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sion2. Who are you? (2)
에드워드가 연 문의 반대편은 24시간 체제로 운영되는 -B 지구의 의료시설이었다. 확실히 숙소로 이동하는 것보다는 의료시설로 직행하는 게 현명한 선택이었다. 케일리의 팔과 에드워드의 갈비뼈 상태로는 숙소로 돌아가봤자 환자만 둘 늘어날 뿐이었으니 말이다.
이런 경우가 왕왕 발생하는지, 계약 시 방문했던 인사부와 같은 지하 본부 안에 있다는 의료시설에는 문을 통해 드나들 수 있는 전용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에드워드의 말에 따르면 ‘문’ 너머가 안전한 장소일 필요가 있기 때문에 잘 모르는 곳에다 생각 없이 문을 연결시키는 건 좋지 않는 모양이다. 에드워드의 숙소와 호수가 적혀 있던 문의 방을 떠오르게 만들지만, 그보다는 비교적 작은 규모로-필드요원들의 것뿐이라 수가 적다고 한다.- 문이 늘어선 공간을 넘어가자 반대편에는 인간 세계의 응급실과 별반 다르지 않은 광경이 펼쳐졌다.
굳이 다른 점을 꼽자면, 의사가 지나치게 젊거나-그것은 비교적 온건한 표현으로, 실제로는 미성년자로밖에 인식할 수 없을 정도로 작고 어려 보였다.-, 지나치게 나이를 먹었다는 것 정도일까.
늘어진 침대와 종종 훤히 열려 있는 칸막이 사이로 보이는 환자의 경중에는 대중이 없었지만, 눈으로 보이는 참상에 비해 소란이 적었다.
하얀 커튼을 흠뻑 적신 핏물이나, 아무리 봐도 치료를 목적으로 이용하지는 않을 법한 줄톱을 들고 헐레벌떡 뛰어다니는 하얀 가운의 너무 적거나 너무 많이 먹은 의사들이 알아듣지 못할 말을 외치는 것 외에는 별다를 소란이 없었다. 피가 튀고 살이 찢어지는 와중에도 치료를 하는 이나, 치료를 받는 이나 평화롭기가 그지없었다.
이곳의 의료기술이 아주 선진적이고 뛰어나서 환자 만족도를 최상으로 유지하고 있거나, 혹은 여기 있는 환자들이 고통에 대해 독특한 견해를 가진 게 아닐까 의심스러웠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케일리는 슬슬 한계까지 올라온 오른팔의 고통을 지금껏 참고 있는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아, 혹시 다른 사람들도 아파하는 게 귀찮은 건가, 라는 자기 본위적인 해석을 첨가하던 중이었다.
“뭐가 그렇게 신기해?”
식은땀을 줄줄 흘리면서도 데굴데굴 눈알을 굴리는 케일리를 끌어 빈 침대에 앉힌 에드워드가 물었다. 표정에 큰 차이는 없었지만 시선이 참으로 부산스럽게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에드워드의 고유능력이 타인의 감정을 읽어내는 것이 아니었더라면 잡아내지 못할 정도로 미세한 변화였다.
나란히 이어진 옆 침대에 걸터앉아 느린 동작으로 상의를 벗어 던지기 시작한 에드워드를 바라보며 나도 옷을 벗어야 하나, 그런데 오른팔을 소매에서 빼내면서 기절하지 않는 게 가능할까, 머릿속 한켠으로 생각하던 케일리가 대답했다.
“처음이거든요, 병원 와보는 거.”
누군가에게 ‘나 처음이에요.’라는 말을 듣기에 병원은 그리 적합한 장소가 아니었다. 케일리를 평범한 홈리스라고 생각했을 때와는 달리, 그가 사격을 정식으로 배웠고 선수까지 할 정도의 실력자라는 이야기를 들은 후인 에드워드가 잠시간 침묵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중산층 이상의 가정에서 유복하게 자란 놈이었는데 어째서 병원에 간 적이 없었던 걸까.
“어지간히 튼튼한 꼬마였나 보군.”
대개는 유년기를 보내며 홍역이니 볼거리 정도는 앓고 지나갔지만, 드물게 잔병치레가 없는 아이도 있다고 하니 그런 맥락이겠거니, 생각했지만 이어지는 케일리의 대답에 에드워드는 완전히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아, 그런 것보다는 집에도 시설이 있었기 때문에 갈 필요가 없었으니까요. 저택에 주치의가 상주하고 있기도 했고, 어린 시절부터 개인 트레이너가 붙어서 건강관리를 해줬기 때문에 잔병치레도 별로 하지 않기는 했던 것 같아요.”
집이 아니라 저택에 의료시설을 상비하고, 주치의가 상주하며, 개인 트레이너에 의한 관리를 받는 전직 국가대표 주니어 사격선수……. 어딜 어떻게 생각해도, 홈리스로 굴러다닐 배경은 아니었다.
에드워드 또한 그럴듯한 가문의 이름을 가지고 유년기를 부유하게 보냈기 때문에, 케일리의 이야기가 모두 사실이라면 그는 평범하게 잘 사는 가정 같은 게 아니라 어마무시한 상류 사회의 일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 주제에 어째서 페어리의 마수에 걸려 쫄래쫄래 여기까지 기어들어왔는지는 둘째치고서라도 말이었다. 혹시 집안이 쫄딱 망했나. 그렇게 생각하니 눈앞의 인간이 다소 가엾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가출한 지 제법 시간이 흐르기는 했지만, 에드워드가 나고 자란 가문에는 망한다는 개념이 없었다. 가문의 일원 중에는 인간들 사이에 섞여서 더 많은 부를 창출해내는 사업가 뱀파이어를 비롯해 그들에게 고용된 가문 출자 회사의 회계사, 변호사, 변리사만 세어도 두 손 두 발로 꼽을 수 없을 정도다. 그들이 운영하는 기업의 고용자는 더 이상 수를 셀 엄두가 나지 않으니 말 다 했다.
세계의 부를 나눠 먹는 상층부에는 보통의 삶을 살아가는 인간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이종족이 섞여 있었다. 에드워드가 알고 있는 영국 상류층 사회만 생각하더라도-집을 나온 지 꽤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이번 세기에 일어난 세대교체까지 파악하지는 못한다 해도.- 삼분지 일은 이종족이다.
그런 의미에서 케일리가 만약 상류사회의 일원이었다 하더라도, 그의 집안이 쫄딱 망하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결론이 나온다. 단순계산으로도 인간은 주어진 육체의 시간에서 이미 이종족에게 월등히 밀리는 조건으로 경쟁했다. 그러니 이종과 인간으로는 쌓아놓은 부의 규모도 다른 게 당연했다.
고급 교육을 받은 케일리가 어째서 길바닥을 전전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생각하면서도, 에드워드는 그가 안고 있는 문제가 자신이 안고 있는 문제와 맥락을 같이한다는 사실에까지 다다르지는 못했다.
제 현 상황이 동족들 사이에서 이단으로 취급받을 만큼 정신 나간 행보라는 것은 자각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실이 케일리가 원인은 다를지언정 멀쩡한 집을 두고 가출한 몸이라는 곳으로 이끌어주는 건 아니었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에드워드가 케일리의 미스터리를 파헤치는 사이, 하얀 가운을 입은 자그마한 인영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에디. 네가 웬일이야, 이런 델 다 오고? 드디어 내 침대에 누워줄 생각이 들었어?”
사랑스러운 목소리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부터 에드워드를 향해 익숙하게 말을 걸어왔다. 케일리와 에드워드가 마주 앉은 두 개의 의료용 침대 사이로 걸어 들어온 것은 놀랍게도, 품이 남는 하얀 가운을 걸친 소녀였다.
꿀빛 웨이브를 허리까지 내려뜨린 사랑스러운 외모의 소녀는 기껏해야 막 십 대에 접어들었을 것으로 예상되는 동안의 소유자였다. 만약 그녀가 외견 그대로의 나이였다면 이 의료시설에서는 무면허 미성년자의 불법 의료행위가 자행되고 있다는 뜻이 될 테니, 케일리는 가능하다면 그녀가 대단한 동안이기를 바랐다.
신체의 특정 부위 하나하나에 미련을 가지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오른팔을 영영 못 쓰게 되면 남은 생애의 왼팔 운동량이 150퍼센트 정도 증가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전에도 말했지만 뱀파이어는 불사가 아닙니다, 그렌샤. 병원이 필요할 때도 있다고요.”
짜증스럽게 미간을 찌푸린 에드워드는 자신의 반절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어린 계집아이를 향해 표정과는 달리 비교적 정중한 어투로 그렇게 말했다.
그를 코로 웃으며 익숙하게 받아넘긴 소녀, 그렌샤가 엄지를 들고 케일리를 가리켰다.
“얜 뭐냐?”
“새, 파트너요.”
“아, 그러고 보니 너 이번에는 이빨이한테 졌다며?”
“지기는 누가 집니까! 얘는 지금까지 데리고 다녔던 애들하고는 달라서 한번 써볼까 양보해준 것뿐입니다!”
진한 미소와 함께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는 그렌샤에게 에드워드가 불쾌한 얼굴로 소리쳤고, 뒤를 잇는 케일리에 대한 평가는 어딘지 부루퉁한 변명처럼 이어졌다.
-B 지구 안에서 꽤 오래 일한 에드워드와 페어리는 사이가 험악하기로도 유명했으며, 서로가 서로를 오물 보듯 피해 다니는 덕분에 그다지 부딪히는 일이 없었다. 다만, 한번 부딪히면 피를 보지 않고는 넘어가는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빨 요정과 미치광이 뱀파이어의 난투에 대한 소문은 반나절을 넘기지 않고 -B 지구에 퍼져나갔다.
그렇게 오래 일해놓고 여전히 신선한 견원지간을 유지하는 둘의 관계를 즐겁게 관전하는 입장에서, 그렌샤는 며칠 전 흘러들어온 싱싱하고 흥미진진한 소문에 관심이 많았다. 바로, 자신의 눈앞에 있는 인간 청년에 대한 소문이었다.
“네가 다른 녀석을 칭찬하다니, 내일은 해가 동쪽에서 뜰 일인데?”
“해는 원래 동쪽에서 뜹니다만?”
“내 말이 그 말이야.”
“아뇨,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제발 대화를 할 때는 인간들이 쓰는 공용어로 부탁드립니다. 아무래도 종족 간 감각 차가 너무 커서 대화가 성립되지 않는 것 같거든요.”
에드워드가 힘 빠진 얼굴로 입술만 달싹이며 웅얼거렸고, 그렌샤는 뭐 그런 걸 다 신경 쓰냐며 그의 벗은 등판을 짝 소리가 나도록 두들겼다.
“윽!”
폐에 박힌 갈비뼈를 망치로 쾅 두들긴 것처럼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내달렸다. 달콤한 외견에 어울리지 않는 무식한 손아귀 힘을 알면서도 피하지 못한 스스로를 원망하며 에드워드는 침대 위에 상체를 쓰러뜨린 채 잠시간 고통에 꿈틀거렸다.
“으윽. 드디어 노망이라도 난 겁니까? 환자를 이딴 식으로 다루는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정작 고통을 준 당사자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어깨를 으쓱하는 게 고작이었지만.
“왜, 어디 내장이라도 다쳤냐? 뱀파이어씩이나 되는 게 칠칠치 못하게. 넌 튼튼하니까 2번 타자. 먼저 얘 팔부터 어떻게 해야겠다. 얼굴색이 무슨 머랭 반죽같이 질렸네.”
멀뚱히 에드워드와 소녀의 대화를 지켜보던 케일리가 느리게 시선을 옮겼다. 팔에서부터 시작된 고통은 거의 마비된 상태였지만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식은땀이 멈추지 않는 걸 보면 스스로도 위험하지 않은가 멍한 정신으로 생각하던 참이었다. 덕분에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가 머릿속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렌샤가 트레이에서 가위를 집어 케일리의 오른 소매를 싹둑 잘라냈다. 그리고 남은 상의를 오른팔에 무리가 가지 않게 벗겨내자 드러난 팔의 상태는 눈으로 보기에도 확연할 정도로 처참했다.
구울 사내가 쥔 손의 형태 그대로 으스러진 뼈 탓인지 바깥으로 드러난 팔뚝이 파랗다 못해 검게 죽었고, 기이할 정도로 부풀어 올라 있었다.
“의사 선생님……?”
몽롱한 밤색 눈이 의문을 담고 자신을 쳐다보는 것에, 그렌샤는 순한 녹빛 눈매를 예쁘게 접어 웃어 보였다.
“응. 내가 의사.”
결코 의료행위에 신뢰를 주는 웃음은 아니었다.
보통 인간 요원들은 -B 지구 직원의 반수 이상이 이종족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병동에서 일하는 이들의 외견을 보고 화들짝 놀라는 일이 많았다.
병동 직원의 대부분이 치료행위에 있어서 인간 의사와 최신 의료기술을 가볍게 무시하는 무시무시한 실력자들이며, 의술을-이라기보다는 치료술.- 행하는 특성상 상위마법 이용자가 많다는 특징 때문에 외견만 봐서는 연령이나 종족을 파악하기 어려우니 어쩔 수 없었다. 그렌샤는 병동의 직원 중에서도, 외견 연령이 상당히 낮은 축에 속했다. 기껏해야 열두어 살이 될까 말까 한 정도일까.
케일리가 의문스럽게 고개를 기울이는 것을 지켜보며 뱀파이어 꼬마의 새 파트너는 자신을 향해 어떤 반응을 보일까, 흥미진진하게 답을 기대하던 찰나.
“혹시 요정이신가요?”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질문은 그렌샤의 예상과 한참이나 동떨어진 것이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요정처럼 예쁘셔서요.”
“아하하, 너 세상 살 줄 아는구나? 누구랑은 아주 딴판인 게 마음에 드네. 좋았어, 내가 이 걸레짝 같은 팔을 깨끗하게 고쳐주도록 하지.”
기분 좋게 웃으며 그렌샤가 케일리의 팔을 가리켰다. 걸레짝이라는 표현과는 달리 조심스럽게 다가온 손이 허공을 휘저었다.
“요정이 아니신가요?”
밤색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묻는 케일리를 향해, 상체를 눕힌 에드워드가 버럭 소리쳤다.
“그 여자의 어디가 요정으로 보여! 그리고 넌 요정에 대해 뭔가 크게 착각하고 있어. 이빨 요정을 생각해보라고. 요정이란 건 그런 족속이니까.”
“음, 요정이 아니시라면……?”
케일리가 아는 이종족 베리에이션은 아주 적었다. 신화에 별달리 관심이 없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상식선에서 알고 있을 법한 이종족은 케일리가 아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그의 생략된 물음에 대한 답변은 에드워드에게서 돌아왔다.
“용이다.”
그건, 케일리의 빈약한 이종족 데이터베이스에도 들어 있는 종족이었다. 그가 알고 있는 용과 눈앞에 있는 용의 모습은 그 사이에 스틱스강을 둔 것처럼 어마어마한 간극이 있었지만, 그는 대체로 의심이라는 감정과 동떨어진 삶을 살아왔으며 이번에도 별다른 저항감 없이 주어진 사실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그렇군요, 확실히 용은 인간의 관점에서도 아름다운 생물이라고 표현되는 일이 많았죠.”
케일리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흐려지는 시야를 다잡았다. 그러고는 눈앞의 상대를 요정같이 예쁜 소녀가 아니라, 금빛의 아름다운 용이라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그녀가 용이 아닌 것보다 용인 편이 낫기도 했고, 사실 누군가가 용이든 아니든 케일리는 그것이 본인과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의심을 할 필요가 없었다.
세상만사 마음먹은 대로 흘러간다는 것은 케일리의 몇 안 되는 인생 지론 중 하나였다. 외부의 자극에 반발하고 역행하기보다는 순응하기로 마음먹으면 모든 것이 평화로워진다. 그리고 대부분의 귀찮음이 눈 녹듯 사라졌다. 그러므로 케일리에게 있어서 타인을 의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논리적인 추론을 제외한 사념은 대개 감정소모로 이어지게 마련이었다. 케일리가 생각하기에 살아가는데 있어서 필요한 판단 이외의 것에 연연하는 것은 선택의 문제였다. 자신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만 하기로 선택하면, 그 뒤는 그저 주어진 선택에 대한 결과값에 미련 없이 몸을 내맡겼다.
눈앞의 소녀가 용이며 자신의 걸레짝 같은 팔을 고쳐주리라 한 점 의심 없이 믿기로 한 케일리가 신뢰의 눈길을 보내자 그렌샤의 맑은 녹빛 눈동자가 반짝 빛을 발했다.
“그 뭐냐, 팔에다 요즘 유행하는 눈 뿌리기나 얼음 만들기 같은 기능이라도 달아주랴? 손에 닿는 건 뭐든 얼음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고, 언제 어디서든 눈싸움을 할 수 있는 끝내주는 옵션인데, 아무한테나 해주는 거 아니다? 거 남자한테 뒤통수 맞은 동생 때문에 고생한 애가 뜬금없이 유행시켜놨지만, 원래 그런 건 우리가 더 잘하거든. 요즘 어린애들이 그런 거에 환장을 한다며? 어떠냐, 아가? 너도 가지고 싶지?”
싱글싱글 웃는 얼굴로 케일리의 팔을 가리키며 그렌샤가 어딘지 신이 난 목소리로 권했다. 마치 팔십 먹은 노인네가 여덟 살 된 손자를 데려다 놓고 ‘알사탕 하나를 더 주랴?’ 하는 듯한 가벼운 어조였기 때문에, 무슨 말을 들어도 동요하지 않는 케일리마저 잠시간 자신이 고통 때문에 청각까지 문제가 생긴 건 아닌가 고민했다.
그러나 그렌샤는 진심으로 남자한테 뒤통수 맞은 동생 때문에 고생한 애가 유행시켜놨다는 얼음 만들기 기능을 선물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자신의 팔 근처에서 알짱거리는 그렌샤의 손 주위에 냉기가 감돌았기 때문에 케일리는 걱정스러운 어조로 입술을 달싹였다.
“저, 손에 닿는 게 얼음이 되면 세수는 어떻게 하나요?”
“세수를 하면 안 되지. 얼굴로 얼음상 만들 일 있어?”
“그건 좀 곤란한데요…….”
“큰 힘을 얻기 위해서는 그만한 희생이 필요한 법이야. 욕심은 화를 부른다고.”
본인이 주겠다고 큰소리를 떵떵 친 주제에, 마치 케일리가 그것을 달라고 탐욕을 부린 것마냥 금세 표정을 찌푸리는 그렌샤에 에드워드가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감싸 쥐며 말했다.
“별 쓸모도 없는 거 떠넘기려고 하지 말고, 팔이나 봐주시죠.”
-B 지구 런던 지국 안에서 비공식 랭크로는 언제나 꼭대기에 꼽히는 그렌샤는, 뱀파이어나 요정과 비교해도 나란히 세울 수조차 없을 정도로 까마득한 세월을 산 주제에 하는 짓은 영락없는 어린애였다. 게다가 종잡을 수 없는 변덕쟁이기까지 해서 치료 할 마음이 사라지기 전에 얼른 치료를 받는 게 현명했다.
용이라는 위대한 명찰을 달고도 인력난에 시달리는 -B 지구 의료팀 중에 가장 한가한 스케줄을 자랑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조금만 기분이 내키면 어떤 이에게는 평생의 염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강대한 힘과 천금을 멋대로 떠안기는 주제에, 자신의 호의에 심벌즈를 치고 팀파니를 두들기지 않으면 당장 얼굴색을 바꿔버리니 대하기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게다가 까딱 입을 잘못 놀렸다가는 말 그대로 입에서 불을 뿜는 용의 아가리에 통구이가 될 가능성이 상당히 높음에야, 아무리 의료기술이 뛰어나다고 해도 환자들이 그녀를 기피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인과였다.
“에잉, 요즘 애들은 다 좋아한다던데 새끼 모기 네가 뭘 안다고 앵앵거리냐?”
“좋아하고 자시고, 장난감을 주고 놀게 하려면 일단 애를 고쳐놔야 할 것 아닙니까? 얘는 인간이라고요. 이러다 죽으면 당신이 책임질 겁니까?”
“그야…….”
에드워드의 말에 무어라 반박하려던 그렌샤가 반쯤 눈이 감긴 채 흐느적거리는 케일리를 바라보며 말을 흐렸다. 확실히 이대로면 오래는 못 버티지 싶었는지, 에드워드를 노려보면서도 케일리의 앞으로 다가간 그녀가 까맣게 부풀어 오른 그의 팔을 어루만졌다.
“일단 통증부터 멈춰볼까?”
그렌샤의 손이 다가오는 것을 보며 케일리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어지간한 고통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몸이 반사적으로 다가올 통증에 대비한 것이다.
실내 환풍기의 바람이 닿는 것만으로도 살이 에이고 찢기는 것처럼 고통이 내달릴 것 같았으나, 놀랍게도 그렌샤의 손끝이 닿는 순간 거짓말처럼 전신을 에워싼 고통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인간은 연약해서 치료하는 도중에 넘어가는 일이 허다하다 보니 나도 노하우가 생겼단 말이지. 아가는 잘 참는 것 같지만 그래도 덜 아픈 게 좋지?”
고통이 사라진 것뿐만 아니라, 마치 어깨 밑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가벼운 감각에 케일리가 눈을 가늘게 떴다. 평소에도 어깨가 이렇게 가벼우면 좋을 텐데, 머리 한켠으로 생각하며 그가 느릿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니까, 지금 무언가 질문을 받은 것 같았는데 내용이 뭐였냐면…….
“아, 맞아요. 덜 아플 수 있다면 그 편이 좋죠.”
그래, 아픈 게 싫지 않냐는 물음이었다.
“이건 마취 같은 건가요?”
어렸을 때 사촌동생이 탄 말 뒷발에 차여 다리가 부러진 적이 있었다. 당시 케일리는 로체스터 가문의 부락에 속한 최신 의료시설에서 전신마취를 하고 수술에 들어갔는데, 그때의 감각은 바로 어제의 것처럼 선연히 기억에 남아 있었다.
두 번, 세 번, 눈을 깜빡인 것만으로 온 전원 스위치를 내려버린 것처럼 순식간에 의식이 꺼지는 기묘한 감각이었다. 적어도 팔 하나를 몸에서 일시적으로 떼어버린 것처럼, 가볍고 아무렇지 않은 느낌으로 순식간에 이루어지는 일은 아니었던 걸로 기억했다.
느릿느릿 흘러나온 케일리의 물음에 그렌샤는 메스를 들어 그가 보든 말든 개의치 않고 팔을 절개하는가 싶더니, 마치 퍼즐 조각을 맞추듯 엉망진창이 된 뼈의 조각조각을 맞췄다.
“네 오른팔에 흐르는 시간을 잠깐 멈췄지. 마취가 아니라, 용의 마법이야.”
어째서 메스를 들었는지 의문스러울 정도로 그렌샤의 손은 쓸모가 없었는데, 일단 절개해 개봉된 팔 안에서 피에 젖은 뼛조각들이 팔 근처 허공에 둥둥 떠서는 저 알아서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실질적이고 물리적인 의미로 그녀가 손을 쓴 것은 피부와 근육을 절단한 그 순간뿐이었다.
“와…… 그런데 마법으로 시간을 멈출 수 있다면, 팔을 원래대로 돌릴 수는 없는 건가요?”
케일리가 생각하기에 마법이라는 절대적인 힘이 존재한다면, 뼈를 조각조각 맞추는 것보다 뿅 하고 주문을 외워 팔을 원상복귀 시키는 것이 훨씬 효율적일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렌샤는 맞춰져가는 케일리의 뼈를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할 수는 있지만, 안 해. 시간을 멈추는 것과 시간에 손을 대는 건 완전히 다른 개념이거든. 시간을 멋대로 움직이려 들면 큰코다친다고. 네 팔을 다치기 전으로 돌리면, 어차피 시간은 다시 흐를 테니까 다시 지금 상태로 돌아오게 되어 있어. 그리고 다 나은 후의 미래로 되돌리면, 네 몸에서 팔만 그 시간만큼을 덜 살게 되는 거지. 어느 쪽이든 별로 좋은 방법은 아니야.”
그렌샤의 말에 잠시간 생각에 잠겼던 케일리가 물었다.
“그러면 지금 멈춘 시간만큼 제 팔은 더 살게 되는 건가요?”
“그렇지. 하지만 팔이 삼십 분 정도 더 살아 있는다고 해서 문제 될 게 있나? 적어도 팔만 먼저 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어?”
“그건 그러네요.”
“그렇지? 그러니까 이 정도는 괜찮아.”
그렇게 말하며 그렌샤는 어느새 몸을 일으킨 에드워드의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런데 그 팔은 어쩌다 그런 거냐? 둘이 놀다 보니 배고파져서 팔뚝으로 미트볼이라도 만들려고 한 거야? 근데 뼈는 먼저 발라내고 뭉개야 할걸. 요리를 하려면 레시피를 잘 봤어야지. 순서가 글러먹었네, 글러먹었어. 뭐든 전문가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최고라고.”
그렇게 조언하는 그렌샤를 바라보며 미트볼의 조리법을 모르는 케일리는 고개를 모로 기울였고, 뱀파이어씩이나 되는 게 아직도 그러고 다니냐는 에두른 비꼼을 알아들은 에드워드만이 그럼 그렇지, 오늘은 왜 얌전히 넘어가나 했다, 하는 얼굴로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 정도면 인간치고는 선방한 편이죠. 상대가 상대였으니까요.”
“왜, 뭐였는데?”
“구울.”
“아하, 구울한테 이렇게 당하는 걸 보니, 넌 아직도 쓰레기나 주워먹고 다니는가 보지?”
무어라 반박하려 입을 연 에드워드는 잠시간 그렌샤를 노려보다가, 무슨 말로도-뿐만 아니라 힘으로도.- 이길 수 없는 상대라는 것을 깨닫고 쓸데없이 힘 빼는 일 없이 체력을 온존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네 말대로면 얘는 구울이랑 붙어서 이렇게 멀쩡하다는 말이잖아? 평범한 인간 같은데 뒷주머니에 뭘 차고 다니기에 그런 묘기를 부린다냐?”
벌떡 일어나 케일리에게 다가온 그렌샤가 식은땀에 젖은 그의 볼을 양손으로 콱 움켜쥐는가 싶더니 이리저리 돌려봤다. 그가 정말로 무언가를 숨기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꼼꼼하게 살펴본 후에야 자그마한 손이 떨어져나갔다. 그렌샤의 손이 지나간 자리에 빨갛게 작은 손자국이 그대로 남았다.
“구울이 그렇게 강한가요? 뱀파이어보다 더?”
제 눈으로 지켜봐놓고도 누가, 더 정확히는 어떤 종족이 우위에 있는지까지는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에 케일리가 그렇게 물었다. 에드워드는 칫, 하고 혀를 차며 시선을 피했고 그렌샤는 아하하, 배를 잡고 뒤로 넘어갔다.
“뱀파이어랑 구울이면 비슷하지. 근데 얘처럼 편식하고 이상한 것만 먹고 다니면 클 것도 안 크고, 원래 있는 힘도 제대로 못 쓰니 종족 대 종족의 비교는 의미가 없어지는 것뿐이야.”
“아, 그래서 그분이 에드워드를 보고 빈혈이라고…….”
“쓸데없는 말 하지 마.”
케일리의 입에서 흘러나온 거슬리는 단어에 에드워드가 말을 끊었다. 그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는 듯 화제를 바꾸기 위해, 에드워드가 그러고 보니, 하며 화제를 돌렸다.
“넌 상대가 뭔지도 모르면서 잘도 그 입에 손을 쑤셔 넣을 생각을 했더군 그래.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그 말이 딱이야. 내가 그렇게 오래 산 것도 아니지만, 인간이 구울의 입에 손을 처넣는 꼴을 두 눈 똑바로 뜨고 보게 될 날이 올 줄은 상상도 못했으니 자랑스럽게 여겨도 될 거다.”
비꼬는 건지 감탄하는 건지 애매한 에드워드의 말에 제일 먼저 반응한 것은 그렌샤였다.
“응? 구울 입에 뭘 쑤셔 넣어?”
“손이요, 손. 저 멍청이가 구울의 입에 수류탄을 처박는 협박질을 했으니 팔 하나로 끝난 거지, 아니었으면 지금쯤 녀석의 뱃속에서 어제 먹은 옆집 아줌마랑 소화되고 있었을 겁니다.”
정말이라는 양 대답하는 에드워드에 잠시간 말이 없던 그렌샤가 이번에는 케일리를 향해 물었다. 에드워드를 향한 노골적인 불신의 빛이 서린 눈빛이었다.
“아가, 너 정말로 그랬냐?”
그렌샤가 무엇을 확인하고자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는 케일리가 느리게 눈을 깜빡였고 통증이 사라진 덕분에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되물었다.
“왜요? 구울에게 그러면 안 됐나요?”
의문이 담긴 케일리의 목소리에 에드워드가 물음을 던졌다.
“넌 구울의 주식이 뭐라고 생각해?”
“글쎄요. 구울을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라 식사라도 같이 하며 어울리다 보면 그가 뭘 주식으로 하는지 알게 되지 않을까 싶지만 지금으로서는 구울이라는 게 실존한다는 사실을 안 지 몇 분 되지 않았기 때문에 생태를 파악하기엔 너무 이른 시간이었겠죠?”
쓸데없이 헛소리를 늘어놓았지만, 결론은 모른다는 뜻이었다.
“미친, 어울리긴 뭘 어울려? 구울이랑? 네놈이? 은수저랑 사이좋게 식탁 위에 올라갈 일 있냐?”
“식탁에는 왜 올라가나요? 식탁에서 장난치면 안 돼요, 예의 없지 않습니까.”
짐짓 타박하듯 돌아온 케일리의 말에 잠시간 침묵한 에드워드가 말했다.
“인간을 주식으로 먹는 괴물 입에다 지 손을 쑤셔 넣은 미친놈이 예의 운운하기는…….”
“아, 구울이 인간을 먹나요? 그건 예상 못했네요.”
언제나와 다를 바 없이 태평하기 짝이 없는 어조에, 이번에는 천하의 그렌샤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굳이 따지면 에드워드 또한 인간을 주식으로 하니, 뱀파이어를 졸래졸래 따라다니는 인간이 구울을 무서워하지 않는 것이 비슷한 맥락인 것 같으면서도 오묘하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다른 인간들에 비해 어딘지 리액션이 평온한 케일리의 어떤 점이 문제인 걸까.
근본적인 원인을 꿰뚫지 못한 그렌샤가 눈을 가늘게 뜨고 고민하는 사이, 허공에서 맞춰져가던 으스러진 뼈가 움직임을 멈췄다. 그렌샤가 케일리의 팔을 잡아들어 절개된 팔 안쪽을 유심히 살폈다.
“이걸로 흩어진 조각은 다 맞아 들어간 것 같고, 남은 건 뼈가 제대로 붙어서 원상복귀 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뿐이겠어.”
그녀가 처음 설명했던 것처럼 팔의 시간이 멈춘 탓일까, 뼈와 근육을 훤히 드러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케일리의 팔에서는 한 방울의 피도 흘러내리지 않았다.
인체의 신비 박람회에 표본으로 전시해도 손색이 없을 완벽한 절개부의 안에는 희고 뽀얀 뼈가 으스러진 흔적 하나 없이 자리를 잡은 상태였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그것을 잠시간 응시한 그렌샤가 지퍼를 잠그듯 절개 부위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훑어내리자, 케일리의 팔이 거짓말처럼 깨끗하게 봉합되었다. 구울의 손 모양 그대로 검게 멍이 든 자국은 그대로였지만 말이다.
뒤이어 그렌샤는 처음 끌고 온 트레이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 분주하게 움직였다. 물에 적신 석고 붕대로 팔을 고정시킨 것뿐만 아니라 보조기구를 이용해 대롱대롱 팔을 목에다 매달고 다닐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 이미 뼈를 다 맞춘 줄 알았는데, 왜 그런 처리가 필요한 건지 그녀의 처치를 의아하게 지켜보는 케일리에게 그렌샤가 말했다.
“아까 말한 것처럼 으스러진 뼈를 원래 자리에 맞추는 건 마법으로 할 수 있지만, 이미 망가진 육체를 망가지기 전으로 되돌리는 건 불가능해. 네 팔뚝 뼈가 알아서 붙도록 자체 치유력을 촉진시키는 마법과, 맞춰놓은 상태를 유지시키는 마법을 걸어뒀어. 내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
결국 뼈가 다 붙을 때까지는 퍼즐을 맞춰놓은 것처럼 모양을 갖춘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인 것 같았다. 그녀의 설명에 케일리는 어딘지 시무룩한 밤색 눈으로 대답했다.
“마법도 생각했던 것처럼 뭐든지 해결해주는 만능은 아니라는 거네요.”
으스러진 뼈를 외과수술로 맞추려면 아마도 엄청난 고통을 수반하는 대대적인 수술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 점을 고려하면 겨우 십여 분 남짓이 걸리지 않는 뼛조각 퍼즐 맞추기 마법에 고마워해야 했지만, 케일리의 입장에서는 결과론적으로 마법이나 수술이나 오른팔을 바로 사용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다를 바 없이 느껴졌다.
오른팔을 못 쓰면 옷을 갈아입을 때도, 세수를 할 때도, 하다못해 식사를 할 때도 왼팔이 두 배로 더 일해야 했다. 케일리는 자신의 왼팔이 그런 중노동을 견딜 수 있을지 순수하게 걱정이 됐다.
그런 케일리의 불만을 눈치챈 그렌샤가 꼼꼼하게 마무리한 깁스를 툭툭 건드리며 대답했다.
“당연하지. 그중에서도 생명을 좌지우지하는 마법과 시간을 거스르는 마법은 금기나 다름없다고. 쓸데없이 휘두르고 다녀서 괜한 충격을 가하지만 않는다면 짧으면 2주, 길면 4주 안에는 완전히 붙어. 모든 물건이 그렇듯 한번 부서진 건 다시 붙여놔도 전보다 쉽게 망가지게 되어 있으니까, 그 팔하고 오래도록 사이좋게 살고 싶으면 구울 입에 두 번 다시 손 집어넣을 생각 말고.”
제법 의사답게 주의사항을 읊어주는 그렌샤에게 케일리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짧으면 2주. 확실히 뼈에 금이 가기만 해도 최소 2주는 안정을 취해야 하는 것을 생각하면 뼈가 으스러져서 2주라는 진단은 혁신적인 의료기술의 진보가 맞기는 했다. 차라리 똑 부러졌으면 편했을 텐데. 그래도 어쩔 수 없지. 빠르게 자신의 상황에 순응한 케일리에게 그렌샤가 물 잔을 건넸다.
왼손으로 그것을 받아든 케일리는 그러고 보니 제법 땀을 흘린 탓에 목이 탄다는 것을 깨달으며 미지근한 물을 목구멍에 흘려 넣었다.
“네 팔의 멈춘 시간을 다시 흐르게 만들 거야. 안쪽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됐으니 아까보다는 낫겠지만, 그래도 많이 아플 테니까 집에 돌아가서 배부르게 먹고 며칠 푹 쉬도록.”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감각이 없던 오른쪽 어깨 밑으로, 생 팔 하나가 통째로 새롭게 자라나기라도 하는 것처럼 무식한 격통이 몰려왔다. 저도 모르게 헉, 숨을 들이켠 케일리가 입술을 깨물었다.
팔꿈치 위쪽에 불이 붙은 것처럼 아팠다. 꺼멓게 멍이 진 피부의 표면에서 느껴지는 둔한 통증은 그렇다 치고, 팔뚝 안쪽이 타들어가는 듯한 끔찍한 통증이었다.
“……네, 그럴게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잠시간 말이 없던 케일리의 힘없는 대답에, 그렌샤가 말했다.
“많이 아프냐?”
“네.”
이번에는 아주아주 아프다는 케일리치고는 적극적인 의사표현으로 고개까지 주억거렸다. 아닌 게 아니라, 구울에게 팔을 잡혔던 순간보다 지금이 더 아픈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그녀가 뼈를 붙이는 동안 고통을 느끼지 않게 해준 것은 마취가 아니라 마법이었다. 뼈를 붙이는 순간의 고통을 느끼지 않고 지나간 것은 고마운 일이었지만, 뼈가 제대로 붙고 외상이 나을 때까지 계속 아파야 한다고 생각하면-별로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침울해질 수밖에 없었다.
밤색 눈이 우울하게 가라앉자 그렌샤는 깁스에 감싸인 팔을 손가락 끝으로 쓸어내리며 은근한 목소리로 케일리를 향해 제안했다.
“그럼 그 팔 나 주고, 새 팔 붙여 갈래? 네 몸에 잘 어울리는 새 걸로 붙여줄게. 내가 만든 팔이 얼마나 대단하냐면, 지금 네 팔을 잘라내고 어깨에 붙이면 2주가 뭐냐, 사흘이면 전보다 훨씬 건강하고 예쁜 팔로 살아갈 수 있게 된다니까. 어때? 이참에 신형으로 갈아타는 건?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니라니까?”
어린애를 막대 사탕으로 살살 꼬시는 것처럼 두 눈을 빛내며 자신을 꼬드기는 그렌샤에게 케일리가 냅다 고개를 끄덕이지 않은 것은, 그저 그녀가 하는 말의 대부분이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권하는 그렌샤가 당장이라도 케일리의 오른팔을 잘라 부품 교체하듯 새 팔을 가지고 올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그녀는 보이는 것보다 훨씬 규칙을 잘 지키는 모범적인 용이었기 때문에 본인의 이야기처럼 금기를 깨는 법은 없었지만, 마법을 이용하지 않고도 살아 있는 육체를 가지고 온갖 실험을 자행하는 반인륜적인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물론 그녀는 애초에 인류가 아니기도 했다.-.
그렌샤의 저택에 있는 실험실 침대는 한번 누웠다 일어나면 몸속의 내장이 죄다 인조장기로 바뀌고도 눈치채지 못하리라는 소문이 돌 정도로 무시무시한 곳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실험 결과를 좋은 목적으로 쓰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그런 용도로 쓰는 방법도 생겼다는 설이 지배적이었으며, 기본적으로는 스스로의 지식욕을 충족하기 위한 여흥에 불과했다.
특히 그렌샤가 좋아하는 실험대상은 재생능력이 뛰어난 이종족의 육체였는데, 에드워드 또한 예외는 아니라 -B 지구의 몇 안 되는 순혈 뱀파이어인 그를 실험실 침대로 데려가기 위해 그렌샤는 이제나저제나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그렌샤가 생체 실험으로 만들어내는 것은 비단 인간의 장기나 육체의 일부뿐만이 아니라, 몇 가지 생물을 혼합한 키메라까지 그 종류가 다양했다. 때문에 그녀의 마수에 동족을 희생당한 이종족 중에는 용이라면 학을 떼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목숨은 붙여서 돌려보내 주었지만, 그렌샤는 어디까지나 자비로운 ‘용’이었기 때문에 그녀의 감각 안에서만 자비로웠다. 즉, 용이 아닌 존재에게 그녀는 재앙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그렌샤, 아무것도 모르는 애 등쳐 먹으면 잠이 옵니까?”
케일리의 치료가 끝난 것을 확인한 에드워드가 그렌샤의 뒤에서 기가 찬다는 듯 물었다.
“왜, 아프다니까 안 아프게 해주겠다는 거잖아.”
“취미를 직장에 끌고 오지 말라고 시말서 쓴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면서 아직도 할 말이 있다니, 스케일 한번 용 같은 뻔뻔함이시네요.”
“말은 바로 하자. 걔는 자기가 그러고 싶다고 자원한 거였어.”
“왕진 나가서 순진한 신참요원 속여서 소중한 뿔을 멋대로 잘라 온 용이 할 말은 아니죠.”
비교적 최근, 영국 지국에 새로 들어온 필드요원이 그렌샤의 마수에 걸려 뿔을 강탈당한 사건은 유명했다.
사실 인과를 따지면 신참에게도 문제는 많았지만-그렌샤가 용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꾀려고 했다.- 아무리 그래도 아무것도 모르는 까마득하게 어린 유니콘의 뿔을 냅다 받는 용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외견상 열두어 살 정도밖에 되지 않은 그렌샤를 꾀려고 한 유니콘에게 문제가 없다는 말은 아니었다. 여자를 꾀기 위해 소중한 뿔을 댕강 잘라준 멍청함도 분명 문제였다.
하지만 그렌샤에 비하면 유니콘이야말로 갓 태어난 갓난망아지에 불과했고 그녀가 나잇값이라는 말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면 그 뿔을 희희낙락 받아 갈 게 아니라, 어른 된 도리로 망아지의 착각을 바로잡아줬어야 했다.
“내가 자른 게 아니라 걔가 잘라서 나한테 준 거야. 말은 바로 하자고. 게다가 결국 돌려줬잖아!”
“소문에는 팔뚝만 했던 뿔이 반절도 돌아오지 않았다고 하던데, 거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에드워드의 푸른 눈이 싸늘한 비웃음을 머금고 되돌리자 그렌샤가 잠시간 입을 다물었고, 이어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 그래. 내가 좀 썼다, 썼어! 얘, 아가, 네 파트너 진짜 짜증난다. 너도 저런 애랑 같이 다니기 싫지? 거 하다 정 화병 도질 것 같으면 우리 내부감사도 잘돼 있으니까 찔러버려. 쟤 연봉 깎이라고.”
에드워드는 바로 눈앞에서 자신의 악담을 퍼붓는 그렌샤에게 말했다.
“걔 치료 끝났으면 이쪽이나 봐줘요.”
“넌 뭐? 멀쩡해 보이는구먼.”
“갈비가 폐에 박혀서 말할 때마다 끔찍하게 아프다고요.”
슬쩍 시선을 비끼며 대답하는 에드워드에, 그렌샤가 허, 헛웃음을 뱉으며 혀를 찼다.
“너도 참. 독하다 독하다 했더니, 그 지경이 되고도 식생활 개선을 안 하는 건 자학이라는 거 알고 있지? 순혈씩이나 돼서 그깟 걸 스스로 처리 못해서 여기까지 찾아와? 가족 얼굴 보기 부끄럽지도 않냐?”
“여기서 가족 이야기가 왜 나옵니까. 빨리 고치기나 하세요. 떠들 시간 있으면 일을 하라고요.”
인상을 찌푸리며 상복부를 쓰다듬는 에드워드에, 더 이상 말씨름 할 기분도 들지 않는지 그렌샤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에드워드의 복부에 손을 뻗었다.
그로부터 약 십 분간, 케일리는 뱀파이어의 내장이 어떻게 생겼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친절한 용의 손길에 피와 살이 튀는 체험 의료현장을 겪어야만 했다.
-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