교양이지 결코 인생의 원대한 야망 같은 게 아니었다. 그가 나고 자란 환경에서 승마는 걸음마였고 사격은 옹알이며 테니스와 골프 같은 것들이 가장 기본적인 사교술이었다.

케일리는 귀찮은 일을 아주 싫어했지만 그 귀찮음의 분류에는 ‘생각하는 귀찮음’과 ‘싫어하는 귀찮음’이 포함되어 있었다. 무언가를 진지하게 생각하거나, 진지하게 싫어하는 데는 에너지가 필요했다.

누군가 하라고 시키면 곧이곧대로 해버리는 것이 가장 쉽고 편한 길일 때가 있었다. 대개 지나치게 여력을 소모해야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반항하거나 거절하는 귀찮음을 무릅쓰지 말자는 단순한 사고방식이기도 했다.

하지만 케일리가 자라난 가정환경의 특수성을 모르는 에드워드에게 있어서는 보통 영국인이 특수부대 출신 용병에게 사격 개인교습을 받는다는 게 결코 일반적인 일처럼 들리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의 입에서 나온 단어 중 상당히 거슬리는 부분이 있었다.

“선수였다고? 네가?”

“주니어요. 아버지가 나가보라고 해서 나갔던 것뿐인데 어쩌다 보니 뽑혀서 잠깐 했어요. 금방 그만뒀지만요.”

”왜 그만뒀는데? 재능이 없어 뵈지도 않는데.”

처음 잡아본 저격 소총으로 그가 해낸 일을 상기하며 에드워드가 묻자, 케일리는 고개를 기울이며 의문을 담은 채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재능이 없으면 그만둬야 하나요? 하고 싶으면 계속 하고 하기 싫으면 관두는 거죠. 그만둔 이유랄 것도 없는데, 다섯 번인가 메달을 가져가니까 이제 경기 나가라는 말을 안 하시더라고요. 어차피 경기도 아버지가 나가라고 한 것만 나갔어요. 처음부터 하고 싶었던 적도 없었고.”

드럼통 위에 세팅한 저격 소총을 짐가방 안에 갈무리한 후 그것을 등에 짊어진 케일리가 말을 멈춘 에드워드를 향해 다가왔다.

케일리의 손에는 처음 에드워드가 쥐어준 권총이 긴장감 없이 늘어져 있었다. 제 입으로 비효율적이라 폄하했던 무기를 쥐고 다가오는 이유를 알 수가 없어 의아한 얼굴로 미간을 좁히는 에드워드에게 케일리가 사내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분은 뱀파이어가 아니죠?”

“그건 왜.”

“그냥, 별로 궁금한 건 아니고요. 저분 벌써 눈이 재생되기 시작한 것 같은데 빨리 도망가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하다가 뱀파이어인 에드워드가 아직 제대로 못 움직이는 걸 보면 더 빨리 재생되는 분이 뱀파이어가 아니거나, 같은 뱀파이어라도 더 센 것 같다는 생각을 했죠.”

대단히 논리적인 상황판단 능력이었다.

“그래서 눈을 뜨면 한 번 더 쏴야 하나 고민 중이었어요. 기왕이면 뭔지 알고 쏘고 싶잖아요?”

판단능력에 문제가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나오는 말에 경중이 없었다. 가벼운 이야기를 할 때와 무거운 이야기를 할 때 화제의 심각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어투가 문제일까. 그래도 포인트는 잘 잡는 것 같은데.

케일리의 요상한 화법에 얼굴을 찌푸린 에드워드는 확실히 그의 말처럼 빨리 도망가는 게 현명하리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당장 이곳에서 최대한 빨리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신이 케일리를 짊어지고 뛰어내려야 했다.

보통 인간이 옥상에서 뛰어내렸다가는 대체로 다진 고기 신세가 되기 십상이니 어쩔 수 없다. 문제는 자신이 아직 인간 하나를 짊어지고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릴 만큼 회복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겨우 두 다리로 서 있던 에드워드가 폐를 관통한 갈비뼈를 피부 위에서 조심스레 쓸며 내장의 손상 정도를 가늠했다. 재생력이 현저히 떨어진 탓에 이 상태로 과하게 움직이면 어디까지 견딜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부러진 갈비뼈가 폐에 꽂힌 채 아물기 전에 그걸 뽑아내려고 해도 한 번 배를 갈라야 했고, 꽂힌 상태로 일단 케일리를 짊어지고 뛰어내리려 해도 그를 놓치지 않고 착지할 자신이 없었다. 그럼 문제는 이걸 어떻게 뽑냐는 건데…….

“저……, 뭘 하고 싶은 건지는 알겠지만, 그만두시는 게 좋을 텐데요.”

에드워드가 폐와 갈비뼈 사이에서 고민에 빠진 사이, 조용한 옥상 위로 케일리의 목소리가 잔잔하게 퍼졌다. 저한테 한 말인가 싶어 에드워드가 무슨 소리냐는 듯 시선을 던지자 케일리는 어느새 숨이 정리되어 몸을 일으키는 사내를 향해 있었다.

“인간…….”

분노에 잠긴 쇳소리가 음침하게 흘러나왔다. 어느 정도 고통이 가신듯 빨갛게 충혈된 안구는 상당히 진척된 재생으로 구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시야가 회복되었는지, 시신경의 재생이 끝났는지까지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두 발로 몸을 지탱하고 선 것만으로도 그가 움직일 만하다는 사실을 방증했다.

제대로 서니 덩치만으로도 두 배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상대를 눈앞에 한 채, 케일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평온한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아까도 생각했지만 종족 분류로 개인을 지칭하는 건 좋지 않은 습관이에요. 누구를 부르는 건지 구분하기가 어려우니까요. 인간은 지구에 칠십억이나 있고, 에드워드, 뱀파이어가 얼마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하나는 아닐 테죠. 부를 사람을 특정 짓는 게 귀찮음도 덜하고 좋지 않을까요?”

상황에 맞지 않는 지적이었지만 내용 자체에는 별달리 문제가 없었다. 에드워드는 그것이 케일리의 기본적인 사고방식이라는 것에 슬슬 적응해갔다.

졸지에 눈알이 터지고 인칭 대명사까지 지적당한 사내는 헛웃음을 내뱉으며 빠득 이를 갈았다.

“건방진 놈. 그 방종한 입부터 찢어발겨주지. 기껏해야 비루먹은 뱀파이어의 상비약 주제에 언제까지 떠들어댈지 두고 보자.”

“그러니까 그 이야기 말인데요, 안 그러는 게 좋을 텐데요.”

“감히 너 따위가 나를 누를 자신이 있다는 말이냐?”

사내의 말에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케일리는 그럴 리가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말갛게 말을 이었다.

“그렇다기보다는 저를 가만히 안 두려면 눈 하나는 떠야 할 텐데 눈꺼풀로 총알 막을 수 있으세요? 눈꺼풀도 다른 피부처럼 질기면 그럴 수도 있긴 하겠지만. 혹시 눈을 감고 움직일 수 있다고 해도, 콧구멍을 막고 움직일 건 아니시죠? 눈, 코, 입, 귀를 전부 막고 쫓아오는 건 힘들걸요.

제 생각에, 온몸이 단단한 생명체는 의외로 별로 없을 것 같거든요. 육체를 가졌으면 어딘가에는 약점이 있을 거고, 콧구멍은 보통 뇌랑 이어져 있고 귀도 그렇죠. 혀나 목구멍 안쪽은 어때요? 그 약점이라는 게 치명상을 입히는 약점이 아니라고 해도, 총 맞으면 아프죠?”

조준도 하지 않고 손에 들려 있기만 한 권총이 유난히 으스스하게 보이는 말이다. 내용은 딱 협박인데, 악의가 느껴지지는 않았다.

게다가 그가 역설하는 내용을 이미 몸소 겪은 사내의 입장에서 보자면, 케일리의 단조로운 충고가 협박이든 허세든 진실을 늘어놓는 것뿐이든 그 작태가 고와 보일 리는 없었다. 빠득, 이를 갈며 케일리의 머리통만 한 주먹을 그러쥔 사내가 성큼 다가섰다.

케일리의 시야로는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커다란 몸통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친절하게도 사내는 허리를 숙여 별다를 것이 없이 평온한 밤색 눈동자를 직시했다.

“크큭. 재밌는 농담을 하는군, 인간.”

목 안을 울리는 짐승 같은 웃음소리는 지옥 밑바닥에서 막 기어 올라온 것처럼 질척한 살기를 담고 있었다. 그 형형한 기운을 한몸에 받는 당사자는 정작 무슨 말이냐는 듯 두어 번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는가 싶더니, 지금까지와 별반 다를 바 없는 태도로 대답을 돌렸다.

“제가 언제 그랬나요? 전 농담 같은 거 안 하는데요.”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그것만 하지, 농담처럼 의미 없고 에너지만 낭비하는 연비 나쁜 행동은 안 하는데.

진지하게 덧붙이는 케일리에 사내가 일순 할 말을 잃었다.

“지금…… 진심으로 날 어떻게 해보겠다 지껄였다는 헛소리를 하는 거냐?”

“어떻게……, 그 표현에는 어폐가 있어요. 저는 그쪽을 어떻게 하고 싶지 않고, 사실 상대가 그쪽이 아니라고 해도 누구에게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거든요. 어쩔 수 없이 뭔가를 해야만 한다면, 그건 아마 그쪽이 먼저 제가 하기 싫은 일을 하게 만들 때 일 거예요. 그러니 엄밀히 말하면 저는 그쪽을 어떻게 하겠다고 말한 게 아니라, 그쪽이 저를 어떻게 하려고 할 때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나열한 것뿐이죠.”

어떻게 보면 그럴싸한 말이었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궤변이었다. 결국 나는 정말 귀찮고 그러기 싫지만 네가 정 나를 패 죽이겠다면 나도 가만히 있지는 않겠다는 아주 직설적인 메시지가 담겨 있는 길고 장황한 변명이기까지 했다.

에드워드와 대적할 때보다 훨씬 둔한 움직이었지만, 그것은 사내가 기력을 잃었거나 스피드가 떨어진 탓이 아니었다. 별 볼 일 없는 인간을 상대로 신체능력을 모조리 개방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을 뿐이다.

손을 뻗어도 피하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눈 하나 깜짝 않는 케일리는 담이 큰 건지 믿는 구석이 있는 건지 그것도 아니면 말 그대로 겁대가리를 상실했는지 알 수 없는 태도다.

어쩌면 동양의 우화에 나오는 어리석은 짐승처럼 간을 테이크아웃 해서 집 냉장고에 보관해두고 다니는 걸지도 몰랐다. 사내에게 있어서 만성빈혈로 비실거리는 뱀파이어보다 훨씬 흥미로운 상대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어느새 주먹을 푼 커다란 손이 케일리의 멱살을 잡아, 마치 봉제인형을 들어 올리듯 휙 잡아 올렸다. 졸지에 공중부양을 하게 된 케일리는 팔다리에 힘을 뺀 채 축 늘어진 편한 자세로 멱살이 잡힌 속에서도 나름의 방법으로 몸의 부담을 줄이고 있었다.

“인간.”

이번에는 자신이 허리를 숙이는 것이 아니라, 케일리를 들어 올려 시선을 부딪친 사내가 섬뜩한 목소리로 한주먹거리도 되지 않는 하등생물을 호명했다.

“케일리.”

하등생물이 순한 밤색 시선으로 무언가를 주장했다.

종의 분류가 아니라 명사를 이용하라고 했던가. 그래, 인간들은 산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곧 죽을 놈 소원을 못 들어주겠냐

그리 생각한 사내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케일리가 막 한 번만 더 인간이라고 불리면 같은 말을 반복하기가 귀찮으니 이제부터 자신의 이름을 인간이라고 여기면 될 것이라 생각하던 참이었다.

“그래, 인간 케일리. 내가 손수 네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발겨서 놈의 먹이로 던져줄 때도 그 시건방진 주둥아리를 놀릴 수 있을지 시험해보는 건 어때? 난 아주 유쾌할 거라는 생각이 들거든.”

내가 네 사지를 찢어발기는 게 빠를까, 네가 내 눈알을 뚫는 게 빠를까?

이죽거리며 멱살을 잡지 않은 반대편 손을 들어, 케일리의 오른 팔뚝을 움켜쥔 사내의 손에 서서히 힘이 들어갔다. 초식동물을 도망갈 곳 없는 구석까지 완전히 몰아넣어놓고 툭툭 건드리고 놀면서, 목덜미를 물어뜯을 타이밍을 노리는 짐승과 같은 눈빛이다.

살이 비틀리고 뼈가 아렸다. 점점 강해지는 악력에도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는 표정과는 달리, 케일리의 육체가 먼저 백기를 들었다. 관자놀이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고 입술이 덜덜 떨렸다. 빠직, 팔에서부터 불길한 소리가 났다. 뼈가 부러진 것이 아니라, 너무 강한 압력에 의해 으스러진 것이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과시하는 것처럼 팔 하나를 손아귀 힘만으로 으스러뜨린 사내는 축 늘어진 케일리의 오른팔을 힐끗 쳐다보며 크큭, 비틀린 웃음을 웃었다.

“자, 슬슬 그 잘난 사격솜씨를 보여줄 생각이 드나? 이래 봬도 네놈이 분수 모르고 지껄인 그 시건방진 충고를 어떻게 실현시킬지 기대하고 있다고. 네깟 게 감히 날 이기겠다고? 그래, 한번 시도해봐. 내 기꺼이 자비를 베풀어 당장 찢어발기지 않고 기회까지 줬으니 모쪼록 실망시키지 말아달라고, 인간 케일리.”

총을 쥐지 않은 오른팔이 흡사 시계추처럼 허공에 늘어져 힘없이 흔들렸다.

자신의 망가진 팔을 내려다보는 것치고는 지나치게 건조한 밤색 시선이 잠시간 그곳에 머물렀고, 이내 사내에게로 돌아갔다. 말없이 자신을 올려다보는 케일리의 시선이 사내는 어딘지 섬뜩하게 느껴졌다.

왜, 대관절 이 별 볼 일 없는 인간의 무엇 때문에 자신이……. 어린애 팔 비트는 것보다 쉽게 끝장난 케일리의 팔을 한번, 제 손에 의해 허공에서 달랑거리는 별달리 무게랄 것이 느껴지지 않는 인간 케일리의 몸뚱이를 또 한 번 내려다보지만 그 까닭을 알 수 없어 답답했다. 힘의 우위로는 견줄 가치조차 없었으며 기껏해야 총 쏘는 재주가 있을 뿐인 하잘것없는 존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내의 본능이 경고했다. 압도적인 강함을 눈앞에 할 때와는 또 다른 감각이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그래. 정체를 알 수 없는 미지의 존재를 앞에 했을 때 느끼는 무지에의 생경함에 가까웠다.

“아까는 잘도 씨불이던 잘난 혀가 이제 와서 돌이 되기라도 했나 보지?”

잠시간 머문 침묵을 깨며 사내는 자신의 감각을 부정했다. 눈앞의 인간에게는 그런 감정을 할애할 가치조차 없었다. 그가 무엇을 숨기고 있든, 여기서 형세를 역전시킬 방법은 전무했다. 분명히 그랬는데…….

“이……기다니, 누가, 그런 말을 했나요?”

식은땀을 줄줄 흘리면서도 어딘지 서늘한 얼굴을 한 케일리가 다소 힘이 빠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는 이긴다고 한, 적은 없어요. 그저, 저에게도 당신을 아프게 할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한 거죠.”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미처 이해하기도 전에, 케일리의 멀쩡한 왼손이 쥐고 있던 권총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힘이 빠진 것은 아니었다. 분명히 의도된 동작으로, 사내는 그가 가진 유일한 무기가 바닥을 한번 튕겨 올라 어두운 바닥으로 나뒹구는 것을 목격했다.

“저는 말이죠, 태어나서 한 번도 누군가를 이기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어요.”

만약 이것이 대치상황이 아니라 온건한 대화를 나누던 참이었다면 맥락에 어긋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케일리는 한쪽 팔이 으스러진 상태로 멱살이 쥐어 잡힌 채 허공에 달랑거리고 있었고, 마지막 보루였던 총마저 잃은 상태였다. 여기서 한가하게 하던 이야기나 계속해보자 맥을 잇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말이냐?”

당장 눈앞의 인간의 목숨줄을 쥐고 있는데도 손 안이 텅 빈 것 같은 감각이었다. 하릴없이 치솟는 불쾌감에 사내가 그르릉, 목을 울리며 커다랗게 숨을 뱉었다. 같은 순간 쨍, 콘크리트 바닥 위로 자그마한 금속 떨어지는 소리가 사내의 귀를 파고들었다.

“착각은 금물이라는 뜻이죠.”

쏙.

뜨겁고 부드러운 무언가가 입안으로 밀려들어왔다. 음영 진 얼굴 속에서 비이상하게 빛나던 사내의 안광이 일순 주저를 담았다. 눈으로 좇을 수 있는 정도의 속도로 올라온 케일리의 팔이, 어둠 속에서도 희게 빛나는 단정한 손이, 어색한 주먹을 쥐고 얼굴께로 다가온다는 사실은 감지했다.

결코 위협적인 동작은 아니었다. 위협적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뒤이어 쑤욱 하고 입으로 들어온 주먹이 느릿하게 빠져나갔고 그 손은 어째서인지 떠나지 않고 자신의 입가에 머물렀다.

‘뭐야, 이건.’

의아하게 그 손을 내려다보던 사내의 혀에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느껴졌다.

“이에 에에 우으……!”

이게 대체 무슨, 이라는 목소리가 제대로 나가지 못한 채 입안에서 종적을 감췄다. 케일리가 자신의 멱살을 잡은 손에 힘을 가하는 사내를 올려다보며 친절하게 설명했다.

“저를 놓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게 좋을 거예요. 그거 지연신관식 수류탄이거든요. 안전핀은 뽑았지만 손잡이는 제가 잡고 있어요. 손을 떼면 대충 오 초쯤……? 제 것이 아니다 보니 보관상태 문제로 약간의 오차야 있겠지만 폭발할 거예요, 그쪽 입안에서.

팔 한쪽을 못 쓰니까 불편하네요. 입까지 가져가는 동안 한 손으로 안전핀까지 뽑는 게 이렇게 어려울 줄은 몰랐어요.”

어딘지 투덜거리는 듯한 내용을 여상하게 중얼거리며 케일리는 자신의 멱살을 쥔 사내의 손 위에 제 턱을 올려놓았다. 사내의 입에 쑤셔 넣은 수류탄의 안전 손잡이를 잡고 있느라 팔을 치켜든 불편한 자세로 그가 말했다.

“제안을 할게요.”

사내의 표정이 처음으로 진심을 담았다. 분노와 당황, 그리고 하찮은 인간에게 허를 찔린 치욕이었다.

“저와 에드워드를 못 본 척해주시면, 에드워드도 그쪽을 못 본 척해줄 거예요. 그러면 서로 없던 셈치고 갈 길 가고, 귀찮은 일 없이 평화롭게 끝나는 거죠.”

사내의 눈동자에 불꽃이 일었다. 그렇다고 해서 성질대로 케일리를 찢어발길 수는 없었다. 그의 말은 옳았다. 케일리의 손을 떼어내고 입안의 수류탄을 뱉어내거나, 안전 손잡이를 스스로 잡는 것이 이론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눈앞의 인간이라는 변수가 지나치게 불확실했다.

팔 하나가 으스러지는 고통에도 식은땀을 흘릴 뿐 아무런 고통의 신호가 없는 것은 생물의 본능을 역행하는 것이다. 저 기분 나쁜 놈이 몸을 던져 수류탄 손잡이를 놓고 자신의 입을 오 초 간 틀어막는 데 성공한다면, 놈의 목적은 달성되는 셈이다.

비실거리는 뱀파이어를 가지고 놀 때와는 완전히 달라진 태도로, 사내는 진지하게 머리를 굴렸다. 지금 저 말에 동의하는 척하고 수류탄을 빼주면 그때 한입에 삼켜버리는 건…….

“에드워드.”

사내가 생각에 잠긴 사이, 케일리가 힐끗 상복부를 쥔 에드워드를 호명했다. 갑자기 지명당한 에드워드는 어딘지 질린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말고, 나? 난 왜? 하고 파란 눈을 끔뻑였다.

기실, 에드워드는 케일리의 대범하다 못해 여벌의 목숨을 성운 바깥에 키핑하고 다니는 것처럼 행동하는 꼴이 적잖이 볼 만하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만약 적이었더라면 뭐 저런 미친놈이 다 있는지 이가 닳아 없어질 때까지 갈아댔겠지만, 대충 아군 비슷한 것임에야 그럴 필요가 없었다.

저런 괴물을 상대로, 머리 꼭대기까지 기어 올라가 겁도 없이 탭댄스를 추는 수를 보여주는 인간은 고대에도 미래에도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걔랑 놀다 말고 갑자기 난 왜?”

폐를 찌른 갈비뼈의 고통을 말끔히 날려버릴 정도로 파격적인 수를 보여준 그를 향해, 에드워드가 한결 나아진 기분으로 대답하자 케일리가 말했다.

“그 문 말이에요, 지나가고 나면 사라지는 건가요?”

그가 말하는 문은 아마도 아니, 확실히 공간왜곡 장치를 의미하는 것일 테다.

“어.”

“여기서 열 수도 있나요?”

“연결시킬 문이 있다면.”

“잘됐네요.”

‘아하. 그런 거로군.’

에드워드는 처음으로 케일리의 기지에 감탄했다. 확실히 그 문을 이용하면 괴물 녀석이 말을 바꾼다 해도 손쓸 도리가 없다. 수류탄의 안전 손잡이를 놓은 후 폭발까지는 오 초의 여유가 있다.

그것을 뱉어내거나, 안전 손잡이를 다시 잡는 데는 수 초가 걸린다. 그러고 나면 괴물은 안전해지겠지만, 케일리와 에드워드의 안전이 위협당한다. 그렇다면 그가 안전을 확보하는 짧은 시간 동안, 두 남자 또한 자신들의 안전을 확보하면 되는 일이다.

자신이 사내와 교전하는 짧은 시간 동안, 케일리는 그가 가진 무기로 가장 효율적인 결과를 낼 길을 찾아냈다. 애초 에드워드가 무기를 담은 짐가방을 벗어 던진 것은, 그것이 통하지 않는 상대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사내의 피부는 총탄으로 뚫을 수 없을 만큼 질기고 단단했으며, 폭발의 진원지 안에서도 멀쩡하게 서 있을 만큼 튼튼한 육체를 가진 자였다. 다만, 에드워드와 사내 본인조차 생각해본 적 없는 표적, 즉, 눈과 입안을 노린 공격으로 케일리는 멋들어지게 허를 찔러준 것이었다.

그의 말이 맞았다. 뼈와 고기로 이루어진 생명체에게 약점이 없다는 건 말도 안 된다. 다만, 그 국부적이고 제한적인 약점을 전투 중에 노린다는 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경우가 대부분일 뿐. 국부적인 약점만 가진 강자와, 대부분이 약점인 육체가 맞붙는다면 전자의 얼마 안 되는 약점을 노리는 것은 더더욱 어려워진다.

총을 가졌다고 해서 눈이나 코나 귀나 입을 명중시켜 괜찮은 타격을 주는 것, 그리고 제 몸까지 사지에 밀어 넣으며 수류탄을 입안에 쑤셔 박고 협상을 논하는 태도. 무엇 하나 쉬운 일이 아니었고, 그런 방법을 떠올리는 것 자체가 평범한 인간-혹은 여타 이종족.-에게는 불가능에 가까운 기지였다. 그리고 케일리는 아무렇지 않게 그 일을 해냈다. 완벽에 가까운 탈출경로까지 확보한 채로.

“이건 진짜…….”

인간의 혈액을 주식으로 하는 뱀파이어가 피식자를 평가하기에 옳은 표현인지는 둘째치고서라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괴물의 입속에 수류탄을 꼴아박은 케일리를 향해 달리 어울리는 말이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에 잠시간 말끝을 흐린 에드워드가 눈을 가늘게 뜨고 중얼거렸다.

“진짜…… 또라이 새끼 아냐?”

에드워드는 인사부의 이빨 요정, 페어리를 아주 좆같은 직장동료라고 생각했지만 그가 무능하다 여긴 적은 없었다. 유능함과 좆같음은 언제나 공존할 수 있었다. 해서 페어리가 자신의 조건에 부합하는 파트너랍시고 어디 길거리에 굴러다녀도 이상하지 않을 홈리스 인간 하나를 주워다 대령했을 때, 에드워드는 그의 유능함을 알면서도 반신반의했다.

그만큼 자신이 내건 조건이 까다로웠고, 그것을 충족하는 상대가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잠시나마 이빨 요정의 유능함을 의심한 것을 반성하며 에드워드는 케일리가 조건만으로는 자신이 요구했던 파트너상에 부합한다는 것을 인정했다.

쓸 만한 정도가 아니었다. 케일리의 그것은 감탄을 넘어서서 경악을 금치 못할 정도의 두뇌 회전과 판단력이었다.

“자, 그럼 두 분 모두 동의한 것 같으니까 문을 열어볼까요?”

태연자약하게 상황을 정리하려 드는 케일리를 향해 핏발 선 눈을 치켜뜬 사내가 무어라 입을 벌리려다 말고 몸을 굳혔다. 현재 그는 고개를 끄덕이거나 가로저을 수조차 없는 상황이었으며 혀를 짓누르는 수류탄 덕분에 제대로 된 의사표현 수단이 없어진 상태였다.

꽤 오래 살았고-아마도 눈앞에서 갈비를 붙들고 선 비루먹은 뱀파이어의 수 배는 될 것이라 확신했다.- 쓰나미며 허리케인, 화산 분출 같은 자연재해를 시작해서 화재, 폭발, 총격까지 다양한 위험에 노출되었던 사내도 입안에서 수류탄을 터트려본 적은 없다.

수류탄뿐이겠는가. 입에 폭발물을 집어넣은 적도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육체가 어디까지 파괴될지 예측이 서지 않았다. 스스로가 반 불사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입안의 수류탄이 저를 어디까지 날려버릴 수 있을지 확신할 방도가 없는 상황에서 트리거를 쥔 인간을 개미새끼마냥 뭉개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뼈가 단단하니 두개골이 무사하다고 할지라도 내장이 무사하리라는 보장이 없다. 입안을 비롯한 연약한 기관이 모조리 스크램블 된다면, 그것을 재구성하는 데 얼마만큼 끔찍한 고통과…… 얼마의 시간이 들지도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에드워드는 케일리가 나타났던 옥상 문을 과장된 연극배우처럼 보란 듯이 열어 보였다. 문 너머는 숙소의 복도가 아니었지만, 케일리가 올라왔던 건물의 계단도 아닌 제3의 장소였다.

케일리의 팔이 안전 손잡이를 잡고 있을 수 있도록 멱살을 쥔 상태를 유지하고 있던 사내가 크르릉, 목을 울리며 분노했다.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없을 뿐더러 한낱 인간에게 의지를 억압당하는 상황 자체가 굴욕적이기 짝이 없었다. 그런 사내를 올려다보며 케일리는 파랗게 질린 입술을 느리게 달싹였다.

“혹시 아직도 고민 중이세요? 되게 끈질긴 사람이네.”

감정의 잔재가 적은 케일리 특유의 목소리에 드물게 귀찮은 기색이 서려 있었다.

“네 눈에는 그게 사람으로 보이냐?”

에드워드가 질린 어조로 물음을 던지자 케일리가 대답했다.

“아, 그 부분은 실언이었어요. 근데 이분은 무엇이시기에 이렇게 건강하대요? 뱀파이어보다 튼튼한 걸 보면 사람이 아닌 건 확실한데, 겉으로 보기에는 그냥 좀 커다란 사람으로 보이네요. 사람들 사이에 있어도 구분이 안 갈 것 같아요.”

“그렇게 따지면 라이칸도, 뱀파이어도 외형으로 인간과 구분 지을 확실한 특징은 없어. 왜, 인간의 격언에도 그런 말이 있잖아. 눈은 가끔 너희를 속인다고. 네 눈을 너무 믿지 마. 앞으로 여기서 일할 생각이 있다면, 더더욱.”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케일리는 어쩌면 연수를 통과할지도 모르겠다는, 그런 웃기지도 않은 생각이었다. 아니 사실은 어쩌면 이라는 가정을 붙일 필요도 없이, 그는 아무렇지 않게 그것을 해내고 자신의 옆에 서 있을 것만 같았다.

연수라고 해봤자 체력검사를 비롯한 체술, 사격술, 이종족 교양, 무기와 마법에 관련된 이론과 실전을 배우고 필드 업무 테스트에 적합 판정을 받아내는 것뿐이다. 오늘 보여준 사격솜씨라면 아마 현재 정식 필드요원들과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만큼 훌륭했고, 제 손에 있는 도구를 적재적소에 사용하는 것만으로 무기 이론과 실전을 배울 필요가 없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나머지 이종족에 관한 분야는 인간 요원의 경우 처음부터 시작하는 게 보통이니 중간 이상만 가면 떨어지지 않는다는 게 정설이니, 케일리에게서 연수를 탈락할 요소는 보이지 않았다. 페어리의 계약상 그가 무사히 연수를 끝내면 자신의 파트너로 일하게 된다.

에드워드가 지금까지 파트너를 거부했던 이유는 다섯 손가락이 모자랄 정도로 많았다.

그중에서도 세 가지만 꼽아보자면, 첫 번째로 인간 파트너는 열이면 열이 뱀파이어의 권속이 되기를 원했지만 그는 생피를 혐오한다는 것이었으며, 두 번째가 이종족 파트너의 뱀파이어에 대한 적대이며-지구의 이종족들 중에도 뱀파이어는 타 종족들과 어울리지 않는 폐쇄집단이었다.-, 마지막이 에드워드가 상대방의 무능함을 결코 용서하지 못하는 고약한 성격을 가진 탓에 파트너십은커녕 적진 한가운데에서 드잡이질을 하다 사이좋게 스틱스강을 향하는 제트 스키를 타는 일이 다반사였기 때문이었다.

그 외에도 사소한 이유는 셀 수 없이 터져 나왔다. 숙소를 지저분하게 사용했던 라이칸슬로프를 인간 사회에 섞여 살기 위한 기본 청결수준조차 지키지 못하는 더러운 네발짐승이라고 폄하하며 사비를 들여 개 훈련소에 보내버렸던 일이나, 단 사흘밖에 유지되지 못한 마녀와의 파트너십에서는 자는 사이에 마법 약의 재료가 되어 다져질 뻔한 적도 있었다. 2인 1조 잠입작전에서 오직 에드워드를 향한 평상시의 사소한 원한 때문에 -B 지구를 배반하고 직장을 버린 채 적진으로 넘어가버린 인간 마법사는 귀여운 축에 속했다.

그런 시기를 반세기 내도록 겪었던 에드워드는 결국 홀로서기를 선택했고, 페어리를 향해 정 2인 1조 룰을 지켜야 한다면 자신이 제시하는 조건에 들어맞는 놈을 데려다 놓으라고 엄포를 놓았다. 그 결과 나타난 게 케일리였다.

심지어 그는 자신이 건 말도 안 되는 조건 대부분을 훌륭하게 충족시켰다. 유능하며, 목숨에 집착해 일을 그르치지도 않고, 권속이 되는 데에도 흥미 없는 인간이라니. 자신의 파트너가 되기 위해 태어난 인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완벽한 조건이었다.

혹시나 싶어 넣어뒀던 청결 부분도 요 며칠 감시한 결과 그럭저럭 괜찮아 보였다. 애초에 청결이라는 조건이 들어가게 된 계기는 라이칸과 파트너를 짠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했는데, 당시의 숙소는 놈이 끌고 다니는 짐승들의 배설물과 털로 집요정 로라가 두 손 두발을 다 들고 주방 찬장에 처박혔을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다. 케일리라면 짐승을 끌어들이지도, 숙소를 쓰레기통으로 만들지도 않을 것 같았다.

더해서 자신을 마법실험의 재료로 생각하지도 않는 데다가, 사소한 원한으로 배신을 때린다든지, 혹은 스스로의 목숨을 너무 소중히 여긴 나머지 파트너를 던져 살아남으려 할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몸소 확인하게 된 터라 그를 거부할 만한 명분도, 이유도 없었다.

게다가 오늘 같은 날에는, 파트너가 있는 편이 수월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오늘 건 본래 잠복과 추적이었기 때문에 케일리라는 변수가 아니었으면 이 지경이 될 수가 없었지만 어찌됐건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낫겠지.

케일리에 대한 평가를 전반적으로 수정한 에드워드를 향해, 가만히 고개를 기울인 케일리가 물음을 던져왔다.

“그럼 이분은 ‘무엇’인가요?”

눈앞의 존재가 수류탄으로 입이 막혀 있지 않았더라면 직접 물어봤을 테지만 어쩔 수 없었다. 흘낏, 거구의 사내를 올려다본 에드워드가 간결하게 대답했다.

“구울.”

“구울? 신화에 나오는 좀비 비슷한 그걸 말하는 건가요?”

“틀린 건 아니지만, 걔보다 더 귀찮지.”

“정확히 어떤 점에서요?”

“걔는 픽션에만 있지만, 얘는 실존한다는 점.”

상대가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말도 한결 가벼워지게 마련이다. 사납게 노려보는 사내, 구울의 시선을 가볍게 무시한 에드워드가 아무렇게나 내뱉었다.

“확실히, 훨씬 귀찮네요.”

동의한다는 양 대답한 케일리를 향해 에드워드가 문을 가리켰다.

“정리됐으면 슬슬 가지? 그 팔, 빨리 처리 안 하면 혈관에 뼛조각이 들어가서 잘못하면 죽어.”

뼈는 부러졌을 때도 위험했지만, 으스러졌을 때 배 이상으로 위험해졌다. 자그마한 뼛조각 하나만 혈관을 잘못 타고 장기에 흘러가면 치명상을 피하기가 힘들었다.

-B 지구의 의료기술은 마법과 치유술이 융합되어 같잖은 인간의 것에 비할 바가 아닌 오버 테크놀로지였지만, 으스러진 뼈를 모아서 붙여놓는 데는 아무래도 시간이 필요하니 빨리 움직이는 게 나았다.

“그래요? 오늘은 실례가 많았습니다, 구울 씨. 저희는 먼저 가볼게요. 여기 문 앞에 조심히 놔주시면 제가 문을 넘어가면서 손을 놓을 테니까, 입에 있는 거 뱉으시고 최대한 멀리 뛰세요.

아까 보니까 다리도 엄청 빠르시더라고요. 삼 초 정도면 충분히 사정거리에서 멀어질 수 있을 테니 남은 이 초는 느긋하게 걸으셔도 돼요. 쓸데없이 뛰면 다리만 아프고 귀찮죠.”

별 쓸모없는 조언까지 덧붙이는 케일리를 잠시간 내려다보던 구울 사내가 이내 힘 빠진 표정으로 허리를 숙여 케일리를 문 앞에 내려놓았다.

케일리는 수류탄의 안전 손잡이를 잡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에드워드가 먼저 문을 통과했고, 뒤이어 그 또한 문 너머로 걸음을 옮겼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구울 사내와 케일리가 서로를 마주했다.

“그럼 셋 세고 놓습니다.”

하나, 둘, ……셋을 세는 타이밍에 케일리의 손이 사내의 입가에서 떨어졌다. 동시에 재빨리 그의 몸을 문 안으로 끌어당긴 에드워드가 수류탄을 뱉어낸 사내를 향해 진한 비웃음을 날린 후, 쾅! 문을 닫았다.

건방진 인간의 조언대로 주어진 오 초의 시간 중 삼 초는 뛰어야 하나, 뱉어낸 수류탄을 들고 잠시 생각하던 사내가 곧 그것을 있는 힘껏 허공에 던졌다.

쾅!

이어서 들리는 커다란 파공음과 밤하늘을 장식하는 폭발물을 올려다보며 구울 사내는 쩝쩝 입맛을 다셨다. 그들이 문을 넘어감과 동시에 공간왜곡의 효용이 다해, 문 너머에는 폐건물의 옥상을 내려가는 계단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까처럼 머리 꼭대기까지 화가 치밀어 오르지는 않았다. 그는 이미 상대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에드워드. 어디서 들어봤나 했더니, 그 순혈 도련님의 이름이었군.”

뱀파이어와 구울의 육체능력을 비교하자면, 대개 우열을 가릴 수 없도록 비등하다는 게 중론이었다. 다만 순혈 뱀파이어는 개체별로 다른 고유의 능력이 있다. 그 특성에 따라 대전하기 까다로운 상대가 되기도 했지만, 에드워드는 육탄전에서 자신에게 간단히 제압당했다. 그는 순혈 뱀파이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없을 정도로 허약했다.

영국 이민국의 순혈 뱀파이어, 에드워드. 그 혈통 좋은 순혈 가문의 막내 도령은, 까다로운 입맛으로 흡혈을 거부한 지 300년이 지난 독종으로 유명한 자였다. 인간도 아닌 주제에 만성적인 굶주림으로 고생하면서 고집스레 폐기 혈액만 주워 먹고 다니는 미친 뱀파이어라고 같은 순혈 사이에서도 악명 자자한 반항아라고 했던가.

나름대로 유명하다고는 해도 그가 통성명을 하면서 이민국의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까발리고 다니는 게 아닌 한 곧장 알아채는 건 불가능했다. 다만 같은 분류의 이종이라면 어느 정도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고, 구울이 그의 정체를 꿰뚫은 건 바로 그런 이유였다.

언데드인 구울이 같은 언데드인 뱀파이어를 알아보는 건 본능의 영역이었다. 뱀파이어인 에드워드가 구울인 자신을 곧장 알아본 것과 같은 본능이다. 상대의 정체를 알아냈으니 오늘의 치욕을 되돌려줄 방법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다. 그의 집안을 생각하면 아주 귀찮아질 가능성이 높기는 했지만, 어찌됐건 그랬다.

“그런데 그 인간은 대체 뭐였지? 순혈 도령이 끌고 다니는 걸 보면 이민국의…… 요정인가?”

폭력에 무감하고 전두엽이 없는 것처럼 움직이는 이종족 하나를 꼽아본 구울 사내가 고개를 기울였다. 요정이라기에는 마법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는데, 평범한 인간이라고 하면 아주 심각하게 자존심에 상처를 입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런 이유로 그가 요정이기를 바라는 것도 없잖아 있었다.

코끝을 맴도는 화약 냄새를 맡으며 사내는 자신이 버려둔 대 이종족 포탄이 있는 지상에 뛰어내렸다. 이민국의 감시가 붙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아무런 수확이 없는 건 아니었다. 고용주에게 오늘 겪은 일을 전달해야겠다 심심히 생각하며, 사내는 본래의 목적지를 향해 뛰었다.

평화로운 달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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