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2권) (6/41)

[BL]영국 비밀보안국의 비밀 2

#Mission2. Who are you? (3)

다시 문을 이용해 숙소로 돌아온 에드워드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케일리를 욕실에 던져 넣는 것이었다. 한쪽 팔을 목에 건 깁스에 매달고 달랑달랑 뒤를 따르던 케일리가 다소 억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에드워드를 향해 불합리함을 호소하는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에드워드의 표정은 단호하기 그지없었다.

“그 거지꼴 좀 어떻게 하고 나와서 쉬든지 해. 난 지국에 돌아가서 보고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은 데다, 네놈의 연수일정도 조정이 필요할 것 같으니까 잠깐 갔다 올 생각이야.”

사실 케일리도 자신의 꼴이 말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았다. 하지만 최근 들어 홈리스 생활을 하느라 지저분함에 대한 허들이 다소 낮아져 있기도 했고 무엇보다 팔 한짝을 들어올리는 것도 힘겨울 정도로 몸이 무거웠다.

“피곤한데 내일 씻으면 안 될까요?”

“안 돼.”

“에드워드의 방에서 자는 것도 아닌데요?”

“너 같으면 같은 집에 하수도 냄새를 풍기는 게 자고 있는데 잠이 올 것 같냐?”

아무래도 그냥 넘겨주지는 않을 모양이었다.

“지국에서 연수 첫날은 마중 나오기로 했었던가? 괜히 길 엇갈리면 귀찮아지니까 따라가지 말고 적당히 돌려보내. 아마 누가 오든 문 열고 마음대로 들어올 테니까.”

“지금부터 본부에 가는 건가요? 철야근무 후에 아침 출근이라니 너무하네요. 그거 노동법 위반일걸요.”

사실 그보다는 어차피 본부에 가는 거라면 같은 집에 있는 것도 아니니 상관없지 않는가라는 생각이 든 참이었다.

“너 이빨 설명 제대로 들은 거 맞냐? 여기는 정부기관이라고. 게다가 노동법의 근로시간 기준에서 군대나 경찰 같은 응급 서비스 계열은 예외가 적용되니까 엄밀하게 따지면 위반이 아니라 합법적인 초과근무지.”

“…….”

“심지어 난 인간이 아니니까 법정에 나가서는 영국 국민 취급도 못 받는다고, 엄밀하게 따지면.”

자신의 과다업무를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케일리를 향해 에드워드가 그렇게 말했다. 너한테도 남 일이 아니라고 읊어주니 잠시간 침묵한 케일리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삼 초가 채 걸리지 않은 경악과 실망, 그리고 포기의 과정을 실시간으로 지켜본 에드워드는 그가 노동법에 대해 알고 있다는 부분이 더 신기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난 간다.”

눈앞에 닥친 일에 경황이 없어 잠깐 잊고 있었지만, 최근 런던 바닥을 술렁이는 이종족 무기밀매의 전말은 이대로라면 미궁에 빠지게 될 것이었다. 이미 구울에게 수사 사실을 들켰고, 그를 고용했을 윗선에 이야기가 닿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이걸 어떻게 커버해야 하나 생각하니 골치가 아팠다.

정말로 두통이 오는 것처럼 미간을 찌푸린 채 욕실을 벗어나는 에드워드에, 케일리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욕실 안으로 터덜터덜 걸어 들어갔다.

허물을 벗듯 요령 좋게 걸치고 있던 옷을 훌렁훌렁 벗어 던진 그는 순식간에 알몸이 되었다. 멀쩡한 왼손으로 샤워기를 먼저 집자 등 뒤에서 욕실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에드워드는 정말로 자신만 욕실에 던져놓고 본인은 본부에 건너갈 생각인 것 같았다.

걸치고 있던 옷은 지저분한 폐건물을 뒹굴어 먼지와 땀, 그리고 대체로 에드워드의 피-그렌샤는 에드워드의 갈비뼈를 제자리에 돌린다며 배를 가르더니, 맨손을 그의 뱃속에 쑤셔 넣었다.- 때문에 누더기가 다 되어 원형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다행히도 페어리에게 건네받은 것과 같은 종류의 작업복이 클로젯 안에 사이즈 별로 몇 벌이나 수납되어 있기 때문에 지금 입은 것을 버려도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판단한 케일리가 지저분한 옷을 슬그머니 구석에 밀어놓은 후 샤워를 시작했다.

깁스한 팔이 젖지 않도록 하반신부터 씻으려 조심조심 다리 쪽으로 샤워콕을 가지고 갔으나,

“앗!”

하필 발쪽에 뿌려진 물에 미끄러져 전신이 허공에 붕 뜬다는 사실을 자각한 순간, 쿵!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욕실 벽에 부딪힌 엉덩이와 등이 욱신거렸다.

“무슨 일이야!”

벌컥, 욕실 문이 열리면서 역시나 피범벅이 된 옷을 갈아입기 위해 제 방을 향하던 에드워드가 벌컥 달려 들어왔다. 꼴사납게 넘어진 케일리와 바닥을 적시는 샤워콕을 내려다보며 에드워드가 침묵에 잠겼다.

새벽녘에는 낙법까지 써가며 요령 좋게 넘어졌던 놈과 같은 인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꼴불견이었다.

“아, 별거 아니에요. 그냥 좀 넘어졌어요.”

한 템포 늦게 돌아온 대답은 에드워드가 욕실에 들이닥치며 소리쳤던 물음에 대한 것이었다. 누가 몰라서 묻냐고 버럭 되물으려다, 에드워드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이 와중에 입씨름까지 할 기력도 없어 한숨을 내쉰 에드워드가 쯧, 혀를 찼다.

팔 하나를 사용하지 못하는 데다 육체적 피로가 쌓일 대로 쌓인 탓인지 밤색 눈에 초점이 흐릿했다. 저러다 욕조에 빠져 죽은 시체를 건지게 되는 건 아닐까 싶었다. 이대로 남겨두고 가는 것도 애매했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지킬 의리도 없는 멍청한 인간을 상대로 목욕시중까지 들어야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야, 너 그냥 씻지 말고 잠이나 자라.”

케일리가 직면한 모든 문제를 단번에 해결하는 타협안을 제시한 에드워드가 제 볼일을 보기 위해 등을 돌린 순간이었다.

“그럴 수는 없어요.”

케일리가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벌써 씻기 시작했는데 그만둘 수는 없어요. 중간에 그만두면 일이 두 배로 늘어나잖아요. 결국 씻게 될 거라면 지금 씻을래요.”

에너지 효율을 중시하는 케일리의 대답은 시간과 장소와 타이밍을 고려하지 않았다.

낑낑대며 한 팔로 욕조를 짚고 일어나 샤워콕을 주워 드는 케일리의 하얀 궁둥이를 쳐다보며 에드워드가 팔짱을 끼고 욕실 문에 삐딱하게 기대섰다.

“하, 지금 나더러 네 목욕시중이라도 들라는 거냐?”

“제가 그런 말을 했던가요? 지금 좀 졸리기는 한데 잠결에 그랬나, 아무래도 진심이 입 밖으로 새어나간 것 같네요. 하지만 에드워드가 그럴 필요는 없지 않아요? 귀찮잖아요.”

저였어도 에드워드가 팔 하나가 부러져서 욕실에 넘어진 걸 보고 도와주려고 하지는 않을 테니까 도와주실 필요 없어요, 라고 친절하게 부연설명까지 해주는 케일리의 태도에 에드워드는 만약 그가 옷을 입고 있었다면 당장에 달려가 멱살을 잡았으리라 생각했다.

일단은 파트너인데 네 팔이 부러지든 다리가 부러지든 나도 안 도와줄 거다, 너도 도와주지 말라고 선을 긋는 태도도 기분 나빴지만-내가 거절하는 건 상관없지만 네가 거절하는 건 건방지다는 전형적인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논리였다.- 진심으로 저가 혼자서 샤워 퀘스트에서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건가 싶어 정신상태가 의심스러웠다.

슬슬 왼쪽 대뇌 반구의 언어중추까지 합세해 제 역할을 방기하기 시작한 것 같은 케일리의 입에서는 이미 최소한의 예의라는 필터링을 거치지 않은 깨끗한 진심을 멋대로 쏟아내고 있었다.

할 말을 잃은 에드워드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그는 멍하니 허공을 올려다보며 초점 없는 눈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아, 사는 것도…….”

이어질 말이 충분히 예상되는 케일리의 중얼거림에 에드워드는 네놈은 대체 숨 쉬는 건 귀찮아서 어떻게 사느냐고 따져 묻고 싶을 지경이었다. 무기력한 밤색 눈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에드워드는 저런 놈에게 일순이나마 감탄했던 새벽녘의 스스로가 원망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이걸 내버려두고 가자니 목에 걸린 가시처럼 거슬리고, 뽑아 들자니 또 굳이 목구멍에 손을 쑤셔 넣어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심경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기가 막히는 아이디어가 에드워드의 머릿속을 번뜩이고 지나갔다.

“로라.”

그러고 보면 자신의 집에는 케일리와 스스로를 제외하고도 한 명의 일손이 더 있었다.

대개의 경우 에드워드가 그녀에게 먼저 말을 거는 일은 없었지만-곰곰이 생각해보니 근 80년은 이쪽에서 말을 건넨 기억이 없다.- 로라는 굳이 시키지 않아도 청소며 빨래를 비롯한 집안일을 해치워놓는 것뿐만 아니라, 때가 되면 꼬박꼬박 에드워드의 혈액 팩까지 꼼꼼하게 챙겨주는 유능한 집요정이다.

어째서 80년이나 말 한마디 걸지 않게 되었는가를 잠시간 생각하던 에드워드는, 그렇게 오래되고 사소한 일까지 일일이 집착하는 성격이 아니었으므로 아마 아무래도 좋은 일임에 분명할 것이라 혼자서 납득했다.

“로라!”

욕실에서 몸을 쭉 빼 주방을 향해 소리치자 정적이 감돌던 반대편에서부터 쪼르르르, 들릴 듯 말 듯 자그마한 발소리가 이어졌다. 잘못하면 쏟아질 것처럼 말똥말똥한 커다란 눈망울을 한 채 자글자글 주름이 가득한 두 손을 꼼지락거리며 로라가 다가왔다.

“무슨 일이신가요, 에드워드 님?”

가느다란 목소리 또한 대단히 오래간만에 듣는 것이었지만, 에드워드에게 있어서 80년은 어제처럼 회상할 만한 정도의 세월이었고 집요정에게 있어서도 그리 긴 시간은 아니다.

끔뻑끔뻑,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묻는 로라가 욕실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문에서 비켜선 에드워드가 욕조 모서리에 걸터앉아 오른팔이 젖지 않도록 머리를 감으려 낑낑대는 케일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얘 목욕시중 좀 들어라.”

뱀파이어 하나와 집요정 하나의 앞에서 저가 인류의 새로운 시초라도 되는 양 당당하게 알몸을 드러낸 케일리는 한 손으로 머리를 감는 중노동에 열중하고 있었다.

먹지 말라던 선악과를 맛나게 처먹은 인류의 후손인 주제에 조상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난 걸 보면 역시 수치심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도 없는-찾을 수 없는 게 수치심뿐인 것 같기도 했다.- 신인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됐건 자신을 대신해 저 흐느적거리는 한 팔 인간을 건사할 집요정을 떠올려 희희낙락 뒤처리를 떠넘기려는 에드워드의 귓가에 청천벽력과 같은 로라의 대답이 돌아왔다.

“로라는 인간의 목욕시중을 들지 않겠어요.”

“뭐? 왜.”

“왜냐하면 로라는 에드워드 님의 명령은 듣지 않기 때문이에요.”

“집요정 주제에 명령을 거부하겠다는 거냐?”

“맞아요. 로라는 에드워드 님의 명령은 듣지 않아요.”

“에드워드 님은 로라의 주인님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로라에게 명령할 수 없어요.” 하고 덧붙이는 로라의 목소리에 에드워드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똑바르게 눈을 마주쳐 오는 로라의 주먹만 한 눈알에 어딘지 과거 비슷한 일을 겪었던 것 같은 기시감이 느껴졌기 때문에 수 분 전 무시했던 사소한 기시감의 정체를 되짚어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래. 곰곰이 생각해보니 어림잡아 80년 전쯤에도 이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 같다. 이 숙소로 옮기기 두 번 전쯤의 그럭저럭 지낼 만한 낡은 아파트였던가. 갈등의 발단까지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결코 교차할 수 없는 의견 차이로 그녀와 설전을 벌이다가 결국은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했던 로라가 흥분해 마법을 쓰기 시작하면서…….

“주인님은 로라에게 에드워드 님의 집을 청소하라고 하셨어요. 에드워드 님의 빨래를 하고, 에드워드 님의 식사를 챙겨주라고 했지만 에드워드 님의 명령을 들으라는 명령은 하지 않으셨어요. 로라는 에드워드 님의 명령은 듣지 않아요.ㄴ 주인님의 명령을 들어요.”

그래, 분명 귀를 찢을 듯한 목소리로 울어젖히며 그놈의 주인님 타령을 늘어놓았다.

당시 살고 있던 낡은 아파트는 하마터면 흔적도 없이 지도상에서 사라질 뻔했을 정도로 로라의 마법은 강력했다. 다행히도 주방의 잡동사니를 허공에 띄운 채 날려버리기 직전, 망할 놈의 주인놈에게 하사받은 소중한 뒤집개가 눈에 들어온 덕분에 흥분을 가라앉히고 사흘 밤낮을 슬픔에 잠겨 있었던 기억이 났다.

“네 주인님의 혈육이면 충분히 명령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나?”

요즘은 영 재수가 옴 붙었는지, 사사건건 일상의 루틴을 벗어난 일이 생겼다. 그것도 결코 트러블이 일어나지 않을 법한 시간과 장소와 상대에게서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말이다. 눈앞의 짐덩이 하나를 처리하려다 말고 덤으로 얹어진 문제를 내려다보며 에드워드가 짜증 섞인 얼굴로 짧게 한숨 쉬었다.

자신이 저택을 나올 때 로라가 따라 나온 것은 현 가주인 아버지의 명령 때문이었다. 만약 명령이 아니었더라면 로라는 수명이 다할 때까지-집요정의 수명이 언제까지인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어쩌면 가문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라도.- 저택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을 것이다. 비단 그녀뿐만이 아니라 집요정의 충심이란 그런 것이었다.

집요정이 섬기는 것은 한 개인이 아니라 가문이다. 어떤 가문에 종속되어 있는 집요정은 그 가문의 일원 모두를 주인으로 섬겼다. 주인어른이라든지 주인마님, 주인 도련님, 주인 아가씨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그들 모두가 주인이었다.

그러므로 가계도를 따지면 싫든 좋든 에드워드는 여전히 그녀의 주인놈의 막내아들이었으니 한낱 집요정에게 건방진 명령 불복 발언을 듣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래도 에드워드만의 생각이었던 모양이었다. 되레 무슨 말이냐는 양 사납게 눈을 치켜뜬 로라가 따박따박 말을 이었다.

“80년 전에 에드워드 님은 말하셨어요. 에드워드 님은 성을 버리셨기 때문에 더 이상 작은 도련님이 아니라고 하셨어요. 로라는 가문의 명령만 따라요. 로라가 모시는 건 가문의 작은 도련님이지, 에드워드 님이 아니에요. 에드워드 님은 로라가 돌아가는 걸 방해하는 나쁜 뱀파이어예요.”

“…….”

그러고 보니 확실히 80년 전쯤 그 비슷한 말을 한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정확히 오늘과 같은 대화를 반복하다가, 결코 저택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입장의 자신과 당장 돌아가자는 로라의 의견 불일치로 인한 참사가 일어날 뻔했던가.

지난날의 과오를 되감기할 생각이 없는 에드워드는 애쉬포드 가문의 작은 도련님이 되어 제 발로 나왔던 집에 도로 기어들어 갈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말없이 팔뚝을 걷어붙였다.

집요정의 마법은 뱀파이어와는 상극이었다. 굳이 뱀파이어가 아니더라도 의외로 그들은 손에 꼽을 정도로 강한 마법능력을 가진 종족이었으므로 상극인지 아닌지를 따질 이유는 없었지만 어쨌든 발가벗은 케일리를 사이에 두고 로라와 대치하고 싶지는 않았다.

안 그래도 구울과의 전투로 기력을 소모한 뒤였고 결과적으로 로라에게 밀릴 게 뻔했는데 그건 너무 처참한 광경이었다.

“로라는 주인님의 명령대로 에드워드 님의 주방 청소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돌아가보겠어요. 청소가 끝나면 주인님의 명령대로 누더기 같은 에드워드 님의 옷을 빨 거예요.”

체념의 빛이 서린 커다란 눈망울이 마치 죽어도 가기 싫은 지옥불 속에 제 발로 뛰어드는 것처럼 어둡게 가라앉았다.

혹시 애쉬포드 성애자는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로 일편단심인 가문을 향한 그녀의 집착에 몸서리를 친 에드워드는 그녀가 폭주하기 전에 과거의 일이 기억나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전처럼 내 목을 잘라 가는 한이 있어도 애쉬포드에는 안 간다고 쓸데없이 입을 놀렸다가 식칼에 목이 달아날 뻔한 경험은 길고 긴 뱀파이어생에도 한 번으로 차고 넘쳤다.

터덜터덜 복도를 지나 주방에 들어가려다 말고 로라가 걸음을 멈추더니 에드워드를 향해 덧붙였다.

“그리고 에드워드 님, 주인님의 명령에 따르면 에드워드 님은 아침에 적어도 팩 두 개를 마셔야 해요. 나가기 전에 다 마시는 걸 로라에게 보여줘야 하니까 그냥 가버리면 저녁에 두 배로 마시게 될 거라는 걸 기억해두세요.”

혹자는 두고 보자는 놈 중에 무서운 놈 없다고 하지만, 에드워드는 그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두고 보자는 놈들은 대개가 독했다. 게다가 두고 보자는 놈이 실제로 그것을 이루어낼 만한 힘을 가졌다면 문제가 커진다.

기껏 옷을 갈아입고 왔더니 지친 뱀파이어를 부려먹으려 드는 케일리를 향해 사나운 시선을 보내며, 에드워드는 갈아입은 옷의 소매를 팔뚝 위까지 깔끔하게 접어 올렸다.

“그래……, 내가 한다, 내가 해.”

영 맥을 못 추는 케일리의 손에서 샤워콕을 뺏어든 에드워드는 어리둥절하게 자신을 올려다보는 다 큰 사내놈-그것도 인간.-을 달랑 들어 욕조 안에 구겨 넣었다. 별안간 순간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눈을 깜빡이며 정신을 못 차리는 케일리의 머리를 뒤로 젖히고 깁스한 오른팔을 위로 들게 만들자 안정적인 자세가 잡혔다.

“눈 감고 입 다물어.”

주방으로 돌아가 청소를 하고 있을 자신의 가문의 집요정과 정확히 같은 체념의 빛을 띤 푸른 눈이 그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곧이어 에드워드가 욕조에 등을 기대고 머리를 내민 케일리의 얼굴에 쏴아아, 뜨거운 물이 쏟아지는 샤워콕을 가져다 댔다. 시키는 대로 눈을 감고 입을 다문 케일리는 별다른 저항 없이 에드워드의 손길에 머리를 내맡겼다.

풀죽은 머리카락을 적당히 적시고 샴푸 거품을 내자 손끝에 닿는 머리카락의 감촉이 선연히 전달되었다. 눈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가늘고 부드러운 머리카락 사이사이를 헤집으며 양손으로 쥐기에 작은 머리통을 잡으며 에드워드는 어딘지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자신이 누군가의 머리를 감기는 건 태어나서 처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적 저택에서 키우던 개를 목욕시켰을 때 느꼈던 것과는 또 다른 기분이었다. 무엇보다 사람의 털은 개의 것보다 훨씬 부드러웠다.

그리고 그 개는 좋은 혈통만큼이나 건방지기 짝이 없어서 케일리처럼 순하고 무방비하게 모든 것을 맡겨오지도 않았다. 오히려 ‘내 시중을 드는 걸 영광으로 생각해라, 하등한 뱀파이어야.’ 따위의 태도였기 때문에 분노한 자신은 개 샴푸를 해주다 말고 이빨을 드러내고 말 그대로 개싸움을 시작했었던 기억이…….

“어이, 케일리. 너 지금 나랑 무슨 농담 따먹기라도 하려는 거냐?”

잠시간 과거의 향수에 젖어 있던 에드워드는 손 안에 서서히 묵직이 무게를 실어 오는 머리통을 쳐다보며 허탈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제법 큰 에드워드의 목소리에도 속눈썹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케일리는 평화로운 얼굴로 숨소리 하나 없이 잠에 빠져 있었다.

“아까는 팔 하나가 부러져도 도와주지도 않을 사이라더니. 대체 뭘 믿고 태평하게 뻗어 잘 수가 있는 거냐, 넌.”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이었다. 하기야, 그렇지 않았더라면 자신도 이렇게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고 있지는 않았을 테지.

케일리에 대해서도, 스스로의 답지 않은 행동에 대해서도, 그리고 당장 닥친 모든 복잡한 일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포기한 에드워드는 손에 쥔 머리통 안에서 이루어지는 기기묘묘한 사고체계가 혹시 공기 전염이 되는 건 아닐까 약간의 의심을 품은 채 샤워기를 들고 샴푸를 씻어내렸다.

◇ ◆ ◇

잠에서 깬 케일리가 제일 먼저 한 것은 손을 들어 뻑뻑한 눈을 비비는 것이었다. 막 일어난 순간에도 잠기운이 묻어나지 않는 체질 탓에 말끔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두개골 안에서는 아직 렘수면에서 완전히 깨어나지 못한 뇌의 신경이 현실과 꿈을 혼동하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더라?

왼쪽 눈을 비비며 어째서인지 오른쪽 눈을 비빌 수가 없다고 생각하며 케일리는 순한 밤색 눈을 끔뻑였다.

왜지? 왜 오른쪽 눈은 비빌 수 없는 걸까?

그렇게 멍한 머릿속으로 고민함과 동시에 반사적으로 오른팔을 들어 올리자, 찌릿한 고통이 내달렸다.

“윽.”

낮은 신음과 함께 완전히 잠에서 깬 케일리는 현재 자신의 오른팔이 오른쪽 눈을 비빌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을 그제야 떠올릴 수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왼손으로 오른쪽 눈을 공평하게 문지른 케일리가 침대에서 일어나 앉자마자 머릿속을 스치는 마지막 기억 중에 침대에 찾아와 누워 잔 부분이 없다는 것이 생각났다.

“피곤했나 보네.”

깁스한 케일리를 깨끗하게 씻겨 옷까지 입혀서 침대에 옮겨준 에드워드의 노고를 스스로의 피로로 인한 기억 누락으로 간단히 정리한 케일리가 멀쩡한 왼팔만으로 기지개를 켰다. 반사적으로 나오는 하품과 함께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훔치는데,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일어나셨나요, 인간. 식사를 준비했어요.”

에드워드의 집요정, 로라였다. 얌전히 침대에서 내려온 케일리가 로라의 뒤를 따라갔다. 도착한 식탁에는 언제나와 같은 브런치 메뉴가 준비되어 있었다.

하얀 플레이트에는 토스트 된 식빵 조각과 바싹 구운 베이컨이 올려진 반숙 프라이, 그리고 따끈따끈 김이 올라오는 매쉬 포테이토가 한 움큼 자리를 잡고 있었다. 심지어 신선한 오렌지 주스를 가득 부은 크리스털 잔을 비롯해, 브런치가 올려진 플레이트와는 다른 자그마한 접시 위에 깨끗하게 씻은 블루베리가 디저트로 나왔다.

로라가 빼준 의자에 앉은 케일리는 먹음직스러운 식사를 만들어준 로라를 향해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정말 맛있어 보여요. 식사 고마워요, 로라.”

케일리의 감사인사에 커다란 눈을 더욱 커다랗게 치켜뜬 로라의 뾰족한 귀가 파르르 떨렸다.

“쟨 왜 안 어울리는 순진한 척이야, 보는 뱀파이어 눈 버리게.”

맞은편에 앉아서 오늘자 타임스지를 읽고 있던 에드워드가 도망치듯 케일리의 앞에서 사라져버린 로라의 뒷모습에 대고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그사이 케일리는 포크를 들어 매쉬 포테이토를 크게 한입 집어넣고 있었다.

“잠은 잘 잤냐?”

우물우물, 입에 있던 음식을 모두 삼킨 케일리가 한 템포 늦게 대답했다.

“네, 무척이나요.”

그 말에 에드워드는 코웃음을 쳤다.

“그랬겠지. 욕조에서 떡하니 잠이 들어서는 손가락 하나 까딱 않고 샤워에, 옷 갈아입기에, 침대에 기어들어 가는 것까지 남의 손으로 해결했는데 피곤하다고 지껄이는 건 입이 아니라 주둥아리일 테니까 말이야.”

그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케일리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들었던 ‘나는 어떻게 여기에 있는가’라는 의문을 해결했다.

“어쩐지 제 발로 들어간 기억이 없는데 신기하다 했어요. 에드워드가 침대까지 옮겨준 거였나요?”

“그럼 네가 자면서 기어들어 갔을 줄 알았냐? 그 팔을 하고?”

웃기는 소리 말라며 케일리의 깁스한 팔을 가리킨 에드워드는 읽고 있던 신문을 식탁에 내려놓으며 그렇게 말했다. 미스터리가 풀린 케일리는 생각해보니 그것도 그러네요, 하고 에드워드의 신랄한 지적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너무 피곤해서 까먹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봐요. 모른 척하지 않고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저를 샤워에 옷까지 갈아입혀서 침대에 눕혀주시다니, 에드워드는 굉장히 이타적인 분이시네요. 저는 아마 에드워드의 발끝에도 따라가지 못할 거예요.”

분명 감사인사를 받고 있었는데 기분이 나쁜 건 왤까. 에드워드는 뱀파이어를 향해 이타적이라느니, 나 같은 건 발끝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라느니, 겸손을 떠는 케일리의 단어 선택에 관자놀이를 짚었다.

지금 저걸 칭찬이라고 하는 걸까?

눈을 보면 장난으로 하는 말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는데, 진심이면 그것대로 문제였다.

먼저 뱀파이어를 향해 이타적이라고 하는 건 결코 칭찬이 될 수 없었으며-오히려 너 병신이라는 욕을 세 바퀴 에둘러 고급스럽게 표현한 것에 가까웠다.- 근본적으로 케일리가 자신의 빈정거림을 전혀 캐치하지 못하는 것 같다는 무시무시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너랑 대화하다 보면…… 가끔 네가 일부러 그러는 건지 진심으로 그러는 건지 헷갈릴 때가 있단 말이지.”

“뭘 말인가요?”

“그 묘하게 기분 나쁜 화법이나 단어 선택도 그렇고, 그래도 이빨 요정보다는 낫지만……. 아니,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기도 해.”

에드워드가 생각에 잠긴 사이 바싹 구운 베이컨과 프라이, 그리고 토스트를 순식간에 먹어치운 케일리가 이번에는 블루베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런 케일리를 보며 에드워드는 잘 씻겨놓으니 겉가죽은 제법 그럴듯하다는 생각을 했다. 음식도 가려 먹을 것처럼 고생의 흔적이 없는 인상이었는데, 의외로 이것저것 잘 먹는 모습이 신기하기도 했다.

에드워드는 팔짱을 낀 채 어린 시절 개가 사료 먹는 걸 구경하듯 케일리가 식사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십 분이 채 지나지 않아 로라가 차려준 브런치를 남김없이 처리한 케일리를 향해 손목시계를 힐끗 쳐다본 에드워드가 말했다.

“연수는 언제부터 시작할래?”

“아, 그러고 보니 팔 때문에 미룬다고 했죠. 그런데 그거, 기간이 정해져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페어리의 말로는 이번 분기의 연수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중간에 끼어들어야 할 거라고 했던 것 같은데요.”

그렌샤는 2주를 꼬박 채우면 움직일 수 있고, 4주로 완치된다고 말했다.

2주를 쉬면 연수의 반이 끝났고, 4주를 쉬면 아예 참가조차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되면 기껏 잡은 새 직장이 훨훨 날아가지는 않을까 싶어 케일리가 에드워드를 향해 질문을 덧붙였다.

“저,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부상을 당하면 평가점이 낮아지거나 하지는 않나요?”

“연수에서 입으면 낮아지지.”

“밖에서 다치는 건 괜찮은 거로군요.”

“그렇게 다치고 싶냐?”

“아니요, 다치는 부위에 따라 귀찮아지는 정도가 에스컬레이트 되니까 가능하면 다치지 않는 편이 좋죠. 그래도 사람 일이라는 건 한 치 앞을 모르니 밖에서 다치는 건 괜찮다는 사실 정도는 알아두면 좋지 않아요?”

“알 때랑 모를 때랑 달라지는 게 뭐가 있어. 다친다는 결론이 같잖아, 머저리야.”

“다치기만 하는 거랑, 다친 데다 점수 생각까지 해야 하는 건 엄연히 달라요. 다쳐서 점수를 걱정하는 데 대해 들어가는 제 걱정에도 에너지가 필요하다고요.”

진지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는 케일리에 에드워드는 잠시간 말을 멈췄다. 그러니까, 생각하는 게 귀찮기 때문에 가능하다면 생각을 하지 않고 살고 싶다는 뜻인 것 같았다.

쟤는 대체 왜 살까?

“연수가 벌써 시작한 건 맞지만, 연수 자체는 4주짜리 교육 프로그램이니 늦추든 당기든 정확히 4주가 걸려. 좀 늦게 시작해봤자 다른 놈들보다 늦게 끝나는 것뿐이니까 미뤄도 상관없지.”

그러고 보니 케일리와의 대화는 다른 놈들에 비해 스무스하게 진행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에드워드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기울였다.

그는 대개의 경우 필터를 거치지 않고 직설적인 말을 던지는 편이었기 때문에 상대방의 반감을 사는 일이 잦았다. 에드워드 본인이 대화상대의 기분과 반응을 거의 신경 쓰지 않았으므로 그것이 차곡차곡 쌓여 원한이 되는 경우도 많았다.

애초에 성격이 좋은 편도 아니었지만, 타인의 감정을 읽고 더 나아가서는 생각까지 읽어내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덕분에 상대방의 허울 좋은 가식을 금세 꿰뚫었고, 대부분의 인격체는 보이고자 하는 모습과 실제의 모습에 갭이 있었다. 그것을 간단히 알아낸다는 점만으로도 에드워드는 자아를 가진 존재들에게 있어서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굳이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에드워드가 대부분의 임무를 파트너 없이 해결했기 때문에 사내 룰을 무시하는 것에 대해 반감을 가진 이들도 적지 않았다. 페어리와 같이 아주 오랫동안 서로를 철천지원수 대하듯 지내는 상대도 한둘이 아니었다. 그런 이유로 에드워드에게 있어서 대화라는 건 많은 경우 육탄전이 일어나지만 않는 일종의 전투였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스스로가 모든 이들과 평화롭게 지낼 만한 성격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케일리와 비교적 문제없이 대화가 이어진다는 사실이 다소 신기하게 느껴졌다.

에드워드는 케일리를 향해 단 한 번도 예의랄 만한 것을 차린 기억이 없었다. 오히려 평소와 비교해도 상당히 직설적으로 대하고 있었는데 그는 별달리 불만이 없어 보였다.

“그러면 그냥 할래요. 어차피 해야 하는 건 빨리 하는 게 나아요. 시간이 지날수록 할 마음이 사라지니까요.”

어깨를 으쓱한 케일리가 그렇게 말했다.

“그 팔로……, 바로 연수를 하겠다고? 너 거기서 뭘 하는지 알기나 하냐?”

“아니요. 그런데 괜찮아요.”

“무슨 근거로.”

“안 괜찮으면, 괜찮게 만들 테니까요.”

두 눈을 깜빡이며 당연하다는 듯 흘러나온 대답은 뭐라 돌려줄 말이 없을 만큼 억지 논리였는데, 어째 케일리라면 그 말대로 해 낼 것만 같다는 근거 없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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